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하나님은 고통과 상관이 없다"

칼빈, "타락도 하나님의 허용이자 뜻"

하나님의 주권과 타락한 세상 사이의 변증법, 신정론의 열쇠

악과 고통에 반영된 하나님의 뜻은 사랑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항상 함께 계신다.

 

신요한 전도사(코닷 객원기자, 열린하늘문교회)
신요한 전도사(코닷 객원기자, 열린하늘문교회)

하나님의 주권과 악의 존재 사이의 모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악’의 존재, 이를테면 고통과 범죄와 재해, 그리고 악한 위정자가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정의와 주권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조리를 겪고도 나의 주인이자 조물주라는 분에게 원망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부자연스럽고 인간답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것이 무신론자들의 불만이다. 그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향한 무신론자들의 조소가 가득한 질문: “세상에 고통과 악이 만연한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가?”에 감추어져있는 진의를 신학과 철학을 기반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정교회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David Bentley Hart)의 사유(思惟)는 탁월하다. 그의 저서 『바다의 문들 -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에 따르면 무신론자들은 사실 ‘도덕적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신이 없기를 바라는 것보다 고통과 아픔을 함께 신음하며 동정할 수 있는 도덕적 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의는 성급하게 이 ‘악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자기가 결정해 버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실수에서 기인한다. 세계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악한 사건들의 직접적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규정짓는 태도는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악한 하나님”, “고통 받는 사람들에 무관심한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벤틀리 하트는 그의 저서에서 특히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그는 "칼빈주의자"들이 위와 같은 입장을 지지한다고 보고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 교리와 "제한속죄" 교리를 "부조리"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심지어 "칼빈주의자"들이 무신론자들의 비판을 오히려 더 심오하게 보이게 만든다고 일갈한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 -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차보람 옮김, 비아 출판사 (사진출처: 비아 트위터)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 -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차보람 옮김, 비아 출판사 (사진출처: 비아 트위터)

물론 소위 "칼빈주의자"들에게 위와 같은 독선적인 태도가 종종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칼빈은 정작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태도는 일종의 뒤집힌 프로메테우스주의와 유사할 수도 있다. 칼빈주의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게 된 것에 의한 깊은 감동에 취해 피조물로써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근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심연과 틈으로 가득한 세상(실재계, real)을 사유하는 고통을 감내하기 싫은 게으른 신앙으로 발생할 수 있다. 실재계에 대한 사유는 실존적 문제에 직면해 있는 현대인들의 삶의 고통을 수반하는데, 독선적인 태도로 실재계를 단순히 배경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천적이고도 목회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종종 범하는 실수이다. 세상 이슈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나 사역적으로 정답을 도출하고자 하는 우리의 종교적 습성이 정작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은폐시킬 수 있다.

하트는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하나님께서는 제 1원인으로 초월적 차원에서 세계를 지탱하고 계신다. 반면 제 2원인들은 피조물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유한하고 우연한 원인들이다. 고통과 재해와 같은 현상은 타락한 세계의 제 2원인들의 우연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제1원인)과 '허용'(제2원인)을 분리했다. 따라서 고통과 악의 문제에는 어떠한 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신의 정의로움’을 변호하는 신정론은 그에게는 궤변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악한 현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악과 죽음과 고통을 이미 승리하셨고, 또 승리하실 것이다. 고통 받는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은 없다.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정교회 학자의 답변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David Bentley Hart). 1965년생. 동방 정교회 신학자이자 철학자, 문화비평가다. 본래 전공 분야인 철학적 신학, 조직신학 뿐만 아니라 역사, 성서학, 문화비평,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 『무신론자들의 망상』Atheist Delusions으로 마이클 램지상을 수상하고 2017년에는 신약성서를 새롭게 번역해 화제를 낳았으며 2019년에는 성서와 교부들의 저작들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신학사를 새롭게 검토함으로써 보편구원론을 제시해 신학계에 파장을 일으켰다.(사진출처: https://opuspublicum.com/david-bentley-hart-on-american-orthodoxy/)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David Bentley Hart). 1965년생. 동방 정교회 신학자이자 철학자, 문화비평가다. 본래 전공 분야인 철학적 신학, 조직신학 뿐만 아니라 역사, 성서학, 문화비평,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 『무신론자들의 망상』Atheist Delusions으로 마이클 램지상을 수상하고 2017년에는 신약성서를 새롭게 번역해 화제를 낳았으며 2019년에는 성서와 교부들의 저작들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신학사를 새롭게 검토함으로써 보편구원론을 제시해 신학계에 파장을 일으켰다.(사진출처: https://opuspublicum.com/david-bentley-hart-on-american-orthodoxy/)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신의 형상

