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으로 인정되는 재난으로서
종말론의 눈으로 바라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

2021 미래교회포럼 전국대회(대표회장 오병욱 목사)가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로 ‘부곡 화왕산스파호텔’에서 12월 6일 개최되었다. 사진@ 발제하는 권수경 교수
2021 미래교회포럼 전국대회(대표회장 오병욱 목사)가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로 ‘부곡 화왕산스파호텔’에서 12월 6일 개최되었다. 사진@ 발제하는 권수경 교수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 보편적 고통으로서의 재난

미래교회포럼 발제 (2020126일 월, 부곡)

권수경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 들어가는 말

이 발표의 주제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 보편적 고통으로서의 재난이다. 종말론, 보편적 고통, 재난 이 세 가지 개념을 하나로 엮었다. 어떤 재난이 보편적 고통으로 인식된다면 자연스레 종말론과 연결이 되므로1)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다. 그런데 이 주제는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미래교회포럼 2021년 전체 주제의 하나로서 코로나19 범유행 가운데 제기된 주제이므로 언급된 보편적 고통과 재난은 코로나19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발표의 과제는 우리 시대의 재난 코로나19가 보편적 고통으로서 갖는 성격을 규명한 다음 그 의미를 성경적 종말론에 근거해 찾아보는 일이다. 우리 삶의 현장을 말씀으로 조명해 보는 작업이므로 그 결론은 곧 우리의 기도와 실천의 지침이 될 것이다.

논의할 핵심 질문은 두 개다. 첫째는 코로나19라는 재난이 어떤 점에서 보편적 고통의 성격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코로나19와 고통의 관계에 대한 논의다. 이 논의는 코로나19를 보편적 고통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답을 복음에서 찾고자 한 미래교회포럼의 2021년 전체 주제의 타당성을 규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둘째는 코로나19 범유행이 보편적 고통으로 확인될 경우 성경적 종말론이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적 종말론과 코로나19의 관계에 대한 논의다. 성경 곧 복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조직신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다. 따라서 종말론이 코로나19의 의미를 충분히 또 올바르게 규명할 수 있다면 코로나19의 의미를 종말론에서 찾고자 한 시도가 옳았다는 점도 확인될 것이다.

코로나19가 닥친 이후 그 재난의 의미를 물리적 영적 원인을 분석하여 찾으려 한 시도가 적지 않았다.2) 필자는 202011월의 샬롬나비 포럼에서3) 그런 시도의 한계를 지적하고 코로나19의 뜻은 원인 아닌 결과를 통해 역순으로 추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면서도 더 나은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늘 미래교회포럼이 시도하는 종말론을 통한 의미 탐구는 코로나19가 가져온 결과를 통해 뜻을 찾아야 한다는 필자의 입장과 일치한다.

이 작업을 위해 우선 종말론, 보편적 고통, 재난 이 세 가지 개념을 각각 살피되, 세 주제 사이의 상호관계에 유념하며 하고자 한다. 그런 작업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물론 종말론이 밝히는 코로나19의 의미다. 세 주제를 다루는 순서는 제목의 역순으로 하여, 먼저 코로나19라는 재난을 다루고, 이어 그것이 보편적 고통으로 갖는 성격을 분석해 본 다음, 마지막으로 그것을 성경적 종말론에 연결할 것이다. 성경적 종말론 자체가 복잡한 주제이므로 종말론에 대한 논의가 코로나19에 대한 분석 못지않은 비중을 갖게 될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고려할 때 우리의 모든 탐구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옳다. 하나님 말씀, 특히 종말론에 비추어 볼 때 코로나19를 주신 또는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 코로나19 범유행

먼저 코로나19 범유행의 특징을 살펴보자. 이 질병이 과연 보편적 고통인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고통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필자가 2월의 미래교회포럼 발제 때 설명하였는데4) 코로나19는 인간 본성과 관련된 고통은 아니지만 개연적 고통이 전체 인류에게 확장,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라고 분석하였다.

 

1) 코로나19 현황

코로나19 범유행이 세계를 뒤덮은 지 2년이 되었다.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로 포럼이 시작된 지도 벌써 1년이다. 포럼이 시작될 때는 모든 것이 안갯속이었다. 백신도 치료약도 나오기 전이어서 상황이 좋아질지 나빠질지, 또 언제쯤 진정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백신이 나와 접종률이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치료약도 곧 나오리라는 예상이 있다. 그렇지만 확신자는 줄지 않고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많은 곳에서 코로나19 퇴치 대신 코로나와 더불어 사는 위드코로나With Corona를 시도하고 있으나 위험과 불안은 여전하다. 지난 2년 동안 전 세계를 고통과 두려움에 빠뜨린 재난을 글 몇 줄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일단 개략적 자료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코로나19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줄임말이다. 코로나19 범유행pandemic이라고도 부른다. 코로나191960년대5) 이후 알려져 온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가운데 201912월에 발견된 형태로 영어로는 Coronavirus Disease 2019로 쓰고 줄여서 COVID-19이라 부른다. 호흡기를 공격하는 중증 호흡기 증후군이며, 호흡과 비말 접촉을 통해 발생하는 병으로 전염력이 강해 바이러스가 확인된 지 몇 달6) 만에 전 세계의 유행병 곧 범유행이 되었다. 그렇지만 치명률은 낮은 편이어서 감염자의 81퍼센트는 아예 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14퍼센트 정도가 호흡곤란, 저산소증 등의 증세를 보이며 심각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5퍼센트 정도다. 병이 확산하는 동안 다양한 변이가 나타났지만 델타 변이처럼 전염력이 강해진 변종 외에 중증을 유발하거나 치명률을 높이는 변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코로나 최신 통계를 보여주는 월도미터스 (Worldometers.info)에 따르면 현재까지 (20211121일 현재) 전 세계에서 257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그 가운데 5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7) 지금까지의 사망자 수만으로도 이미 인류 최악의 감염병 5위다.8) 국가별로는 미국이 감염자 48백만 명에 사망자 79만 명의 기록으로 선두를 유지하고 있으며 인도가 확진자 34백만 사망자 46, 브라질이 확진자 22백만, 사망자 61만으로 뒤를 잇고 있다. 바이러스의 기원지로 알려진 중국은 20205월 이후 하루 확진자가 100명 미만이어서 지금 전체 확진자 수에서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효율적인 방역 정책을 사용하여 감염자 41만 명에 사망자 3,274명의 통계를 보이고 있다.

코로나19의 평균 사망률은 감염자 대비 2.02%. 그렇지만 실제로 65세 미만의 경우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확률은 1%에 훨씬 못 미치며 30대 미만의 경우 0.004%에 불과하다. 따라서 병 자체를 가볍게 여기고 정부의 방역을 정치적 모략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방치했을 경우 환자의 수가 관리 능력 한계치를 초과할 수 있고 그 경우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장기간 고생하거나 죽는 환자가 많이 나온다. 발생 초기 중국과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 뉴욕 및 캘리포니아가 그런 상황을 겪어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브라질의 감염자 대비 치명률이 3%로 높은 이유도 폭증하는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결과다.

 

2)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

코로나19는 전염률은 매우 높으면서도 치명률은 매우 낮은 독특한 질병이다. 겨울마다 찾아오는 독감의 하나가 그저 전염률만 수십 배 높아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방치하면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 치명률이 급상승한다. 반대로 엄격히 통제하면 시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감기하고 비슷한 가벼운 병 때문에 국민의 삶을 너무 옥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19를 바라보는 관점도 극과 극을 오가고, 코로나19에 대처하는 각 정부의 정책 또한 강력한 통제에서부터 그냥 내버려 두는 정책까지 실로 다양하다. 국경이나 특정 지역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방법과 그냥 내버려 두는 반대쪽 극단의 정책을 번갈아 채택한 국가도 적지 않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비판과 불평은 피하지 못한다.

코로나19를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적 거리두기였다. 강한 전염력을 염두에 둘 때 매우 합리적인 조치다. 단체 모임을 중단하고 개인과 개인 사이도 1미터 이상 거리를 두게 했다. 대부분의 정부가 이 정책을 시행했다. 결과는 사회생활의 급격한 위축이었다. 경제에 미치는 타격도 컸다. 손님이 와글거려야 수익을 올리는 각종 자영업이 극도의 영업부진을 겪었고 폐업하는 가게도 줄을 이었다. 공장에서도 같은 방역 수칙을 시행해야 했으므로 생산이 줄고 무역 규모도 줄었다. 항상 성장만 해오던 세계 경제가 코로나 2년 동안 후퇴를 경험했다.

가장 강력한 거리두기는 격리였다. 모든 사람과의 접촉을 끊는 방법이다. 병이 확진된 사람은 입원을 하거나 수용 시설에 격리가 되었고 감염이 의심되거나 확진자와 가까이 접촉한 사람도 예방을 위해 격리를 강요당했다. 해외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도 2주간의 격리기간을 가져야 했다. 다른 만남 역시 제한적으로, 그것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허용되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만남을 제한함으로써 코로나19는 인간 삶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삶의 중요한 대목인 출산, 결혼, 장례 등이 큰 타격을 입었다. 임신과 출산의 긴장이 배가되고 두려움까지 추가되었다. 결혼을 미룬 사람, 적은 하객으로 강행한 사람, 계획을 바꿀 수 없어 돈을 날린 사람도 부지기수다. 가장 아픈 부분은 장례였다.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은 사람의 장례도 거리두기 때문에 제한이 많았지만 코로나19에 걸려 사망한 경우에는 감염병 규정에 따라 장례식 자체를 치르지 못한 채 시신을 불태워야 했다. 삶을 마감하고 떠나는 일은 떠나는 본인이나 남은 가족 및 친지들에게 참으로 중요하고 뜻깊은 순간이지만 코로나19는 그런 의미마저 빼앗아 갔다.

