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체 중심의 진화론적 선교, 자기 보존을 위한 선교,
이기적인 경쟁의 선교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서로 사랑하라'의 선교, '성육신적 겸손과 섬김'의 선교로 돌아가야 한다

2021 미래교회포럼 전국대회(대표회장 권오헌 목사)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로 부곡 화왕산스파호텔에서 지난 6~7일 열렸다.

2021 미포에서 질문하는 김동춘 목사
2021 미포에서 질문하는 김동춘 목사

권오헌 목사의 아침 경건회로 시작된 둘째 날 집회는 이현철 교수가(고신대)와 권효상 선교사(KPM 연구국장)가 발제했다. 미포 참석자들은 마지막 발제시간까지 진지한 질문과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질문하는 안동철 목사
질문하는 안동철 목사

미래교회포럼은 2022년 선배들의 뒤를 이어 더욱 알찬 내용으로 모일 것을 다짐하며 대표회장 권오헌 목사의 기도로 폐회했다. 다음은 권효상 선교사의 "보편적 고통 시대에 교회 선교의 미래" 발제문 전문. 

 

◇사진으로 보는 2021미포

미포 진행하는 사무총장 이세령 목사
미포 진행하는 사무총장 이세령 목사
2021 미포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미포 참석자들
2021 미포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미포 참석자들
2021 미포 첫 시간 부터 마지막 시간까지 참석한 김순성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2021 미포 첫 시간 부터 마지막 시간까지 참석한 김순성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폐회 기도하는 권오헌 대표회장

 


 

보편적 고통 시대에 교회 선교의 미래

 

2021 미포에서 발제하는 권효상 선교사
2021 미포에서 발제하는 권효상 선교사

권효상 [1]

 

서론; 선교와 관련된 보편적 고통

이미 이전 미래포럼에서 신학적, 성경신학적 의미에서 보편적 고통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선교적 관점에서 보편적 고통을 다루는 것으로 글의 한계를 짓고자 한다. 선교 영역에서 느끼는 보편적 고통은 지구적인 가난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정치적 핍박과 종교적 박해로 인한 고통, 그리고 전 지구적인 환경 재난으로 인한 환경적 고통의 문제 등이다. 특히 전쟁, 정치적 고통, 경제적 고통, 환경적 고통은 거대한 난민의 발생이라는 추가적인 고통을 양산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로 인한 선교지의 붕괴는 선교사와 현지 교회가 겪는 새로운 형태의 고통이다.

선교를 어렵게 만드는 많은 고통의 원인들이 상존하지만, 선교 영역에서 발생하는 고통에는 순기능 도 있다. 북한, 중국 등 공산권과 이슬람 국가들에서 발생하는 정치, 종교적 박해는 현지의 어린 성도들의 믿음이 급격히 자라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선교지의 가난 문제는 선교사들로 하여금 현지인에게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는 것이 사실이다. 복음의 수용률과 선교지의 경제 성장은 반비례한다. 그러므로 가난은 선교지의 현지인들에게는 고통이지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순기능을 일정 부분 가진다. 기후난민과 정치적 혹은 경제적 난민의 거대한 발생은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고통이다. 그러나 난민이 대부분 이슬람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과 난민들이 복음을 비교적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난민의 문제를 단순히 사회정치적 문제로 보지 않고 무슬림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난민을 통해 이슬람을 돌파해 가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 서 인류의 보편적 고통을 선교의 기회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본다. 이제 이 년이 채 안 된 코로나와 위드 코로나로 인해 예상되는 고통은 어떠한가? 촌각 안에 선교사들과 현지교회 지도자 들은 선교지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예상되는 위드 코로나의 문제는 선교사와 선교 현장에 지속적인 고통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4차 산업 혁명의 문명의 이기를 선교에 사용할 수 있도록 등 떠밀고 있음을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 시대에 선교가 잠시 멈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교를 위해 준비해 주신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기 위한 준비 기간임을 고백한다. 그동안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사역이 대면 으로만 가능하다는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선교의 많은 부분이 비대면 으로 진행되기 시작했고, 이전에 보지 못한 선교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한 유익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코로나로 인한 고통 역시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보편적 고통들이 선교를 위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편적 고통에서 인류가 복음으로 해방되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교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excuse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excuse는 excuse me 가 아니라, excuse you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보시면서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의 원인인 우리들이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죄의 결과들인 보편적 고통들을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선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것을 인류의 보편적인 죄 가운데서 최선의 해결책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차선책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편적 고통의 원인을 선교 영역에서 제거해 나가는 것 또한 통전적 의미에서 우리의 중요한 선교 사명이다.

