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춘식 교수 신대원 36회졸, 목사, 문학평론가 ACTS(아신대) 선교학 교수은퇴 스페인어 신문 Tiempo Latino Cristiano 발행인 역임, 현 GMTI 선교교육원장 한국기독교문예상, 미주문협문학상 1997. 제4회 남미안데스문학 대상수상 2003. 제3회 한국 들소리문학 대상수상.
윤춘식 교수 신대원 36회졸, 목사, 문학평론가 ACTS(아신대) 선교학 교수은퇴 스페인어 신문 Tiempo Latino Cristiano 발행인 역임, 현 GMTI 선교교육원장 한국기독교문예상, 미주문협문학상 1997. 제4회 남미안데스문학 대상수상 2003. 제3회 한국 들소리문학 대상수상.

 

허성욱 박사의 시조집 세월이 마주 웃는다

 

한국 창조과학회의 허성욱 목사님(이하 허성욱)이 네 번째 시조집을 내었다. 기독교계는 크게 축하할 일이라 사료된다. 1월포리 사설, 2멀미의 바다위에 당신이 계십니다, 3생수를 찾아서에 이어 이번 제4(2021. 11. 카리타스)을 상재하였다. 본 글은 4세월이 마주 웃는다에서 살펴 본 서평이다. 본 저작은 3집을 출간한지 20년이 훌쩍 넘은 터울을 지닌 출간이라 시어와 이미지 등 세련되고 정제되어 있다. 오랜 기지개를 켜고 세상에 발표한 작품들은 세월·마주·웃음의 3단 옷을 입고서 탄생하게 되었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인류의 대적 바이러스 팬데믹 가운데 태어나 그래서인지 그 의미가 사뭇 깊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작품집 역시 전체 5부로 구성되었다. 103편의 현대시조를 실었는데 주로 부산을 비롯한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그의 일상과 기념비적인 담시(談詩) 그리고 그리운 이들을 애타도록 마음에 품은 역작들로 다듬어져 있다. 사무사(思無邪)라 했던가? 논어 위정편에서는 시경(詩經)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 300수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고전이 어언 2500년이 지나오도록 수정됨 없이 흘러왔으니 무릇 시란 마음에 사()됨이 없어야 한다는 진실을 독자들은 알게 모르게 되뇌이며 시를 짓고 읽으며 창작해 왔던 것이다. 거기엔 놀라운 비밀 또한 보관하고 있으니 내용 가운데 이해타산이 없고 속된 것도 없으며 오직 인간이 올곧게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즉 군더더기 없이 다이어트가 잘된(사악함이 없는) 동심과 같은 뜻이라 풀이할 수 있다.

 

구약의 시편은 어찌 그렇지 않던가! 전체 150편을 헤아리는 시편은 그 근원 자체가 시경과는 전혀 다른 계시로부터의 출발이니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의 애환과 역사와 찬양과 메시아 기대를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신학자 가운데 톰 라이트(Tom Wright)는 신약 부분에서 긍정과 비판 사이를 오르내리는 신학자이지만, 그는 시편을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라 했으며 그 노래들은 시간, 장소, 물질의 세계로 이미지화 되었다고 해석한바 있다. 허성욱 역시 자신의 서정시를 세월(시간), 장소(시적 배경), 사물(승화의 요소)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시조가 톰 라이트가 탐색하였던 시편의 해석과 다른 점은 세 번째의 사물화에서 허성욱의 사물들은 개인의 주관적 1인칭의 심정을 승화시켜주는 제3의 요인으로서 서정의 극치이자 그리움을 치환하는 환유법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탈출 불가결한 그리움마저도 제3의 요인인 전혀 다른 사물을 통해서 반전시킨다. 가령 시 <지난 새벽 꿈길에서>와 같이 "불현듯 백화점 옆을 그리움이 돌아간다"라고 태연한 척 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시심을 순환시킨다. <옛 전우를 만나고>에서도 장사 대대 11중대 월포리를 회상하면서 휴대폰을 철썩이며... "집어등이 가물댄다"고 순환시킨다.