교회도 이런 변화를 피하지 못했다. 모이는 것이 교회 생활의 기본이었던 만큼 예배, 성경공부, 식사 친교 등 거의 모든 교회 활동이 중단되거나 위축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보조 수단으로 사용해 오던 온라인 기술을 적극 활용하였고 새로운 방식에 맞는 다양한 콘텐츠도 부지런히 개발했다. 코로나19 초기에 교회는 정부의 방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런데 교회 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불만이 가중되었고 방역을 담당한 정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아졌다. 좋게 써주지 않는 언론을 향한 불만도 컸다. 그런 다급함 가운데 실로 안타깝게도 코로나19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몇몇 기관들이 세미나나 포럼 등 기회를 제공했지만 전체 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말았다.

 

3) 코로나19를 보는 관점

강한 전염력과 낮은 치사율의 기묘한 조합이라는 점 외에 코로나19 범유행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처음부터 정치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코로나19 방역의 대표적인 실패사례인 미국과 대표적 성공사례인 한국도 정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가 처음 급속히 번질 무렵 미국의 집권당인 공화당은 코로나19는 감기와 별 다를 바가 없다며 가볍게 무시했다. 민주당이 발의한 트럼프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맞서9)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다가 코로나19를 막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그런 입장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기조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보수 매체인 Fox TV가 트럼프의 그런 태도를 적극 옹호한 반면 다른 언론들 특히 CNN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거듭 공격했다. 특히 엄청난 수의 사람이 확진되고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생생한 통계로 전하면서 정부의 무책임을 비판했다. 그 무렵 미국 텔레비전에서는 초기 대응의 성공사례로 대한민국이 하루에도 수십 번 언급이 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은 코로나19를 가장 효과적으로 막아낸 나라다. 확진자 수나 사망자 수도 놀랍도록 적지만 그런 방역을 단 한 번의 봉쇄조치도 없이 이루어냈다는 점은 세계 다른 나라의 탄성을 불러 일으켰다. 거기다가 백신 접종도 시작은 늦었지만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고 그 결과 위드코로나 정책도 선진국 가운데 앞장서서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의 지도력과 국민들의 성숙도 그리고 한국의 뛰어난 정보산업이 함께 이루어 낸 업적이다. 덕분에 일정 규모 이상의 경제를 가진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률을 보였으며 코로나19 기간에도 무역이 계속 늘어 무역 규모 면에서 이제 영국과 이탈리아를 제치고 세계 8대 무역국이 되었다.10)

그런 가운데 정치적인 공격도 적지 않았다. 초기에 가장 많았던 것이 중국을 봉쇄하지 않은 데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언론은 정부의 정책을 사사건건 비판함으로써 해외 언론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11) 백신 도입 및 접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부정적인 분위기 가운데 음모론도 상당히 퍼졌다. 코로나19를 이용해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고도의 통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12) 코로나19를 이용해 먹는 차원을 넘어 아예 코로나19 자체를 더 깊은 음모의 소산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13) 그래서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 가운데도 후유증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부의 음모이기 때문에 협조할 수 없다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경우는 백신도 백신이지만 아예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는 사람도 많고 공공장소에서는 마스크 착용 문제로 마찰도 빚어지고 있다. 과학이 책임지고 주도할 영역이 정치, 종교와 뒤섞여 버린 것이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의 방역을 비판하는 가운데 일부 교회가 또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이유는 정부의 방역이 과도하여 기독교의 핵심 신앙 활동인 예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수 교회는 성 윤리 등의 문제로 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더 비판적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 때문인지 일부 교회는 정부의 방역을 종교탄압 또는 예배방해로 규정해 저항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언론에서는 교회와 코로나 확산을 연결하는 뉴스가 수시로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전체 교회가 지난 2년 동안 해 온 희생과 모범의 가치가 상당 부분 소멸되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방역에 협조하면서 고난에 동참해 왔는데 그 희생보다 소수의 반발이 더 크게 부각된 것이다. 결국 일부 교회는 정부에 이어 언론까지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와의 마찰도 생겼고 그런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코로나19 기간 동안 교회를 떠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정부의 방역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교회 안에 있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주장도 있고 정부가 교회를 없애려 한다는 음모론마저 나왔다. 그런데 그 기간 방역 책임자였던 총리는 줄곧 기독교인이었다.14) 현장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마찰을 교회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더 의논이 필요하다. 또 정부와 언론이 앞장서서 교회에 부정적인 통계를 내고 정보를 왜곡했는지, 교회발 확진자의 수가 얼마나 부풀려졌는지, 그것도 차차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요 언론사의 책임 있는 자리에는 기독교인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부 및 언론에 맡기신 책임을 영역주권의 원리에 맞게 존중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15) 그렇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예배를 둘러싸고 정부 및 언론과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코로나19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차분하게 논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 대립 구도가 하나님의 뜻을 엉뚱한 상황과 연결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미래교회포럼은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를 보편적 고통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애써 왔는데 이런 작업이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과 기도가 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그런 심도 있는 논의를 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 코로나19와 보편적 고통

1) 재난과 고통

대한민국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르면 재난은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각종 자연재해나 갖가지 사고를 가리킨다. 감염병은 그런 재난의 하나로 언급되어 있으니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 19는 당연히 국가적, 세계적 재난이다. 그럼 그런 재난 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이기도 한가?

고통은 아픔이다. 아픔이 무엇인지는 지난 2월의 발제에서 설명했다. 사전적 정의는 비슷한 용어만 반복하므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 또는 아픔은 그냥 직관적인 느낌이다. 모두가 싫어하는 어떤 감각이다. 보편적 고통은 그럼 무엇인가? 2월 발제 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하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고통으로서 인간의 실존 자체에 내재한 고통이다. 삶 자체가 끝없는 고통으로 가득하고 그런 삶의 일부인 질병이나 사고 또 그런 삶의 마감인 죽음 또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 고통이다. 두 번째는 개별적인 고통이 확산하여 모두가 겪는 고통이 된 경우다. 하나의 바이러스로 시작해 전 세계를 장악해 버린 코로나19가 그런 점에서 보편적 고통이다. 개연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

재난이라고 다 보편적 고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자연재해는 피해 대상을 기준으로 보면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 국지적인 재난 곧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홍수, 산불, 가뭄 등은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런 재난은 한 국가 내에서도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규모가 클 경우 뉴스로 보도되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정보를 공유하지만 정보를 갖는다고 해서 아픔도 함께 나누는 것은 아니다. 전염병도 국지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2002년 중국에서 시작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2012년 중동에서 퍼졌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16)의 경우 꽤 많은 나라로 퍼졌고 아직 백신도 못 만든 상태지만 범유행으로 커지지는 않았다. 코로나19도 보편적 고통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세계 모든 나라로 번져 모든 인류에게 크고 작은 아픔을 줌으로써 보편적 고통이 되었다.

과학과 기술이 첨단으로 발전한 오늘은 이전에는 생각지 못하던 보편적 고통도 예상할 수 있다. 전 세계 전산망 마비라는 사태가 만약 발생한다면 세계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저런 불편과 손해를 겪을 것이므로 보편적 고통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 역시 자연적 재난은 아니지만 인간의 불완전함이 만들어 낸 보편적 고통이 될 수 있다. 유통망의 불균형 또는 단절도 세계적인 경제 혼란을 가져오고 그것이 보편적 고난을 낳을 수도 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역시 전염병이다. 코로나19에서 보듯 온 세계가 지구촌으로 엮어진 지금 전염병은 언제든 세계적인 재난이 되어 보편적 고통이 될 수 있다. 그 어떤 자연재해보다 더 위험한 보편적 고통이다.

 

2) 코로나19와 보편적 고통

코로나19의 직접적인 영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당연히 코로나에 걸려 크게 앓거나 죽는 경우다. 대부분의 확진자가 증세를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증세를 제법 느낀 사람도 많고 그 가운데 일부는 입원까지 했다. 상태가 안 좋아 중환자실 신세를 지는 환자도 적지 않았고 산소호흡기까지 착용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생존확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코로나와 몇 주, 몇 달을 싸운 사람, 코로나에 걸려 죽은 사람과 유가족이 코로나의 일차 희생자들이다. 이들은 코로나19가 주는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다. 또 병에 걸리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이 병에 걸릴까 두려워했고 두려움까지는 아니어도 긴장감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었다. 백신이 등장한 이후 검은 구름이 다소 옅어졌지만 온전한 빛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또 백신의 부작용으로 아프거나 장애가 생기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런 고통 역시 병 자체로 인한 고통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다.