우리가 잘 아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소설에는 ‘아브락사스’라는 신이 등장한다. 그는 선과 악이 모두 내재된 신이다. 따라서 아브락사스는 오직 선만 내재된 “기독교의 신”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 하트는 고통 받는 세상과 하나님을 분리함으로써 아브락사스에게 친히 유일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헤세가 비판하고 하트가 믿는 “기독교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의무론적 신을 닮아 있다. 이들에게 "기독교의 신"은 도덕적 욕망의 거울에 불과하다.

라캉과 헤겔의 사유를 빌리자면, 인간의 욕망은 예지계(상층부/상상계)를 보호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예지계는 손상되지 않기 때문에(또는 ‘않아야 하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다. 이것은 한계로 가득한 현상계(하층부/상징계)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심리학적으로 미혼의 젊은 남성은 여성에게 사랑에 빠질 때 그녀를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아프로디테’로 본다. 이성의 눈을 잃고 욕망의 대상으로 본다. 그녀는 ‘신’에 가깝다. 따라서 사랑에 빠진 남성은 그녀 앞에서 평소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긴장하며 식은 땀을 흘린다. 그녀에게 틈과 균열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욕망의 대상’이자 ‘예지계’이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사랑일까? 그녀 그 자체, 그녀의 단점까지도 인식하고 포용해야 사랑이 아닌가? 그러므로 라캉에 의하면 “욕망은 사랑에 대한 방어”이다. 진짜 사랑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예수가 과연 하나님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다. 종교의 힘은 욕망의 힘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던 예수는 그들의 욕망과 달리 가장 끔찍하고 잔인하며 수치스럽기까지 한 형벌을 받고 돌아가셨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그들에게 이렇게 천명한 것과 같다. “너희가 욕망하는 대(大)타자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질책처럼 다가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예수를 보고 “괴물”이라고 말한다. 다소 불경하게 들리지만 헤아릴 수 없는 용어는 아니다. 거룩한 신과 연약한 인간이 혼재되어 보이는 존재(성경적으로는 틀린 표현)를 인간의 본성은 결코 욕망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일종의 괴물과도 같기 때문에. 하물며 예수의 제자들도 도망갔다.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다. 피투성이인 신을 믿으라고? 인간 본성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이것이 인간 사유의 한계이다. 성경은 항상 우리의 사유를 한계까지 밀고 간다.

슬라보예 지젝 · 존 밀뱅크 공저, 『예수는 괴물이다』, 배성민 · 박치현 옮김, 마티 출판사
슬라보예 지젝 · 존 밀뱅크 공저, 『예수는 괴물이다』, 배성민 · 박치현 옮김, 마티 출판사

 

정말 고통에 하나님의 뜻이 소외되어 있는가?

“칼빈주의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한계 지점까지 이르러 진지하게 상고하는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도 정작 자신들의 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니, 욕망의 대상이 신이다.

여기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쪽은 고통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욕망의 대상으로 도피한 철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고통이 만연한 세상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고백하는 성경의 저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이 있다. 어느 쪽이 사유를 끝까지 밀고 갔는가? 어느 쪽이 더 사유의 게으름을 유발하는가? 철학자들의 눈에 후자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는 ‘괴물’이다. ‘괴물’을 의미 있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이런 게으른 사유는 당연한 것이다. 무신론 철학자들은 신을 물질에 귀속시켰으며, 종교적인 철학자들은 신을 욕망에 귀속시켰다.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한 헤겔적 사유는 언제나 이원론으로 환원한다.

