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시대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자기개혁을 통해 생명을 유지해 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성경의 조명을 받으며 길을 밝혔고, 시대마다 일어났던 자기비판과 영성운동이 꺼져가는 교회의 불씨를 되살렸다. 이런 역사 인식을 가지고 '한국교회, 소망이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교회의 현실을 짚어 보고자 한다.

최근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2007년 후반기에 발생했던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은 교회 밖의 비판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간혹 인터넷 상에서는 'X독교'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비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교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강남 부자와 관련된 희화적 언어로 함께 오르내리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세상의 조소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교회 내부의 자성적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적인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최근의 비판은 '십자가 없는 기독교' 혹은 '예수 없는 기독교'라는 비판에서부터, '한국 교회는 십자가를 달아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사실은 바알 신을 섬기고 있다'라는 혹평에까지 이르렀다.

2천여 년 전 갈릴리를 중심으로 민초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군림하는 제왕적 그리스도의 모습만 보인다.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빠져버린 기독교는 고난과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과 물질의 축복을 갈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성공신화와 만사형통만 추구하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의 이러한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의 모습을 너무나 닮아가고 있다. 세속적인 가치를 기독교의 영성적 가치로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교회 안을 자본주의적 가치로 가득 채우고 만 것이다.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교회들이 한국에 많다는 것도 이의 반증이다. 거대한 자본과 기업이 약자를 삼키 듯, 대형교회가 점차 작은 교회들을 흡수해 가는 과정은 어찌 그리도 서로 닮았는지….

대형교회가 많아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 있는 존재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점차 사라지고, 대형교회의 그늘에 안주하면서 여전히 '젖만 먹는' 단계의 신자들만 늘어나고 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수가 아무리 불어나더라도 각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견고히 세우는 역할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교회와 교단에서 자주 발생하는 분규가 교회법으로 치리되지 못하는 상황은 이미 오래 되었다. 최근 모 교단에서 감독 자리를 두고 벌어진 싸움은 일반 사회의 상식으로서도 도저히 납득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그 사건은 세상 법정으로 넘어갔고, 세속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은 한국 교회와 교단이 사회법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식 수준 이하라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적 영성을 사회 속에 확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듯이 보인다. 교회가 사회를 이끌어갈 것을 기대하는 것은 소박한 희망사항일 뿐이고 오히려 사회의 비난과 지탄을 받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이제 이 땅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는 말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한국교회에서 무슨 쓸 만한 것이 나겠느냐는 말도 머지않아 인구에 회자될 것 같아서 두렵기만 하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도 겉으로는 거기에다 온갖 기독교의 미사여구를 덧붙임으로써 교언영색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오히려 싸움은 더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전개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교회와 주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기독교인의 문화가 과연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서글픔을 갖게 된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가?
한국 교회의 이 같은 저질화와 타락은 여러 가지 복합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그 요인 중 하나는 해방 이후에 급격하게 늘어난 교단의 분열을 들 수 있다. 어떤 외국의 선교학자는 한국 교회의 분열이 한국 교회 성장의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좋게 말하면, 한국 교회가 '분열'이라는 아픔을 양적 성장의 기회로 선용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16세기 종교개혁 때에 가톨릭 측에서 유럽에서 잃었던 영지를 외부에서 찾겠다는 뜻으로 유럽 바깥 지역 선교에 임했다는 역사 해석에 비추어보면 분열은 그 본래 의도와는 달리 그것이 전도와 성장의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1960, 70년대 한국교회가 성장하며 보였던 교회난립 현상은 실상 교회 분열과 무관하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 상가 내에 즐비했던 각기 다른 교단 소속의 여러 교회들을 생각할 때,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하는 염려도 있지만 분열이 도리어 교회 성장에 효과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교회의 저질화가 바로 이런 비그리스도교적인 경쟁에 의해 자라나고 심화 확대되어 갔다는 점이다.