코로나19가 직접 주는 고통 외에 코로나를 막기 위한 정부의 사회정책, 의료정책이 또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코로나 방역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사회적 거리두기였기 때문에 코로나19는 수많은 사람을 고립시켰고 그 결과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강도의 고립감, 외로움을 안겨주었다. 우선 병이 확진되어 격리되어야 했던 사람들은 병 자체가 주는 아픔에 더하여 악화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홀로 있어야 하는 고립감과 싸워야 했다. 확진자를 가까이 접촉했다는 이유로 두 주간의 격리조치를 받은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자신들은 확진자가 아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또 홀로 머무르며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코로나19에 밀려 치료나 수술을 받지 못한 다른 일반 환자들도 많았다. 살 수 있었던 환자가 코로나19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은 경우도 적지 않다.17)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는 수많은 사람의 행동을 제한했다. 이전에 하던 많은 사회활동을 포기해야 했다. 음식점이나 유흥 시설에 갈 수가 없었고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모이기도 어려웠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만나고 대화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런 활동의 제한은 사회생활, 경제활동, 가정생활 등 많은 영역에서 큰 제한을 가했다. 그런데 몸의 불편보다 더한 것은 마음의 고통 곧 외로움이었다. 장애인이나 다른 병을 앓던 환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격리 때문에 남보다 더한 고립감을 느껴야 했다. 사회 전체가 고립을 주된 흐름으로 수용하면서 이전부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던 사람들은 더 깊은 고립의 자리로 밀려 들어가 더 큰 고독을 느껴야만 했다. 또 이번 코로나19에서 특히 소외된 계층이 노년층이다.18) 사회적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노인층이 코로나19로 인해 오랜 기간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고 도움을 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 따라서 심리적 육체적 고통이 남보다 컸을 것이다. 노년층은 또 첨단 기기를 활용하는 능력이 다른 연령층보다 적기 때문에 정보를 제때 얻지 못하는 답답함도 있었다. 약간의 불편도 엄밀하게 말하면 고통이다. 따라서 이 정도의 불편과 괴로움만으로도 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이 되고도 남는다.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고통의 한 큰 영역이 경제다. 사회활동의 제한은 곧장 경제 위축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경제 당사자인 자영업자, 경영자, 직장인 모두에게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줄어든 수입은 경제 및 생활에 고통으로 다가왔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들은 정부에 방역 완화를 촉구하는 시위도 몇 차례 가졌다. 코로나19가 미친 경제적 여파 가운데 심각한 한 영역은 격차다. 코로나19로 어떤 계층은 소득이 더 늘었지만 자영업자나 비정규직의 경우 소득이 심각하게 줄고 아예 실직하거나 폐업한 사람도 많다. 국가 경제는 분명히 많이 좋아졌지만 피부로 느끼는 사람은 소수다. 경제적인 상실감 특히 상대적인 박탈감은 코로나19가 가져온 고통의 하나다. 다수의 사람이 느낀 고통이니 보편성도 말할 수 있다. 성경을 믿는 우리에게는 고아와 과부 같은 소수의 약자가 느끼는 고통도 보편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런 고통의 원인인 죄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고통 특히 격차의 문제는 빈부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던 상황 가운데 코로나19가 던져준 큰 숙제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책임도 무거워졌지만 교회가 맡아야 할 부분도 커진 셈이다.

코로나19가 주는 고통을 직접 느낀 또 다른 사람은 정부 관리들과 의료계 종사자들이었다. 사회 전체를 살리는 정책이 각 개인에게는 불편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므로 정부 책임자들은 국가를 위해 일하면서도 수많은 개인으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의료계 사람들은 밀려드는 환자 때문에도 힘들었지만 높은 감염률이 요구하는 각종 장비와 절차 때문에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거기다 정치, 종교적 음모론 때문에 예방과 치료를 거부하는 이들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19)

모두가 크게 작게 코로나19의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의 대부분은 고통이었다. 다만 고통의 종류와 정도에 있어서 큰 편차가 있으므로 그 점에서 공감이 있어야 보편성도 인정할 수 있다.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이 앓는 감기는 보편적 고통인가? 범위가 넓어도 강도가 약하다면 보편성도 없다. 하지만 코로나19는 감기가 아니다. 병 자체가 주는 고통도 심리적으로는 인류 대부분에게 미치고, 병을 막기 위한 노력에 동반되는 고통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이 더욱 아프게 느끼고 있다. 따라서 코로나19는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보편적 고통이 분명하다. 간단히 줄이면, 코로나19는 모두에게 고통이 되었다. 개인과 사회에 따라 겪는 고통의 종류나 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그런 차이를 넘어 코로나19가 주는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3) 현재 상황

코로나19가 시작될 무렵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컸다. 곧 진정되리라는 낙관론도 있었지만 대개는 1~2년 정도 갈 것이라 예상했고 앞으로 인류는 영원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 할 것이라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 1년 전, 그러니까 미래교회포럼이 코로나19를 보편적 고통으로 규정하고 논의를 시작할 무렵에도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1년이 지난 지금쯤은 코로나19가 사라지지는 않아도 적어도 어느 정도 전망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백신이 개발되고 접종률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도 코로나19는 수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백신이 나온 이후 이제는 병에 걸려도 중증을 앓지 않고 죽을 가능성도 많이 낮아졌다. 그래서 코로나와 더불어 사는 위드코로나 정책을 세계 여러 나라가 이미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코로나19가 영원히 퇴치되지 않을 거라는 전제를 안고 있다. 현재 치료약도 부지런히 연구 중이므로 치료약이 나오는 순간 코로나는 말 그대로 감기 정도로 더불어 사는 그런 병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

코로나19가 처음 범유행으로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이 긴장 가운데 종말을 떠올렸다.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불신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에게는 대사건을 맞이할 때마다 종말을 떠올리는 일종의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한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지자 코로나19와 종말을 연결하는 흐름이 많이 약해졌다. 그런 가운데 위드코로나를 시도하는 지금도 코로나19를 종말론에 연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를테면 코로나19를 앞으로 생겨날 거대한 고통에 대한 전조harbinger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세상의 종말을 단일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그때가 언제며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주께 여쭈자 주께서는 이 둘이 다른 사건이라고 설명해 주시면서도 그 둘을 별도의 사건으로 분리하기보다는 가까운 미래에 있을 성전의 파괴가 먼 미래에 있을 종말을 전조하는 것으로20) 설명해 주셨다. 같은 관점을 현재 진행중인 코로나19에 적용한다면 수많은 재난의 첫 케이스로 보아 종말론에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견된 지 이제 60년인데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20년 전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10년 전에 발병했다. 10년마다 하나씩 나오는 셈인데 이번의 코로나19는 전세계를 휩쓸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앞으로는 치명률도 높고 전파속도도 빠른 더 위험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시기가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현재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볼 때21) 이런 류의 질병은 언제든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예측이다. 그렇다면 긴장이 많이 줄어든 지금도 코로나19를 초기의 그 긴장감으로 종말에 연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그런 방식의 추론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사건이 꼭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야만 성경의 종말론과 연결되는가? 재미있는 것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두려움에 몰아넣을 그 무렵에도 정작 교회에서 공식적인 종말론 논의는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신자들이 종말을 많이 생각한 것과 대조적인데 성경적 종말론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당연한 반응이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조용함이 성경적 성찰의 결과가 아닌 무감각의 결과였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성경적 종말론 특히 주님이 가르치신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모양이 상당히 다르다. 성경적 종말론을 바로 안다면 위드코로나 시대에도 코로나19를 얼마든지 종말론과 연결할 수 있다. 더 큰 사건의 전조가 아니라도 괜찮다. 규모 또는 강도와 무관하게 재난이란 측면에서 종말과 연결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만 한다. 사실 주님의 재림을 생각나게 할 사건이 꼭 보편적 고통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적어도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론에 따르면 그렇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코로나19의 완전 퇴치는 불가능하며 앞으로 코로나와 더불어 살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인류 역사가 이제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현재 상황을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코로나가 지속된다면 우리의 고통과 불편함도 길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죄 있는 세상에서 고통이 갖는 긍정적 의미를 생각할 때22) 코로나19와 더불어 살아가는 위드코로나의 삶 역시 의미가 없지 않다. 종말론에 비추어 코로나19의 의미를 파악할 때 더욱 그렇다.

 

 

. 종말론

이제 우리가 보편적 고통으로 규정한 이 코로나19를 종말론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살펴보자. 코로나19를 성경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적 종말론의 개요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기독교 바깥의 보편적 종말론

앞에서 종말론 앞에 성경적이라는 말을 붙였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 특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종말을 먼저 생각하고 코로나19의 의미도 그 종말론에 근거해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말론 자체는 기독교 바깥에도 흔하며 우리도 그런 종말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코로나19의 보편적 고통이 갖는 의미를 성경적 종말론에 올바로 비추어 보기 위해서는 성경 아닌 종말론에 대해서도 개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기독교 종말론의 큰 틀인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의 구분을 타종교의 종말론에도 적용할 수 있으므로 타종교의 종말론 가운데 보편적 종말론 부분만 일단 간단하게 보자.

힌두교는 종말을 바라보기보다 우주 역사의 무한 반복을 예상한다. 개인이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주의 역사 역시 무한 순환을 반복한다. 구원은 없다. 종말도 없다. 그런데 주류 종파 가운데 비슈누파Vaishnavism는 구원자 칼키kalki를 기다린다. 칼키는 수십억 년 뒤에 나타나 세상의 악과 혼돈을 제거하고 새 시대를 시작할 것이라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빈약하다. 현세의 어려움을 끝내고 새 시대를 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정도다.

불교의 종말론은 대개 힌두교의 종말론을 계승한 것인데 중간에 등장한 이슬람 세력 때문에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칼키가 나타나면 불교가 번성하고, 사람들은 길고도 행복한 삶을 살 것이며, 의가 최고로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23) 중국에 들어와서는 조금 달라진다. 이홍李洪, Li Hong이 나타나 택한 백성을 구원한다는 도교 종말론과 결합이 되어 묵시론적 성격을 갖게 되었고 서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의 영향을 받아24) 미륵 신앙을 갖게 되었다. 부처는 자신이 죽은 4천세 곧 인간 시대로 567천만 년이 되면 탐욕, 정욕, 가난, 악의, 폭력, 살인, 허약, 성의 타락, 사회적 붕괴 등의 악이 창궐할 것이라 하였고 그 직후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이 나타나 황금시대를 이룩할 것이라 하였다. 미륵불이 나타나면 인간 세계의 고통과 슬픔을 모두 제거할 것인데 제거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 여기서도 힌두교처럼 그저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넘지 못한다.25) 고통의 원인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니 당연한 결론이다. 정토 불교가 개인 구원에 치중하는 반면 미륵 불교는 보편 종말론에 비중을 두는데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 미륵신앙이 불교 신앙 가운데 가장 강력한 민간 전통이 되었다. 따라서 난리와 종말을 연결시키는 경향이 한국인의 심성에는 유달리 강하다.

