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정부(明治政府)는 도구가와 막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사교로 인정하여 계속적인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명치천황(明治天皇)은 외국의 문물을 받아 드리기 위한 수단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인들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오래 동안 쇄국장책을 일관하여오던 명치정부는 서서히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고, 1858년 7월에는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문의 8조에는 일본에 있는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에 전념할 수 있으며 거유지에 예배당을 건립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거유지내의 그리스도교의 활동을 법적으로 보장하였고 선교사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도록 규정하였고, 이 조약의 발효는 일 년 후인 1859년 7월에 성립되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미국 성공회의 선교사인 J.리긴스와 그의 동역자인 C.M.윌리암스가 나가사키(長崎)에 개신교의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상육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서 10월에는 미국장로교회 계통의 선교사인 J.L.헤본 의학박사와 11월에 미국의 개혁파 교회의 선교사인 S.R. 브라운 등이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 상육하게 되었다.
그 후에 계속해서 대부분 미국의 선교사들이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1859년에 로마 카토릭 선교사들이 일본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 또한 개신교와 동방정교회의 선교사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열심히 가르치고 전도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대할 뿐이었다. 초기에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였다.

그 후 1865년에 베루나-루 프친 챤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 박해수난자 기념회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숨어있던 많은 신자들이 나타나 부활절 예배에는 1500여명이 함께 모여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1873년(명치6년)에 명치정부가 파송한 이와쿠라(岩倉具視) 일행이 유롭을 시찰 중에 있었는데 이 때에 나가사키(長崎)의 우라가미(浦上)에서 외국인 기독교인 박해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알게 된 외국의 공사들이 일본정부에 몰려와 항의를 하게 되었고, 정부에서는 외국의 비위를 거스릴 수 없어서 마지못해 천주교 금지령을 철회하게 되었다.

1873년 2월에 그리스단 금제의 법령이 철거되기 전까지 약60여명의 선교사들이 일본 각처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동경과 요코하마(橫浜)을 중심으로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일본 정부에서는 “마을마다 배우지 않는 집이 없고, 집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국적으로 교육을 보급하였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일본성서협회를 설립하여 일본어 성서를 발간하게 되었고, 1872년에 일본에 최초로 개신교 교회인 요코하마교회(現:海岸敎會)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의 중심은 학교 교육과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엄밀하게 선교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많아도 좀처럼 믿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도구가와막부 때에는 불교에 의하여, 명치정부이후에는 신도(神道)에 의하여 사람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전원 불교 신자인 동시에 진자(神社)의 씨자(氏子)라고 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는 기독교는 일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고 있다.

일본인에게 “왜 기독교를 받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묻는다고 그들은 단순히 “우리는 일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신비로운 종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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