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1차 대구포럼이 3월 25일 대구 샘물교회(담임 소재운 목사) 당에서 열렸다. 1차 미포 마지막 발제는 성경 강해 시간이다. 이번 미포 말씀 강해는 김하연 목사가 맡았다. 발표하는 김하연 목사(대구삼승교회, Ph.D. 구약학)
2022 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1차 대구포럼이 3월 25일 대구 샘물교회(담임 소재운 목사) 당에서 열렸다. 1차 미포 마지막 발제는 성경 강해 시간이다. 이번 미포 말씀 강해는 김하연 목사가 맡았다. 발표하는 김하연 목사(대구삼승교회, Ph.D. 구약학)

 

레위기 강해(Leviticus)

김하연 목사(대구삼승교회, Ph.D. 구약학)

 

들어가는 말

소위 메타버스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다가오는 시대의 변화의 주기가 점점 짧아져서 도무지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야 할지도 급급한 가운데 있다. 코로나 대역병으로 인하여 설교자들은 당황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고난가운데 있는 교회를 바라보며 이럴 때에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하셨다.1)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연구하고 전하는 것이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런 시대에 수천년 전에 기록된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오래된 본문 중심의 설교는 진부하지는 않을까, 그냥 울리는 태고적 메아리가 아닐까, 공중에 떠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시대는 초스피드로 변하고 있고 눈앞의 상황은 절박한데 설교는 너무 고릿적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라인 설교가 대세인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온라인 교회도 생겼다. 온라인 세상에서 쉽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인스턴트 설교자료가 판을 치고 있다. 이런 마당에는 오래된 성경말씀보다 오히려 현대적인 전달 프로그램이나 기술이 더 긴급한 과제같이 보인다. 그러나 인스턴트 식품이 몸에 해로운 것이 더 많듯이 주워모은 짜깁기 설교에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 영원한 세월, 급변하는 현대 문명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보이고 그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목회와 설교의 나갈 방향 같지만, 실상 하나님께 시간이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거나 혹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의 말씀을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아무리 세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로 나오고, 그 진리에 자신을 적용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결코 진리를 다양하게 시대에 맞추어서 조각할 것이 아니라, 영원 불변의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파고 연구하여서 구원의 생수가 넘치도록 해야한다. 변화무쌍하게 보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그분의 뜻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고, 빠르게 보다는 그분의 의도의 깊이를 깨닫고 증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가운데 해답이 있다. 진리의 말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가득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왕좌왕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만이 지금 당면한 여러 문제와 영혼의 갈증을 채울것이다.

본 강좌에서는 레위기의 몇 본문을 보면서 구속사적 메시지를 살피고자 한다. 레위기설교는 어렵다. 들어보기도 쉽지 않다. 구약의 복잡한 제사를 설명하고 있는부분이 많은데다가, 그러한 것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보이기 때문에, 성경통독시간에도 그냥 지나치고 싶을 정도이다. 또한 그때와 지금의 문화생활이 다르므로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당시의 문화와 사회와 삶의 양식이 다르다고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실상은 너무나 중요하다. 레위기는 모세 오경중의 제일 가운데 싸여있다. 모세오경 중에서 제일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는 앞부분은 하나님께 죄용서받는 희생제사를 드리는 부분이 나오고 (1-16), 뒷부분은 하나님 앞에 사는 성도의 거룩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내고 있다(17-27, Holiness Code, 성결법). 이 두가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나님앞에 어떻게 그에게 나아가며 그 앞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당한 삶을 살수 있는가에 대한 핵심중에 핵심적인 말씀이 바로 레위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레위기를 살피면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원한다. 물론 레위기에 진행된 많은 동물 제사 등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지킬 이유는 없다. 또한 그때의 삶의 양식이 지금과 똑같지는 않다(불연속성). 그러나 레위기의 모든 제물은 그리스도 예수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누구인지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나아가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움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연속성).2) 레위기를 강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는 풍성할 뿐 아니라 든든한 닻과 같이 흔들림이 없이 견고하고 신약의 메시지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으로 가득하다. 레위기의 몇 개의 본문들을 강해하는 가운데 숲을 보고 또 나무를 보기도 하면서설교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번제단으로 나아가라(1:1-9)

1) 하나님이 부르셨다.

레위기 1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기가 시작하는 본문은 하나님이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레위기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봐이크라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본격적으로 진행 중에 있을 때에 그 황량한 광야, 아무것도 없는 모래바람만 부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곳 성막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는 이스라엘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황량한 환경에서 가장 은혜롭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처소로 모세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셔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부르시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부르심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리고 이스라엘이 있는 광야에 임하시고 그의 부르심에 이제 이스라엘은 그분께 나아간다. 그분께 나아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성막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번제단을 통과해야만 한다. 번제를 통과하고, 제사장의 물두멍을 지나서, 성막 안으로 들어가면 말씀을 상징하는 놀라운 금 촛대가 있고, 그곳에서 비추는 빛으로 성막이 황금색으로 빛난다. 그곳에 향단이 있고, 그곳에 먹을 떡상이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의 비추는 말씀의 빛으로 생명의 떡을 먹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황금빛 놀랍고 신비한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려면 번제단을 통과해야 한다. 그곳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적용) 가장 황량한 사막에서의 이스라엘이 번제단을 통해서 결국 가장 놀라운 영광의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고 동행 할 수 있는 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번제단을 통과하는 길이다. 광야같은 인생에 내려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영광의 삶을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관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겉보기엔 오직 황량한 광야의 인생이지만, 그리스도를 통과하면 영광의 하나님과의 동행이 시작된다.

