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패스가 촉발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논쟁
평범함이 일상이 아닌 꿈이 되어버린 시대
사람을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우리의 신학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는 것

인명의 존엄성 논쟁을 재점화한 방역패스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인간의 기원, 인간의 목적, 인간의 구조 등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는 함축적인 질문이다. 사상가들은 각자의 사유와 삶을 통해 각기 광범위한 함의를 지닌 다양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오늘날 인간적 가치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 질문이 더욱 중요한 위치로 대두되었다.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낙태, 화학적 행동통제, 안락사, 유전공학 등과 같은 관행은 인명의 존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정부의 ‘방역패스’ 제도는 '화학적 행동통제'에 해당될 수 있다. 서울행정법원이 기본권 침해를 근거로 지난 4일 일부 시설에 적용된 방역패스 효력을 정지했지만, 방역 당국은 공익을 위해 백신을 독려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즉시항고 의사를 밝히면서 ‘인명의 존엄성’에 대한 논쟁은 지속될 전망이다.

방역패스 논쟁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더욱 긴급성을 띠게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긴급한 문제는 "신은 무엇인가?"보다 "인간은 무엇인가?"일 수도 있다. 도리어 이것이 가장 신학적인 질문처럼 보인다.

인간은 왜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여기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통일된 지식, 일종의 ‘신’을 찾기 위해 전념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내가 만든 신은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말한다.

4일 서울 마포구 종로학원에서 학원 관계자가 안내 데스크에 붙어 있던 방역패스 관련 안내문을 떼고 있다. 학원, 독서실, 스터디카페에 방역패스를 적용하는 정부 정책에 대해 법원은 이날 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 뉴스1

 

영혼을 잃은 우리의 신학, 영혼을 회복하는 성경

신대원 동기 전도사에게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필자에게 개혁신학으로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을 어떻게 하냐고 질문했다. 개혁신학으로 제자훈련을 어떻게 하냐고도 질문했다. 개혁주의적으로 제자훈련을 점검해보니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왜 신학과 사역은 다르다는 이야기가 정설이 되었을까? 믿음의 선배들은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당대의 방법론을 우리 시대에 그대로 배껴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도 상식이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평범한 인간을 안다면 말이다.

우리는 신학을 가르칠 줄만 알지, 정작 영혼을 돌보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모르는 의사처럼. 이것이 참된 개혁신학일까? 평범한 인간성 회복을 갈망하는 팬데믹 시대를 치료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 니체가 옳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학적 담론들이 양산될 때마다 인간성을 배신하는 일들을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신학은 인간중심적인 신학을 벗어나기 위해 구원론의 외연을 모든 존재로 확장했다. 그러자 인간에 대한 견해에서 일관성을 잃어버렸다. 고립적인 신학 또한 인간중심적인 신학을 벗어나기 위해 신의 광채에 몸을 던져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만든 신학에서 인간은 언제나 병풍에 불과하다. 인간은 누가 챙길까?

엠마누엘 레비나스(상)와 조던 피터슨(하)
엠마누엘 레비나스(상)와 조던 피터슨(하)

최근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타인의 얼굴에서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에 열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질서를 유지하며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진리를 인간학을 통해 명쾌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두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발견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에 관한 기록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준비하셨고 또 이루시는 구속의 계시이다. 인간에 관한 지식은 성경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다른 지식은 없다. 인간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평범하지 않은 평범함

인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사회는 팬데믹 이전의 평범했던 일상의 회복을 꿈꾼다. 평범을 사회적 산물이라며 모두 해체한 후, 우리 사회에서 ‘평범’은 짙은 안갯속에 있게 되었다. 현대사회의 이상(理想)은 평범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평범 자체이다. <평범한 것도 재능이다>라는 책 제목처럼, 사실 '평범'은 '평범하지 않다'.

2013년에 개봉한 일본영화 <두더지>의 주인공 중학생 스미다의 꿈은 '평범함'이다. 그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가정폭력을 일삼고 부모의 빚더미를 어린 나이에 짊어지게 된다. 그는 평범하게 살기 위해 자신과 사회를 괴롭히는 대상들을 제거하지만, 깊은 자괴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칼 한 자루와 함께 시내를 방황한다. 그는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자수라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했다. 폐허 속에서도 땅 밑에서 평범하게 사는 두더지는 우리 시대의 평범함의 메타포(metaphor)이다. 평범하기 위해선 두더지가 될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영화 두더지, 감독: 소노 시온
영화 두더지, 감독: 소노 시온

타락 전 인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평범’이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프로테스탄트에게는 개혁신학과 청교도 신앙이 가장 평범했다. 동시에 그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만약 나의 신앙과 신학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하고도 우월한 무언가로 생각한다면, 내가 믿는다고 생각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가 아니라 내가 만든 '금송아지'일 수도 있다. 이내 그것은 - 니체의 말처럼 - 나를 심판할 것이다(출 32:35).

 

길을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함

사도 바울은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말다툼을 삼가라고 강조한다.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딤후 2:14). 이럴 때일수록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평범한 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다(딤후 3:14). 

기본권조차 무너진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 방역패스에 대한 말다툼에 집중하기보다, 우리가 전보다 더욱 말씀에 거하는 것이지 않을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 비록 권세가 압제할지라도 감사가 풍성한 삶, 예배의 자리가 제한받더라도 거하는 모든 곳에서 예배하는 삶,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기로 결단한 삶,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두더지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평범한 일상’이 우리 사회를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은 가장 "평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은혜이다. 
신앙은 가장 "평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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