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_총회 대사회관계위원)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_총회 대사회관계위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가 부끄러운 상태로 변한 것은 뱀의 간교함 때문이다. 뱀의 간교함은 선악과를 따 먹도록 부추겼고, 결국 먹고 말았다. 뱀의 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하는 하나님 중심의 선악 개념을 버리고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는 선악의 세계로 진입하게 했다. 결국 서로 돕는 관계의 세계가 무너졌다. 서로를 고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1. 뱀의 간교함과 벌거벗음

뱀의 간교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하였다. 뱀이 말한 대로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먹기 전에는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자가 하나님이었는데, 이제 인간도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자가 된 것이다. 인간 중심의 선악세계가 도래하였다.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지켜주는 세상이 선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뱀의 간교함은 남의 먹거리를 남겨두지 않고 먹어버리는 세상을 만들었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것을 왜 남에게 주어야 하는가? 왜 남의 것으로 두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과 의심은 결국 인간 중심적인 세상,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세상을 만들었다.

 

인간이 선악의 기준인 세상이다. 창조주가 개입되지 않는 세상이다. 창조된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다. 그것이 결국 인간이 보기에도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인간이 기준이 된 세상은 하나님의 선이 인간에게 선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도 변화한다. 하나님이 에덴에 두신 질서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하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타락한 세상을 사는 인간들에게 벌거벗음은 부끄러운 것이고, 다양한 가림막이 필요한 현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원래 에덴의 세상은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세상으로 규정함으로 벌거벗음을 부끄러움으로 파악하는 세상이 정상이 아님을 말한다. 그 비정상의 상태가 바로 뱀의 간교함이 작동한 결과이다.

 

2. 부끄러움과 두려움

선악과를 먹고 난 결과 먼저 눈이 밝아졌다(3:7). 그리고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삼았다. 벗을 것을 가렸다. 눈이 밝아져서 벗을 것을 알게 된다. 알게 된 것은 벌거벗음이다. 뱀의 간교함으로 인간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했다(3:5). 눈이 밝아진다는 공통의 것을 근거로 벗은 것을 안 것과(3:7) 뱀의 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3:5) 연결된다. 벗은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다. 벌거벗음의 상태로 이미 살고 있었는데 그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린 것을 보면 그 상태를 견디지 못했음을 말한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서로를 직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음으로 벌거벗음의 상태를 면하려 했다. 벌거벗음이 주는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벌거벗음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벌거벗음은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상태이다. 이것이 정상이다. 사람 사이에 어떤 가리는 것이 없는 투명한 상태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부터 이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미 눈이 밝아진 상태이다. 하나님과 같은 상태이고 선악을 아는 자가 되었다. 먹기 이전의 선한 것과 악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선악이 생겨났다.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는 것이(벌거벗음) 더 이상 선하지 않고 가려야 할 악한 것이 되었다.

 

1) 벌거벗음은 남녀의 관계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들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기에 좋은 상태로 바꾼 것이 여자를 만든 것이고,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함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서로 돕는 것이다. 그리고 돕는 관계가 성립되는 정서적 고백을 담은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내 살 중에 살이고 뼈 중에 뼈"라고 함으로 자신과 같은 존재를 기뻐하였다. 이렇게 좋은 상태, 서로를 기뻐하는 상태, 서로 돕는 관계에 선 관계를 부부 사이에서 규정할 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음이다. 이는 돕는 배필이란 번역과 같이 특수한 관계의 용어이다. 벌거벗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선함과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와 서로를 기뻐하는 정서적 태도가 모두 표현되며 가림이 없는 상태이다. 뱀의 간교함은 벌거벗음이 가진 창조의 이 모든 선한 것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부끄러운 상태로 변질시켰다.

 

2)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표현(2:25)을 근거로 창3:7절을 보자. 눈이 밝아져서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 벗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는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무로 만든 치마로 가려야 했다. 치마로 가린 것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3장 자체에서는 벌거벗음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직접 규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사용하는 용어는 두려움이다(3:10). 자신의 벌거벗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대해 두려움을 가진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동산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동산 나무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도구가 되었다. 먹을 것을 얻는 수단이자, 남의 먹을 것을 지키는 수단이 나무들이다. 그리고 그 나무들을 통해서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계명, 명령을 지키는 수단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인 나무들이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피하는 수단이 되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숨었기에 하나님이 찾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때 아담이 답변을 한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벌거벗은 상태로 인해 하나님과 그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인해 숨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다. 이미 사람과의 관계가 치마를 통해 가려지고 파괴되었는데, 이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었음을 확인한다.