 

2) 희생제물 없이는 안된다. 번제의 제물은 숫송아지, 양이나 염소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드린다(1:3. 10, 14). 제물은 아마도 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받는데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즉 가난하다고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모두에게 열어 주셨다. 집비둘기를 못드리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희생제물이 있어야 한다. 자기의 생명을 대신할 제물, 대신 심판받을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는 자기의 죄값을 지고 하나님께 그냥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희생제물이 있어야 한다. 나 대신 하나님의 심판의 희생제물이 있어야 한다. 이 희생제물은 바로 속죄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1:4)

속죄가 된다는 것은 값을 치룬다는 말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로는 이 말은 레카페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달래다’ ‘요구를 들어주다의 뜻이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분노는 완전한 속죄로만 달래지고, 가라앉혀서 우리가 그 앞에 설 수가 있다. 지극히 공의로우신 그분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대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 죄의 값을 대신 치를 때에만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이 행위는 죄의 전가를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면 죄가 전가된다기보다 죄값의 전가라고 할 것이다. 대신 죄값을 치르는 것을 상징한다.

희생제물은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한다(1:5) 피를 흘림은 곧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는 것보다 더 멋진 은유는 없다. 그것은 그리스의 고난이요,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는 것을 나타내 준다. 로마서 59절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정돈한다. 피를 흘리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려서 죄의 값이 치러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데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번제물을 태울 때에 하나님은 그 냄새를 좋아하신다. 우리말에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1:9)에서 향기로운은 불에 탄 냄새의 향기를 말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냄새(pleasing odor, 레이아흐 니호아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제 받으실만 하다는 것이다. 이제 죄값이 피 즉 생명으로 갚아졌으니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송아지, 염소, 비둘기 등의 피흘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있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는 생명으로 값을 치러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예외는 없다. 하나님께 나오려면 반드시 생명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모형의 실체로써 그의 십자가의 희생으로써 그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제물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게 되었다(9:12). 그래서 오늘날 다시는 번제를 드릴 필요는 없다. 모든 동물제사 등은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영원토록 생명을 얻게 된다.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희생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값이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가 되어 그가 죄값을 치르신 것이다.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의 받으신 심판은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적용) 아무리 은혜로운 부르심이 있어도 나갈 자격이 없으며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번제로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로 인해서 영원한 자격, 영광의 처소로 나갈 자격을 얻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배하라 (9:22-10:11)

사람들 레위기를 먼 나라,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별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레위기에 언급된 여러 제도들을 지켜야 하는 사회는 여러 면에서 신약시대의 교회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구약의 율법은 의식법(제사법)’, ‘사회법’, 그리고 윤리적인 계명들로 구별한다. 그리고 선별적으로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10계명 같은 윤리적인 계명은 언제나 오늘까지 적용되는 것이고, 사회법은 이스라엘 사회에 관계되는 것이었으므로 오늘날 교회와는 직접 연관이 없는 것이고, 더구나 ()의식 법/종교규례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성취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신약의 교회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문제가 있다. 사실, 이 세가지는 서로가 섞여 있는 법들이고, 어떤 경우는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라는 4계명은 제의식법인가 아니면 윤리적인 법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인가? ‘살인하지 말라는 사회 규범인가 윤리적인 법인가? 19:18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명백히 윤리적인 계명이지만 레 15장에서 빚을 탕감해주고, 이스라엘 종을 놓아주는 것은 사회법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법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법이 아닌가?4) 결국 하나인 것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다(Christo Centric).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모든 율법들은 하나가 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구약의 율법을 이래저래 구별해서 어떤 것은 지켜야 되고 어떤 것은 지킬 필요가 없게 구별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물론 문자적으로 짐승의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규례는 제사장 된 우리(벧전2:7)가 철저히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원리와 방법을 보여주고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희생제사를 드리는 법들도 오늘날 교회에 여전히 유용하다. 제사법마저 그럴진데 다른 사회법, 윤리적인 계명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 본문은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어떤 예배가 바른예배, 좋은 예배인가?

본문은 대 제사장 아론의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이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엄격하게 말씀따라 예배해야 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림을 보듯이 엄중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대 제사장 아론의 큰 두아들은 아버지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들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대 제사장은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에 불을드리고 그 위에 향을 뿌려서 성소에 향기가 나도록 해야 하는 일을 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를 이행하려고 하나님 앞에 향료를 드려서 분향하였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죽였다는 것이다(10:1-2). 이것이 뭐 죽을 일인가? 아니 예배하러 나가는 길 아닌가? 더군다나 이 제사는 아론의 큰 두아들 아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왜 죽이신다는 말인가?

