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 (Cebu Bible College, PHL 교수) 부산대학교,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 영국 브리스톨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구약윤리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경성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통일교육문화원 이사장,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이성구 (Cebu Bible College, PHL 교수) 부산대학교,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 영국 브리스톨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구약윤리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경성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통일교육문화원 이사장,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궁극적 질문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3년째 계속되고 세계 각국이 늘어나는 감염자, 사망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짙어져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세계는 언제까지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수십만 명이 죽어가는데 만약 세계 3차 대전이 발생한다면 지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한민국은 과연 안전한가?”

비록 COVID-19로 세계가 흔들리는 것 같아도 대다수의 사람은 여전히 이런 감염병은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갈수록 생활이 어려운 계층이 생겨나지만, 여전히 그럭저럭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일어났지만 세계를 단번에 파괴할 수 있는 대규모 전쟁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국지적인 것에 불과하다. 최근 러시아가 군대를 전진 배치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푸틴(Vladimir Putin)이 그렇게 쉽게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대체로 세계는 평화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국과 중국이 여러 측면에서 긴장 관계를 이어가고, 러시아가 유럽 전역에 가스 공급을 갑자기 줄이면서 언제라도 에너지 파동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어 세계는 이래저래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세계 정상이 모여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탄소 제로 시대를 노래하다가 갑자기 에너지 위기론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져 세상을 놀라게 할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우주 정복과 같은 화려한 수사들이 계속되지만, 개인의 건강을 제대로 확보할 수 있을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고 지구가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은 모든 인류의 평안과 복지를 생각할 때 항상 고려해야 하는 상수(常數)가 되고 있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이 불안을 제거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가졌다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삶을 위협하는 불편한 상호관계

인간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존재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는 역시 관계이다. 인간이 인간과 자연 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감염병이 창궐하고 기후가 격변하고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재앙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할 때 개인이나 가정, 국가, 세계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작은 관계의 파괴가 커다란 사회적 소요를 가져오고 인간 전체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이런 관계의 악화는 마침내 전쟁이라는 결과를 빚게 된다.

중동의 위험성은 이스라엘과 아랍인들과의 신앙적 갈등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야위즘(Yahwism, later Judaism)과 알라 신앙을 주장하는 이슬람의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으로 확대되고 있고,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이슬람 무장단체의 공격은 20019·11 테러로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국, 미국은 지난 20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피해를 겪으며 곤욕을 치렀다.

이런 연유로 오랫동안 많은 전문가는 중동이 세계의 화약고이며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바로 이스라엘과 중동국가 간의 전쟁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확언하다시피 했다. 실제로 1948년 근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 승인되면서 곧바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1952년의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위기가 발생하고, 1967년 유명한 6일 전쟁이 일어났으며, 다시 197310월 욤키푸르(대속죄일) 전쟁을 치렀다. 그때마다 이스라엘과 그를 둘러싼 아랍국들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1973년의 전쟁에는 소련과 미국이 함께 가담하면서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동전쟁은 그 이상 확대되지 않았고,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유엔까지 개입해야 하는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강대국들 사이의 경쟁 관계로 인한 갈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준동 가능성은 세계를 뒤흔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계대전 같은 위기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예언자들이 바라본 세계

이스라엘과 아랍세계는 어떻게 결정적인 전쟁에 빠져들지 않고 이런 상태로나마 평화의 시간을 지속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은 인구나 경제적 능력 측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막강한 중동의 아랍국가에 둘러싸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화를 유지해 가는 것은 북한, 중국, 러시아 등 적대적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진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示唆)한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과 분열의 씨앗으로 간주되는 에서의 후손 아랍국들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오늘 이 글에서 모든 경우를 살필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을 남긴 예언자들이 보여준 한결같은 특징 하나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의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17권의 구약 예언서 전체를 살피면 호세아서를 제외한 모든 예언서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웃한 열방(列邦)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특히 이사야(13-23), 예레미야(46-51), 에스겔(25-32) 등은 아주 긴 분량으로 앗수르, 바벨론, 블레셋, 모압, 다메섹, 구스, 애굽, 에돔, 아라비아, 두로 등 유다 주변의 나라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선포했다. 물론 그들이 다른 나라들로 사역지를 옮겨가며 열방의 백성이 들을 수 있도록 예언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인지를 열방에 대한 심판 예언을 통하여 더욱 확실히 해 두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뿐만 아니라 열방들도 이스라엘 못지않은 관심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면, 예언자들이 이스라엘과 열방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랐지만, 그 둘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우리는 열방을 향한 예언을 제일 많이 담고 있는 이사야 1923-25절에서 그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사야 19장은 전반부인 1-15절까지는 이집트인에 대한 심판을 경고(19:1)하고 있다. 그들 내부에서 분쟁이 일어나 서로를 치는 일이 발생할 것이며 정신이 쇠약해지고 강과 바다, 나아가 나일강 언덕의 초장과 곡식 밭이 마르는 총체적인 자연재해가 발생해 망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후반부인 16절부터는 전혀 다른 성격의 예언이 기록되고 있다. 한마디로 이집트에 완전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선포한다. 가능하면 16-25절 전체 예언을 자세하게 들어보기를 권한다. ‘그날에라는 어구를 다섯 차례나 동원해 어느 날인가에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일이 생겨날 것을 선포한다. 이집트가 두려워할 것이고, 유다의 땅이 이집트의 두려움이 될 것이며, 이집트에서 가나안 방언, 곧 히브리어가 사용될 것이고, 그 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설치되고 변경에는 여호와를 알리는 기둥이 세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침내 여호와는 이집트 땅에 한 구원자(메시아)’까지 보내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천지개벽이 일어난다는 예언이다. 이 단락의 예언은 23절 이하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23 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大路, highway)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 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19-23-25).