필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의 영역에 고통을 가져오는 보편적 고통의 원인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으로서 선교를 위한 외피 문화를 공공영역에서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미래 교회 선교를 그려 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서 있는 동시대의 보편적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변화를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본론

1. 동시대의 고통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지금 선교를 화두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상황 즉, 정치 사회적 상황, 경제적 상황, 지정학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미래 선교를 말할 수 없다. 이미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선교만 따로 떼어서 담론으로 삼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미래 선교에 대한 대안 제시를 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과 고통의 위기로 몰아가는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글로컬 역학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자는 망루를 만들기 전에 비용 계산을 미리 해야 한다 (눅 14:25-35). 우선 지난 한 세기 이상 전 지구의 경제, 정치, 지역학의 가장 큰 화두였던 세계화 (globalization)를 화두로 삼아보자.  

 

1) 세계화

 

여러분이 60-70년대에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다음과 같은 급훈 아래에서 학교 생활을 했을 것이다. [나도 쓸모가 있을 걸..], [여럿이 있으면 이로움이 있다], [쟤 깨워라], [한우갈비; 한마음으로 우리는 갈수록 비상한다], [더불어 숲이 되자]. 뭔가 함께 힘을 내고, 상생하자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90년대 우리나라 고등학교 급훈을 보면 사뭇 달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존], [옆반 정복], [합격자 명단에 귀하의 이름이 없습니다]. 90년대 이후 급훈은 왠지 더 경쟁적이고 치열해진 삶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자세히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은 당연시되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이 팍팍한 삶의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기인되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답은 세계화 이다. 세계화라는 용어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을 보기 좋게 포장해서 70년대부터 세상에 유통된 포장지에 불과하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전 지구적인 그리고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이 단단히 연결된 그 거대한 영향력의 기초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 와 신보수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기독교 내부적으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신복음 주의(Neo-evangelism)라는 말을 흔히 들어왔고, 사실 신복음주의는 한국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신복음주의가 가진 충분한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복음주의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에 끼친 영향을 이해해야지 교회가 어디서 대사회적 영향력의 누수를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세계적인 석유파동과 실업난 등 세계 경제의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케인즈 의 수정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영미를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1979년 영국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인 대처리즘과 1981년 미국의 레이건 노믹스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인 담론이 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라는 개념들로 대변되는 기업과 자본 시장 위주의 시장 정책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구호들이다. 신자유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이전에 국가의 관리로 존재하는 모든 경제 국경들을 없애고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여 [오직 시장 기능] 만이 모든 경제 활동과 삶을 밑받침 하게 하자는 다분히 경제적인 개념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국정화 된 것은 1993년 7월 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신경제 5개년 계획] 담화문을 발표한 시점부터이다. 신경제 5개년 계획을 통해 문민정부는 일 인당 국민소득 일만 달러로 한국 경제가 도약할 수 있다는 블루 청사진을 제시한다. 마침내 1996년말 한국은 선진국 진입의 대명사로 불리는 OECD에 가입했다. 한국이 이후 OECD의 조건을 따라 국가를 무한개방 해야 하는 일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세계화라는 말은 긍정적이며 일상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국가 프로젝트들에 의해 연일 선전되었다.

 

그 일환으로 문민정부에 의해 주도된 것이 이른바 1995년 단행된 [5.13 교육 개혁]이다. 5.13 교육 개혁은 소위 열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왔고, 그 이후 열린 교육 시대에 국가가 마련한 세계화라는 급훈 아래 자란 세대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민정부의 교육 개혁은 이전의 교육 이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교육을 통해 국가 전체를 새로운 매트릭스를 가진 완전히 다른 사회로 탈바꿈하겠다는 거대한 전략이었다.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은 이전의 경우와 매우 다른 특징을 선보인다. 문민정부의 등장 자체가 사회 구성 방식의 재구조화를 위한 상징성을 담보하는 한편 국가, 시민사회, 시장의 관계 규정과 관련하여 새로운 국가사회의 판짜기의 징조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숭희 2005:60)

 

5.13 교육개혁의 주된 골자는 신자유주의로 표방되는 [진화론적 경제 생태계]에서 경쟁력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국민들을 교육하자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가 가진 무한경쟁을 통한 인류의 무한 진화라는 체계 속에서 우리 사회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사회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러니는, 개혁 안이 표면적으로 담고 있던 평생학습 및 그 안에서의 교육복지 지향성 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개혁을 받아 내었던 이른바 세계 자본주의의 일상적 전환 논리의 하나로서 학습된 노동에 대한 지구적 요구가 있었으며, 그에 따라 각국의 전통적 교육체계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글로벌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매트릭스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학습은 국가 경쟁력, 즉, 국가에 의해 지지되는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표적인 전략으로 설정된다.” (Walters: 1997; World Bank: 2003)

 

