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분열을 멈추려면

투표 보이콧, 보수적일수록 분열하는 현상

분열에 대한 철학적 분석 - 해체주의적 심리

분열의 큰 목적: 정치적 효력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의 권면을 기억할 필요

 

지난 5일 윤석열 대선후보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선출된 후로 또 다시 분열의 영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준석 대표는 "지난 주말 수도권에서 선거인단(책임당원)에서만 1800명이 넘는 탈당이 있었고 탈당자 중 2030 비율은 75%가 넘는다”고 밝혔다. 특히 홍준표 의원의 지지자들 가운데에서 실망을 감추지 않으면서 차라리 대선 때 이재명 후보를 찍겠다거나, 투표를 안하겠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정치와 사회, 교계를 막론하고 보수적인 성향의 가장 큰 특징은 진보적인 성향에 비해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 의혹에도 불구하고 경선에서 압승했다. 경선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던 이낙연 의원이 이재명 선거대책위원회(이하 선대위) 출범식에 참여한 것에 반해, 홍준표 의원은 윤석열 선대위에 참여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홍 의원은 이를 당 분열로 보는 비판을 일축했지만, 민주당과 비교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탈당원서 접수 현황 (사진출처: 이준석 대표 페이스북)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탈당원서 접수 현황 (사진출처: 이준석 대표 페이스북)

교계에서도 보수적인 교파에서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개혁파 정통교리인 '능동순종' 교리에 대하여 몇 년 전부터 논쟁이 격화되더니, 얼마 전 합동총회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연구위원회가 '능동순종' 교리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여 많은 형제 보수교단들과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소위 진보진영은 꽤나 신속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연대하여 자신들을 대항하는 세력에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왜 보수는 힘을 합치지 못하고 논쟁하는 데에 몰두하다가 결국 분열을 초래하는 것일까?

용어적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 여기서 사용하는 '보수'와 '진보'는 단지 '경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한하여, 정치나 교계와 상관 없이 '보수'는 객관적 가치와 자연법을 지지하는 경향을, '진보'는 객관성을 해체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스며든 좌경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겠다. 이와 같은 분류라면 객관적 진리와 교리와 전통을 지지하는 교회는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보수와 진보의 차이

진보와 보수에는 기본적인 인식론적 전제의 차이가 있다. 진보는 보편적인 실재가 없다고, 또는 그것을 가려내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보수는 보편적인 실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보는 사상일치의 과정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만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보수는 그렇지 않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치를 보이지 않으면 일치가 불가능하다고 결과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이 보편적인 실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직접 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타당한 근거를 통해 그 실재를 논증함으로써 전달해야 한다. 이 보편적 실재는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해 '좌에서 우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따라서 실재의 근거는 '전통'(좌-우)이다. 이 전통에 근거한 실재는 곧 '정통'(위-아래)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실재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연속적으로 계승했는지의 여부를 가려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과연 전통을 '순수하게' 연속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가능한가? 

 

● 보수의 해체주의적 심리

지식의 고고학자로 자처한 미셸 푸코는 세계를 담론으로 보았는데, 계통학을 통해 오늘날 진리를 존재하게 하는 조건들과 연속성들을 해체하면서 발생하는 정치적 효력에 빛을 가져다 줌으로써 참된 담론들이 발생하게 되기를 원했다.

계통학은 해체 작업을 통해 정치적 효력을 얻게 하는 모든 학문을 뜻한다. 해체는 하나의 정답을 관철시키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해체라는 작업을 통해서 발생하는 정치적 효력과 권력을 얻는 것이 해체의 목적이다. 푸코의 관점에 따르면 해체를 통해 참된 담론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담론들이 곧 세상이다.

미셸 푸코(1926.10.15 ~ 1984.6.25)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으며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소외된 비이성적 사고, 즉 광기(狂氣)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적관계를 파헤쳤다. 1984년 6월 25일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였다.
미셸 푸코(1926.10.15 ~ 1984.6.25)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으며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소외된 비이성적 사고, 즉 광기(狂氣)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적관계를 파헤쳤다. 1984년 6월 25일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였다.