 

그는 물리학자이기에 흐르는 물이 흐르고만 있는 물로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차갑게 얼어버리든지 뜨겁게 기화하여 승화되든지 반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여 허성욱의 작품집에는 5부로 구성된 다양한 서정시들이 게재되어 선보인다. 고신 교단에서 정형의 음수율로 시조를 짓는 분들이 몇 안 되지만, 그에게 흘러간 세월의 편린은 다양하다. 불교학도(부산대학시절)로서 그는 집안의 내력으로 인해 자연스레 불경을 대했던 청소년 시기가 있었다. 부산의 금강사와 범어사 넓게는 통도사와 표충사에 이르기까지 법회 원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대했던 불경이 반야심경(般若心經)으로서 불자들에게는 피아노 연주법의 바이엘 같은 것이었고, 사숙했던 경은 천수경(千壽慶)으로 예불의 마음을 기억하기도 한다. 고신에 중··SFC(Student for Christ)가 존재하는데 비해 그는 S.F.B(부다를 위한 학생) 출신이었다고 위트를 남긴다.

 

제한된 공간에 그와 나와의 만남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필자가 제1차 안식년을 맞아 거제 염광교회(선교관)에 머물 무렵 거기서 고신대학 선교대학원에 출강하고 있을 때, 허목사님은 염광교회에 창조과학 특강 차 와있었다. 그때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와 창조과학회의 사역은 일찍이 알려진 바 있어 그를 알아보았다. 이렇게 주 안에서 코이노니아가 이뤄지게 되었고 그 후 다시 연구년이 되어 한국에 왔을 때 우리는 가족처럼 그의 집에 초대되어 한데 지내기도 했다. 우리는 만나면 물리학 전문가가 되었다. <팽이는 왜 도는가?>라는 물리적 명제를 놓고서 나는 신대원 은사이셨던 이보민 박사(S대학 물리학전공)의 물리학 명제에서 신학과 윤리로의 행보라는 재미나는 과외수업을 받은 적 있어, 허목사님과의 대화에서 그 팽이가 견인이 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4집에서도 팽이는 유감없이 시가 되어 발휘되고 있다.

허성욱 박사의 시조집 「세월이 마주 웃는다」
허성욱 박사의 시조집 「세월이 마주 웃는다」

 

허목사님의 향리는 김해 생림이다. 소 먹이던 목동시절을 보냈고 집안의 내력으로 자연스럽게 불경을 대할 수 있었다. 초등시절 잠시 김해 마사교회 주일학생이 되기도 한다. 그는 소 먹이던 초·중 시절을 지나면서 자연의 조화와 우주의 법칙에 감탄해 마지않았으며 불교의 영향으로 수평선과 지평선 너머를 볼 줄 알게 되어 사고력을 키우게 되었다.

 

그가 글에 대한 관심과 연계는, 군대시절 51사단 해안 부대에 근무했던 당시 전우신문에 가장 계급이 낮은 이로서 운문이 실렸을 때, 연대 본부 내 어느 간부의 격려와 칭찬으로 창작에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글쓰기가 향상되어 영덕 문화원에서 개최하는 백일장에 당선되었고 상장이 도착하여 중대 전령에 의해서 한 참 뒤에 전달 받았다고 전한다. 매일신문에도 시 작품을 투고하여 실리기도 했다. 당시 크리스천 군종병 중심으로 절기 때 문화예술제와 시화전에도 참여하는 등 시 쓰기에 더욱 열중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부산대학 물리학 출신의 부산시 순위고시에서도 성적이 탁월하였다. 그는 한때 태권도 고단자로서 체육관을 설립하여 후진을 길러내었던 사범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산 지하철에서 노인이 된 K 선배를 만난다.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았는지... 옛날과는 반대로 선배의 어깨를 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지하철에서의 이러한 그림은 우리 모두에게 편하게 그려지는 그림이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일상에서 시민을 포함한 만인이 함께 교감하는 교신처이다. 서로 미소 짓는 얼굴에서 억새꽃 군무를 느끼며 4권의 제목 세월이 마주 웃는다가 탄생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세월은 지나온 무수한 시간의 대명사이다. 마주는 과거에는 선배였지만, 이제는 동료가 된 친구이리라. 허목사님은 성지공고 물리과 교사였고, 그는 D 공고의 건축과 교사였다. 서로 어깨를 친다한들 아무도 시비 걸지 못할 사이이다. 웃음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웃음은 먼저 좋은 피를 만든다. 그렇다, 웃음은 혈전을 깨끗하게 한다. 이 글은 소탈하면서도 동료의식을 일깨워준다. 단지 목사로서의 만남이 아닌, "지하철 한 정거장의 거리를 두고서 고향 산천이 지나가는" 한 순간이 이 시조(정형시)를 맑게 반전시키는 토양의 객토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허성욱 글쓰기의 시적 매력은 다름 아닌 여기에 있다.