분열을 통한 양적 성장을 구가하는 동안 교회가 더 중요하게 지녀야 할 질적 성숙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와 교단의 분열은 그 전개 과정에서 각종 치부를 낱낱이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일반 사회의 이익단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실망감을 안겨 주어 스스로 전도의 문을 막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

또한 교단의 분열은 교회를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고 결국 교단 소속이 분명치 않은 각종 사이비 교회와 목회자를 양산해 냈다. '비행기 탈 때 평신도였던 사람이 내릴 때에 목사가 되었더라.'는 웃지 못 할 현상은 바로 교회와 교단의 분열이 가져온 심각한 후유증의 하나였다. 이런 경향성 하에서는 기독교 고유의 영적 성장은 물론 일반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마저 공유하는 것도 어려웠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이원론(二元論)적인 신앙행태도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이 같은 저질화를 재촉했다. 이원론의 행태는 여러 면에서 나타나지만, 가장 쉽게는 신앙과 생활의 분리에서 찾을 수 있다. "새벽기도 갔다 오다 남의 집 담벼락에 달려 있는 호박 따온다."는 말이 농담처럼 있었던 때도 있었다. 이 말은 가장 단적으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행(信行)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는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일반 불신자와 다를 것이 없는 삶을 단적으로 희화화한 말이지만, 실상 삶의 신앙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축약하여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가치관이 기독교적으로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이해관계가 돌출할 때 그 불일치가 그대로 드러나고 만다.

아무리 말씀으로 무장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생활태도로는 교회 안에서까지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교회법상 이미 자격이 미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고 감독으로 출마한 성직자나 또 그를 지지하여 최다득표로 밀어준 성직자들을 보면 이들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현상들을 목격할 때마다 한경직 목사님이 성직자들을 향해 말씀했다는, "목사님, 정말 예수 믿으십니까?"라는 말이 자주 생각난다. 지하철 안에서 전도하는 사람을 향해, "너희 목사님에게나 가서 전도하시지!"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빈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또 한편 오도된 복(福) 개념이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망가뜨리고 있다. 교회에 가서 듣는 가장 흔한 소리는, 언필칭 '축복'이다. 설교에도 '복' 소리가 들어가지 않으면 허전할 정도이다. 그런데 그 복의 개념이 문제다. 구약에는 이런 저런 복들이 제시되어 있다. 실제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현실적 삶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장수(長壽) 부귀(富貴) 강녕(康寧) 등이 그렇고 이런 축복들은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초월하여 제시된 복이 이런 현실적인 복들로 말미암아 가려지고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하는 데에 있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 중반부터 요한 3서 2절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하게 된다."고 신자들을 현혹해 왔다.

이 복이 기독교의 복의 전부인양 주장하고 신앙생활이란 곧 이 같은 '축복' 생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이런 흐름은 박 대통령 시절의 '잘 살아보세' 하는 새마을운동과 그 맥이 일치하였고, 산업화 과정과도 맞아 떨어졌다. 교회는 부지런히 복음의 핵심을 여기에 맞춰갔다. 들어가도 복이요 나와도 복이었다. 교회는 복의 전당이요, 성직자는 복을 매개하는 중재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마태복음 5장의 복은 한국 교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가난함의 복, 애통함의 복, 온유의 복,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복, 긍휼케 하는 자의 복, 마음 청결함의 복, 평화를 만드는 자의 복,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의 복,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는 주님의 가르침은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강조되지 않았다.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이 복은 간데 온데 없어지고 들어가며 나가며 받아야 할 복은 바로 부자 되는 복이요, 건강하게 되는 복이요, 잘 먹고 잘 사는 복이었다. 이런 복이 과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복이랄 수 있을까? 기독교 복음을 빙자하여 인간적으로 만들어낸 그야말로 세속적인 복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이런 복 개념을 가진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이 추구될 수 없다. 이런 세속적인 복 개념이 바로 물량주의,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성공주의로 연결되면서 한국 교회를 십자가 없는 바알주의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가난의 실천과 작은 교회 운동으로 나가자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 여전히 소망이 있는가? 필자는 그래도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아니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에서 사회복지 활동과 관련해서 대략 70% 정도가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이 정확한 통계에 근거해서 나온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에서 한 가닥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물질로 이웃을 생각하며 나누는 노력의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교단에서 북한에 병원을 세우고 아프리카와 제3세계에 학교와 구호기관을 세우는 소식을 들을 때에도 역시 희망을 갖게 된다. 교회개혁을 위한 의욕적인 외침을 들을 때도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것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이다. 이런 외적인 사역은 내적인 충만함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