그런데 해체는 진보 좌파 진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자연법을 지지하는 보수에서 객관적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그 진리의 개념화를 계통학적으로 분석하여 발견한 근거로 자기 주장에 호소력을 얻으려는 작업이 일어난다. 즉, 정치적 효력에 빛을 가져다 주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보수에서 "내가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열성인 이유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보는 보수를 해체하기 위해 해체를 사용하지만 보수는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해체를 사용한다. 

전통은 곧 연속성을 계승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전통을 계승한 그 어떤 사람의 주장도 연속성만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다양하기 때문에 연속성 뿐만 아니라 불연속성도 갖는다. 그러나 이 불연속성의 존재가 곧 진정으로 연속성이 있는 명제는 없으며 단지 정치적 효력을 위해 연속성을 창조했다는 것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푸코의 관점이다. 이 불연속성이 반기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다양한 담론들을 기하급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료인 셈이다.

때문에 보수나 기독교가 다양한 담론들을 양산하는 것에 그친다면 적을 돕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담론들은 담론에서 머물면 안되는데 그것은 연속적이며 통일된 진리와 실재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복음과 하나님 나라이다.

 

● 분열을 피하는 전략

전통에는 연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성도 있다. 불연속성은 푸코의 주장, 즉 진리는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단지 권력과 사회적인 암묵적 합의에 의해 상정된 것이 진리라고 부르는 것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불연속성은 피상적인 성질일 뿐, 그것이 가르키고 있는 실재, 즉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으로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이다. 

언약신학은 이러한 특징을 파헤친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으로 대표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공존은 불연속적인 외형이 이상화되어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언약을 하나님 안에서 연속적으로 체험하는 종말론적인 삶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유일한 연속성은 '구속사'이다. 불연속적인 세속사 안에서 연속적인 구속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일치를 이룰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자 미셸 푸코의 철학은 자신의 철학에 의해 스스로 반박된다. 후기구조주의에 의하면 진리는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상정된 것으로써 사회 유지를 위해 그 진리는 연속적이어야만 하도록 구조화된 것일 뿐, 인간은 그 어떤 보편적 실재도, 진리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면서 그는 “불연속성이 존재하므로 연속적 진리는 없다”는 또 다른 ‘진리’를 주장한다. 푸코의 주장 또한 그의 개인적 컨텍스트에 의해 구조화 된 것일 뿐이다. 그 덕분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담론들로 사회에 혼란을 초래한 것에 대한 책임은 없고 단지 자신을 향한 정치적 지지에 만족한다. 어쩌면 그들은 이처럼 잔인한 세상을 원하는 것일 수 있다. 투쟁할 대상이 없으면 정치가 필요 없기에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분열의 우선된 목적은 '정치적 효력'이다. (일러스트 출처: https://www.steemcoinpan.com/sct/@oldstone/3hqnox)
분열의 우선된 목적은 '정치적 효력'이다. (일러스트 출처: https://www.steemcoinpan.com/sct/@oldstone/3hqnox)

 

●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보수'해야 할 것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의 고고학자와 같은 욕망을 갖는다. 보수적인 성향은 지식의 토대를 분석하여 자신의 지식의 정당성을 얻고자 거기에서 연속성을 도출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다양하기에 어떤 사조에도 완벽한 연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상의 토대를 전통에'만' 두면 나타나는 이런 오류들은 정치적 효력만 얻고자 하는 기회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이 반대하는 급진적인 철학을 도리어 방증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떠한 세계와 이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치밀한 논의이다. 동일한 목표를 합의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한다. 우리의 시선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 초대교회 선교 과정에서도 분열과 갈등이 있었다. 어쩌면 이는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지만, 우리는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전 1:10-17).

개혁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인간의 자아에 빛을 가져다 주길 원했다. 이것은 계몽주의적 작업처럼 보이는데 바빙크는 계몽주의가 아닌 인간의 자아가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토대로서의 작업이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계시'를 필요로 한다.

계통학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언약의 연속성에 관한 것이어야만 한다. 해체가 존재해야 한다면 말씀에 의해 자아가 해체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완벽한 연속성은 계시와 거기에 나타난 언약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이를 중심으로 연합할 때이다.

지식의 객관성을 증명하고 싶다면, 지식의 고고학자가 되고 싶다면, 계시, 곧 복음에 끊임 없이 자신이 해체당하는 것 외에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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