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사진@ 코닷 쟈료실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사진@ 코닷 쟈료실

                                                     

  최근에 "은혜"라는 찬양을 많이 듣고 있다. 지난 1124일에 있었던 졸업사은회에서 학생들이 불렀던 찬양인데 가사가 너무 좋고 곡조가 아름다워서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요즘 교회들마다 이 찬양을 많이 하는 것 같고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된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은혜~ 은혜~ 모든 것이 은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에게 공감이 되는 고백이다. (지난 번 칼럼 "위드 그레이스" 참조)

  그런데 지금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은혜로운 복음성가 하나의 출현이 아니라 긴 안목에서 볼 때 한국적 찬양의 탄생이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적 찬양은 수십년 전에 등장하여 조금씩 자라고 있었지만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K-찬양의 '탄생'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어떤 점에서는 '성장' 또는 '절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하여 창궐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탄생'이란 말을 써 보았다. 과연 '탄생'이 맞는지 '절정'이 맞는지, 아니면 '쇠퇴'인지는 앞으로의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한국적 찬양이란 말을 필자가 사용하는 것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길선주 목사는 평양에 장대현교회를 세우고 한국 교회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이때가 아마 1900년 전후가 될 것이다). 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장로들을 세우고 각 부서들을 만들고 은혜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길 목사는, 교회가 이렇게 은혜롭게 나아가고 있는데 1년에 한번쯤은 교인들이 모여서 찬양대회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고 하는 흥겨운 날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에서 즐거운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래서 찬양을 하는데 어느 장로가 나와서 부르든, 어느 집사가 나와서 부르든 찬송가는 달라도 곡조는 다 비슷하게 되고 말더라는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찬송가를 배워서 불렀지만 당시 한국인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흥에 겨워 부르다 보면 한국의 전통 가락대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때 길 목사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찬송가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목회와 부흥회 등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3년간에 걸쳐 작업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날 일본에 가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청년이 돌아왔을 때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작곡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 청년은 대답하기를, 자기는 음악을 공부하기는 하였으나 작곡을 공부하지 않아서 도와드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길진경, <영계 길선주> 참조)

  그 후로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대로, 주로 미국과 영국의 찬송가를 번역해서 사용하였다. 간혹 독일의 찬송이나 중세의 찬송가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영미의 찬송가들(hymns)이었다.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때 작사 작곡된 곡들도 상당수 들어 있어서 전도, 회심에 관한 찬송이 많고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내용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19세기의 곡들이 많아서 곡조가 중후하고 힘이 있으나 어떤 곡들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부르기에 어려운 것들도 많다. 물론 "거룩 거룩 거룩 ..." 같은 경건한 찬송들도 있고,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참 아름다워라" 등 아름다운 찬송들도 상당수 있다. 그래서 이런 곡들은 한국 교회에 1970년대, 80년대에 성장할 때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 흐르고 한국인의 정서도 자꾸 변해 갔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과 유럽도 그렇게 변해 갔다. 그래서 미국을 중심으로 복음성가가 나타나서 온 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한국 교회도 1970년대 말부터 복음성가가 들어와서 선풍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내게 강 같은 평화",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등 아주 쉽고 은혜로운 곡들이 인기를 얻다가 점점 다양해지고 발전하여서 1980년대, 90년대 이후에는 엄청나게 많이 불리게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전통적인 찬송가보다 복음성가가 체질에 맞는지 열광적인 찬양 집회가 교회마다, 집회마다 흥행하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이런 복음성가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 반응과 경계가 많았으나 시대의 흐름은 꺾을 수 없었다. 복음성가는 더욱 번져 가고 심지어 주일 오전예배에도 조금씩 들어오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저항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 시대를 역행하여 시편 찬송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시편 찬송은 종교개혁 시대와 그 후에 개혁교회에서 많이 불렀으나 그 곡조가 너무 느리고 단조롭다(대개 16세기, 17세기, 18세기). 경건하고 중후한 맛은 있으나 몇몇 곡을 제외하고는 멜로디가 아름답다고 느끼기는 어렵다(물론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음). 시편 찬송은 오르간 반주가 있어야 제 맛이 나고 교회당 층고가 높아야 한다. 그리고 서양인들처럼 육식을 많이 해서 목과 배에 힘이 있어야 제대로 부를 수 있지, 동양인처럼 약한 사람은 따라 부르기 힘들다. 물론 경우에 따라 시편 찬송도 경건하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도 있음을 필자는 부인하지 않는다(필자의 유튜브 "변종길"에 시편 찬송 동영상 올려 놓은 게 있음). 그러나 시편 찬송은 옛날 서양 사람들의 찬송이며, 요즘은 화란의 개혁교회 성도들도 시편(psalms)과 함께 찬양(hymns)과 복음성가(spiritual songs)도 같이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시편도 옛날 곡조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새로 만든 좀 빠른 곡조를 붙인 것도 있고, 그것을 또 개정한 것도 있다.    