문제는 본문 101절에 나온것처럼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다는 것이다. 16:2-3에는 어떤 불을 드려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레위기 16

12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과정은 이렇다. 성막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만나는 번제단 위에서 번제를 드린다. 그 때, 처음 번제를 드렸을 때에 불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 9:24에 보면 이 불이 여호와께서 불이 나와서제단위의 번제물을 살랐고, 그 기름을 태웠다고 한다. 이 불이 바로 여호와께서 명한 거룩한 불이다. 희생이 드려진 그 불인 것이다. 제사장들은 그 번제단에 처음드린 번제물을 태우기 위한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도록 나무를 계속 보충해 넣어야 한다(6:2-3), 그리고 제사장은 그 번제단에 있는 숯불을 향로에 담아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그 분향단에 드리고 그 위에 향을 뿌려서 성소가 향으로 가득차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야 죽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아론의 아들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각각 화로를 가지고 성막으로 서로 달려가서 드리게 된다. 사실 이날은 이 두 아들들의 취임 날이기도 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먼저 성소 안의 분향단에 향료를 넣느냐고 인해서 기득권을 잡으려하고, 그것이 앞으로 아버지 뒤를 이어서 더 인정받는 제사장의 위치를 선점하는가 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명하신 불과는 관계없이 그냥 아무 불이나 드려서 내가 먼저라는 데만 집중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이다. 하나님은 그들 둘 다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살랐다고 한다. 이 불이 분향단에서 나왔는지, 번제단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명백히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불을 드렸다고 한다. 시기와 경쟁으로 드린 결과이다.

성경은 이 들이 드려야 하는 분향의 일은, 예배하는 일은 명백히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10:3). 그런데 지금 아론의 두 아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기의 영광과 기득권을 위해서 나아갔던 것이다. 제사장의 옷을 입고,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가 있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도 않고, 예배하는 자세가 자기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를 위한 예배, 자기의 영광, 자기의 거룩과 권위를 드러내는 예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 하신다. 그래서 아론도 할 말이 없다. ‘아론이 잠잠하니라고 하지 않는가(10:3)?

 

적용)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이다. 하나님께 예배함은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를 높이고, 그의 말씀대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신성모독죄가 된다. 예배시간에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벌써 문제이다.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중심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예배가 예배되지 않고, 신성모독이 되어서 징계를 받게 된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5)로 인하여 크게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자들은 오히려 자기 죄를 먹고, 병드는 일들도 심지어 생기기도 하지 않았는가(고전 11:29-30)? 예배의 현장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만 높이는 자세여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1)

레위기 본문 중, 아니 구약 전체의 본문 중에서 오늘날에 적용시키기에 가장 거리가 먼 본문을 꼽으라면 바로 레위기 11장일 것이다. 여기에는 짐승들 중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물고기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때문에 이게 도데체 오늘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는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구약의 정결법의 한쪽 귀퉁이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명절 제상에 올라간 것을 먹어도 되는가 안되는가에 관계된 말씀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무엇을 먹을 것이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이 먹고 먹지 말아야 하는 규정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는 어떤 적용이 있는가?

본문에 보면 들짐승 중의 먹을 것과 물고기 중에 먹을 것에 대한 원칙이 나온다. 모든 짐승 중에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을 먹을 수 있고,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11:3, 10). 여기에 따르면 낙타는 새김질 안하니 못먹고, 사반(너구리과)나 토끼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안갈라져서 못먹고, 돼지는 굽이 갈라졌는데 새김질 안하니 못먹는다. 삼겹살 좋아하는 한국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오늘날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물고기 중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못먹으니, 추어탕이나, 장어구이, 메기탕, 좀 고급스럽게 새우구이, 랍스타 등은 못 먹는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성경을 버리자고는 못하니 이런 것은 구약의 것이니 오늘날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몰고 나갈 것인가? 본문은 심지어 새들 중에는 원칙도 없다. 그냥 허용과 금지된 조류의 이름만 나열한다. 곤충은 날개는 있으나 네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못먹고, 그러나 점프하는 것은 먹을수 있다고 한다(11:21).

성경은 이런 것은 부정한 것이니 먹으면 안되고, 저런 것은 정한 것이니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정하고 부정하다는 것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의문이 간다. 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면 무엇이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구별은 성경의 다른부분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노아 때에 홍수가 끝나 방주에서 나왔을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을 다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9:3). 또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소위 부정한 짐승이 섞여있는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게서 깨끗하다고 하신것이라고 했다(11:5-10). 이상의 본문들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바울도 음식을 가리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딤전 4:3-4)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왜 이렇게 구별하는가?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혼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단 안식교도들은 육식은 건강에 좋지 않으므로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권고하면서 노아 홍수 이후 즉, 육식 이후에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바로 육식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억지다.

그러면 무엇인가? 복잡한 본문이지만, 중요한 원리를 중심으로 정리하자. 하나님은 레1-10장까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제 11장부터는 그 앞에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한마디로 정결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1장이 음식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거룩이다.

레위기 11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사실, 레위기 11-15장까지는 전체가 정결케 하는 법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그중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래서 출산, 문둥병, 곰팡이, 피부병, 유출병에 관한 정결한 예식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첫 번째 이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어떤 것은 부정하다 하고 어떤 것은 정결하다고 하여서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욧점은 이런 이런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게 곧 구별된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외적인 표시를 음식 등으로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노아 때에는 홍수 후에는 이런 구별이 필요 없었다. 모든 동물을 먹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앞에 구별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방주에서 나온 사람은 이제 8명 모두 한 식구였기 때문이다. 레위기 시대에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언어, , 음식, 의복 등에 대해서 가나안 땅의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외적인 표시가 필요한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어떠한가? 이제 더이상 음식으로 자신을 세상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모든 예표와 상징 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성취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더이상 유대인의 혈통으로 구별되거나, 음식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과 구별하기 위한 의복과 음식의 역할은 끝났다. 세상에 보일 표는 오직 믿음과 믿음에 걸맞는 행위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고 안먹고 그 구별은 왜 그렇게 복잡한가에 대한 의구심들은 이제 해결점을 얻는다.

