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연예인의 자살 소식에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청년들을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마음이 몹시 착잡하다. 방송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달리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고 행복한 표정에도 마음은 죽을 만큼 힘들고 괴로웠다니 인생을 연기하듯 살았을 그 모습에 가슴이 아리다.

젊은 시절 제대로 된 목회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 저도 성경에 나오는 모세처럼, 다윗처럼, 베드로나 바울 같은 큰 인물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기도 응답은 "너는 너가 돼라"였다. 하나님은 또 하나의 모세도 다윗도, 베드로나 바울도 아닌 '나다운 나'를 기대하신다는 것이었다.

과연 나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을 나다운 일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자기 주장대로 할 말 다하고 속 편히 사는 사람에게 "너답다"라고 일침을 가하지 않는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나답지 못한 게 아니라 내 뜻대로 못한 것이다. 나답다는 것, 그것은 결코 내 맘대로, 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아니리라.

크리스천으로서 '나다움'의 결론은 예수님답게 사는 것이다. '답다'라는 말은 무엇을 닮았거나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접미사이다. 성경은 인간의 궁극적인 닮은꼴은 하나님이며,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를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격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나답게 사는 건 곧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며 사는 것이다. 솔직히 나다움이 주님다움이라고 정의하자니 '나답게'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답게 살지 못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무슨 불경스러운 말이냐고 하겠지만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답게만 사셨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스스로 영원부터 계시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그것도 실패한 인생에 대한 못 말리는 사랑 때문에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하며 너무나 인간답게 사셨다. 아니, 인간다움이 아니라 아예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고 보면 구원과 영생의 은혜는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못한 데서 오는 반전의 은혜이다.

결국 인간을 향한 그 애절함 때문에 죽기까지 사랑했던 하나님.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이며 진정 내가 나답게 살아갈 모습인 것이다. 결국 사랑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나다운 모습이며 내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싫은 것을 거절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싫은 것은 버리고, 그 어떤 일도 사랑이 담긴 일이라면 감히 그것은 나다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을 묻는 질문에 자신 없다면 그건 나답지 못한 일이다.

나는 오늘 진정 '나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나다움'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나답지 못함보다는 주님답지 못한 회한을, 그러나 하나님답지 못하고 인간으로 오신 은혜를 알기에 사랑으로 살아갈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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