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수 목사는 청주 한마음교회 담임목사로 학교교회 운동을 통해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서동수 목사는 청주 한마음교회 담임목사로 학교교회 운동을 통해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선거가 치열했습니다. 선거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저도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듯 관전했습니다. 매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막장 사건이 나오는 일일 막장 드라마처럼 뉴스를 보았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SNS는 뜨겁습니다. 한숨과 분노의 소리와 흥분하고 기뻐하는 소리가 교차합니다. 권세를 휘두를 칼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고지에서 한쪽은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잡은 것에 대한 기쁨일 것입니다. 이제 칼을 쥔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칼은 권력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칼을 경계했습니다. 칼은 칼로 망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분명히 합니다.(26:52) 이것도 저것도 주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애초 칼을 잡으려는 경기장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합니다.

 

검과 칼

성경은 검과 칼을 구분합니다. 검은 히브리어로 헤렙입니다. 헬라어로는 마카이입니다. 양면에 날이 있는 검()입니다. 본래 제사장이 소나 양을 잡아 뼈와 살과 기름을 분리할 때 쓰던 것입니다. 지배계급인 제사장이 이 검으로 제사드릴 때 죄에 눌린 백성이 살아났습니다. 칼은 히브리어로 마아켈렛, 헬라어로 프롬하이아입니다. 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로서 주방에서 요리할 재료를 썰거나 다질 때 쓰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부엌칼입니다. 어머니가 이 칼로 가족을 위해 요리할 때 가족이 살았습니다. 양날이 있는 비파형 동검이 지배계층의 탄생을 알리듯이 제사장이 권력에 욕심을 내고 검을 들고 제단을 나와 세상으로 향할 때 전쟁이 일어납니다. 또 피지배계층이 칼을 들고 분노할 때 살육이 일어났습니다. 조선 시대 말 전라도 지방의 민란을 다룬 [군도]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든 칼이 꼭 생선토막 자르는 칼 같이 생겼습니다. 부엌칼이죠. 전쟁을 하면서 이 검과 칼이 점점 길어지고 발달해서 오늘날의 검과 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검()은 지배자들이 권력을 얻으려고 드는 것이고 칼()은 피지배자들이 압제에 항거해서 복수하려고 든 것입니다. 압제를 많이 당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복수의 개념의 칼()을 주로 사용합니다. 늘 괴롭힘을 당한 우리나라도 칼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는 양날의 검을 씁니다.

 

주님은 버리라고 말씀하신 검

그런데 주님이 칼을 버리라 칼은 칼로 망한다고 하실 때 칼은 히브리어로 헤렙, 헬라어로 마카이라는 검()입니다.(18:11)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칼이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고기를 잡고, 배를 가르고 잡아서 파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검을 가졌습니다. 당시는 유월절에 무기를 휴대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많고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많아서 일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불법으로 검을 휴대하고 있습니다. 칼이라면 부엌칼이라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검입니다. 물론 작은 단검이지만, 분명히 그는 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헤렙, 마카이 곧 제사장의 검으로 제물을 잡지 않고 군병을 향해 휘두릅니다. 그리고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제사장의 검이 제물로 향하지 않고 외부로 향하면 피를 부르듯이 지금 말고의 피를 뿌리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물론 베드로는 내가 이렇게라도 예수님을 지켜 드리고 제자 공동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칼을 준비했고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검이 없는 줄 아느냐. 열두 영도 더 되는 검을 든 하늘 군대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휘두르지 않는다. 왜 그것은 내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대신 말고의 귀를 붙여 줍니다. 고치고 치료하십니다. 그들을 살리고 대신 십자가 제단 위에 당신을 속죄 제물로 드립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당신의 피를 흘립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이해 못 합니다. 검을 버린 베드로는 도망합니다. 더는 자기를 보호할 검이 없고, 예수님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검으로 예수님을 지키고, 자기도 지키고, 제자 공동체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는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 검으로 그들을 이기지 못할 뿐 아니라 이긴다고 해도 결국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그러니까 칼은 칼집으로 보내야 합니다. 백성을 위하는 제단을 나온 검은 피를 부릅니다. 제사장의 검, 마카이가 돌아가야 할 집, 칼집은 제단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집을 나온 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푸틴의 칼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부녀자, 어린이 가리지 않습니다.

 

나의 검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우리에게도 제사장의 검이 있습니다. 우리의 검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6:17) 히브리서도 살아 있고 능력있는 말씀의 칼은 설명할 때, 마치 제사장이 제물의 뼈를 갈라내고 각을 뜨는 모습으로 그립니다.(4:12) 그 검()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세상에 나가서 싸우지 말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산 제물 된 너희 자신을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검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 교회를 지키고, 성도를 지키고, 예수님을 지키려고 투쟁합니다. 세상에 분노합니다. 힘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좌절합니다. 베드로처럼 도망합니다. 갈릴리로 떠납니다. 세상으로 도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합니다. 분노로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겨도 집니다. 칼은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이고 잘라내는 칼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검의 집인 십자가 제단에 자신을 올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로 죽여야 합니다. 죄를 잘라내고 육을 잘라내고 옛사람을 잘라내고 나를 잘라내야 합니다. 말씀으로 거짓의 껍데기를 벗겨야 합니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죄를 발라내야 합니다. 욕망의 비곗덩어리를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삽니다.(18:8,9)

선거가 끝나고 이겼다고 흥분하거나 졌다고 좌절한 성도들이여 칼을 잡으려는 경기장을 나오십시오. 그 칼을 잡아도 지고, 놓쳐도 집니다. 세상을 향한 베드로의 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향한 예수님의 검을 들어야 합니다. 그 검으로 죄를 쫓는 눈을 뽑아 버리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말을 하는 혀를 잘라내고, 천국에 가져가서는 안 되는 모든 손을 잘라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발을 잘라내고 이렇게 마귀의 도구가 된 자신을 잘라내야 합니다.

내가 더 큰 힘, 더 큰 칼을 가지면, 하나님께 더 크게 영광 돌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더 큰 성공, 더 큰 칼을 가지면 주님을 위해 이 썩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 칼로 자기를 죽여 만민을 살렸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주님, 제가 뭘 더 잘라내야 합니까? 제가 뭘 더 버려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버려야 할 것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의 칼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 산제물로 자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검

그러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칼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너는 내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불러오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26:53)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왜 군대가 필요합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늘에는 군대가 있습니다. 이 군대는 다른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려고 5분 대기조처럼 대기하는 군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도우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내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칼이 되어 주십니다. 이 군대가 아브라함이 318명으로 가나안 남북전쟁에서 이기게 했습니다. 이 군대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호위한 마하나임 군대입니다.(32:2) 이 군대가 기드온의 300용사가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의 수많은 적을 쓸어버렸습니다. 이 군대가 엘리사를 아람군대로부터 지켰습니다.(왕하 6) 이 군대가 여호사밧이 군대 앞에 찬양대를 세워서 나갈 때 브라가 골짜기에서 이기게 한 군대입니다.(대하 20) 이 군대가 히스기야 앞서 가서 앗수르 군대 135천명을 한 번에 쓸어 버렸습니다. 성경에는 이 군대가 그들의 칼이 되고 마병이 되고 군대가 되어 이기게 한 사건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산성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군대가 되어 주셨듯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칼과 권세와 능력과 승리가 되어 주십니다.

선거로 인해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분들이여. 여러분의 본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이 이 땅에 강물처럼 흐르기 원하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붙잡으려 했거나 붙잡은 검은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베드로의 검은 아니었습니까?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검,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 위에 산 제물로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의 제단에서 예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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