유교는 일반 종교가 가진 형이상학적 체계가 없어 종말론도 없다. 유교 사회의 종말론은 대개 불교나 도교 둥 다른 종교의 것이다. 혹 말세관을 언급할 경우에도 순환론적 시간관을 그대로 품고 있어 새로운 시작 정도로 그친다.

이슬람은 개인 종말론은 많이 다루지만 보편 종말론은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나마 부활, 대환란, 최후의 심판 등 기독교 종말론을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다. 마지막 때에 거짓, 고난, 억압 등이 있을 것이라 한다. 성적 타락, 경제적 속임수, 무자비 등도 말세의 특징이다. 의인은 천국에 악인은 지옥에 간다. 시기에 대해서는 성경을 베낀 듯 무함마드도 모른다 했다. 예수의 재림이 종말의 한 신호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마흐디mahdi라는 구원자가 따로 있다. 그런데 마흐디의 구원은 온 세계를 이슬람이 장악하는 것을 가리켜 인도 내의 불교 종말론과 닮았다.

유대교 종말론은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다니엘 예언은 신약과 연결되어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 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24:15). 유대교는 유대인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부활을 믿기도 하지만 내세를 믿지 않고 보편적 종말도 없다 하는 분파도 있다. 로쉬 하샤나가 해마다 있으므로 심판도 그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을 믿되 이방인만 심판을 받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실로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여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 유대교 종말론이다.

우리 시대에 주목할 집단이 신천지다. 수많은 이단이 그렇지만 이들도 자극적인 종말론을 이용해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이들의 종말론은 성경과 전통 사상을 섞은 것으로 영지주의 특성까지 갖는다.26) 한 신문은 신천지 급성장의 비결의 하나로 기독교 종말론과 전통 종말론의 융합을 든다.27) 동학, 원불교, 증산도 등 전통 종교가 후천개벽을 내세워 교세를 넓힌 것과 맥을 같이한다. 신천지의 종말론은 앞뒤가 맞지 않고 성경과도 맞지 않아 깊이 연구할 가치는 없으나 신천지 확장의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종말론 자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2) 타종교 종말론의 특징

종말에 대한 기대는 어느 종교, 어느 문화에나 있다. 현실의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사람의 상상력은 자기가 바라는 완벽한 상태를 늘 꿈꾸기 때문이다. “말세다 말세!” 사람들은 도덕적 부패가 극심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신적 능력을 전제하고 그런 신의 뜻에 비추어 볼 때 세상이 이제 망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있던 문제가 극한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런 한탄은 종말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이 왔으면 하는 기대감과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세속 종말론은 그 자체로 변증법적 성격을 띤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이런 생각이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있음을 고려한다면 종말론은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지구적 난리가 날 때마다 사람들은 종말을 생각한다.

이 땅의 소위 종교는 전부 악과 고통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개인의 책임도 무겁게 다룬다. 하나님이 사람 마음에 양심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가 죄와 악을 언급하고 내세의 심판을 다룬다. 이 땅의 삶에 근거한 상과 벌 또는 천국과 지옥을 대부분의 종교가 약속한다. 그런데 그런 언급은 개인적 종말론 차원에 국한된다. 보편적 종말론에 가면 죄 문제가 사라진다. 선과 악의 구분도 없고 심판도 없다. 그저 고통과 슬픔의 제거 하나에 초점을 둔다. 그렇기에 타종교의 구원은 거의 보편적 구원의 성격을 갖는다. 개인 종말론에서 말하던 심판이 보편 종말론에서는 모두 사라져 악은 제거하지만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 사이에 일관성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 종말론에서 선악을 논할 때 그 절대 기준과 악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따라서 올바른 해결책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 일반의 종말론은 한 마디로 무책임하다.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을 우주의 변화라는 큰 틀 아래 다 덮어버린다. “다 잘 될 거야.” 연속극에 자주 등장하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아니, 종교 일반 곧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의 보편적인 기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종교가 그리는 종말론은 전부 막연한 내용을 담은 추상적인 주장이다. 567천만 년이라는 기간을 말하고 구원자가 나타나 무슨 일을 한다는 등 어떤 절차가 있는 듯 말하지만 그런 숫자나 절차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현재의 문제가 사라진 이상향을 꿈꿀 따름이다. 그저 좋은 곳, 무엇보다 지금의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는 곳 정도를 넘지 못한다. 또 종말과 관련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저 기다릴 뿐. 그런 종말을 바라보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가져야 할 태도 자체도 없다. 따라서 종말에 대한 인식이 현재의 내 삶에 갖는 의미는 전혀 없다. 워낙 먼 미래의 일이라 위로도 되기 어렵다. 종말에 대한 그런 인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의 삶을 포기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망할 세상이기 때문에 종말을 앞둔 내 모든 행동이 뜻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리와 재난을 불신자의 종말론 범주 내에서 고찰해 삶에 유익한 결과를 얻기는 어렵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그럼 어떤가? 뒤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일단 기독교 종말론도 세상의 고통, 슬픔, 불의 등과 이어져 있다. 종말은 그 모든 문제를 없이할 때로 주어진다. 그렇지만 성경적 종말론은 불신 종말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문제의 근원을 알고 그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물론 자연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계시로 알려 주셨다. 또 성경의 종말론은 일관성이 있다.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이 통일된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고 창조에서 완성까지 전체가 치밀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주적 종말론은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진 그 거대한 역사의 장엄한 마무리다. 따라서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동반한다. 그리고 성경적 종말론은 현재 나의 삶에 깊은 뜻을 갖는다. 성경은 종말을 대비하는 올바른 태도도 가르치기 때문이다.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끝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 종말론적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종말론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분은 종말을 일깨우는 보편적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 기독교 종말론

이제 기독교 종말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종말론은 개혁 조직신학 7분과28) 가운데 하나다. 종말론은 미래의 일을 다룬다는 특성 때문에 조직신학의 다른 분과와 달리 명확한 부분과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섞여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조직신학의 바탕인 성경 가운데 미래에 대한 진술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종말론 관점에서 바라볼 때도 종말론 가운데 명확한 부분에 중심을 두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1) 두 가지 종말론

성경적 종말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개인적 종말론과 보편적 종말론이다. 이 점은 성경이 명확하게 구분한다. 개인적 종말론은 한 사람의 종말 곧 죽음과 그 이후의 문제를 다룬다. 보편적 종말론은 온 우주의 마지막에 대한 연구다. 둘 다 보편적 고통인 재난과 관련이 있다.

코로나19는 질병이기 때문에 우선 개인적 종말론과 연결된다.29) 병에 걸리고 그로 인해 죽는 이가 적지 않다. 그렇지만 전체 인구에 비할 때는 이 병을 앓거나 죽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성은 약하다. 모든 인류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죽을 가능성은 극도로 낮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가져오는 고통 가운데 생활의 불편 같은 것은 종말론과 연결하기 더 어렵다. 병에 걸려 죽음을 생각하게 되거나 정말로 죽는 경우에만 종말론과 연결할 수 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병에 걸릴 가능성과 그로 인해 사망할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는 보편성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운전을 할 때 사고와 사망의 가능성을 생각해 안전띠도 매고 보험도 들지만30) 그런 가능성 하나로 운전을 보편적 고통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코로나19는 막상 걸린다 해도 당장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무서운 병은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 종말론 차원에서는 코로나19를 보편적 고통의 범주에 넣기 어렵다.31) 따라서 코로나19를 보편적 고통으로 규정하고 성경적 종말론으로 그 뜻을 살핀다면 그 종말론은 개인적 종말론이 아닌 보편적, 우주적 종말론이어야 한다.

그럼 코로나19는 개인적 종말론과 완전 무관한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코로나19로 죽는 사람은 소수지만 죽음 자체는 인간 본성에 속한 보편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보편적이지만 적용은 개별적인 그런 고통이다. 따라서 누가 코로나에 걸려 고통을 겪거나 죽을 때 교회는 코로나가 계기가 되어 경험하는 그 죽음의 보편성을 인식하고 그것의 근원인 죄와 그 죄를 없이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이 점에서 아픈 성도와 아프지 않은 성도를 함께 보듬고 그들의 영혼을 소망 가운데 굳세게 세워주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코로나19의 보편적 고통이 개인적 종말론과 연결되는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이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궁극적으로 다시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점 성경적 종말론의 중요한 한 특징이다. 코로나19가 보편적 고통으로 갖는 의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그에 따르는 부활과 심판을 일깨우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부활과 심판은 개인적 종말과 깊이 이어져 있다. 개인적 종말 때 약속된 것들이 성취되는 때가 바로 보편적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저 고통 가운데 죽음을 생각하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그런 고통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해 갖는 의미를 생각할 경우 그런 사건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되고 그 뜻이 요구하는 순종32)은 결국 다시 개인적 종말론의 문제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점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2) 보편적 (우주적) 종말론

보편적 종말론은 성경 여러 곳이 설명하고 있다. 주로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이다. 여기서는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제외하고33)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명확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성경의 종말론은 창조주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우주 역사의 마지막을 가리킨다. 가장 뚜렷한 두 사건은 우리의 기본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 및 심판이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시기 전 마지막 때에 다시 오겠다 약속하셨다. 재림의 날은 곧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이날은 우주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날이다. 그러나 모든 걸 그냥 덮기만 하는 날이 아니라 명확하게 해결하는 날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부활한 다음 영원한 영광 아니면 영원한 저주로 가게 된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날이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날이 된다 (7:17; 21:4). 그날이 되면 지금의 천지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다시 오실 정확한 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24:36; 13:32). 심지어 주님 당신도 모른다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아예 관심조차 갖지 말라 멍하셨다 (24:36; 13:32; 1:8). 이 점 명백하다. 그렇지만 주님의 재림 전에 재림을 예시하는 수많은 징조가 있을 것이라 가르쳐 주셨다. 그런 말씀을 담은 성경이 마태 24, 마가 13, 누가 21장이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멸망이 곧 우주의 종말이라 본 제자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는 말씀으로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우주 종말의 징조가 뒤섞여 있어 혼란스러운 면도 있다. 그렇지만 우주적 종말의 징조로 주님이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들만 갈무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도 있고 또 사도들이 주님께 배워 후에 보강한 내용도 있다.