실제 OECD 가입 이후 한국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를 경험한다. 선진국 대열 가입 이라고 미화된 이면에는 준비되지 않은 한국 사회가 맞닥뜨려야 했던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파고가 있었다. 자유화와 세계화라는 말로 포장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국민들과 해당 정책 관료들은 실제로 그 독소에 대해서 본인들이 알지 못했을뿐더러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못했다. 시장 경제에서 무한 경쟁을 허용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결국 1998년 IMF라는 건국 이후 최대의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았다. 현재도 대부분의 국내외IMF 관련 인사들은 한국이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겪은 이유는 단지 서서히 개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IMF 당시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강경식 전 경제 부총리겸 재경원 장관은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진단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급속도로 (세계화가) 빨리 진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입니다. 비유하자면 한 파도를 넘으면 또 다른 파도가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같은... 그것도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그런 파도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구조와 질서의 개편 과정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느냐 하는 과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퇴임사 녹취).” 전혀 다른 구조 생태계를 가진 한국 사회의 탄생에 대한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문제는 세계화의 무한경쟁이라는 파고는 더욱 그리고 끊임없이 거세어지지 더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안정을 되찾거나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들이닥치는 거대한 파도와 같이 우리의 삶의 전반과 그 삶의 기반이 되는 국가와 사회의 구조 전체를 익사시키고 있다. 이것이 무한 경쟁의 구조 속에 함몰되어 있는 한국 사회와 그 속에 속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이다.

 

이제 이러한 경제 및 국가 전반에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와 그 결과들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 영미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함께 올라탄 나라들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비 성경적인 결과물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1) 우선, 세계화는 지역주의의 쇠퇴를 가져왔다. 성경은 지역화(지역주의와는 다른 지역화를 의미한다)를 반대하지 않는다. 작금 세계화를 비판하는 생태신학의 근저에는 경제 진화론을 근거로 하는 모든 지역들을 무시한 거대 경제 구조를 비 성경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2) 문화적으로 보면 지역의 문화적 특성보다는 서구문화의 단일화 종속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대학학문의 선에서는 문화 진화론을 오래전부터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장 에서는 여전히 문화의 진화론적 종속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디어를 통해 전파   되어지는 서구 문화의 편파적인 확장을 제3세계나 혹은 지역 문화가 어떻게 경쟁을 하면서 이겨 갈 수 있겠는가?

(3) 경제적으로 세계화는 다국적 기업 혹은 다국적 자본의 횡포를 막을 수 없게 되었으며, 고용의 불안 등 일반인의 경제활동의 불안 요소가 극대화되었다. 세계화의 진화론적 물결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무래도 경제적인 종속이다. 전세계의 부유층의 1%가 세계의 자산 중 절반을 가지고 있으며, 가난한 하위 50%는 세계 자산의 1%만을 가지고 있다. 세계 불평등 지수는 20세기 초반 부에 대공항과 세계대전을 겪을 때가 45% 정도였다. 1985년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불평등 지수가 55% 이상 올라갔다는 것은 소외계층의 불만이 최고조로 축적된 상태라는 것을 방증한다. 신자유주의 시장 상황에서 소외계층을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 경제의 지나친 진화론적 약진이 만든 결과이다. 이것은 성경의 희년 사상에 대비되고, 성경의 경제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4) 사회적으로는 복지의 축소로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효율성의 극대화로 인해 인간소외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또한 사회안전망이 약해져 취약 계층이 늘어나게 되었다.

(5) 생태계의 파괴와 자원의 지나친 낭비는 시장 경제 우선 논리에 늘 밀려있다.

(6) 정치적으로 국가 간의 무한경쟁은 국제 난민의 증가, 국제정치의 불안, 그리고 국지전과 세계대전 에 대한 불안감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세계 경제 구조의 매트릭스로 실제화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구조적인 허점들로 세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결과물들은 기독교의 시각에서 신자유주의에 반 성경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사회 안과 밖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매트릭스가 정착하는 과정과 신자유주의의 문제점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신자유주의가 사회 경제적 매트릭스라면, 신자유주의의 정치사상 은 신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신자유주의의 정치사상의 기저에는 미국의 기독교를 근저로 하는 종교 사상이 모태 역할을 했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는 미국식 기독교 신복음주의를 기저로 하고 있다.