 

고대 이스라엘의 관점이든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입장에서라도 이런 예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어떻게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둘러싼 양 강대국과 이스라엘이 서로 고속도로로 왕래하며 교통하고,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가? 게다가 오직 이스라엘에만 적용될 수 있는 내 백성(‘ammiy, 10:24, 43:6,7; 1:10; 2:23; 11:4)’, ‘내 손으로 지은 것(ma‘ash yaday, 60:21, 64:8; 119:73, 138:8)’이라는 용어를 원수처럼 대해온 이들 나라를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가? 거기다 이스라엘, 애굽, 앗수르 셋이 함께 동일하게 세계 중에서 복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하나님의 유일한 선민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스라엘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끝내 감추거나 지워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꿈을 가진 민족, 꿈을 현실화하는 정치

이스라엘은 앞서 살펴본 대로 중동의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을 뿐 아니라 여전히 긴장 관계를 겪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며 시리아와 이스라엘도 수시로 폭격을 주고받는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물리적으로 이스라엘은 아랍국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아랍세계는 총 22개국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인구는 약 325백만 명이며 대부분이 무슬림으로 갈수록 강경파 원리주의자들의 입김이 세어지고 있다. 경제 규모는 1조 달러를 능가하고 매해 5퍼센트씩 성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인구 1천만도 되지 않는 이스라엘이 상대할 수 있는 나라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너끈하게 나라를 지키고 있고, 나름의 평화를 유지해 가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지금처럼 중동의 아랍국가들과 상당한 기간 공존할 수 있을 가능성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지금도 이들의 귀에 들리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 사상을 품고 살아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평화(샬롬)의 도시인 예루살렘(샬롬)평화의 왕인 솔로몬(샬롬)의 아버지 다윗왕과 같은 위대한 왕 메시아가 다시 나타나 세계를 다스리는 꿈을 키워왔다(9:6-7).

그들의 메시아 관이 그리스도인들과 다르지만 어쨌거나 평화의 왕이 자신들에게 나타나 다스릴 것이라는 꿈은 지우지 않고 있다. 그 꿈은 오늘의 강소국(强小國)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아랍 모든 나라가 어쩌지 못하는 그런 특별한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은 저마다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보여주려 애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이 원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 국민은 모두 경제적 대국이 되기를 원한다. 복지정책이 촘촘한 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 주택가격이 안정되어 누구나 쉽게 집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좋은 직장을 얻어 평안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런 소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쟁의 위험이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북한과 종전협정,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의 위험성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중심으로 생각한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직도 지나치게 대한민국 중심적 사고를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이 모두 동의해야 가능한 평화 프로세스를 우리 위주로만 생각하니 여전히 제자리에서 맴돌거나 안팎으로 다툼만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주는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꿈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집트와 앗수르와 이스라엘 셋이 함께 복이 되는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보다 훨씬 강대국이요, 그러면서 우리의 적대국이기도 했던 나라를 향해 하나님께서 내 백성 일본, 북한이라 부르시고 내 손으로 지은 중국, 러시아라고 부르시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순간을 꿈꾸고 소망하며 살아야 비로소 우리에게 세계와 함께 복을 누리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보게 될 것이다. 반미냐 반중이냐, 친미냐 친중이냐, 반일이냐 친일이냐, 종북 혹은 친북이냐 반북이냐 등의 갈라치기 정치 프레임만으로는 결코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우리의 삶에 길이요 빛이다. 구약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 선지자의 꿈과 비전을 담은 예언을 오늘 우리의 꿈과 비전으로 삼아내는 교회와 민족이요, 특히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기를 소망한다.

 

※ 이 글은 월드뷰 2022년 2월호에 기고 된 글을 허락 받아 게재합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