복음의 세계 전파 (24:14; 13:10),

대환란 (24:9, 19, 21; 13:9, 19; 21:12, 23, 25-26),

거짓 선지자의 난무 (24:5, 23-26; 13:2, 21-22; 17:23; 21:8),

하늘의 여러 징조 (24:29-30; 13:24-25; 21:25-26),

배교 사건과 불법의 사람 등장 (13:14; 살후 2:3; 요일 2:18),

유대인 구원 (11:26).

국가간의 전쟁과 지진, 기근 (24:6-7; 13:8; 21:10-11)34)

누가복음에서는 마지막 재난에 전염병들 (loimoiv)”을 추가하셨다 (21:11). 언급한 이 사건들이 주 재림의 징조라는 점은 명확하지만 이 사건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있다. 주님이 언급하신 사건들 가운데 국지적으로 끝날 것들도 없지 않다. 그런데 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이 되었으므로 주 재림과 더욱 강력하게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은 이런 사건들이 주님 재림 전에 있을 것이라 하셨는데 그 사건 직후에 다시 오실 것인지 아니면 그런 사건이 발생하는 과정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를 것인지는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재림의 여러 징조를 말씀하실 때도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하셨다 (21:9). 사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룰 것이라 하신 말씀과 (24:34; 13:30; 21:32) 죽기 전에 주님이 왕권을 갖고 오시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는 말씀 (18:28) 역시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가리키는 것인 줄 알았다가 이후에 뜻을 새롭게 풀어낸 경우다.

 

3) 성경적 종말론의 특징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적 종말론은 그럼 다른 종교가 가르치는 종말론이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종말과 어떻게 다른가? 종말을 주도할 신의 도래를 말하는 점은 언뜻 보면 다른 종교와 닮아 보인다. 그렇지만 성경은 제삼의 신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인간의 구원을 직접 이루신 그리스도가 친히 오셔서 모든 일을 진행하신다는 점이 다르다. 다시 말해 우주의 종말은 전체 우주의 창조 및 운행과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주권자가 직접 오셔서 행하시는 사건으로서 전체 우주의 역사와 일관성을 갖는 그런 사건이라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원, 종말이 함께 잘 짜인 역사를 이룬다.

또 다른 특징은 우주적 종말론이 개인적 종말론과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몸의 부활과 심판은 개인적 종말론의 완결이다. 타종교의 우주적 종말은 개인적 종말과 무관하다. 그저 모든 아픔과 슬픔이 제거되는 세상을 꿈꾸지만 그 방법은 모르고 그저 좋은 세상이 오기를 막연히 바랄 뿐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종말론은 개인적 종말론을 무시하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결하는 단계다. 완벽한 일관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각 개인이 영워한 삶이 온 우주의 종말이 와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하면서 대충 살다가 마지막에는 다 잘 되리라 기대하는 막연한 낙관주의는 성경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죄를 무서워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전도의 책임도 강조된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9번은 이 점을 명확하게 가르쳐 준다.35)

29. 다가올 세상에서 죄의 형벌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 다가올 세상에서 죄의 형벌은 하나님의 평안한 임재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영혼과 몸이 지옥 불에서 극도의 고통을 영원히 쉼 없이 겪는 것입니다.”

타종교나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종말론에서는 주님이 언급하신 것 같은 그런 사건과 난리가 곧장 현세의 파괴, 난리, 멸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그런 사건이나 난리가 주 재림의 징조일 뿐 그것이 바로 현세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주 재림의 징조로 언급하신 사건들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이 약속대로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근거가 되어야 옳다. 대환란이든, 지진이든, 전염병이든, 이대로 끝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사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우리의 기대를 일깨우고 굳세게 하는36) 징조들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일상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재림의 징조가 계속 나타나지만 그런 동안에도 우리의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종말론과 결합된 종말론적 삶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강조하신 것이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수십 억 년의 기간을 내세운 다른 종교와 비교되는 말씀이다. 주님은 알 수 없음을 강조하시려고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주님 당신도 모른다 하셨다 (24:36; 13:32). 사도들도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살전 5:2; 벧후 3:10; 16:15) 밤에 도둑이 예고 없이 드는 것처럼 주님도 그렇게 오실 것이라 하신다 (24:43; 12:39; 살전 5:2; 벧후 3:10; 16:15)

시기를 모른다는 말씀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24:42, 43; 25:13; 13:34, 35, 37; 12:37). 깨어 있다는 것은 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24:36-42; 13:32-37; 21:34-36)37) 재림과 결합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삶이다 (21:36). 시기에 대해 관심 갖지 말라 하신 이유가 바로 정작 관심을 쏟아야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 일이 바로 깨어 준비하는 일이다. 성경의 종말은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다. 사건이 하나 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징조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계속된다 (24:37-39; 17:26-30). 물론 그런 일상의 계속이 주 재림의 약속을 잊게 만들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살전 5:3). 여자가 아이를 가진 것처럼 명확하다. 반드시 오신다. 그렇기에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

 

4) 대비하는 삶

성경적 종말론은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사건이 날 때마다 그것이 주 재림의 확실함을 일깨운다는 것을 알고 언제일지 모르는 주 재림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사건들 가운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듯 보이는 사건들도 물론 많다. 거짓 선지자는 지난 2천년 동안 수도 없이 나타났다. 지진이나 기근 같은 자연재해도 수시로 발생한다. 그렇지만 대환란은 아직 오지 않은 사건 아닌가? 복음이 과연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었는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났는가? 유대인은 여전히 다수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별들의 세계에서 난리가 났다는 것은 허블 망원경도 아직 관측하지 못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지금부터 미리 깨어 준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 명백히 있다면 때와 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주님 말씀이 힘을 많이 잃을 것이다. 적어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날 때까지는 좀 무관심해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흥미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38)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사건도 사실은 이미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은 뜻이 백 퍼센트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건의 의미를 잘 해석하면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39) 물론 그런 해석을 근거로 그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다고 단정은 하지 않는다. 대신 일어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정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그리스도께서 당장 재림하시는 일 역시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성경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일단 성경은 종말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재림까지의 기간을 마지막 때라고 부른다 (2:17; 고전 10:11; 1:2; 5:3; 벧전 1:5, 20). 그렇기에 사도들도 그리스도 승천 이후의 시기를 곧바로 종말의 때로 이해하고 있다 (벧전 4:8; 벧후 3:3; 요일 2:18; 1:18). 물론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말세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딤후 3:1; 벧후 3:7) 그 시기 역시 이천 년이라는 긴 시기뿐 아니라 임박한 미래까지 포함하는 긴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간과 구분되는 마지막 때가 분명히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그때를 많이 강조하신다.40) 그렇지만 종말에 관한 다양한 해석 가운데 심지어 계시록의 예언이 이미 다 성취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으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사건들 역시 이미 일어났다고 볼 성경적 근거가 있다. 따라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경고는 지금 우리에게도 바로 해당된다.

종말을 산다는 것은 대비한다는 것이다. 그럼 대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누가 21장에서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하셨다 (21:36). 기도하지 않으면 깨어있을 수 없다 (26:41; 14:38). 기도는 또 실천이다. 주님께서는 마태 24장 강화를 깨어 준비하라는 경고로 일단락 지으신 다음 뒤이은 25장에서는 깨어 준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비유 세 개로 설명하신다. 첫 비유인 열 처녀 비유는 기름을 등불과 함께 준비하는 것을 깨어 준비하는 방법으로 말씀한다. 기름이 성령을 가리킨다는 풍유적 해석도 있지만 핵심은 모든 경우에 대비하는 지혜다. 신랑이 늦게 올 수도 있으므로 기름을 등불과 함께 준비하는 태도를 통해 치밀하게 대비하는 지혜를 가르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어지는 달란트 비유는 깨어 준비하는 구체적인 보기를 보여준다 (25:14-30). 이 비유에서는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을 따로 덧붙이지 않으셨지만 마가 13:33-35에서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하신 다음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라고 달란트 비유를 요약한 것 같은 보기를 드신다. 그런 직후 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반복하신다. 또 누가 12:35-48은 열 처녀 비유와 통하는 말씀을 하신 다음 깨어 있는 방식으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 하는 말씀을 구체적인 보기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인이 재능에 따라 맡겨준 달란트로 장사를 해 이익을 남기는 일은 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깨어 있을 것인지 그 방식을 가르쳐 주신 것이 분명하다.