 

제목VOL

1

2

3

월포리사설(1986)

멀미의 바다위에 당신이 계십니다(1992)

생수를 찾아서(1998)

4

(2021)

세월이 마주 웃는다

구성

주제 및 서정

편수

1

일상의 삶의 얘기이며 주제가 연결되는 산책의 자리이다. 그 반 경은 주로 경남 남부의 산들과 강과 근교의 얘기들이다.

20

2

삶의 자리는 현장 위주의 산책로와 집 주변 근처에서 생동하는 만남과 사색들이다.

20

3

주로 가족(혈연)이 소재들이다. 부부와 큰 형님, 아우 그리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그리움을 싣고 있다.

20

4

신앙 중심의(산문으로 써도 좋은 교회기념일 등 성경본문과 설 교지침에 대한 스토리를 가진 작품들) 신앙고백, 담론적인 시조

성령의 감동, 성전의 그리움이 수놓인 시편들.

23

5

땅끝까지 이르는 삶의 진솔한 얘기들이 먼 여행을 통해서 내부 로부터 말의 염원(씨앗)을 심고 있다. 시적 긴장감이 감돈다.

20

1부를 열면 일상의 삶의 이야기로써 경남의 산들과 강들, 자연에 펼쳐지는 계절을 담고 있다. 시조 <세월이 마주 웃는다>의 시적 모티브는 서두에서 밝혔듯이 지하철에서 만난 고향의 K 선배이자 동료이다. 마지막 연에서 고향의 산천을 만난 듯이 한 인물에 따르는 세월과 배경과 회상은 그 역사를 숨 쉬게 한다. 1부에서 독자들은 산과 강과 바다와 고향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가야산은 속내를 감춘 산으로 골안개만 피우고 있다. 낙동강은 그냥 침묵하며 속으로만 흐르고 그 하늘 위로 유유자적하는 구름이 지난다. 이렇듯 제1부에서 만나는 자연과 경관은 주로 3층 구조로 이루어진다. <공중전화>에서도 대합실(세월)얼굴(신발소리)그리움(전화번호) 눈길이 잠시 머뭇거리면서(6) 그리움이 밀려오는 것이다. <호계역>에서의 태화강마저 잔잔한 물결을 이룬다. <일출주변>에서 태양 자신은 생명의 힘으로 꿈틀대나 주변은 여유자적하다. <튤립>에서 튤립의 꽃이 세월이라면 꽃이 질 때 세월도 지며 숨길 수 없는 근심을 보랏빛에 담아낸다. <봄의 사색>에서는 목련꽃잎에 멍든 하늘이 소재이다. 그리고 지그시 눈감는 달빛이다. <담쟁이>는 멍드는지 피어나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벽에 바짝 붙는 고요함이다. <호박소>에선 가을 산을 비유하여 낙엽을 세월의 비밀이라고 은유한다. 주변의 재약산 가지산 백운산이 소()를 호위하며 그리움을 품는다. 경관과 사색과 그리움은 모두 수동태이다. <무척산>역시 일생동안 마음에 새긴 꽃 같은 산이 된다.

