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1차 대구포럼이 3월 25일 대구 샘물교회(담임 소재운 목사) 당에서 열렸다. 2022미포에서 발표하는 김상윤 교수.
2022 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1차 대구포럼이 3월 25일 대구 샘물교회(담임 소재운 목사) 당에서 열렸다. 2022미포에서 발표하는 김상윤 교수.

경명학교의 과거와 미래

김상윤1)

 

들어가면서

본 원고는 필자가 9년 전에 재개교한 경명학교의 이야기를 통해 미래 교회학교 교육에 대한 느낀 점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1. 영남지역 첫 선교사들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 델노르트대학의 학장에 취임했으나 무디의 설교에 감동하여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선교사 언더우드의 형이 경영하던 타자기 회사의 후원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뜻을 같이하던 학우 애니와 결혼하고 바로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한 달 동안 배를 타고 1891129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항이 내려 보이는 영주동 언덕에 사택을 짓고 전도를 시작하여 1894년 봄 부산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 1895년에 부산 영주동 선교사 사택 사랑채에서 열린 한문학교. 사진의 오른쪽 뒤에 애니의 남동생인 아담스와 어학 선생 고학윤, 그 앞엔 서초시의 아들, 왼쪽 뒤엔 베어드, 그 앞에 서상륜, 맨 앞에 애니가 앉아 있다.
▲ 1895년에 부산 영주동 선교사 사택 사랑채에서 열린 한문학교. 사진의 오른쪽 뒤에 애니의 남동생인 아담스와 어학 선생 고학윤, 그 앞엔 서초시의 아들, 왼쪽 뒤엔 베어드, 그 앞에 서상륜, 맨 앞에 애니가 앉아 있다.

이듬해 1985년에는 한문학교를 열었다. 첫 한국인 교사 서초시는 한 달에 7엔을 받았다. 그는 노인으로 김수업과 배성두의 친구였다. 그의 아들은 일정한 봉급 없이 보조교사로 가르치면서 가끔 선물을 받았다. 이 학교는 조선어, 산수, 지리, 성경 등을 가르쳤다.

 

애니가 뇌막염으로 죽은 어린 딸 낸시를 복병산에 묻고는 태평양을 바라보고 울다가 부흥회 때 부르던 곡에 자신이 지은 가사를 붙여 부른 것이 찬송가 387멀리멀리 갔더니이다. 이듬해 10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경복궁의 요청으로 선교사들이 교대로 권총을 소지한 채로 잠을 자면서 고종 왕을 지켰다. 이때의 간절한 기도가 찬송가 375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가 되었다.

 

 

2.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교회의 설립

 

낙동강 창녕함안보가 남쪽은 옛날 밀포 나루가 있던 곳이다. 기차가 없던 옛날에는 여기서 배를 타고 부산 자갈치나 영도까지 왕래하였다. 19세기 말 이곳 출신인 김수업이라는 분이 이령리에 살다가 김해로 가서 오늘의 면장인 풍헌을 지냈다. 그가 부산에서 친구 서초시를 통해 예수를 믿고 친구 배성두와 함께 김해읍교회를 세우고 고향인 시골에 살고 있던 삼종형수 김성아에게 김해김씨 회비를 받으러 왔다.

 

김성아(경주 金聖牙)는 필자의 증조모로 30대의 이른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외아들만 바라보며 살다가 몸까지 자주 아팠다. 불안한 마음에 유명한 무당들을 불러 태어날 손자들만큼은 많기를 빌었다. 그러던 차에 예수를 믿으면 자손이 번성한다는 김수업의 말을 들었다.

 

김성아는 장날에 온다는 선교사를 직접 만나기 위해 손아래 동서와 함께 김해읍 장터까지 걸어서 갔다. 선교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주소를 주고는 방문을 요청하였다. 선교사에게 받은 쪽 복음서를 치마끈에 품고 와서는 안방의 밥상에 올려놓고 정성을 드렸다. 처음에는 가족 몇이 예수를 믿고 나중에 아들 김세민이 믿어 노세영 선교사의 지도로 1897년 이령교회가 설립되었다.