 

신보수주의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 이념이다. 신보수주의자의 줄임말인 neo-con은 미국 공화당의 신보수주의자들과 맥을 같이하는 세력을 통틀어 일컫는 용어다. 정계 및 언론계, 각종 싱크탱크 등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신보수주의는 야만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자연의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 레오 스트라우스를 사상의 기원으로 삼는다. 그러나 신보수주의 는 특정인의 사상으로부터 발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서 성장해 왔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은1960년대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이 야기한 논란들-민권운동과 인종 문제, 여권운동, 문화적 좌파 운동, 신좌파(new left)의 대두,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이 촉발한 분열, 1970년대의 장기 경제침체, 중동전쟁, 제3세계 혁명들, 냉전과 데탕트, 사회주의의 붕괴, 다문화주의의 도전, 그리고 9•11등- 지난 반 세기간 미국 사회가 직면했던 중대한 대내외 문제들과 도전들에 대한 대응을 통해 신보수주의가 형성되고 확산되었던 것이다.”(백창재: 2003)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면서 신보수주의자들은 전통 권위의 붕괴를 염려했다. 그리고 “신좌파들은 이러한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민의 가치관 붕괴, 도덕성 상실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일부의 신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쇠퇴에서 그 원인을 찾거나, 일부는 쾌락주의의 만연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2] 신보수주의가 현실 정치세력화 되는 시기는 대략 198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는 2000년을 전후한다. 특히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등장하는 2000년부터 신보수주의 세력이 그들의 이념을 전 세계에 현실화시켰다.

 

신보수주의의 이념은 자유 이상주의(libertarianism), 미국 제일주의, 결과의 평등 거부, 시민 종교로서의 기독교로 요약된다. 자유 이상주의는 개인과 재산 등 사적 영역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려 한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유통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사용한다. 그러나 개인의 영역이 침해받을 경우에는 정부가 강력하게 권력을 행사해서 질서를 바로잡는다. 이 정책은 국제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세계 각국의 자율을 인정하되, 미국의 이익이 침해받을 경우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간섭한다. 이것은 미국의 예외주의 혹은 미국의 우월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결과의 평등화의 거부는 무한정의 자유주의가 전통적 가치의 혼란, 범죄의 증가 등 역효과를 보임에 따라 모든 복지 정책은 평등보다는 미국의 사회적 안정과 경제 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과의 평등보다는 기회의 평등 주장) 그리고, 기독교의 가치를 시민영역에서 통용 시켜 미국적 전통 질서를 유지하고, 도덕적 부활을 모색한다.

 

신복음주의 (neo-evangelism)

미국식 신보수주의는 기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신보수주의 운동은 지난 50여 년 동안 미국 사회에서 등장하고 있는 네 가지 우파운동 유형의 일환이다. 그 네 가지 우파운동은 반공산주의 운동, 인종차별주의 운동,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 그리고 신보수주의 운동 등이 그것이다”(남궁곤 2004:12). [우익에 눈먼 미국: 어느 보수주의자의 고백]이란 책에서 데이비드 브록은 미국 신보수주의가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연관하여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신보수주의가 등장하는 배경을 인종주의에 호소한 닉슨의 ‘남부전략’ 1970 년대 낙태권리 및 평등권에 관한 수정법 반대 운동, 폴 웨이리치(기독교 우파를 정치 세력화했으며 헤리티지 재단 창설자: 저자 주)와 1979년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선포한 제리 폴웰 목사(도덕적 다수운동; Moral Majority운동의 주창자이며Liberty대학 설립자: 저자 주)의 정치 조직작업, 1980년 레이건 대통령 당선, 그리고 팻 로버트슨 목사(기독교 정치 압력단체인 미국 기독교 연합; Christian Coalition of America의 지도자이며 기독교방송국 CBN의 설립자: 저자 주)의 기독교 연합으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찾고 있다” (Brock, 2002:192).

 

신학적으로 미국의 신복음주의는 40년대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주의가 가진 약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발전했고 많은 신학적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필자는 근본주의나 신복음주의가 가진 장점들을 비하하거나 신학적인 약점들을 배열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여기서 신복음주의 신학이 미국식 신보수주의에 비 성경적인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신진화론과 진보적 창조론을 바탕으로 하는 신보수주의에 정신적인 뒷배경이 되어 주었거나 혹은 신보수주의의 약점들을 적극적으로 구별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나라도 신복음주의 운동의 일환인 뉴라이트 운동이 교회와 신학, 그리고 경제와 정치 그리고 교육 분야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복음주의가 가진 모든 이론적 배경들과 타당할 수 있는 이유들과 그 긍정적인 결과들을 모두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진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모든 분야(whole)에서 무한(whole)한 경쟁]을 부추긴 신복음주의의 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인 [이웃을 섬김]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정반대되는 목적과 결과를 도출했다는 사실 만큼은 직시 되어야 한다.

 

2) 국수주의 (ultra-nationalism)의 귀환

 

2010년대 중반은 전 세계의 구조가 재편되어지는 중요한 시기임에 틀림없었다. 지난 50년간 전 세계는 무한경쟁을 발판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매트릭스를 가지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21세기 초반에 재등장한 국수주의는 전 세계를 긴장시킬 만한 사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영미와 유럽 이외에 제3세계, 특히 아시아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서구 중산층이 가진 부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이것은 국수주의로의 회귀를 부추기는 정치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비 성경적인 결과물들로 인해 세계는 지금 실업, 테러, 이민자 문제, 환경재앙, 그리고 지역의 몰락 등의 중대한 이슈들을 대면하고 있다. 반대급부로 부상한 것이 바로 국수주의이다. 21세기 들어와서 눈에 띄게 국수주의를 자처하는 극우 정당들이 남미에서부터 유럽까지 정권을 획득하고 있다.