상술했듯이, 음식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거룩하게 살라고 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11:44-45)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 구약에 거룩이란 말이 520번이나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은 이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알수 있다. 거룩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카도쉬(거룩)이란 말은, 잘라내다, 자신을 성별하다, 하는 뜻이 있다. 즉 더러운 것을 잘라내고 깨끗하게 되는 것을 거룩하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 귀절을 많이 외운다던가, 고상한 말을 쓴다든가, 윤리적으로 별로 흠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한마디로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쇠고기를 먹으면 거룩하게 되고 돼지고기를 먹으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하시지 않는가?

 

적용) 우리는 음식의 종류에 더 이상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계탕이나, 돼지고기나, 개고기나, 쇠고기나 별 차이가 없다. 말씀드렸듯이 구약시대에 이런 음식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외적으로 드러내야 할 표시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삶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줄 드러내야 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 생활, 물질, , 윤리적인 삶 등 모든 것에 있어서 그렇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에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했다(7:20-23). 당신은 무엇으로 자신을 이 세상과 구별할 것인가?

 

하나님과 함께 살기 (16:1-10)

 

1) 하나님과 광야 인생길을 함께하려면 대 속죄가 있어야 한다.

레위기 16장은 대 속죄일욤 하키푸림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레위기가 오경말씀 중에 가운데 나오는 말씀인데, 그 중에서도 레위기 16장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겉보기에는 일년 중 하루 대 속죄일의 종교의식 같지만 실제 내용인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함께 하고자 할 때에 어떻게 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놀라운 메시지이다. 갈 길을 알지 못하고 광야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과 기쁨과 행복, 그리고 언약가운데 영생으로 이끄시는 그 하나님과 이 땅에서 동행하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장이 아닌가? 땅에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하심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지 않고 계속 함께 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 속죄일은 일년에 단 한번 있는 일이다. 대속죄일(영어: Day of Atonement, 히브리어: 욤 하키푸림)은 성력 710일에 지키는 하나님의 절기다. 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한다. 지금까지도 모양은 다르지만 이스라엘에서 지켜지고 있다. 이날, 대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받기 위해서 단 한번 성막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대제사장이라고 아무 때나 원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16:2). 이 날, 대 제사장이라도 휘장 안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속죄제물의 피를 담아가서 속죄소 주변에 뿌리고, 제단 뿔에 그 피를 바르고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한 속죄를 하고, 대 제사장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날이다. 그날 대 제사장은 지성소로 들어가서 속죄 염소의 피를 하나님의 언약궤 뚜껑은 시은좌에 붓고 하나님의 속죄하심을 받는 날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지 않도록 한다. 언약괘 뚜껑에는 하나님의 그룹 천사들(크루빔)이 언약괘를 내려다 보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마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언약궤를 내려다보는 것을 상징한다. 언약궤 안에는 10계명의 돌판이 있다.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어기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진노와 심판이 일어나고 하나님은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천사들과 십계명 사이에 있는 뚜껑에 죄값을 대신 치를 어린 염소의 피가, 곧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총체적 속죄요, 정결케 함이요, 하나님이 여전히 성막 안에, 그리고 이스라엘 회중 가운에 머무시게 하며 광야 생활을 동행하시게 하는 일이 된다.

이 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다.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성소에서 찬란한 금빛을 발하는 일곱 촛대의 불빛 아래, 생명의 떡을 먹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니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 특권과 영광은 지구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 일은 속죄일의 속죄양 피로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2:19-21).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막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했으니, 명백하게 예수 안에서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이고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면, 사실 우리는 성전의 일부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2:19-22).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이제 성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바로 예수 안에 거하시는 분이시오, 예수 안에 거하는 우리가 또한 성전이 될진데 하나님은 바로 우리 안에, 내 안에 얼마든지 계시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두려워 떨며, 모든 제단과 성막과 그 기구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피를 뿌리고 난 뒤에서 지성소에 겨우 한번 들어가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었으나,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그런 불편함이 없다. 성전되신 예수님은 영원히 정결하신 분이시므로 다시 정결하게 되실 필요가 없다. 그분은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므로 자신을 정결케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일년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과 우리를 막는 휘장은 완전히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15:38). 이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은 없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언제든지 들어갈 수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얼마든지 그분의 영광을 대할 수 있고, 그분의 존재를 우리는 영원토록 항상 만날 수 있다.

예수 안에서만가능한 일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성전에 있게 되고, 우리가 성전의 일부가 되며, 우리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우리는 영원히 그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적용)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 인생 가운데 모든 것이 아름답다. 가정이나, 사회에서나, 현재일이나 미래의 일이나...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이고, 그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과 함께 살수 있을까? 어떻게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며 그가 나의 삶에 동행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한번 이러한 특권을 얻은 것을 감사하자. 오직 예수 안에서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자이며, 예수 바깥에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자이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자이고,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인생을 내힘에 의지해서 겨우 살다가 소망없이 인생이 끝나야 한다. 영원히 예수 안에 거하라.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다.