그럼 달란트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실천의 내용은 이어지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 가르쳐 주신다 (25:31-46).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실 것인지 명시하시는 말씀이다. 주님은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자비의 행동이 바로 주님께 한 것이라 하시면서 그런 사랑을 베푼 자들에게41) 영원한 복을 약속하신다. 물론 이 비유를 두고 깨어 있는 방법이라고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 비유를 명확하게 종말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25:31). 또 사도 베드로도 종말을 대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 기도와 더불어 사랑을 강조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42)

마지막 때가 되었으므로 근신하여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와 함께 힘써야 할 일은 사랑이다. 아니, 깨어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하기 위함이다.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하셨다 (24:12). 종말을 대비하는 삶은 그리스도인다움을 보이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사랑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성경적 종말론은 다른 종교의 종말론처럼 먼 미래의 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일상에 포함되어 있는 본질적 요소의 하나인 셈이다.

성경적 종말론의 중요한 한 특징은 일상성 내지 평범성이다. 주님은 노아 및 롯의 경우를 언급하시면서 당신의 재림도 그와 같을 것이라 하셨다 (24:36-39; 17:26-30). 노아 시대와 롯 시대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일상을 살되 종말을 바라보는 가운데 산다. 그렇게 준비되어 있기에 도둑이 밤에 와도 당하지 않는다 (살전 5:4). 둘이 한 자리에 있지만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림을 받는다 (24:40-41; 17:34-35).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언제나 종말이 함께 있다. 어느 신학자의 비유처럼 일상과 종말은 마치 철로의 두 레일처럼 나란히 달리다가 그리스도 재림 날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보편적 종말이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사랑과 선을 실천함으로써 대비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시금 개인적 종말론과 결합된다. 기독교 종말론은 언제나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고려신학대학원 권수경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권수경 교수

. 성경적 종말론과 코로나19

성경의 종말론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주 예수의 재림과 우리 몸의 부활 및 심판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치며, 둘째, 종말에 구체적인 순서와 과정이 있다는 것이고, 셋째 종말을 대비하는 올바른 태도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타종교는 난리가 나면 삶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어차피 망할 세상이니 당연하다. 그렇지만 성경은 주 재림의 징조가 뚜렷하면 할수록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43) 종말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요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이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세 가지 특징이 교회사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피면서 오늘 우리의 태도와 연결해 보자.

 

1) 재림의 신호

코로나19는 재난이다. 보편적 고통이다. 거기다가 주님이 재림의 징조로 명확하게 언급하신 전염병이다 (21;11). 주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얽힌 고통의 하나다. 따라서 종말론으로 바라볼 때 코로나19가 갖는 첫째 의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확인이요 재림이 멀지 않았음을 일깨우는 경고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하셨다 (24:34-35; 13:30-31; 21:32-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24:33).

코로나19는 우리 주님의 재림의 약속이 확실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분주하게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재림의 소망을 잠시 잊었던 우리에게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일깨우신다. 코로나192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 이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 같기도 하다. 얼른 정신을 차리라는 경고다.

주 재림의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그 날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고 주께서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날이기 때문이다 (7:17; 21: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 52번은 이렇게 묻고 답한다.

52.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오신다는 것은 그대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 모든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 나는 하늘에서 오실 재판장을 학수고대하게 됩니다.44) 그분은 나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에 이미 내어 주셔서 나의 모든 저주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또 당신의 원수요 따라서 나의 원수이기도 한 모든 원수를 영원한 저주에 던지실 것이고 나를 선택된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코로나19라는 재난 역시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보편적 고통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생각하며 위로를 얻는 계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성도는 코로나19가 주는 온갖 불편함뿐 아니라 만의 하나 그것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따르는 영원한 복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주 재림의 사실이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살전 4:18). 교회는 그런 위로를 서로 나눔으로 소망을 새롭게 하는 공동체다.

 

2) 올바른 대비에 대한 경고

그렇지만 시기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주께서 때와 기한을 모르게 하신 뜻을 바로 알고 순종해야 한다. 우선은 깨어 기도하라는 뜻이다. 이 점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9) 33장이 잘 짚어주고 있다. 이전의 청교도 고백과 달리 종말론 자체를 그리스도의 왕권을 넘어 단독 항목으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45) 심판의 날이 죄를 멀리할 이유인 동시에 역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에게 위로가 되어야 함을 먼저 언급한 다음, 때를 모르게 하신 섭리를 두 번에 걸쳐 언급하면서 땅의 안전보장을 버리고 늘 깨어 있으라는 뜻임을 명시했다.46) 깨어 있다는 것은 항상 주 예수의 오심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항상 깨어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91문 주기도문 해설이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다. “나라가 임하시오며간구의 의미를 보편적 종말론과 연결해 해설한다.47)

죄와 사탄의 왕국이 멸망하고, 복음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며, 유대인이 부름받고,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지도록, 교회에 복음 직분자들과 예식들이 공급되고, 부패에서 깨끗함을 받도록...... 우리는 기도한다.”48)

즉 주께서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주께서 속히 오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일이 교회가 정결하게 감당해야 할 일임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다시 오심 및 우리가 그와 함께 통치함의 때를 앞당기시도록......” 기도하라 하였다. 기도의 내용은 결국 주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이런 간구 가운데 복음의 전파가 언급된 점은 성경적 종말론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 종말은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는 시간이 아니다. 죄 문제를 자동으로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므로 종말이 임박할수록 전도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본능적 상식적 종말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가 진정되든 되지 않든 깨어 기도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코로나가 진정 기미를 보인다 해도 이번 코로나19의 교훈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코로나19를 통해 주신 교훈과 경고를 오래 간직할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3)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전통적 신앙고백이 주 예수의 재림과 종말에 관해 가르치는 내용은 종말의 확실성과 그로 인한 위로 및 깨어 기도할 필요성 등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렇게 깨어 기도하면서 내가 실천할 일이 바로 사랑이라는 점은 명시하지 않는다. 재림을 대비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장로교 (PCUSA)1967년 신앙고백은 이 점을 다소 보강하고 있다.49) 3화해의 성취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화해의 완성으로 규정한 다음 (9.11)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우리의 사명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9.5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구속은 인간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등. 죄 때문에 착취당하고 빼앗긴 자연환경도 포함한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 생명을 향한 당신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성취되고 모든 악이 당신의 피조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50)

“(9.55) 이 희망이 낳은 절실함으로 교회는 현금의 과제들을 떠맡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제한된 진보가 이 땅의 하나님 나라라고 단정하지 않지만 실망과 패배로 낙망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진득한 소망 가운데 부분적 성취를 넘어 하나님의 최종 승리를 바라본다.”51)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우는 내용이다. 물론 사회복음을 복음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이 고백서에 나온 내용을 교회가 직접 수행할 사명으로 볼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 재림을 대비하는 것이 재림을 고대하는 것, 깨어 기도하는 것을 넘어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물론 그런 영역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실천이요 선행이라고 명기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종말을 바라보는 성도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한다. 교회는 물론 자신의 부분적 성취를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하나님의 최종 완성을 바라보기에 그 성취를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종말론이 밝히는 코로나19의 의미는 어떻게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는가? 코로나19 자체가 가져온 고통에 대한 관심이 우선일 것이다. 코로나는 감염병이다. 아프게 하고 죽이기도 한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두려움에 빠지거나 불편함을 겪으며 산다. 사회적, 경제적 약자의 소외가 심화되고 그만큼 그들의 고통도 커진다. 종말론이 밝히는 코로나19의 의미는 교회가 또 그리스도인이 그런 고통을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고통이다. 보편적 고통이다. 그렇다면 고통이 세상에서 갖는 긍정적 의미를 코로나19도 가질 것이다. 고통은 인간을 생각으로 인도한다. 죄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찾게 한다. 주님이 언급하신 재림의 징조 가운데는 보편적이지 않은 고통도 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보편적 고통을 주는 재난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이런 보편적 고통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을 발견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은 코로나19를 통해 이 땅에 고통이 있음을, 다시 말해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함을 다시금 일깨우신다. 코로나19는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수많은 고통의 하나다. 개연적인 고통이 범위의 확장으로 보편적 고통이 되었지만 그런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이 땅에는 강도나 범위 양면에서 땅에는 코로나19를 능가하는 보편적 고통이 있음을 인식한다. 그 고통을 줄이는 일이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복음을 전하는 일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에 꼭 있어야 할 두 요소다.

 

 

. 코로나19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성경적 종말론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코로나19를 통해 기대하시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주 예수의 재림이 확실함을 확인하여 성도들이 위로를 얻는 일, 둘째, 코로나19 기간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 셋째, 코로나19 도중에 또 우리 일상의 삶 모든 영역에서 부지런히 전도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 등이다. 이제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성도의 삶에 구현할 수 있으며 교회가 그 목표의 구현을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예배 회복을 위한 노력

코로나19의 의미를 종말론적으로 살펴볼 때, 코로나19 다음 전략으로 위드코로나가 시작되는 지금 교회가 예배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예배는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으로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코로나19를 주신 뜻을 가르칠 좋은 기회다. 지난 2년 동안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교회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음으로써 성도들의 영적 복지를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가 몰아친 지난 2년 동안 예배에 많은 제한을 겪었다. 예배당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드리는 경우에도 방역 단계에 따라 모이는 수를 제한해야 했다. 성도 전원이 한 자리에 다 모여 드리던 그런 예배는 거의 드릴 수가 없었다. 교회를 통한 에너지 공급이 중단 또는 제한되어 성도 개개인의 영적 삶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교회는 또 교회대로 모이지 못한 결과로 활력을 잃었고 활동 위축과 재정 감소를 아프게 경험했다.