 

2015년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극우주의자인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승리하면서 남미의 콜롬비아,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등 다른 나라들로 점차 극우 정권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다. 극우 정권은 EU에서도 그 돌풍이 거세다. 2015년 10월 포르투갈 총선에서 극우의 코엘류 정권이 들어섰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스웨덴을 뺀 나머지 국가들이 극우로 돌아섰다. 2015년 영국 선거에서 보수당이 압승을 함으로써 영국은 결국 하드 브렉시트의 길을 걸었다.  2017년 선거에서 네덜란드 총선에서 유럽이 극우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곧 그 말이 무색하게 프랑스 역시 우파성향의 르펜과 그의 신생 정당에 상당한 시선을 주었다. 그의 네 가지 선거 공약은 이민자 제한과 유럽연합 탈퇴, 국내 기업의 규제 축소를 통한 외국 기업으로부터 자국 기업 보호, 변화의 수용이었다. 아시아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 이미 일본은 일찍부터 아베의 극우 정당이 정권을 잡았고, 필리핀이 극우 국수주의를 표방한 두르테르를 대통령으로 뽑음으로써 새로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2016년 미국이 국수주의를 표방한 트럼프를 선택함으로 2016년 이후 전 세계는 이전의 세계 질서와 매트릭스들을 재편하는 중이다.

 

이제 우리는 최근 국수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의 트럼프 정권을 탄생시킨 알트라이트 사상을 살펴 보고자 한다. 미국의 트럼프 돌풍을 이끈 ‘알트라이트(alternative right, alt-right: 신 우익, 혹은 대안우파)’는 백인, 남성 그리고 중산층의 극우주의 대중운동이다. 중산층의 몰락과 유럽의 난민사태, 이슬람의 유럽에서의 테러 등으로 인한 피로가 쌓여 서구에서 반이슬람주의, 반이민주의, 반자유 무역주의, 국수주의와 인종차별을 표방하면서 2010년대 초반부터 온라인을 통해 익명으로 퍼진 운동이다.

 

이들은 미국의 전통적인 보수당인 공화당이 민주당의 기치인 다문화주의, 페미니즘과 자유 이상주의에 동조하고 있다고 보며 비판한다. 이로 인해 공화당 주류는 그들이 표방하는 자유 의지론 과 차이를 보이는 알트라이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중도 성향 공화당 인사들은 알트라이트 의 인종차별적 메시지가 다인종 사회로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할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당내 강성보수 인사로 분류되는 뉴트 킹리치 전 하원의장조차 2016년11월13일 CBS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트럼프와 알트라이트를 연결하는 것은 좌파의 선동”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트럼프의 인선 작업에 알트라이트 중심 인물인 스티브 배넌을 백악관 수석 전략가 겸 수석 고문에 임명한 일에서 기정사실화 됐다. 배넌은 트럼프 캠프 최고경영자를 맡으면서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불법 이민자 추방, 무슬림 입국 금지 등 초강력 이민정책을 이끌었다. 배넌의 지명은 공화당 일각은 물론 민주당과 시민단체의 엄청난 반발을 초래했었다.

 

알트라이트는 경제적으로는 보호무역을 선호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노선에 비판적이다. 경제교육 재단 (EFF)의 경제학자 제프리 터커는 알트라이트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고, 자유무역과 자유이민에 회의적이며, 개인의 자발성과 역사의 진보도 불신한다고 분석했다. 트럼프의 무역 관련 계획은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세계화 세력들과 절연한다고 발표함으로써 트럼프 행정부 는 수십 년 동안 사용한 유화적 무역 정책을 뒤집으며, 새로운 무역 협정들은 미국 노동자와 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제공하는 방향 전환했었다. 이 일은 취임 후 1호 행정명령으로 내려진 TPP 탈퇴에서 증명되었다. 유럽의 영국의 하드 브렉시트로 급격히 촉발된 작금의 전 세계의 보호무역 으로의 회귀는 제3국의 경제성장과 아시아 경제의 성장으로 인한 부의 재편 과정에서 선진국 중산층의 부의 감소에 대한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보호무역으로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2017년 7월 G20 정상회담에서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을 표시했지만, 세계적인 흐름은 이미 보호무역주의의 기류를 타고 있는 듯하다.

 

3) 진화론적 무한경쟁; 과학주의의 승리 혹은 역사의 데자뷰?