하트의 주장처럼 고통이 만연한 세상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는가? 요셉이 애굽에 팔리도록 내버려두신 것도 하나님이시며, 7년 간의 풍년과 더불어 7년 간의 기근도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당시 바로 왕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요셉을 목격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도 하나님이 내리셨다. 당시 바로 왕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다윗 왕이 병력을 계수하는 범죄를 짓도록 그의 마음을 격동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앗수르와 바벨론을 일으키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욥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106:8)라고 증언한다. 죄악 많은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한” 도구이다(롬 11:32). 심지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신다(딤후 1:8). 칼빈은 죄악의 허용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라고 했다. 과연 이러한 성경 구절들이 하나님이 '악한 신'이라는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고통과 악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 놓여져있는 세속인들도 더러는 불가항력적인 신적 능력을 의식했을 것이며, 더러는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울부짖었을 것이며, 더러는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실존의 목적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을 것이며, 더러는 이 고통과 악의 경험이 성공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이 모두 ‘목적론적 섭리’를 찾기 위한 사유의 과정이 빚어낸 결과들이다. 인간에게는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바라보려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설사 자연재해를 겪으며 자연의 ‘합목적성’을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재해가 지나고 나면 다시 자연을 통해 합목적성을 경험한다. 하늘이 태풍을 일으켜 나를 외면했을지라도, 다시 하늘이 제공하는 소중한 생명의 근원에 은혜를 입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악의 조물주, 비도덕한 신이 아니신 논리적 근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사랑

거의 모든 인간은 이성으로는 더 이상 소망을 찾을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의 순간에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을 찾으며 이렇게 하소연한다. “이렇게 피로 물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나님께서 악이 만연한 세상을 통해 이루실 목적이 있다고?” 여기에 “YES”고 대답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악을 '허용'하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악의 조물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가 되면 사랑일까? 그것이 하나님일까? 이해가 되는 순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다.

이것이 무신론자들에게 “비도덕적인 신”을 믿는 무책임한 모습으로 보일지언정,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결코 사유할 수 없는, 예지계와 현상계 사이에서 간섭현상처럼 발생하는 ‘괴물’과 같은 세상을 곧 합목적적인 세계로써, 하나님 사랑의 계시로써, 아름답고도 선한 목적을 지닌 실재로써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이다.

구속사를 향유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실재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만이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만이 어떠한 역경에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성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인식한다. 고통에 굴복한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름다운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악을 심판하실 것을,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인식이 왜곡된 세속인들에게도 고통 만연한 세상은 목적론을 갖는다.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세속인들이 고통이 만연한 세상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복음을 영접하고 구속사에 참여하는 것밖에 없다. 헤겔과 라캉, 지젝이 이러한 변증법적 진리를 발견했어도 그들의 사유에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었기에 예지계와 현상계 중 하나를 택해야 했거나 둘 사이의 모순을 해소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실재(real)를 ‘괴물’이라고 조소하며 결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다.

진짜 사랑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 '정'(正). 동시에 진짜 사랑은 기쁨과 자유를 선물한다 - '반'(反). 이 '정'과 '반'의 '합'(合)은 괴물이 아니라, 가장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의 속성이다.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가 어떻게 위대한 사랑의 표상이 될 수 있었는가? 사랑의 속성은 '불가해'이다. 사랑은 틈과 균열을 가장 아름다운 실재로써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휼히 여기는 초월적 능력이다. 인간이 욕망하는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이시다. ©Alwayspushforward.me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가 어떻게 위대한 사랑의 표상이 될 수 있었는가? 사랑의 속성은 '불가해'이다. 사랑은 틈과 균열을 가장 아름다운 실재로써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휼히 여기는 초월적 능력이다. 인간이 욕망하는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이시다. ©Alwayspushforward.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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