교회는 그런 혼란 가운데 코로나19의 참뜻을 종말론에 근거해 찾지 못했고 따라서 코로나19가 확인한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소망과 위로를 얻도록 돕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도들도 영적으로 많이 굶주렸다. 개인 차원의 말씀과 기도로 명맥은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모이기를 힘쓰라 하신 뜻은 구현할 수 없었다. 지금의 노력은 그런 작업을 다시금 하겠다는 의지이니 코로나19를 주신 뜻에 부합하는 순종일 것이다. 코로나19 대응 정책이 위드코로나로 바뀌면서 한국교회는 예배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니, 2년 가까이 하지 못했던 모임을 되살리는 일에 애쓰고 있다. 교회는 모임이다. 모여야 한다. 그렇게 모일 때 깨어 기도할 수 있고 또 깨어 기도하게 도울 수 있고 주 예수의 재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소망을 갖고 전도도 할 수 있으며 상 주실 주님을 바라보며 열심히 사랑도 실천할 수 있다.

 

2) 참 예배에 대한 논의

그렇지만 우리의 목표가 무조건 코로나19 직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난 2년간 경험한 아픔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는 큰 손실일 수 있다. 코로나19는 높은 전염률 때문에 모든 모임을 중단시켰다. 코로나19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으므로 코로나19를 주신 또는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은 일단 모이지 말라는 것이어야 한다.52) 한국교회는 이 점을 애써 무시하면서 온라인을 이용해 비대면으로 모이든지 아니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라도 최대한의 인원을 모으려고 애썼지만 코로나19 자체가 모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일 가능성을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배로 모이는 것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성도의 첫째 의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난 2년 동안의 노력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예배 회복 운동을 보면서 지울 수 없는 우려 하나는 예배 회복과 예배 활성화에 매진하면서도 예배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배가 무엇인지 먼저 성경에 비추어 논의한 다음 성경이 말하는 예배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마치 예배가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예배를 회복하자고 독려하고 있다. 거기서 말하는 예배는 주일 낮에 가장 많은 성도가 모여 드리는 그 시간을 가리키는가? 찬송, 기도, 설교, 헌금, 축도를 모은 그 행위가 예배인가? 그런 모습은 코로나19에서 확인한 깨어 기도하라 하신 말씀과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을 연결하지 못하는 잘못일 가능성은 없는가?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 모이지 못한 2년 동안의 상황이 혹 우리의 잘못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꾸지람일 가능성은 없는가?

왜 모이는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과연 무엇인가?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한 중요한 근거는 히브리서 10:24-25 말씀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모이라는 권면 자체보다 모여서 해야 할 일을 더 강조한다. 서로 돌아보는 일,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 권하는 일이 모이는 이유다. 사랑과 선행은 주님께서 제자의 삶으로 규졍하신 핵심 요소다. 주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는 그런 삶을 권하고 격려하고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다. 그런 실천을 위해 모인다. 성경은 그것을 예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3;16).

선을 행하고 구제를 베푸는 행위가 우리의 예배다. 물론 시와 찬미의 예배도 소중하다 (5:19; 3:16). 하지만 이 둘이 분리된다면 우리의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예배 회복을 외치는 지금도 사랑에 대한 강조는 잘 들리지 않아 혹 우리가 성경적 균형을 갖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교회는 지난 2년 동안 예배 때문에 내적 어려움도 겪었지만 외적 갈등도 함께 겪었다. 예배의 중요함을 강조하다가 코로나 확산의 계기를 제공하고 그래서 생명을 가벼이 여긴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예배를 쉬어야 한다는 외침과 예배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므로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충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으며 사랑의 대상인 이웃에게 혐오감과 실망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예배는 사랑과 뗄 수 없게 이어져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예배와 사랑 가운데 선택을 강요하는 그런 안타까운 것이었다. 예배는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도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웃의 건강과 목숨을 위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배의 실제 내용은 서로 사랑하는 삶이어야 한다. 선행과 구제는 예배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2년 내내 갈등을 겪어 온 이 부분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하였다 (9:13; 12:7). 정말 조심스럽긴 하지만 코로나19를 통해 모일 수 없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의 위선을 경고하셨던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13).53)

하나님이 과연 그런 뜻으로 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모이지 못하게 하셨는지는 더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예배의 회복에 애쓰는 지금 이 순간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한 가지를 그냥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 교회의 도덕적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 , 권력, 인격 문제 등 여러 영역을 아우르고 목사, 장로, 집사, 교인 등 다양한 직분을 망라한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이 거세다. 코로나19는 그런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다. 주 예수의 재림을 일깨우고, 우리에게 구원과 심판이 있음을 확인하는 사건이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기도하며 뜨겁게 사랑하라는 경고 말씀이다. 우리의 예배 회복이 이런 말씀을 외면한 가운데 시도된다면 그런 노력이 온전한 회복을 낳기 어렵고 코로나19라는 보편적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도 성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코로나19의 뜻을 종말론에 비추어 보는 것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익이 있다.

지금 교회의 형편을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바벨론 포로에 비기는 이들도 있다.54) 예배를 마음대로 드릴 수 없는 형편에 대한 묘사로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런 비유를 사용할 때는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원인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바벨론에 잡혀 가 포로가 된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면 우리가 지은 죄는 무엇인가? 포로가 된 현재를 한탄하기 전에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있는가?

 

3) 첨단 기술 활용의 문제

한 가지 부연하자면 코로나19는 직접 모이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교회에 안겨주었다. 소위 비대면 만남이 활성화된 것이다. 대형 스크린 활용, 유튜브 동영상 송출, 줌을 통한 소통, 스마트폰을 이용한 성경 읽기 및 나누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코로나19를 통해 나타난 주의 뜻을 구현함에 있어서 이런 첨단 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주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일과 깨어 기도하는 일과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일에 이런 첨단 기술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 종말론의 한 특징이다. 물론 열심히 사랑하는 삶을 가리킨다. 따라서 코로나19 같은 재난을 맞을 때도 우리는 주어진 상황 가운데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하며 재림이 방금 있을 것처럼 소극적인 태도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재난의 소식이 들려 와 우리 가슴이 설렐 때도 멀고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다음 세대를 향한 관심은 더욱 커져야 한다. 그렇게 볼 때 발전하는 기술을 예배와 삶에 활용하는 일은 코로나19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 잘 통한다. 코로나19가 닥치기 30년 전에 온라인 기술을 주신 뜻을 적극적으로 확인해 보는 작업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 점에서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현장 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대면 예배 즉 온라인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니라는 선언도 공공연히 한다.55) 가정에서 나름 경건하게 참여하고 그래서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은 당황스럽다. 게다가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나이 든 목회자들의 이런 강한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는 과연 예배가 아닌가? 현장감은 약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온라인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다음 세대의 경우 온라인 방식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온라인 기술이 없던 시절 기록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풀어 온라인 방식에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다. 2천 년 전에 온라인 기술이 있었다면 베드로가 온라인 설교를 하지 않았을까? 바울도 줌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화상 토론을 하지 않았을까?

앞으로 위드 코로나 시대에는 온라인 기술이 교회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로 함께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도래와 함께 영역을 더욱 넓혀갈 것이다. 교회는 그 두 영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56) 온라인 세계는 오프라인이 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많이 열어준다. 이를테면 지금 청년들이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묵상한 재료를 카톡방에 올려 공유하는 방식은 이전에는 하기 어려웠던 교제 방식이다. 디지털 문화는 성경을 젊은이들의 삶 깊은 곳으로 옮겨 다양한 영역과 소통할 수 있게 만든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재택근무가 많아지고 디지털 소통이 더욱 활발해졌다. 앞으로 더 그럴 것이다. 온라인 방식의 예배 역시 시대가 달라지고 삶의 플랫폼 자체가 변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코로나19가 강요한 첨단 기술의 활용은 앞날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깨어 기도하고 전도하고 사랑하는 일에 말이다.

첨단 기술 사용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 시대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이루어졌는지 늘 확인해 보아야 한다. 정치적 성향이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지난 2년 동안의 경험이 우리를 성경과 무관하게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문화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특히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첨단 문화의 경우 더욱 그렇다. 예배에 대한 오늘의 논의는 예배가 전부라는 주도적인 흐름에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는 아닌가? 약간만 다른 이야기를 해도 정치의 안경을 쓰고 비난하지 않는가? 보편적 고통으로 우리 가운데 다가온 코로나19라는 재난은 하나님의 뜻을 여러 가지로 생각게 한다. 특히 종말론을 통해 그렇게 하며 우리에게 정말 성경적인, 철저하게 성경적인 이해와 분석과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 나가는 말

종말론에 비추어 본 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의 의미도 잘 밝히고 그 사건 자체의 뜻도 올바로 드러내 준다. 따라서 미래교회포럼은 시의적절한 주제를 정확한 성경적 구도에 성공적으로 담아낸 셈이다. 코로나19를 주신 주의 뜻을 잘 보여주고 올바른 순종을 촉구한 셈이다. 물론 그 뜻의 구체적이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가 밝힌 내용과 다를 수도 있고 더 보강할 점도 있을 수 있으므로 말씀을 품은 가운데 열린 토론을 통해 가장 성경적인 답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발제 내용을 요약하자면, 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으로 인정되는 재난으로서 종말론의 눈으로 바라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우리에게 깨어 기도하라는 경고가 되면 현재의 삶에 충실하여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명령이 된다. 주님의 백성들은 코로나19를 대하면서 말씀의 엄중함을 확인하고 주 재림을 바로 대비하고 있는가 살펴야 하며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상을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전도와 사랑으로 코로나19의 참뜻을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

 


◆미주

1)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도 이런 경향을 보이지만 여기서는 성경적 종말론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2) 성적 문란, 동성애, 인간의 교만, 물질주의, 소비주의, 정치적 음모 등이 원인으로 언급되었는데 명확한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는 독단적인 주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3) 권수경 코로나 이후 사회와 교회: 신학적 의미와 평가샬롬나비 학술대회. 20201127.