 

진화론을 기저로 하는 신보수주의의 경제적 매트릭스인 시장 자유경제가 가진 문제의 요체는 [이웃을 섬김]이 아닌 [무한 자유경쟁]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트라이트로 대표되는 국수주의가 가진 논리의 근저에도 역시 [이웃을 섬김]이 없다. 국수주의는 개인적 차원의 이기주의가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된 것으로, 나만 잘 먹고 잘살자는 국가 이기주의의 다름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성경적 이타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과학주의(scientism)는 과학의 무한한 진보적인 발전을 주장한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다준 문명의 이기를 맛보고 있는 현대인들은(기독교인들조차) 과학주의가 진화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문턱에서 우리는 이미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엄청난 가능성들을 보면서, 분홍빛 미래를 그린다. 과학주의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만든 공상과학 영화들 보라. 미래가 천국같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혹자들은 역사의 데자뷰를 경고하기도 한다. 1차 세계 대전 (1914-18)과 러시아 혁명, 스페인 독감(1918) 이후 유럽은 전쟁 후유증으로 실업률의 증가와 소득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각 나라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대안은 보호주의와 국수주의였고, 결국 세계 경제질서가 무너지고 대공항을 맞게 되었다.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대처했으나, 세계적 경제 대공황 속에서 유럽에서는 조합주의 (corporatism)로 알려진,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편 압제 정치의 요체인 파시즘이 등장했다. 경제나 정치 혹은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비주류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파시즘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른다.[3] 이른바 조합주의는 19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채택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상당수 지식인과 정책 입안자가 하나의 모델로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반부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개인주의와 그 극대화인 국수주의의 결과가 결국은 이같은 파시즘적 파국과 전쟁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경험했다.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을 등에 업고 무한히 진화하며 전진할 것인가? 데자뷰의 역사를 만들어낼 것인가? 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2. 해결책으로서 섬김의 교회 외피 문화 창출

지금까지 우리는 반 성경적인 진화론적 경쟁이 만들어가는 개인적 차원의 이기주의와 국가적 차원의 국수주의가 가속화되는 전 지구적 현상을 진단했다. 필자는 이것이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일반적 고통들의 근원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것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대면하는 고통들과 직간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교회의 선교와 현장 선교사들의 선교가 하나님이 가르치신 원리에 맞고 보시기에 아름답게 운행되도록 할 수 있을까?  본인은 지난 2월 미래포럼에서 발표한 이현철 교수의 선행된 발제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여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지난 2월 미래포럼에서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 고신교회가 지난 총회에 상정한 안건을 분석한 이현철 교수는 [고신총회가 코로나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넷째, 고신총회 산하 노회와 교회들은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동역자와 교회를 지원하고자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 취약한 미자립(미래자립) 소형교회들의 아픔을 보듬고자 노력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위한 관심을 구체적인 위원회와 정책적인 측면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해당 사항들이 실제적인 지원과 캠페인 같은 형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총회와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수준에 있는 중·대형교회들이 앞장서 줄 것을 소망해본다.” 이러한 교회 간의 섬김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이러한 섬김이 교단 차원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것을 넘어서 (교회 간; intra-between), 교회가 세상과의 관계(inter-between)에서 상호 섬김의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상호 간 섬김을 한국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한 목사와 성도들이 선교사로 가서 같은 섬김의 방식으로 선교지를 섬길 것이다. 이러한 섬김의 문화가 중첩되면 섬김의 선교 신학이 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유일한 선교의 방법인 성육신 선교를 선교학적으로 풀어보면 [섬김]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KPM은 공식적으로 우리의 선교 신학을 성육신적 선교하고 규정하고 있다. 성육신적 선교는 결론적으로 진화론적 경쟁과 반대되는 [성육신적 낮아짐과 낮아진 섬김]을[4] 의미한다.  

성삼위 하나님의 상호존재 방식을 초대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라고 규정했다. 선교학적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이러한 존재방식은 [역동적 상호섬김] 혹은 [지속적 내어 줌]으로 해석된다. 자기를 내어 주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상호간의 끊임없는 사랑의 존재 방식은 성부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성육신 하게 하신 것으로 인해 증거되어진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는 타인을 섬기는 실천 (praxis)을 통해 타자 안에서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 나가는 지속적인 (역동적) 과정 안에 있다. 그 어느 선교사도 타인(타 종교) 앞에서 선생되어 가르칠 자격이 없다. 다만 섬김을 통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론적 선교신학에서 상호주체성의 의미는 상대를 주체로 인식할 뿐 아니라, 상호 문화화의 역동적인 의미 안에서 상대 주체를 필연적으로 섬김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의 공간에서 선교사의 역할은 자명하다. 그것은 선교사가 [타인을 섬김]으로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 사회의 전포괄적인 삶의 구조 안 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섬김 대신 경쟁이라는 가라지를 뿌리고 있다. 교회에서 이런 경쟁이라는 가라지를 경험하며 살던 교역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선교지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와서 섬김의 선교를 하는 방법을 모른다. 결국 우리의 경쟁하는 일상의 삶의 방식은 세계화된 동시대 안에서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칠 뿐 아니라, 선교지 의 전포괄적인 삶 안에 그리고 그 안에서 선교를 감당해야 할 선교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적인 성육신적 섬김의 선교를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지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선교하는 교회가 먼저 미래의 선교를 생각하며 경쟁 대신 섬김의 (외피)문화 구조를 가져야 한다.

