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패스 반대 집회에서 나타난 전체주의적 본성
자유와 전체주의의 아이러니한 조화
'성경적 자유'와 '세속적 자유'의 혼동
인간에게는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려는 죄성 있어
우리의 소속감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해야

성경, 자유주의의 시녀가 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방역패스 반대 집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고 한다.

여러분, 모두 백신 접종 안하셨죠? 혹시 맞으셔더라도 부스터샷 맞을 분은 안계시죠?”

방역패스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백신을 미접종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계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부스터샷을 맞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위 집단에서 소외된다. 특정한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방역패스를 정당하게반대할 권리가 주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런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백신을 사실상 강제하는 방역패스 정책 뿐만 아니라, 자유를 외치는 집단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자유주의가 실현되려면 공동선과 공동체성이 필요한데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사회계약론이다인간은 기본권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갖고 있지만, 공통된 권력이 없는 자연상태에서의 무한한 추구는 필연적으로 개인들 사이에 이익 갈등을 야기하고 결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회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회계약론이며, 따라서 자유주의는 사회계약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소외된다. 자유주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화이다.

자유의 이데올로기화라는 측면에서 자유주의는 방역패스 논쟁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찬성진영에서는 참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한 사회계약이 '백신접종'과 '방역패스'인 반면, 반대진영에서는 백신반대’, 또는 백신미접종이 사회계약이 된 양상을 보인다.

눈여겨 볼 점은 - 비록 전국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백신을 접종했지만 위와 같이 백신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보수적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적 자유세속적 자유를 혼동하는 지점이다. 백신반대와 백신미접종, 그리고 반정부 기조가 기독교인들에게 이데올로기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이데올로기인 성경은 자유주의의 시녀가 되었다.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전체주의적 본성

세속적인 측면에서 자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 실체는 목적론이 소멸된 무한한 심연과 같다. 아무런 법과 윤리가 지배하지 않는 무인도에 혼자 갇혀있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매일이 두려운 상황 속에서 고독과 사투하며, 심연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야 하는 괴로움과 공포가 자유의 실체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자유에 대한 공포가 대중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대중은 이러한 공포로부터 피하기 위해 전체주의에 의존하는데, 그는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표현했다. 나치즘이 부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의 방역패스 정책이 발표된 후, 당장 식당과 카페, 심지어 장 보러 마트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격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유의 심연에 놓일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사회는 인간을 심연가운데에 두지 않는다. 아니, 불가능하다. 사회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계약을 체결하고 사회로 귀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로부터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서는 계약체결을 통해 특정 사회에 귀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좌우 가릴 것 없이 나타나는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전체주의적 본성이다.

현재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우리는 백신접종과 미접종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백신 접종 집단에 속할 것인가, ‘미접종 집단에 속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사탄이 속삭인다. 이 집단의 소속감으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그러므로 자유가 이데올로기화가 되면 자유와 전체주의의 양립이 가능하다. 자유를 지탱하는 특정한사회계약을 강제하면 그것이 전체주의이기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여러 새로운사회계약 패러다임들이 등장하면서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전 세계적으로 자유와 윤리, 공동체, 공동선 등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고귀한 가치들이 재구성되고 있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정말로 엄중한 시기이다. 이런 때에 교회가 어떠한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굉장히 중요하다.

무인도에 포류된 뒤 탈출 과정을 그리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0)의 한 장면. 주인공은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배구공을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무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는 무의미로 점철된 심연이다. 인간은 의미의 지배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무인도에 포류된 뒤 탈출 과정을 그리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0)의 한 장면. 주인공은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배구공을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전체주의적 본성을 피할 유일한 길

교회의 대답은 무엇인가? 특정한 사회에 구속되어 진정한 자유를 결코 누릴 수 없는 암울한 운명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며 사는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자유는 사회계약과 얽혀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회계약은 곧 타율이다. 타율이 내 자율성을 통제하면서 진정한 자유가 침해된다. 따라서 자유의 과제는 자율과 타율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율과 타율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면서 이 둘 사이의 중재를 꾀한다. 타율이 자율이 되고 자율이 타율이 되는 것, 즉 자율과 타율의 합치가 근대철학이 원했던 이상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정언명령에 귀속시킴으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켰다. 현대철학은 모든 타율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지만 이 마저도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사회계약은 언약이다. 우리가 구속된 사회는 주님의 몸 된 보편교회이다. 성경적으로 언약의 그림언어는 결혼이다. 결혼의 조건은 사랑이다. 그래서 율법의 요약은 사랑이다. 율법이 내 자율을 제한하지 않는 이유는 주의 법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율법이 대신 성취되어 구원을 누리는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유를 이루는 유일한 답을 사랑이라고 말씀한다.

사랑의 속성은 어떠한가? 사랑은 희생을 담지한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해산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자식이 부모를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자신을 내어준다.

사랑은 타율에 정합하려는 목적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 일은 '자율'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연인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감정과 같다. 사랑은 원수라도 화목하게 한다. 사랑은 자신의 자유를 사랑하는 타인을 위해 사용하도록 한다이러한 모든 사랑의 속성들은 자율과 타율의 일치를 이룬다.

이처럼 사랑은 율법을 요청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이 율법을 이루기 때문이다. 사랑이 율법을 이루었다는 것은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벗어나 내 자유의지가 율법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바라고 있는 '합목적적 세계'를 이룬다. 사랑만이 목적론이 있는 자유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다면, 백신 접종 유무나 백신찬반과 같은 세속적인 사회계약 이전에, 같은 하나님 나라의 계약을 체결한 시민으로서 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 교회의 사명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미혹할 때 말씀을 사용하여 미혹한다. 마귀가 사용하는 미혹의 방법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 마귀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마귀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와 세속적 자유를 분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전체주의로 미혹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해야할 일은 더욱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힘쓰는 것이다.

최근 법원의 잇따른 방역패스 효력정지 판결에 근거하면 방역패스를 빌미로 백신을 강제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 점점 자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초연하고 겸비하여, 팬데믹으로 인해 영육간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성도들과 이웃들을 더욱 사랑으로 목양하고 돌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시대적 풍파에 흔들리거나 격동하지 않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교회의 마땅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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