 

2) 본문은 우리에게 용서하며 살기를 가르친다. 대 속죄일의 행사 가운데에는 두 마리의 염소가 속죄 제물로 나온다. 한 마리는 이스라엘의 죄악의 짐을 대신지고, 그 죄값을 바로 자기의 목숨으로 대신 치르는 염소이다. 대 제사장 아론은 이날 두 마리의 염소를 제단앞으로 끌고와서 그들에게 안수한다. 안수하면서 이 염소제물이 그 생명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값을 치를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제비를 뽑는다. 그중 첫 번째 염소를 속죄의 제단으로 가져간다(16:9). 그리고 두 번째 염소는 광야로 보내진다. 이 염소 희생제물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더 잘 알고,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될 것이다.

먼저 이 염소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진다(16:10). 이 염소는 당장 죽이지 않는다. 똑같이 이스라엘의 죄를 머리에 안수받고 그 죄 값을 치르기로 되어 있는 염소이다. 산 염소는 산 염소이되 산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은 염소와 같은 처지요, 이스라엘의 죄 짐을 지고 가는 염소이다. 이 염소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고 한다. 아사셀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으나, 아사셀은 에즈 아잘로써 이것은 염소, 영원한 제거, 또는 격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염소는 광야로 보내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두 마리의 염소로 인해서 한편 이스라엘의 죄값은 치러졌을 뿐 아니라 영원히 제거되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염소 역시 예수님을 예표한다. 멀리 광야로 보내져서 다시는 그 죄가 돌아도지 못하게 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요한복음 129절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다그가 짊어지고 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없애신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적용)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우리더러 산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12:1). 산제물, 그것은 바로 레위기 16장의 광야로 보내진 제물을 말한다. 예수님이 광야로 보내진 희생양의 삶을 사셨으니,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바울은 우리더러 이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은 산제물처럼 살라는 것이다. 그 염소가 제물로써 다른이를 위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지금 우리가 살아 있어도 그런 자세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빚진자가 아닌가? 더 이상 자기 욕심과 자기 의를 위해서 살지말고, 자기 공의로움과 자기 자랑과 영광을 위해서 살지 말고, 이제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9:1-18)

레위기 19장은 가장 윤리적인성경본문이라고 별명이 붙어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도리와 이웃에 관한 도리를 가득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거룩하라고 하신다(19:2). 우리는 이 거룩의 문제가 저 위에 구름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의 나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본문을 통해서 거룩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고 아주 현실적이고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다. ‘거룩은 모세오경에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는 낱말 중에 하나이며, 구원받은 성도들, 이스라엘의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한다는데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다(20:7). 사실 거룩은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다. 넓게 생각하면 온 지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엿새만에 만드시고, 이레째 쉬셨다.

창세기 2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22절은 이레째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이레째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한다. 이 말은 어렵게 느껴졌다. 엿새만에 만드시고 이레째 쉬셨다면 될 것을 그의 하시던 일을 이레째에 마치시고 이레째에 쉬셨다고 하니 어려운 것이다. 같은 날에 일을 마치고, 같은 날에 쉬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이레째에 안식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말이 다르다. 이해가 달라지게 된다. 이레째 안식하는 일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그것은 이레째에 안식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포함되는 것이란 말이다.5) 그러면 모든 것이 말이 된다. 멋지게 조화가 된다. 그리고 사실 이 이레째의 일은 성경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하는 구절이 없으므로 처음 여섯째날의 날 구분에 있어서 하루씩을 마무리하는 표현이 이레째에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도 창조의 이레째가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시고 안식일에 일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가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신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그냥 돌아가게 내 버려두고 멀리서 관조하는 것으로 그 일을 마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을 운행하시되 특히 그가 만드신 세상에서 인간들이, 만물들이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의 만드신 창조 가운데 그분의 창조를 기뻐하며 예배를 받으시며, 영광 받으시고 모든 것을 운행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안식이다. 그럼 하나님이 안식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셨으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매일 만나기를 원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특히 에덴동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다. 하나님의 만드신 피조세계,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그에게 경배하고 하나님은 그로 더불어 즐거워하신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안식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안식은 모든 피조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심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에덴 동산 뿐 아니라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만들어 진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소인 에덴동산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2:15). ‘경작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아바드이다. 이는 일하다, 섬기다의 의미가 있다. 레위기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일은 아바드이다. 아담의 경작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불순종하고 반역하여서 성전인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다. 에덴의 동쪽에서도 계속 범죄했다. 죄는 커지고 하나님을 반역한다. 노아의 시대에는 도저히 심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시길 원하신다. 성막을 만드시고,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시며, 그의 만드신 온 우주 만물 가운데 그분의 통치와 그 다스리는 권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기를 원하신다. 성소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이 성막은 성전이 되고, 이 성전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모형이 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땅의 백성들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살게 됨으로 이 세상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고, 어디든지 성소 안에서의 삶이 되는 것이고, 어디든지 하나님의 동행을 살아갈 수 있고, 어디에서든지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생과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동행과 영원한 천국과 이런 것들이 다 성전되신 예수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창조하신 안식 가운데, 즉 하나님의 축복과 다스리심 가운데 살게되는 특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시고 만드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가운데 안식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와서 그 창조의 영광을 누리고 그를 높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안식에 들어오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19:3, 95:11). 불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의 동행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4:1).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의 완전한 영원한 안식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다. 창조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거룩한 성도의 삶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이 영원한 안식의 자리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생각 할 때에 우리는 거룩의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문제이다. 창조의 목적이다.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 레17-27장까지의 소위 성결 법전을 중심으로 온통 거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레위기 전체에 거룩이란 단어가 총 150번이 사용된다. 그리고 거룩과 관련된 법규들이 아주 강화된 법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 거룩하라 (, 11:44-45)”하고 명령하기도 하지만, 거룩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죽이라등의 강력한 어조도 엄청 빈번하게 나온다(17:4, 9, 10, 14, 18:29, 19:8, 20:3, 5, 6, 17, 18, 22:3, 23:29). 그러면서 계속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오십여 회 출현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거룩을 얼마나 신중하게 여기시는가가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구별을 항상요구한다. 심지어 음식에 관해서도 분명한 거룩법 (The Prologue Holiness in Eating, 17) 가운데 구별해야 하고, 제사의 제물을 선택할 때, 성적 윤리에 관한법 (Holiness in Sexual Behavior, 18). 레위기는 근친상간이나, 월경 중에 있는 여인, 이웃의 아내, 남색 등은 금지되었다(18:19-21). 하나님이 제일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모든 예배와 삶에 있어서 구별된 삶을 지키지 않고, 가나안 땅에 사는 원주민을 닮아갈까봐 걱정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행동은 바로 그 땅에 원래 거하던 백성들의 죄악의 모습들인데, 이런 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그 땅에 주인이 되지 못하고, 땅이 그들을 토하여 내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하신 곳이 더러워 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구별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이다. 이것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길이다.