2021미포 / 기독교 내피문화 외피문화
2021미포 / 기독교 내피문화 외피문화

종교문화는 내피문화와 외피문화로 나누어진다. 내피문화는 종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교리나 진리를 의미한다. 기독교 같으면 5대 튤립 교리나 삼위일체 교리 같이 우리가 믿는 바에 관한 것이다. 외피문화란 그 종교가 외부에 드러내는 종교가 가진 문화적 양상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비기독교인들이 경험하는 기독교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은 술, 담배 안 하고, 제사 안 드리고, 주일마다 예배드리러 가는 등이다. 즉, 외피문화란 타인이 느끼는 그 종교의 외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내피문화에는 관심이 없다. 기독교의 교리가 어떤 것인지, 우리가 믿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기독교가 드러내 보이는 외피 문화를 보면서 기독교를 가늠하고 나서,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 기독교가 가진 외피문화를 가지고 우리 사회와 우리가 속한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적어도 일제시대 때 한국민들이 경험한 기독교의 외피문화는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근대식 학교와 의료와 복지, 그리고 독립운동 등 당시 한국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을 충족시키는 의미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기독교의 종교문화 생태계는 너무나 척박해서 한국 사회를 변혁시키는 의미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한국사회는 기독교의 존재 의미를 못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번 코로나의 고통 속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외피문화의 결과는 기독교인의 급속한 감소로 귀결되고 있다.

고통의 시대에 교회가 사회에 의미를 주는 외피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외피 문화를 보면서 기독교의 참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영적 대결) 자신들의 가치관을 내려놓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개혁교회가 가르치는 문화관에 따르면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 살아가는 인생 자체(구원의 서정; 성령안에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양자 삼으시고, 그리고 성화되는 모든 과정)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구원의 서정은 인간 개개인의 구원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신의 구원 서정의 과정들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은덕들(세상 사람들에게는 외피문화로 드러난다)을 통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성품이 세상에 나타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드러난 하나님 나라와 성품을 보면서 자신의 세계관과 비교한 후, 기독교가 가르치는 진리가 더 크고 진정성 있는 것으로 판단될 때 개종한다. 즉, 기독교인의 구원 서정은 비기독교인의 새로운 구원의 서정에 관여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만일 우리의 구원의 서정 전체에서 만들어가는 외피문화가 반성경적이라면, 그 삶 자체가 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과 멀게 가도록 만드는 역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만들어 가는 외피문화는 믿지 않는 이들의 또 다른 구원의 서정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우리의 구원의 서정 전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개혁교회의 독특한 종교문화관을 지켜 행하자. 한국교회가 이러한 성육신적 섬김의 모판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미래의 선교도 경쟁이라는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성경적인 섬김의 구도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선교와 관련한 인류의 보편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주요한 대안임을 제시한다.  

 

결론; 진화론적 무한경쟁에서 타인을 섬김으로

 

필자는 비 성경적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무한경쟁이 사회, 정치, 그리고 경제의 공적 영역에서나 교회 안의 매트릭스로 심화되는 것이 고통을 양산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됨을 지적했다. 연속 선상에서 섬김과 반대되는 경쟁이라는 삶의 전포괄적인 구조가 선교지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쟁의 매트릭스는 국제 사회의 정치, 경제의 역학 관계 안에서 가난의 고통을 유발하고, 상당한 지역에서 이러한 사탄적인 경쟁의 마지막 단계로 대규모 난민들의 고통이 발생한다. 부끄럽게도 여러 행태의 선교사들의 경쟁적 선교 또한 이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선교영역이 겪는 보편적 고통의 실제이다.   

 

필자가 선교 필드에서 본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지부에서 송별하는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  자리에서 지부장 N 선교사는 인사 자리에서 필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선교정책을 잘 가르쳐 현장에 파송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인성이 된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한국교회 속 깊숙이 파고든 [진화론적 경쟁]에 길들어 목회를 하던 이들이 선교사로 오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선교사끼리 경쟁하는 모습(외피문화)이 현지인들에게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선교에서 나타나는 경쟁을 단순히 일부 선교사가 일으키는 지엽적인 문제로 경각심 없이 대처해서는 안 된다. 경쟁은 성육신을 통해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선교방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매트릭스를 가지고 선교한 선교의 결과들은 결국 선교 전체에 고통으로 나타난다.

