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2월에 그리스단 금제의 법령이 철폐되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기독교에 대하여 냉담하였다.

기독교의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될수록 기독교 배척에 대한 사회적 풍토도 크게 고조되었다. 또한 기독교를 사교로 배격하는 운동이 신도, 유교, 불교의 관계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그 당시에 유행되었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되새겨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예수교의 신자가 되었답시고 일본의 주체를 잊어버리는 놈들, 예수를 국왕보다 존경하는 놈들, 예수를 믿는답시고 가업을 태만히 하는 놈들, 예수를 믿는답시고 조상을 숭배하지 않는 놈들, 신궁을 무시하고 예수에 열심히 미쳐있는 놈들, 세계에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하는 놈들,” 등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배척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들의 기독교 배척의 소리가 유형무형으로 기독교를 탄압하는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심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이 교육기관과 의료사업을 통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문명의 고도의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영어와 서양 학문을 배우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기독교의 감화를 받게 되었다.

정성어린 진료활동에 인격적인 감화와 현대의학에 의한 치료의 효과 등은 일본 민중들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는 외국인 거주지나 도시에서 지방 마을과 농어촌으로 확산 되었고 귀족층에서 농민층으로 확대되었다.

872년 9월에 두 번째로 동경에, 1874년 4월에 고베(神戶)에, 1874년 5월에 오사카(大阪)에, 1875년 7월에는 미다(三田)에, 1876년 10월에는 우에다(上田)에 차례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 속담에 “가죽은 탐이 나고 범은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박해 당시에 일본인들은 기독교의 문화와 서양의 고도의 지식을 탐하면서도 아무도 접근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 1865년 11월 5일에 병중에 있던 야시노 모도다가(失野元隆)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일본 개신교 신자로서 최초로 J.바라 목사를 통하여 세례를 받게 되었다.

1866년 2월에는 구마모도(熊本)의 성중의 무사이었던 소무라(壯村助右衛門)가 C.M 윌리암스 선교사를 통하여 두 번째로 세례를 받았고, 1866년 5월에는 무라다 와가사(村田若挾)가 세 번째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복음의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진통의 과정은 너무나 잔인하고 비참하였다. 오랜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3인의 세례자가 탄생하였다. 우리는 일본에 기독교의 여명이 밝아오기 까지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노고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 최초로 도입되었던 선교단체는 복음주의적 기독교 단체이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기독교는 웨슬레(J.Wesley1703-1791)의 감리교회 운동이었다. 1872년 미감리교회 선교부에서 일본 선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메클레이(R.S.Maclay1824-1907)목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세계는 우리의 교구라는 웨슬레의 말과 같이 우리 선교국은 새로 전개된 선교의 분야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많은 고난이 있으나 이것을 극복해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비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은 우리 앞에 일본 선교의 문을 열 수 있게 하셨다. 이 기회에 일본에 선교하는 일은 우리들의 임무이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의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기대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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