 

적용)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면 거룩해야 한다. 거룩하지 않은 이들, 시내산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제사장들은 자신을 위해서 먼저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신실해지기 전에는 결코 그들과 함께할 수도 그들을 도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간의 범죄를 품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대적을 이길 수 없게 하셨다. 오히려 수 십명이 죽고 말았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의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되고, 그분의 영광과 능력을 맛볼수가 없다. 사람이 범죄하게 되었을 때 주의 영이 떠나게 된다(6:3). 거룩한 삶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든든한 고리가 되기 때문에 이것 없이는 우리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거룩한 삶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이음새를 든든히 연결해주는 든든한 리벳과도 같이 거룩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과 든든히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요일 1:7).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닌것이다. 이웃간의 거룩의 문제도 심각하다. 본문의 10-18절은 이에 대한 메시지이다. 주의 깊게 살피고 적용하자.

 

거룩한 백성의 가족관계 (20:8-13, 22-26)

 

1) 부모-자식 관계:

본문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단순한 권면을 넘어서 심판이 따라올 것을 경고하고 있다(20:9).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위기 외에 다른 본문들도 보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경고 외에도 이것을 잘 지키고 나아가면 축복이 따라올 것을 약속하고 있다(20:12). 이 구절들이 신명기와 신약의 에베소서에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잘 지키면 상을 받게 될 것이다(27:16, 6:1-3).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녀로써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도 고금을 막론하고 부모공경의 사상은 가장 아름다운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구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의 1800 글자짜리 효경을 모른다고 해도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당연한 일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높인다, 무겁게 여긴다의 의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부모공경을 중요시여기고, 십계명 중에 사람에 대한 계명중 첫째로 놓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 이루어지역사가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부모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자녀를 낳아서 생육하는데만 목적은 아니고,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오고오는 세대에 가르치라고 하고,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계통을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다. 자녀는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자녀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하고 배운다. 부모의 속성 가운데서 자녀를 사랑하고 책임지고 돌보는 일들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게 된다. 무모의 역할은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을 확장해 나가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것이 창조질서요, 하나님의 원하시는 정상적인 가족의 경우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마치 부모 중의 한편인 아버지, 아바라고 하지 않는가(8:15)?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겠는가? 아니, 사실 모든 피조세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이 구지 우리에게 아버지란 호칭으로 불려야 될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라고 하신다.

가정은 교회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듯이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의 구성은 너무나 소중하다. 파손된 가정은 자칫 신앙생활에 하나님을 배우나가는 일에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고 함께 하나님께 나아간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단순히 효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공경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낳아준것에 대해 감사하는 단순한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창조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엄히 명령하시고, 이것을 어기면 벌을 주시겠다는 것이고, 이것을 잘 지키면 상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되는 명령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그것은 나아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공경이다.

 

적용)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 가정이 그냥 가정이 아니고, 부모가 그냥 부모가 아니다. 가정은 교회이므로, 가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존재와 명령을 드러내도록 하라.

 

2)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부부관계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좋은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부부관계의 순결에 대해서 하나님은 엄하시다.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20:10)고 하시지 않는가? 대한민국 형법 제 241조 간통죄가 있었으나 이제 폐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배우자 있는 자가 다른 사람과 간통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간통죄가 형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민사상 손해배상책임만 진다. 즉 간통으로 인하여 결혼한 부부가 심리적 배신감 등으로 인해서 손해배상이나 이혼소송은 할 수 있으되 성인 남녀가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하는 자체를 죄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부분을 엄격하게 규정한다. 간음한 자는 간부와 음부를 다 죽이라고 한다. 성경은 성적인 범죄를 가볍게 여기 않는다. 시간상 다 언급할 수 없지만, 본문 레 20:11-21절에 보면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자, 즉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에 대하여,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자에 대해서, 며느리와 동침하는 자에 대해서, 장모와 동침하는 자에 대해서 엄한 계명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결론은 죽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신약시대에도 이 부분에 대한 명령을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 침소를 더럽히는 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하신다(13:4).