현재 우리에게 요청되는 변화는 단순한 외적인 구조 변화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내적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세상을 비 성경적인 구조악 가운데 가두어 왔다. 우리 시대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이론적 토대 읽기를 하면서 우리는 그 구조악은 다름 아닌 진화론적 무한경쟁이 만들어내고 있는 결과물들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교의 내적 패러다임 변화는 [진화론적 무한경쟁]에서 [타인을 섬김]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닐까? 이 패러다임에 맞추어 우리의 세계관, 삶의 목표, 사회적 인식 등 모든 부분에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개혁주의 문화관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 구절은 창1:28의 문화명령으로 불리는 구절이다. 타인과 타자를 대할 때 하나님은 [다스리라; 아밧드] 곧 경작하라고 하셨다. 원어적 의미에서 이 말은 주관이나 통치의 의미보다는 섬김이나 보호에 더 가깝다. 하나님께서 함께 동거하라고 허락하신 [그 종류대로]의 타자들을 대하는 작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방식들인 신자유주의나 국수주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결코 아름답게 평가받지 못할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에덴에 두신 [타자를 섬김]이라는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사는 개혁교회는 전 세계의 매트릭스가 모든 영역에서 바뀌어 가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류 전체가 겪는 보편적 고통 가운데 선교 영역과 관련된 고통은 무한경쟁의 구도가 보편화된 것에서 기인한다. 성경은 섬김을 가르친다. 섬김은 선교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적 섬김이 보편화된 교회에서 자란 세대들과 그들 가운데 배출된 선교사들이 문화-지리적 국경을 넘어서 선교사로 가더라도 경쟁의 구도가 아닌 섬김의 구도를 형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보쉬의 책 transforming mission의 마지막 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보쉬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한 가지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반 데어 알스트(1974: 196)는 우리에게 옳은 신앙에 관한 수 없는 회의들이 있었던 것을 깨우친다. 그러나 이제까지 가장 큰 계명들 –서로 사랑하라-의 의미를 실행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는 한 번도 없었다 (763).” 그는 다음 세기를 바라보며 선교의 패러다임 변혁을 예고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성경적이고 그리고 성육신적인 패러다임으로 회귀(ad fontes) 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주체 중심의 진화론적 선교, 자기 보존을 위한 선교, 이기적인 경쟁의 선교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서로 사랑하라]의 선교, [성육신적 겸손과 섬김]의 선교로 돌아가야 한다. 이 일은 너무 어려워 병아리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것과 같이 우리 선교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해야 할 우리 시대의 가장 최우선의 일이다. 그 일은 마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강론을 듣고 그들의 모든 기득권과 종교적 세계관을 내려놓아야 했던 것에 유비될 수 있을 만큼 큰 도전임에 틀림없다.

 

Bibliography

권효상, 개혁교회 선교방법론I, 미출간 서적.

백창재, 미국보수주의 분석, 2003, 서울: 국가전략, 통권 제25호, pp 83-101.

한숭희, 문민정부 교육 개혁과 평생교육 담론: 권의적 국가주의 청산과 교육개혁의 새판짜기, 2003, 서울: 아시아교육연구 6권 3호, vol. 6, no. 3.

Bosch, David(1991),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 on Theology of Mission, 김병길, 장훈태 역(2000), 변화하고 있는 선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Brock, David(2002), The Conscience of an Ex-Conservative, 한승동 역(2002), 우익에 눈먼 미 국: 어느 보수주의자의 고백, 서울: 나무와 숲.

Ehrman, John, The Rise of Neoconservatism: Intellectuals and Foreign Affairs, 1945-1994, 1995, Yale University Press.

Walters, S. (E.d.), Globalization, adult education and training, 1997, London and New York: Zed books.

World Bank, Lifelong learning in the global knowledge economy. 2003, Washington D.C.: World Bank.


▼미주

[1] KPM연구국장, 고려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선교학.

[2] 양진석, 미국 신보수주의 (Neo - Conservatism)의 역사적 전개,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candoit88&logNo=3001537160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3]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 내부에서는 유대인이나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독일 내부의 적들의 때문에 전쟁에 지게 되었다는 [배후 중상설]이 일어나게 된다. 배후 중상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전쟁으로 지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들고 나온 국수주의 즉, 파시즘적 국가주의라는 희망에 매료되고 만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역시 비슷한 이유로 파시스모 (파시즘)를 통해 결국 약자를 희생시키면서 자국의 위기를 헤쳐 나가려고 했다. 이는 결국 2차 대전으로 연결된다.

[4] 권효상, 개혁교회의 선교방법론I, 미출간 서적,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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