 

<세월이 마주 웃는다>

 

! 저 노인, 곽 선배다

어느새 백발이다

 

이젠 그때처럼

내가 선배 어깨 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세월이 마주 웃는다

 

중학 동기들과

회포 풀고 온다면서

 

만면에 짓는 미소

억새꽃 군무 같다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

고향 산천이 지나간다

 

2부에서는 현장 위주의 산책과 주관적 사색이다. 주변과의 만남과 저자의 내면적 교제를 담고 있다. 2부에서의 수작은 <갈대밭>이다. 유년의 들녘에서 소 먹이던 때의 회상과 어머니의 음성에서 시작한다. 갈대꽃의 백발이 예사롭지 않다. 그 유년의 들녘에서 갈대꽃을 바라보며 미래를 내다보는 세월의 유수함을 백발의 머리에 비유하고 있음이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팽이>의 이미저리에서 물리학자의 표상이 드러난다. 수직과 수평돌기, 힘의 균형과 천성적 잠, 팽이의 역학을 삶과 결부시키면서 간절한 그리움으로 돌고 있다는 팽이를 주시한다. 어쩌면 저자의 자화상과도 같은 그 끝점에서 잠이 드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라고 애써 강조하고 있다. <백목련2>에서도 그 속내를 보이지 않는 잎사귀라고... "초록으로 앓고 있다"1부에서와 같은 주제의 글쓰기 목록을 이어주고 있다. <온천천 소묘>에서 2부의 시는 다시 부활처럼 활력을 얻는다.

 

<온천천 소묘>

 

냇물이 지나가며

콧노래를 불러댄다

 

흥얼흥얼 졸졸졸졸

제 장단이 따로 있다

 

몇 군데

모래톱 남기는

여유도 부려본다

 

천변에 피워 둔 꽃

노랗게 웃을 즈음

 

감나무 가지마다

홍시가 익어가고

 

교각은

발가락 사이로

비눗물을 풀고 있다

 

우레탄 작업 지연

알림판을 읽다 말고

 

가을이 종종걸음으로

온천천을 지나가고

 

저만치

두루미 한 마리

천공을 날아간다

 

<난중비망록>에서 저자는 비망록을 코로나라고 남기고 있다.

쟁기 써레 지나가고 고무래로 고른 흙에

물주고 퇴비 넣은 저마다의 내력들이

코로나 역병 앞에서 자유 대련하고 있다 (3)

 

경건의 능력을 잃고 회오리로 감겨 올라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제 각각 해석되고

어느새 회군을 하며 만보기나 만진다 (6)

 

배경과 공간은 이날도 온천천을 지나는 오후의 한나절이다. 현실에서 바라보는 온천천 묘사는 황사경보(재난) 중에서도 재잘거리며 개울물 따라 활보하고 행인들의 자유로운 토론은 계속된다. 자신은 결코 기독교 배교의 전통에 서지 않으면서 온천천 주변의 모습을 선명하게 묘사하기에 이른다. 온천천을 다시 회군하는 모습에서 어느새 현실이 손에 잡히고 있다. 저자는 산책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변심을 되풀이하는 세속으로부터 해방될 날을 꿈꾸고 있다.

 

다음의 시에서 독자들은 서정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벌초>

 

할머니 산소 가는 길

날 따라오라는 듯

 

한 마리 노랑나비

팔랑팔랑 앞장을 선다

 

허성욱 시조의 압권이며 서정시의 백미이다. "손자가 길 못 찾을까봐 할머니가 보내신 걸까?" 추석을 앞두고 향리에 벌초하러 나서는 손자의 모습이 그윽하다. 그를 인도하는 것은 길도 성묘할 연장도 아닌, 팔랑 팔랑하는 한 마리의 노랑나비인 것이다.

 

저자의 시편 1~2부에서 왜, 그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자연을 묘사함에 있어 적용된 그리움이 숨을 죽이거나 고여 있거나 멍든 채 잠잠히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은 그 해답을 곧 3~4부에서 찾을 수 있다. 3부에서 노래하는 주제들은 가족(혈연)과의 애틋한 정과 고향과 묘지이다. 3부가 시작되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즉시 <어머니 산소>가 나온다. 거기에는 독자들 중 대부분이 체험했을 법한 아득한 그리움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다. 아내의 떠남과 6개월 후의 아우의 갑작스런 별세에 이어서 부모님 같던 큰 형님의 별세가 잇따르게 된다. 어머니는 사라지지 않은 삶의 이정표로써 가까이 그리워지고, 그 어머니는 철따라 그 산자락에서 꽃피우고 계신다. 그 다음 페이지가 <큰 형님을 여의고>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던 현실을 대면해야 할 저자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형님을 보내드리는 멀고 먼 저 천국문을 통곡으로 다스리는" 노래를 들어보라, 독자들은 어떻게 이 노래를 이생에서 따라 부를 수 있을런가? 그것은 <빈자리>로 통한다.