 

벌거벗었기에 숨는 행동 이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행동을 한다(3:8). 낯을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가 정상적인 상태를 말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제사장의 축복을 보라.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6:25-6). 후일에 아담의 아들중 가인의 행동을 보라. 여호와께 제사가 열납되지 못하자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 안색이 변하는 것이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얼굴은 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는 행위는 여호와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표시이다. 소위 언약적 관계의 파괴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명령한 것 즉 남의 먹거리를 먹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인간 자신들이 규정하는 선악으로 구성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과 그의 명령을 배제하는 세상으로 진입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은혜롭지 못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전락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좋은 세상에 속하여 모든 먹을 것을 공급하는 나무들조차 자신들을 가리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두려움이고, 인간 관계에서는 부끄러움으로 귀결되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남의 먹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먹은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평화가 없어지고 사람들과 관계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서로 돕는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다.

 

3. 부끄러움과 치마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두려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졌다.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치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변화를 말해준다. 이전에 부끄럽지 않아서 벌거벗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과 비교가 된다.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은 가림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것과 유사하다. 나중에 에덴에서 추방될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무화과 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와 가죽 옷과 비교할때 가린다는 성격은 같다. 그러나 일시적인 성격의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고착시킨 것이 가죽옷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벌거벗은 상태로 지낼 수는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것이 에덴에서 살수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에덴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이 사는 동네이다. 사람들 사이에 막힌 것이 없고 가리는 것이 없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남의 먹거리인 선악과를 지키지 못하고 먹고 난 결과 이제는 서로의 모습을 가리고 숨겨야만 한다. 다 보여서는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벌거벗음을 성적인 부끄러움으로 규정 할 수는 있지만 단지 성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전반적인 사람들의 관계가 정상이 아님을 말하는 상징적 표현이 벌거벗음과 부끄러움이다. 첫 사람의 범죄를 성적인 범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단지 죄가 성의 문제로 표현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치마로 가리지 않는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는 서로 돕는 관계이고 그래서 서로의 먹을 것을 지키는 상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한 상태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치마를 만들어 입으면서 인간은 서로에게 대한 관계의 변화가 발생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질문을 통해서 확인시켜주었다. 먼저 남자에게 질문한다. 너의 벗었음을 누가 알려주었는가? 그것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누가 알려주었는가? 질문에 대해서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다고 답변한다. 이 답변은 단순하게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하나님이 주시고 함께 있게 한 여자가 주어서 먹은 것이다. 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일에 대한 단순한 인정과 돌이킴 즉 회개가 없다. 자신의 책임을 여자에게 미루고,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원인을 돌린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 방해가 된 것이다. 은혜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관계를 망치게 되었다고 원망한다. 도움이 되도록 준 관계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벌거벗음이 두려움이 된 것은 결국 돕는 이가 되어야 할 관계가 깨어진 현실을 반영한다. 그래서 서로가 돕는 관계가 아니고 부끄러운 관계가 되었다.부끄러움이 무엇인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관계이다. 무엇인가 가리고서야 관계가 가능한 상태이다. 이것을 현재의 관심사인 먹을 것과 연결해보자. 남의 먹거리를 먹고 난 결과 이제 서로는 서로를 향해 자랑스럽고 돕는 이로서 신뢰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언제 나의 것을 빼앗을 지 모르는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계감을 보이고 서로를 보게 된다. 이런 경계감은 현실적으로 무조건적인 신뢰를 서로에게 줄수 없게 만든다. 의심과 경계를 치마로 가리면서 보여준다. 왜 보증을 서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가? 과도한 신뢰를 인간에게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잃을 것을 각오하면서 보증을 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지 말아라. 사람과 인생사는 그렇게 신뢰할만하지 못하다. 심지어 부부의 관계도 이런 신뢰가 있는지 의문스러운 현실이다.

 

남의 먹거리를 탈취한 세상은 어떤 신뢰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거래와 법적인 보장 나아가 사회적 이목을 근거로 겨우 관계들이 유지된다. 사람들의 관계에 이러한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치마가 보여준다.

 

다음은 책임을 전가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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