  시편(psalms)이든 찬송(hymns)이든 복음성가(gospel songs)이든 그것들은 거의 대부분 서양 교회가 만든 것들이다. 따라서 서양 사람들의 정서와 영성을 반영한 것이며, 그것들이 (성경처럼) 영감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대에 따라, 민족에 따라, 자기의 언어와 문화와 정서와 영성을 따라 새롭게 불러야 한다. 하나님은 같은 찬송만 늘 듣기보다 다양한 찬송을 듣기 원하신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인의 정서와 영성을 담은 한국적 찬송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100여년 전 길선주 목사의 생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선구자적인 혜안을 가진 것이었지만 여건이 준비되지 못하여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오랜 세월 동안 한국 교회가 한국적 찬송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몇 십년 전부터 찬송가를 개편할 때에 한국 사람이 만든 찬송가가 조금 들어오기는 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는 한국 사람이 작사 작곡한 곡이 제법 있다. 그러나 몇몇 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곡조가 아름답지 못하여 거의 불리지 않고 있다. 그 이유를 필자는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국악이나 전통 가락에 맞추어 작곡한 것이 많아서 기독교적 분위기에 맞지 않거나 또는 오늘날 정서에 맞지 않은 것이 많다. 한국적 찬송가를 만든다고 해서 불교나 유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그런 국악 가락을 사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국악도 나름대로 가치와 의미는 있겠으나 21세기 한국인의 정서는 대부분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100여년 전의 한국 교회라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등의 가락이 맞았겠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으로서는 힘들다(물론 이 정도의 곡은 그래도 가끔 한 번씩 부르기에는 좋다). 둘째로, 한국 사람이 만든 곡이라 해도 사람만 한국 사람이지 곡 자체는 서양식의 것을 빌어서 서양식으로 작곡하였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 많다. 대개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 작곡했으니 국적만 한국인이지 사실은 서양곡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은 서양 정서도 아니고 한국 정서도 아니고 모양만 찬송가 흉내를 내었지 은혜도 안 되고 아름답지도 못한 것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성가는 가사와 내용에 있어서 문제 있는 것들도 많지만 대량 생산과 빠른 변화를 통해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처음에는 서양 곡들을 번역하여 불렀다. 특히 "찬양과 경배" 팀을 통해 미국의 복음성가들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번역되어 불러졌다. 교회마다 찬양팀이 생기고 복음성가 책자들이 많이 발간되었다. 전문으로 찬양 사역을 하는 팀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인에 의해 작사, 작곡되어 불리는 복음성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필자는 이 분야는 잘 모르지만 처음에는 최용덕 씨가 좋은 곡을 많이 만들어 발표한 것으로 안다. "갈릴리 마을 그 숲속에서"란 곡은 지금은 거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곡이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적 복음성가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고형원의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와 이권희의 "사명"도 참 은혜롭고 아름답다. "사명"은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는데 번역곡인데도 매우 은혜롭다. 이런 복음성가들의 특징은 현대인 특히 현대 젊은이들의 정서에 맞게 부르기에 쉽고, 자연스럽고(인위적이지 않고), 흥이 나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이든 분들은 따라 부르기 힘든 부분도 있다. 그 이유는 옛날 세대들은 서양식 학교 교육을 받아서 옛날 영미의 멜로디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찬송가(영미 찬송가의 번역본)에는 익숙해 있지만 현대의 복음성가는 낯설다. 물론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서양식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현대 한국인은 현대 서양인과 정서적으로 통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 현대 문명은 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 정서적 수렴 현상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미국 복음성가와 한국 복음성가 사이에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인과 한국인의 근본적인 정서와 문화, 그리고 교회 배경(영성)의 차이가 해소된 것은 아니고 그대로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 복음성가는 서양인에 의한 복음성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한국인은 한국인 고유의 정서가 있고, 또한 한국 교회의 영성이 있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전 세계 교회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을 가지고 있다. 말씀 사랑과 성경 암송, 새벽기도회, 부서 활동, 친밀한 교제, 전도와 심방 등 한국 교회의 장점들은 너무나 많다. 특히 새벽기도를 통한 은혜, 성령의 강력한 역사, 믿음을 통한 고난 극복 등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베푸신 은혜는 너무나 많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람이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는 서양 사람이 지은 복음성가와는 다른 영성과 곡조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필자는 오래 전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 찬양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는 2015년에 중국의 한 교회를 방문하고 거기서 중국 찬양을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 중국 성도들이 다함께 찬양을 부르는데 그 곡조가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웠다. 그 곡의 제목은 "당신의 사랑은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습니다"(니디아이 불리부치, 你的愛不離不棄)인데 시홍미(施弘美) 작사 작곡으로, 부르기도 쉽고 곡조가 물흐르듯이 아름답게 흘러가고, 내용도 성경적이고(시편 구절이 많이 들어 있음), 하나님의 사랑을 애절하게 노래한 것 같았다(유튜브에서 찾아보시기 바람. 이 카페에도 소개해 놓은 적이 있음). 도대체 이렇게 아름답고 은혜로운 곡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싶어서 여기 저기 찾아 보았는데, 그녀는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부근 산타 클라라에 있는 생명하영량당(rolcc.net) 교회에 소속된 대만계 미국인이었다. 중국 고유의 정서와 문화, 중국인 교회 배경의 바탕 위에 현대 미국식 교육의 종합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그 다음에 또 찬미지천(讚美之泉)이란 찬양팀을 알게 되었는데 미국 LA 남쪽 터스틴에 본부가 있으며, 역시 대만계 미국인들이 만든 찬양팀으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찬양은 기존의 서양 찬송가나 찬양과는 정서적으로 다른 동양적 곡조와 정서를 담고 있어서 쉽고,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은혜로운 것이 특징이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중국 찬양은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가듯이 노래한다.  