 

시간은 또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잠자코 웃으시던 모습

뇌리를 스쳐 가네

 

자꾸만

돌아 보이는

그리움을 어이할꼬?

 

일과를 다 마치고

침대에 누웠으니

 

피붙이 챙겨주신

이런저런 순간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3부에서 여섯 번째 시가 <비 내리는 날> 실로암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시는 부인되는 고/김미영 사모를 여의고 실로암에 장사지낸 지하철 4호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한여름 그리움을 신열로 달랜다. 그 산길은 저자가 딛고 디뎌서 익숙하다.

 

<비 내리는 날>

 

보고 싶다

비가 내린다

그래도 가야겠다

 

지하철 4호선에

몸을 싣고 떠나본다

 

산길을 올라가며

눈물처럼 내리는 비

 

후드득

받쳐 든 우산

아리게 흔들린다

 

<당신의 흔적>에서는 하늘로 떠나간 부인의 지갑을 열며 면허증을 만져보면서 그 흔적을 읽는 장면이다. 적성검사 기간인데 저 면허는 어찌할꼬?(4) 아내의 적성검사 기간을 기억하며 면허기간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다. 언제나 함께 가던 "용호동 남부면허장"이라고 속절없이 되뇌인다. 이렇듯 그에게 있어 1~2부에서 하염없는 그리움과 벽에 바짝 붙은 담쟁이 마냥 숨죽이고 있던 호흡의 정체가 무엇이었는가를 독자들에게 암호라도 풀어주는 양 가까이 귓전을 울려주고 있다. 그는 <청도 휴게소>에서도 <고촌리 산길>에서도 봄까치꽃을 보면서도 임(부인)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촌리 뒷산이 아직도 고뿔을 앓고 있다고 감정이입 시키는 것이다. 그의 눈앞에는 동백꽃도 백목련도 신열을 앓고서 골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추석>, <교회 가는 길>도 모든 신경세포가 부인에 대한 애틋한 연민으로 손수건을 만지게 만든다. <아우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혼자된 나를 위해 택배로 보내줬던

한 근원 진한 정이 아직도 따스한데

6묘역 스산한 바람 옷깃을 파고든다

 

그 약속

귀에 쟁쟁하구나

그날 그 마지막 통화

 

독자들은 비로소 그가 '세월이 멈춰서 있으며' 세월이 고요하게 적막마저 고여 있음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부에서는 3부에 격앙되어 있던 슬픔과 고독의 연민을 한층 승화시키고 있다. 이생에서의 이별이라는 아픔의 교량을 어떻게 건넜을까? 동시에 그의 부인과 혈연들은 허목사를 남겨두고서 어떻게 먼저 요단을 건너갔을까? 어떤 지인은 욥과 같다고 위로했다고 한다. 말로 표현하기는 그래도 주고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어떻게 그 아픔을 이렇게 시조로 작품으로 남길 수 있었을까? 죽음 자체를 연구하듯 쓴 논문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이별을 다룬 논리도 아니면서, 산불이 타는 듯 그리움으로 바삭거리며 달려오는 서정을 어떻게 한 땀 한 땀 형상화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팽이를 연구한다면 몰라도 물리학자가 다루는 죽음과 이별은 무엇이며 신학과정을 마치고 안수 받은 목사로서의 다루는 죽음과 생명은 또 무엇일까?