 

노세영 선교사가 의사인 부인과 함께 평안북도 선천으로 이동하자 사보담, 어을빈 등이 그를 대신하여 이곳을 방문했다. 이령교회에 관련된 소식 즉, ‘령동 회당의 이름은 190219일 자 그리스도 신문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3. 이령교회에서 초등과정 경명학교 개교

 

1904년 봄에 곽화서를 교사로 월봉 16(당시 320전에 해당)으로 어린아이들에게 한글 셈하기 성경 노래 등을 가르쳤다. 이령교회를 순회 사역하던 교역자들 중에 베어드 선교사가 세운 부산의 한문학교를 가르치던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초등과정 신학문을 가르쳤다. 멀리 마산과 인근에서도 학생들이 모였다. 개학한 후 6년만인 19116월에 김정오, 이순필, 이수홍, 김응조 등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대구 계성중을 거쳐 서울로 갔다. 김세민의 장남 김정오는 대구 계성중학교를 거쳐 경성약전 1회 입학생으로 초대 대구시의장을, 생질 이순필은 세브란스의전을 입학하여 과 마산지역 초대 신식병원장과 창신학교 한국인 초대교장 등을 지내면서 영남지역 교계와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 1912년 1월 13일 자 경명학교 회계보고서: 교장 김세민(김찬일) 등의 이름과 날인이 보인다. 총지출은 726량 1전 9푼으로 적혀있다.
▲ 1912년 1월 13일 자 경명학교 회계보고서: 교장 김세민(김찬일) 등의 이름과 날인이 보인다. 총지출은 726량 1전 9푼으로 적혀있다.

 

4. 영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

 

1911년 경명학교 첫 졸업생 김정오가 계성중학교에 입학한 해에 누나 김복남이 시집을 가서 그 학교 선배 배동석이 자형이 되었다. 배동석은 김해읍교회 설립자 배성두의 아들로 4년 전인 1907년에 계성중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이은 황태자의 일본 압송에 반대하는 소요사건이었다. 교장 안의와가 경찰에 가서 선처를 부탁하여 겨우 학생들을 꺼내고 주동자 배동석은 서울 경신학교로 전학을 보낸 일이다. 배동석은 1915년에 세브란스의전 재학 중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그해 겨울 비밀리에 만주에서 군사학교를 운영하던 박상진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고 이희영, 이시영, 이동녕 등을 만나 1917년 봄 복학했다. 그다음에는 상해를 다녀왔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자기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던 에비슨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졌다.

 

그의 장인은 함안군 칠북면 조합장으로 농지세 등을 수거하고 있었다. 김세민은 사위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라의 독립이 바로 앞에 놓인 듯하였다. 그리하여 토지세금 등을 담당하는 자가 돈을 가지고 도주한 것처럼 하는 등 수차례 독립자금을 마련해주었다.

 

19192월 중순에 이갑성은 자택에서 음악회를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배동석은 그의 지령을 받고 26일 경남의 민족대표를 추대하기 위하여 마산에서 이상소와 이승규 두 장로를 만났으나 실패하고 마산역에서 의신여학교 교사로 있던 박순천에게 독립선언문을 전달하였다.

 

1919년 사위의 안내로 김세민은 여도선 등 14명의 교인들과 함께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였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참관하고 돌아와 36일 밤 예배당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만들었다. 9일 연개 장터에서 대회장의 개회사와 유광도의 연설, 김정오의 선언문 낭독 후, 경명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선두에 서고 수천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꽹과리를 치면서 감격과 울분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면서 인근 마을을 순회한 후에 석양 무렵에 해산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312일 대산면 평림, 13일 영산, 밀양, 통영, 15일 신반, 16일 지정으로 이어져서 경남 삼일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 2016년 삼일 만세운동 97주년 기념행사에서 부친 김세민을 분장한 배우를 만나자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시는 아들 김필오
▲ 2016년 삼일 만세운동 97주년 기념행사에서 부친 김세민을 분장한 배우를 만나자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시는 아들 김필오

 

5. 심사참배 반대운동의 시작

 

경명학교를 졸업한 김세민 장로의 장남 정오와 차남 주오 두 형제는 대구 신정교회를 잘 섬기다가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로 서로 대립하게 되어 동생 김주오 장로는 교회에서 제명되자 자신이 운영하던 약방을 시골의 우리 아버지에게 팔아 그 돈으로 대구의 첫 고신 서문로교회를 설립하는 데 보태고 자신은 목사가 되기 위해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네 살도 안 된 나는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이사와 정주당 약방에서 주오 큰아버지 식구들과 10명이 넘게 한 부엌에서 같이 살았다. 가족의 생계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던 그런 용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대구에 살던 우리 가족은 내가 9살 때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다시 고향 근처인 남지로 왔다.

 

6. 경명학교 재개교

 

지금은 경명학교가 이름만 남아 있고 건물이나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전해 온 이야기와 옛 문서를 통해 어렴풋이 그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유년의 추억 때문인지 아버지는 이 골짜기 중 따뜻한 양지에 밭을 사서 가끔 여기서 어머니 그리고 나와 셋이서 도시락을 먹었다. 몇 년이 지나 이곳에 구들장이 있는 온돌 집을 한 채 지어 자연인처럼 사셨다.