4) 권수경 고통의 신학적 의미미래교회포럼 2021229일 모임.

5) 동물의 경우 1920년대부터 닭의 감염 사례가 있었고 1931년에 첫 공식 보고가 있었다. “Coronavirus” Wikipedia.

6) 세계보건기구 (WHO)20203월에 코로나19를 세계적 범유행으로 선포했다.

7) 주소는 worldometers.info/coronavirus. 통계의 정확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8) “Outbreak: 10 of the Worst Pandemics in History” MPH Online. mphonline.org. 20211120일 자료.

9) 트럼프 탄핵소추안은 20191218일 하원을 통과하였고 202025일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탄핵 명분은 권력남용abuse of power과 의회 업무방해obstruction of Congress였다.

10) 20211~8월 기준. 김형준 우리나라 무역규모, 영국 제치고 세계 8위로” <한국일보> 2021111. 자료 출처는 세계무역기구.

11) 대한민국의 언론은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에 대해 시종 해외 언론과 정반대의 태도를 유지하여 전체 여론의 흐름을 상당히 좌우하였다.

12) 코로나19와 종말론을 연결한 글 가운데 재미있는 하나는 첨단 기술을 활용해 코로나19를 방역하는 정부를 그리스도 이전에 나타날 불법의 사람과 연결해 논의한 글이다. 종말론을 다루지만 코로나19가 아닌 방역 정책과 연결하여 코로나19를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글이 되었다. 김영욱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 본 전염병(COVID-19)” <신학지남> 202012. 195-214.

13) 코로나뿐 아니라 백신을 666과 연결한 음모론도 교회에 제법 퍼져 있다. 박용미 코로나19 틈타SNS·유튜브 통해 왜곡된 종말론 급속 확산” <국민일보> 2021927.

14) 코로나 초기 몇 달을 지휘한 이낙연 총리는 2019년 장로가 됐고, 20201월부터 20215월까지 지휘한 정세균 총리와 20215월 이후 지휘한 김부겸 총리는 안수집사다.

15) 코로나19뿐 아니라 최근의 여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보면 교회와 정부의 관계, 또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16) 두 병 모두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는데 전염성은 강하지 않지만 치명률은 높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은 치명률이 10%, 중동호흡기증후군은 27%를 기록했다.

17) 미국 병원의 경우 코로나 환자를 위해 비워 둔 병실과 의료 시설 때문에 암이나 당뇨 등 다른 질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수명이 단축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18) 박지영, “코로나19와 노인의 고립,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좋은나무, 2021/11/12 다운로드)

19) 미국에서는 백신을 거부한 환자가 몇 달 간격으로 확진되어 같은 병원에 거푸 입원한 사례들이 있다.

20) 황원하 감람산 강화 해설 (24:1-35)” 개혁정론. 2015/08/10

21) 미래교회포럼이 2019년에 주제로 다룬 4차 산업혁명이 이렇게 이번의 주제와 연결된다.

22) 권수경 고통의 신학적 의미미래교회포럼 2021229일 모임.

23) Donald S. Lopez Jr. (2015). Buddhism in Practi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202204. Wikipedia “kalki” note 5.

24) “말세관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상적 원천이라는 주장이 일반 종교학, 특히 비교종교학에서는 정설처럼 되어 있다.

25) “말세관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 한민택 한국 그리스도계 신흥 종교의 종말론에 관한 신학적 고찰 -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을 중심을으로” <가톨릭 신학과 사상>, 201474. 68-136.

27) 이희용 신천지 교단 폭풍성장의 비밀 3가지” <연합뉴스> 202035(온라인판)

28) 서론(계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최근 성령론을 추가하는 이도 있다.

29) 개인적 종말을 말하는 성경 구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30) 웨인 그루덤이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 보기. W. Grudem,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3, 1104.

31) 죽음에는 육신의 죽음 외에 영적 죽음이 있기 때문에 육신적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코로나19가 두려움 하나로도 개인적 종말론과도 연결될 수 있겠으나 적어도 보편적 고통이라는 자격으로 하는 것은 아니므로 일단 논의에서 제외한다.

32) 깨어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

33) 계시록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휴거, 대환란, 70주 환란, 재림 등에 대한 접근법부터 다양하여 명확한 하나의 입장을 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대한 입장은 크게 미래주의 (계시록, 에스겔, 다니엘 등은 물리적으로 지구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과거주의 (계시록 예언은 2000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역사주의 (성경의 상징들을 역사상 인물들과 연결한다), 관념주의 (계시록 진술을 상징과 비유로 푼다) 등이 있다.

34) 다양한 자연재해 가운데 눅 21:25은 예루살렘 멸망 관련 예언에서 쓰나미도 암시한다.

35) Q. 29. What are the punishments of sin in the world to come? A. The punishments of sin in the world to come, are everlasting separation from the comfortable presence of God, and most grievous torments in soul and body, without intermission, in hell-fire forever.

36) W. Grudem, Systematic Theology, 1101

37) 이 본문에서는 시기를 모른다는 말씀은 없이 깨어 있으라 하셨지만 앞서 17:26-30에서 노아의 때,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고 같은 내용을 담은 마 24:36-39에서 시기를 알 수 없다는 가르침의 한 보기로 노아의 때를 언급하셨으므로 결국 같은 가르침이 된다.

38) W. Grudem, Systematic Theology, 1101-4

39) 단 하나의 예외로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일을 언급하는데 이 일은 주님이 오시기 직전 몇 분 또는 몇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재림이 멀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W. Grudem, Systematic Theology, 1103.

40) 6:39-54; 12:48 .

41) 주님이 언급하신 사랑의 행동을 전도자에게 한 행동으로 국한시키는 주석도 있으나 전도와 구제를 불필요하게 대립시키는 입장으로서 그런 제한을 설정할 근거가 비유 자체에는 없다. 성경 다른 내용을 근거로 해도 주님이 일반적인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42) 사랑이 죄를 덮는다는 구절의 성경적인 뜻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질그릇에 담은 보배> (복있는 사람, 2017) 205-260을 참고하라. 사랑이 죄를 덮는다는 말의 참뜻은 불신자들이 종말을 모든 것을 덮는 때로 이해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43) 이와 관련하여 영어권에서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마르틴 루터의 말이라며 떠돌고 있는데 20세기에 생긴 헛소문이다. 한국에서는 스피노자가 한 말이라는 헛소문이 있다. 범신론적 운명론으로 본다면 스피노자와 통하고 종말을 대하는 성경적 태도로 본다면 루터와 통한다. 물론 내일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44) 원문은 고개를 높이 들고 (mit erhobenem Haupt) 기다리게

45) Crawford Gribben, “The Eschatology of the Puritan Confessions” Scottish Bulletin of Evangelical Theology, 20.1, Spring 2002. p. 70

46) As Christ would have us to be certainly persuaded that there shall be a day of judgment, both to deter all men from sin, and for the greater consolation of the godly in their adversity; so will he have that day unknown to men, that they may shake off all carnal security, and be always watchful, because they know not at what hour the Lord will come; and may be ever prepared to say, Come Lord Jesus, come quickly. Amen. (Chapter 33, Section 3)

47) C. Gribben, 70-71

48) “..... we pray, that the kingdom of sin and Satan may be destroyed, the gospel propagated throughout the world, the Jews called, the fullness of the Gentiles brought in; the church furnished with all gospel officers and ordinances, purged from corruption.....”

49) The Confession of 1967. Kruse Kronicle Webpage, “Eschatology in the Confessions” 200611

50) God's redeeming work in Jesus Christ embraces the whole of man's life: social and cultural, economic and political,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individual and corporate. It includes man's natural environment as exploited and despoiled by sin. It is the will of God that his purpose for human life shall be fulfilled under the rule of Christ and all evil be banished from his creation

51) With an urgency born of this hope the church applies itself to present tasks and strives for a better world. It does not identify limited progress with the kingdom of God on earth, nor does it despair in the face of disappointment and defeat. In steadfast hope the church looks beyond all partial achievement to the final triumph of God.

52)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샬롬 나비 포럼을 참고하라.

53) 7:8-10도 비슷한 말씀을 전한다.

54) 권수경 코로나 이후 사회와 교회: 신학적 의미와 평가샬롬나비 학술대회. 20201127.

55) 보통 대면 예배와 비대면(온라인) 예배로 구분하는데 대면은 화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회집 예배와 분산(온라인) 예배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56) 조성돈 위드코로나 시대, 한국 교회의 딜레마와 과제좋은나무, 20211117.

 


◆참고자료

(신앙고백서)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The Confession of 1967: Inclusive Language Text> Presbyterian Church USA, 2002

 

(일반자료)

권수경 코로나 이후 사회와 교회: 신학적 의미와 평가샬롬나비 학술대회. 20201127.

권수경 고통의 신학적 의미미래교회포럼 2021229일 모임.

김영욱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 본 전염병(COVID-19)” <신학지남> 202012

김형준 우리나라 무역규모, 영국 제치고 세계 8위로” <한국일보> 2021111

박지영, “코로나19와 노인의 고립,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좋은나무, 2021/11/12 다운로드)

박용미 코로나19 틈타SNS·유튜브 통해 왜곡된 종말론 급속 확산” <국민일보> 2021927.

송영목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해석 비판월간종교 2021331(온라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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