 

5부에서는 스스로의 확고한 신념에 차 있다. 먼 여행길에서 확신에 찬 삶의 자리를 보여준다. 이번 시조집은 어떤 순차적인 내력보다는 일상의 삶의 자리를 기···결로 엮고 있는 듯하다. 세월이 비록 시리고 아프지만, 그 앞에선 어느 날 만난 고향의 지인 앞에서 세월이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고향 산천이 웃고 있는 것이다. 특히 4부에 게재한 삼일교회(부산 초량)의 설립 기념주일 48~50주년, 66~67주년 그리고 70주년(2021) 모두 6편의 기념시(행사시)로서 허성욱의 필치를 독자들 앞에 선보인다. 우리들은 매년 허다한 기념시와 교회설립 행사시를 대해온다. 그렇지만 허성욱과 삼일교회 사이에는 남다른 애정과 사연의 숨결이 고동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첫째, 그에게 있어 삼일교회는 살아있는 역사적 전설이며 그렇게 "눈물처럼 내리던 비"가 생생하게 기억되는 교회이다(48주년 기념).

둘째, 그렇게 "우산 함께 받쳐 들고 마음하나 이루었던 눈부신 은혜"의 단합된 교회이다(49주년 기념).

셋째, 주님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요한의 아들 시몬을 부르시던 그 음성으로" 삼일아! 삼일아! 삼일아! 세 번씩 거듭 부르는 교회이다(50주년 기념).

넷째, 광야의 그 음성은 "혼란스런 때에도 십자가 바라 본" 그런 기도하는 교회였다(66주년 기념).

다섯째, 저자는 초량동 50번지를 잊지 못한다. 유일신 신앙의 가르침과 96평 판자 교회당과 십자가를 회억하며 "시대의 아픔 앞에 첫 믿음을 돌아보며" 저자의 기독교 교리를 고백하고 있는 생명신학이 있는 교회이다(67주년 기념).

여섯째, 마지막 편 <날마다 교회로>에서는 마침내 저자 자신이 삼일교회가 되고 자신은 교회의 분신이 된다. 게달의 따끈한 장막과도 같고, 허성욱 자신이 게달의 검은 빛 장막이 되기도 한다. 그 장막에 향과 기름이 배이기도 하고, 뚝뚝 보혈이 떨어지기도 하고, 나아가 "왕의 방"이 나온다. 이는 아가서 1장에 나오는 궁정의 내실로써 솔로몬의 안방(현대적 해석으로 교회당)을 비유한다. 저자는 안방의 알레고리를 기억할 만큼 말씀의 제단을 사모하고 있다. 왕의 처녀 술람미가 솔로몬 앞으로 나아갔듯이 그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갑니다"라고 고백하며(70주년 기념시) 전체 6편의 기념시를 마감한다.

 

우리는 여기서 현재 각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 사랑에 닻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에 돌 항아리 다섯이 있었다면, 허성욱의 삼일교회 사랑은 적어도 여섯 편의 기념시가 회자하고 있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기서 집사 직분으로 시작하였으며, 신학공부도 목사됨의 안수도 여기에 본적을 두고 있으니, 부인은 삼일교회의 제2성가대 지휘자로 헌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허성욱은 이 교회의 교역자로서 정년을 맞은 것은 아니지만, 목사로서의 영예로운 은퇴기념을 위해 이 교회가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애정과 회포가 어찌 남다르지 않겠는가.

 

5부는 본 시조집의 대단원이다. 5부를 해석하며 서평하려면 앞서 기록한 1부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5부에선, 1~4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의 주변이 아닌, 큐슈와 그랜드캐니언과 르메트르의 우주와 열차와 버스 등 이방 유랑의 시조들이 나온다. 최종의 시 <고목>은 두고두고 여운을 남길 것이다.

 

<고목>

 

세월이 흘러가면

어느새 남는 상흔

 

갈라지고 엉겨 붙고

서로 그리 손을 잡고

 

한 생애

길동무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한다

 

그의 시는 오선지에 도돌이표를 그리며 다시 그리움의 물결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4부에서 그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을 생각한다. <성문에 앉았다가 창 19:1-3> 아직 창세기 194절 이하가 기록되기 직전 허성욱에게 있어 성문은 어떤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에게 물어보기 전, 독자들이 찾아야 할 것은 행간이다.