  그러면서 필자가 가지게 된 의문은, 그러면 왜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한국적 찬양을 만들지 못하는가? 였다. 선교가 시작된 지 130년이 더 지났는데 왜 아직도 한국적인 찬양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국악 같은 찬송가, 서양식 찬송가 같은 것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 지난 1124일 졸업사은회 때 들은 "은혜"라는 찬양은 참으로 가사가 은혜로웠고 곡조도 아름다웠다. 물론 신학생들이 부르니 은혜가 충만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찾아보니 손경민 작사 작곡인데, 2020년에 발표한 곡인 것 같다. 그는 어려서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사업이 망해 집을 나가시고 어머니 홀로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키웠다고 한다. 경민 군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생을 하고 대학 다니다가 휴학하고 공장에 들어가서 손이 할아버지 손처럼 되도록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늘 새벽기도에 가서 기도하시고, 아들 경민이도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같이 갔다고 한다. 어머니가 우시면 같이 따라 울고 ... 어머니가 밤 늦게 집에 돌아오시면 자고 있는 경민의 머리에 안수기도를 해 주셨는데, 얼굴에 따뜻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어머니가 무안해 하실까 봐 모르는 체, 자는 체했다고 한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고 밝게 사셨고 경민 군도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결국 대학원을 나오고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작사 작곡 일을 하고, 현재는 교회에서 음악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또 신학대학에서 겸임교수로 봉사하고 있고, 아이빅밴드라는 찬양팀을 이끌고 있다고 한다. (20211122일자 유튜브 "CBS 새롭게 하소서" 참조).       

  이처럼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과 새벽기도를 통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찬양으로 승화시킨 이 이야기는 한국 교회라는 배경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 때부터 가사도우미(파출부)와 요양도우미, 식당 일 등 힘들고 고단한 일을 하면서도 새벽기도와 신앙생활을 통해 두 아들을 믿음으로 키워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환경을 탓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자라서 자기의 삶을 아름다운 찬양으로 담아내는 손경민 목사를 통해 필자는 드디어 한국적 찬양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손 목사의 교회 배경이 침례교회라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생각에 잠기게 한다. 왜 장로교회가 아니고 침례교회인가? 왜 고신이 아닌가? 고신에는 이런 작곡가가 없는가? 그런데 고신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니 말씀을 잘 전하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침례교회 목사의 설교가 신학이 약하고 단순하기는 하지만 더 성경적으로 보인다. 물론 다들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침례교회가 더욱 기도를 강조하는 것 같다. 고신은 기도를 말하기는 하는데 뭔가 좀 약한 것 같다. 설교를 준비하느라 애를 쓰기는 쓰는데, 목사가 설교를 '만들어 내려고'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왜 성경에 있는 대로, 순서대로, 순순히 풀어내지 못하는가? 무엇보다도 기도가 약하다. 새벽기도회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기도를 하고, 예배 순서 중에도 온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 등은 역시 침례교회가 잘한다. 고신 목사들은 말씀을 강조하는데, 사실은 말씀 중심이라기보다 신학적인 경우가 많다. 그 신학이란 것도 정말로 성경적이면 괜찮은데, 알고 보면 서양교회를 거친 서양신학적인 게 아닌가? 설교에서는 '대지'를 잡을 때 목사 자신의 인간적 생각, 신학적 체계, 교리적 틀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 신학적 틀도 물론 필요하기는 하지만 모든 설교에 그런 인간적인 틀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성경 자체를 순순히, 자연스럽게, 순수하게 풀어내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고신이 아닌 교회에서 고신보다 더 성경적인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앞으로 고신 교회가 좀 더 분발하여 기도를 힘쓰고 영성에 힘쓰고 말씀 중심의 설교를 하여서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빈다. 그래서 우리 고신에서 은혜와 영성이 풍부한 한국적 찬양을 많이 만들어 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고신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한국 교회가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 교회의 영성을 담은 은혜롭고 아름다운 찬양을 많이 만들어 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단지 한국 교회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 교회가 즐겨 부르는 세계적인 찬양이 되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K-팝에 이어 K-찬양이 온 세계를 휩쓸기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태까지 세계 교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한국 교회의 놀라운 영성을 담은 K-찬양의 은혜를 온 세계가 함께 나누어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온 세계가 K-찬양을 통해 큰 은혜를 누리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2022. 1. 2. 주일 오후. 변종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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