필자는 최근 한국 교회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는 방안이 무엇일까 깊이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한국 교회의 영성(靈性) 회복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영성 회복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필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부흥의 원인이 말씀의 흥왕(행6:7, 12:24, 19:20)에서 기초했고, 또 한국 초대 교회의 성장과 발전도 역시 이 말씀의 흥왕에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씀의 흥왕은 교회에서만 이뤄질 것이 아니다. 바로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에서 날마다 말씀이 흥왕하여 우리 안에 있는 세속적인 인간상을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난국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의 회복과 성장도 역시 이처럼 말씀에 깊이 침잠하는, 말씀의 흥왕함에서 그 계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고 하듯이 현재 범람하는 사이비 말씀의 홍수 속에서 정말 마실 수 있는 말씀의 진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 영합적인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곳곳에서 여러 젊은 목회자들이 참다운 말씀의 흥왕과 교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교회의 새로운 소망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말씀은 기도와 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처럼 분주한 세상에서 기도의 시간을 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을 우리 생활에 구체화함으로써 기도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예컨대 복잡한 도시생활이지만,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또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 짬짬이 기도할 수 있다. 쉬지 말고 드리는 기도와 말씀 묵상이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의 영성이 놀랍게 성장할 것이며, 한국 교회 영성회복은 개인의 이 작은 경건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성 회복을 위한 교회적 차원의 실제적 방안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 점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가난의 실천이요 다른 하나는 작은 교회 운동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너무 부요하다. 물질적 부요함이 영적 빈곤을 초래하고 사회적 냉소의 대상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 부요함이 주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칭 그 부요함 때문에 자신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계3:17)을 깨닫지 못했던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가난함을 통해서 영적 부요함을 누리는 삶이 이제 한국 교회에 절실하다. 라오디게아 교회와는 반대로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이 오히려 주님께서 인정하는 그들의 부요함(계2:9)이 되었듯이 말이다. 예수님의 팔복의 첫 번째 복도 가난함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보아도 영성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가난해져야 한다.


교회의 영적 각성과 가난의 실천은 곧 작은 교회 운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뜻있는 목회자들이 벌써 여기에 눈떠서 작은 교회 혹은 중소교회 운동에 앞장서 가고 있다. 작은 교회 운동은 오늘날 대형교회가 갖고 있는 영적 황폐함을 극복하고 성령의 하나 됨에 동참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작은 교회들은 서로 연합하고 협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관을 확립할 수 있다.

대형교회의 부정적 측면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을 상실하고 독단적이며 개교회주의로 나가는 교만함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작은 교회 운동의 긍정성은 그리스도 교회의 연합의 끈을 공고히 하면서도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교만함을 극복하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로서 겸손하게 행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국교회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하며 찬양하는 시편기자의 염원을 작은 교회들의 연합운동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남북과 동서로 분열되어 갈기갈기 찢긴 한국 사회에 참다운 일치와 평화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한국교회에 대한 소망이 더 간절해지는 이유는 교회의 변화가 우리 사회 변화의 희망의 토대가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한반도평화연구원(www.koreapeace.or.kr) 홈페이지에서)

이만열 / 한반도평화연구원 고문·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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