 

<성문에 앉았다가> 19:1-3

 

마므레로부터 오는

소식하나 없는 오후

 

성문에 홀로 앉아

심령에 거풍을 쐬며

 

듣는다

바람결 따라

상수리 잎 서걱이는 소리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 어조에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때의 성문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롯의 성실성이다. 이곳은 그 성실함이 소문나는 근원이기도 하다. 타인과 나그네(때때로 천사)에게 초대와 접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잠언 3123절에는 진귀한 구절이 나온다. "그의 남편을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그 현숙한 아내는 자기의 집안일을 보살피는 동시에 남편을 성문에서 칭찬받게 만드는 부인이다.

 

본 시조집 4부를 논하다가 성문을 클로즈업 시키는 것은 평자의 비약일 수도 있다. 거풍(擧風)은 문자 그대로 통풍이 잘 안 되는 곳에 습기 찬 책이나 옷 등의 물건을 바람에 쐬어주고 햇볕에 말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문에 홀로 앉아 거풍을 쐬는" 그 심령을 통과할 바람과 햇볕은 과연 무엇일까? 꼬리를 무는 생각/ 이리저리 뒤척여도 <롯을 생각하며 1> /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온 들을 바라보며/ 옹기점 연기 같은 연기/ 까맣게 속을 태운다" 여기서 독자들은 홀로 남은 롯과 홀로 남은 자신(저자)을 두고서 옹기점 연기 같은 연기로써 까맣게 속 태우는 다른 연기를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거풍(擧風)은 이 시조집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해답이자 또 다른 수수께끼로써 독자들 내면에 고독과 함께 자리 잡는 해석학이 될 것이다.

 

[결어] :

허성욱 목사님에게 다른 시조집 1~3권이 있으니 전체를 평론하면 한 저자의 반()전기집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제4권을 요약하려 한다.

 

1. 본 시조집은 저자의 일상적인 산책과 묵상을 통해 가족에 관한 애정을 담아낸다. 소재로써 동원된 자연물들과 계절감각은 저자의 내면세계로부터 슬프게 달아오르는 또 다른 공간이다.

 

2. 비에서 비유된 별리의 이미저리(imagery)이다. 한때 도ㅈ환은 부인을 장사지내고 돌아오는 길에서 '접시꽃 당신'이라는 빛바랜 꽃을 피웠다. 하지만 허성욱에게 있어 그리움의 꽃은 대지에 피어나는 신화적인 자연의 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꽃은 활화산 같은 열정이라기보다 조용한 산속에 고여 있는 연못과도 같다. 그 연못에 신열을 앓으며 아프게 채우며 내리는 비의 상징이 그의 주제이며 이번 시조집을 서정의 연못으로 안내하고 있다. 아내를 여읜 그는 아내에 의해 아내를 향해 아내를 위해서 극진한 민주주의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서 호흡한다. 저자는 아내를 장례한 후 매 금요일마다 실로암 묘역을 찾아가 무덤이 젖도록 울다가 내려왔다고 적는다. 그 눈물이 비가 되었고 그때 내린 비가 그가 쏟은 눈물이 된 것이다.

 

3. 허성욱의 시문은 <성문에 앉았다가>에 나타나듯이 그의 영성이 숨 쉬는 '성문의 시학'이다. 성문은 저 유명한 일화인 보아스가 앉아있던 곳이기도 하다. 주석적으로 장로와 함께 성문에 앉는 것은 남자로서의 큰 영예로 여겨졌고, 성읍의 유력한 자만이 성문어귀에 있는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갔던 사실은(4:1) 지금까지는 룻의 요청에 대응하는 수동의 모습이었으나, 앞으로는 보아스 자신이 능동적인 행위자로 서게 됨을 시사한다. 보아스의 영성이 성문에서 빛났던 것처럼 허성욱 시조의 시작(詩作)공간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창조과학회 학자로서 성문에 머물러주기를 기대하고 싶다.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이름이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증명하는 것이리라. 다음에 잉태될 제5집에선 더 나은 본향을 향한 성문에서의 능동적인 작품을 기다려본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