왜 성경은 부부의 순결에 대해서 이렇게 엄한가? 그 이유는 결혼 외의 간음이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가정을 만드시고 교회를 만드셨다. 그리고 그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장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것은 교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신다.

에베소서 5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여 그에게 순종하고, 또 남편이 아내를 목숨걸고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신부된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것과 그 은혜에 감사하여서 아내된 교회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을 드러내시고 싶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가 이루는 가정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 주어야 할,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과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야 할 중요한 기관(에이전트)인 것이다. 부부란 그냥 두 사람이 좋아서 만나고 결혼한다고 그게 끝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이 부부가 가장 아름답게 관계가 유지되는 일을 위해서는 순결이 필요하다. 이것을 통해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 가정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드러내고,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부부간의 순결을 지키는 일에 불충성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은혜를 가리겠는가? 그래서는 안된다.

 

적용)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드러내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간에 신실하고, 그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라. 이 세상에서 부부로의 중요한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이 세상에 비출 빛인 것이다.

 

희년에 부르는 노래 (25, Jubilee Year)

본문은 희년에 관한 메시지이다. 희년은 그 말자체가 오늘날은 거의 안쓰는 말이다. 레위기 25:9 에 따르면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나서, 50년째마다 그해 일곱 번째 달 10일에 크게 나팔을 불어서 희년을 선포한다. 그날은 자유를 선포하는 날이고, 온 백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절기를 지내게 된다. 251-7절에는 안식년에 간한 규례가 나온다. 그때에는 파종하지 말고 땅이 쉬게 하고, 거기에서 저절로 난 소출은 누구나, 나그네나, 객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심지어 짐승들도 먹을 수 있도록 두는 제도이다. 하나님의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특히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며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고, 그 다음 해, 50년째는 드디어 희년이 된다. 이때에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서 자유를 선포한다(25:10). 이때에는 남의 빚이나, 노예의 신분이나, 얽매인 모든 것, 힘들어서 판 하나님의 기업 모든 것이 원상복귀되는 그런 해가 바로희년이다. 요즘말로 하면, 리셋(resetting)하는 것이다. 컴퓨터 같은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냥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처음 공장에서 나온것처럼의 처음상태로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처음 만드신 그런 모습의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평등이고, 인간을 모든 부채와 악과 어려움에서 자유하게 하는 자유의 선포하는 날이다. 인간생활의 모든 모진 고난이 있었어도 이제 이 희년으로 인해서는 완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그런 한해가 바로 희년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시작했고, 살아가며 여러 가지로 얽혀있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나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새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있는 여러 어떤 절기들보다 더 기쁘고 새로운 한 해가 아닐 수 없다. 희년은 놀라운 해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고의 해이다.

 

1) 모든 팔린 재산이 돌아가야 한다(25:10; , 25:13, 28). 재산상의 문제, 부채의 문제로 인하여 땅을 팔수 있다. 그러나 땅을 팔 때도 가능한 가까운 친척에게 팔아서, 토지 무르기가 쉽게 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룻기 참조) 만일 50년이 되도록 토지를 도로 무를 수 있는 힘이 없으면, 팔린 해를 기준해서 50년 될 때에, 그 판 사람에게 무상으로 도로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원 주인인 하나님께 돌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이에 입각하여서, 1948년 이전의 주인 있는 땅 외에는 땅을 사고 팔수는 없다. 누구나 집을 지을 때, 국가로부터 50년간 임대 할 수 있을 뿐이다. 땅과 부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레위기 25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 모든 팔린 사람이 돌아가야 한다(25:10; , 25:54). 재산상의 문제나, 빚의 문제로 인하여 종으로 팔릴 수는 있으나, 그러나, 주인은 그를 삯군과 같이 여기고(25:53) 그에게 삯을 주어야 할 것이며, 50년이 되면 그를 돌려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희년에는 그 본 주인인 하나님께로 돌려보내야 하기 때문이다(25:55).

 

3)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이어야 한다. 들판의 어떤 것도 소출 되어져서는 안된다(25:11 이하). 이 희년에는 마지막 안식년 직전의 양식을 먹거나, 들에서 자연으로 난 것들을 먹고 살아야 한다. 역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함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7년째 안식년에는 6년째의 소득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50년째는 이 모습이 더 극단적으로 보인다. 49년째가 안식년이므로 50년째 희년이 될 때에 또 들에서 난 것은 모두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내 소유권을 주장하여 단독적으로 소출을 거둘 수는 없다. 너와 종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 심지어 야생동물들까지 그 소출을 같이 먹으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 공평함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6일에 만나를 두배로 주신 하나님은 제 6년에 두배, 48년에는 세배를 주실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의지하여 희년을 지켜야 한다.

적용) 우리는 소유를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주인되심과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고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마 4:4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신 말씀은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8:3 인용).