 

1980년 내가 교육학 석사가 되는 해 아들이 태어나 할아버지가 손자 이름을 석사 석()에 돌림자 양()을 붙여 석양이라고 지으시곤 농장이름도 석양농장이라 하셨다.

▲ 1973년 이령제일교회 여름성경학교 나는 왼쪽 뒤에 사촌 동생 상식을 안고 있다.
▲ 1973년 이령제일교회 여름성경학교 나는 왼쪽 뒤에 사촌 동생 상식을 안고 있다.

이곳에 고신대학의 동료 교수와 학생들을 오기 시작하여 토요학교 등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잘 놀다 갔다. 그러던 중 옛날 경명학교 이름을 되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 제자를 비롯하여 시골의 교회 지도자들과 친척들을 모시고 경명학교 재개교식을 가졌다.

▲ 1990년대 뒷줄 가운데 김신 판사, 김상구, 남은우 교수 앞줄 가운데 권용수 목사. 오른쪽 사진은 2013년 3월 1일 옛 경명학교 터에서 가진 일일 캠프
▲ 1990년대 뒷줄 가운데 김신 판사, 김상구, 남은우 교수 앞줄 가운데 권용수 목사. 오른쪽 사진은 2013년 3월 1일 옛 경명학교 터에서 가진 일일 캠프

이 학교는 정규학교가 아니며 그렇다고 대안학교도 아니다. 교훈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이며 누구든지 방문하여 자연 속에서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자유롭게 놀다가 점심 먹고 또 놀다가 가면 된다. 교장은 필자가, 교감은 필자의 아들인 김석양이 맡고 있으며 코로나 이전에는 부민교회 주일학교에서 토요학교를 매달 셋째 토요일에 교회 봉고 몇 대로 이동하여 11시경 도착하여 330분경에 부산으로 출발하였으며 30명에서 40명 정도 참석했다. 특별한 예배시간은 따로 없이 자연 속에서 여름에는 물놀이, 겨울에는 연날리기 등 계절에 따른 자유놀이를 하고 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방문하여 자유놀이와 자연체험 학습을 하고 간다.

 

나오면서

그동안 학교를 운영하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00년 전에는 문명이 아쉬웠으면 지금은 촌스러운 시골 체험이 아쉽다.

2)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생명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3) 믿음은 언어보다 체험이 중요하니 자연 속에서 직관 교육이 효과적이다.

4) 작고 소박한 것들을 보고 감동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5) 지나친 도시문화로부터 휴식이 필요하다.

6) 예수님의 설교에 기초가 되는 자연의 이미지 형성을 어릴 때 길러야 한다.

7) 몸으로 움직이는 활동을 통해 봉사와 선교를 위한 기초 훈련이 된다.

8) 교단 차원에서의 토요학교 운영을 했으면 좋겠다.

9) 청년과 부모들이 함께 지도하므로 세대 간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10) 학교 친구들을 초청하여 효과적으로 전도를 할 수 있다.

 


미주

1) 경명학교 교장, 연락처 momtest@hanmail.net 고신대학교 아동학과 및 유아교육과 초대학과장

2) 역대 교직원에는 교감 여도선, 교사 곽화서(곽성복 숙부), 김백은, 김주관, 김주현, 구만서, 김정오, 김순, 함태영, 김철부, 황정규, 서학로, 김주오, 김전부, 김도선 제씨이다. 이령교회를 순회한 조사와 전도사는 백도명, 김기현, 서초시, 고명우, 김주관, 이현필, 이윤기, 이윤종, 장상언, 서성숙, 김길창, 최일형, 함태형 제씨이다. 그밖에 경명학교 졸업생으로 하갑조, 윤효량, 황규석, 배대위, 배유위, 김보라, 서요안, 한세호, 곽성복, 김주오, 서완선, 김상서, 김상환, 김상렬, 손명수, 여찬송, 여찬구 외 여러분이 있다.

3) 한국에 병원이 시급하다는 에비슨의 연설을 들은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제중원을 증축하여 세브란스 병원을 만들었다. 에비슨은 배동석이 만세운동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자택에서 숨겨주었으며 감옥에서 결핵에 걸렸을 때 한국 최초의 결핵 병동을 만들고 병보석을 받아내었다.

4) 일본의 압제가 심해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민족자결주의의 소문이 들리면서 우리나라 독립의 요구가 일어나는 시점에 고종 임금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은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불을 붙였다.

5) 박순천(朴順天: 1898-1983 경남 기장 출신 국회의원, 야당 대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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