 

4)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희년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희년은 구원의 선포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러한 제도는 그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성경에 죄는 빚으로 연결될 때가 많다. 부담인 것이다. 죄의 값을 치러야 하지만, 도저히 스스로 죄의 값을 치를 수가 없을 때, (사실 모든 인간은 자기 스스로 결코 어떤 죄의 삯을 치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죄의 노예로 있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희년의 선포와 축복으로 인하여서 모든 죄와 타락의 (8:19 이하) 사슬로부터 해방된 것을 말해주려는 하나님 구원 계획의 오묘한 역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빚을 다 갚아 주시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이제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희년제도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자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 기쁨이 충만을 의미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책에서 위의 희년의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사야 61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눅 4:18-21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다. 이것은 바로 이 모든 예언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정한 희년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희년은 인간의 이해에 따라서 어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것이었다. (양각 나팔을 불었던 것이다. 25:9)이것은 선포인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처음의 설교의 말씀에 이 희년의 메세지가 선포된 것은, 바로 오랫동안 구원을 계획해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성취를 알리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그 죄의 짐에서 풀려나게 될 것이요,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이다. 이 위대한 선포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주님의 오심과 이 선포가 없으면, 영원히 죄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희년의 영적인 의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들을 무거운 죄의 종의 신분에서, 죄의 심판하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고 율법의 요구에서부터도 완전히 자유하게 하신 해방의 한해, 아니 사실 예수 안에서 이 자유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 시작된 이 희년의 리세팅이 되는 놀라운 선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되는 시작점을 알리는 선포가 되는 것이다. 외침은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 왕되신 그가 오셨도다. 그가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그가 우리는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셨고, 해방시키셨도다. 누구든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으며 기뻐하는 도다, 예수의 말씀같이 오늘, 이 말씀이 너희에게 임하였도다.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오셨도다, 왕이 오셨도다, 나를 구원하셨도다. 어찌 내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적용) 그러므로 매일 기뻐하라, 우리는 매년, 매일, 이 희년의 선포가운데 살고 있다. 그리고 영원토록 희년의 선포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이사야서 613절에 이 희년을 만난자는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찬송의 옷으로 바꾸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이제 살길이 생겼다고, 낙심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우리에게 천국의 길이열렸다고....그렇게 외치고 전도해야 한다. 물론 나아가서 삶의 모습들 가운데, 내가 자유케 되었음을 알리며, 또한 이웃이 자유케 되도록 알려야 하는 것이다. 진리로 자유케 된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길게 나온다. 간단히 요약하여 적용하면 이렇다. ‘정직한 거래에 대하여-형제를 속이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25:13-17),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을 두려워 말라’(25:18-22),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라(25:23-28, 토지는 영원히 팔지 말라), 그리고 네 이웃은 너의 형제임을 인정하라(25: 35-38). 가난한 이웃, 형제에게는 돈이나 양식이나 이식을 받지 말고 꾸어주거나, 그를 돌아 보도록 해야 한다. 네 이웃이 모든 문제, 곧 경제적인 문제, 근심과 걱정,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하라.

이스라엘은 희년이 오기를 50년씩 기다렸다. 모든 것이 해방되는 날, 속박과 부담이 다 해결되는 날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매일 희년이다. 마귀도, 천사도, 율법도 주님이 주신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그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다. 영원한 희년이다. 할렐루야! 이제 다만, 그가 다시 강림하실 때까지 이 희년의 소식을 알리자. 예수님처럼 이 말씀이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담대하게 외치라. 전도하라.

맺음말

레위기의 몇 본문을 살펴 강해하여 보았다. 전달의 방법과 기술의 문제는 별개요, 또한 부차적이다. 먼저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모든 역사의 원인이시오, 최종 목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의 뜻을 먼저 깨닫고 또한 사람들이 깨닫도록 세상에 선포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어서 모든 것을 소성케 할 것이다. 지혜는 자기 집을 지을 것이요(9:1),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다(40:8).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수년 내에 반드시 다시 부흥할 (생명력 있게 살아날) 것이다(3:2). 말씀을 맡은 천국의 서기관들은(13:52) 자기의 사명을 다하자.

▼미주

1) C.J.H. 라이트는 그의 다니엘서 강해에서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단1:2로써 성경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한다고 설명한다. “주께서...넘기시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J.H. 라이트,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다니엘서 강해, 박세혁 역, (서울: 도서출판 CUP, 2020), pp. 37-43.

2)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Liveticus, Founndations for Expository Sermons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21), pp. 2-5.

3) 앤서니 티슬턴은 그의 책 성경의 그림언어와 상징해석에서 빈센트 테일ㄹ러와 플레밍 러트리지를 인용하면서 이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다. 앤서니 티슬턴, 성경의 그림언어와 상징해석, 최승락 역 (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22), pp. 24-25.

4) Greidanus, Preaching Christ form Leviticus, pp. 4-9.

5) 이에 관한 자세하고 폭넓은 토론을 위하여는 김진수,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의 나라, (서울: 영음사, 2018), pp. 34-48’을 보라.

6) 김하연, “모세오경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본문과 설교, vol. 8(2016), 한국동남성경연구원, pp.19-22.

7) Jan Du Rand, God’s Conquering Story of Victory, Unravelling the Book of Revelation, (Wandsbeck: Reach Publishers, 2021), pp. 105-107.

8) 9:1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