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시작하는 말

   

   
▲ 이 억 주 목사
한국교회언론회 대변인
칼빈대학교 교수
예원교회 담임
 한국 교회, 거룩하신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향하여 비판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마도 존재할 수가 없을지 모른다. 혹시 있다고 해도 미련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 일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비판하는 자가 비판받는 대상보다 더 깨끗해야 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런지 모를 일이고, 그보다는 ‘주님의 교회가 문제가 있다’며 세상을 향하여 나팔을 부는 결과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혹시 청각이 나쁜 개처럼 주인의 발소리와 도둑의 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을까봐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등 떠밀린 사람으로서, 지혜롭지 못할 수도 있으나,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속으로만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상주(喪主)와 같은 심정임을 먼저 고백하겠다.

   

 현재 한국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만이다. 교회는 문제가 없는데 비방하는 자들이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거짓이며 또한 비겁한 말이 된다. 물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양 비난하기 위한 일도 있을 것이며, 혹은 과장된 것도 있을 것이고, 기독교의 특수성을 오해한데서 발생시킨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를 감안하더라도 사실적 문제를 지적받았을 때에 문제를 만들어낸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과오까지 면죄부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한국 교회를 위한 긴급 제언(An Urgent Statement for Korean Churches)을 할 정도의 현실인가? 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실례들은 현실 안주가 얼마나 위험하고 역사적 몰이해 인가를 알게 한다.

   

 한국 교회의 위기 진단은 교회 내부에서부터 제기되고 있다. 2008년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한국 교회 신뢰도 여론조사결과”라는 것을 발표했다. 발표의 결론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쁘다”이다. 이 조사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여론조사 시점이다. 이때는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이 집중 보도되었던 때였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조사를 내어 놓은 곳이 달리 없기에 이를 인용하고자한다.

  

 신뢰도 조사 내용은, 첫째, <한국 기독교를 신뢰하느냐?>에 대한 답으로 ‘신뢰 한다’가 18.4%, ‘보통이다’ 33.3%, ‘신뢰하지 않는다’ 48.3%이다. 둘째, 종교단체의 신뢰도는 천주교가 35.2%, 불교는 31.1%, 기독교는 18.0%로 나타났다. 셋째,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신뢰도에서 천주교 신자는 96.5%,  불교 신자는 72.2%, 기독교 신자는 76.2%라고 답했다.

   

 2005년 통계청의 종교별 인구 발표는, 그동안 기독교계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불교 인구는 1,072만 명, 기독교 인구는 861만 명, 천주교 인구는 514만 명이며, 원불교는 13만 명이다. 이 수치는 10년 전인 1995년과 비교했을 때, 불교 인구는 40만 5천 명이 증가했고, 천주교 인구는 219만 명이 증가했으며, 원불교 인구는 4만 명이 늘었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는 14만 명이 줄었다. 1985년에 종교인구가 42.6%에서 2005년에는 53.1% 로 10.5%가 늘어났는데도, 기독교 인구만 유독 줄었다는 분석이다.


 2006년 10월 19일 시사 주간지 『시사저널』에서 “개신교는 왜 홀로 쇠퇴하는가?” 라는 기사는 개신교만 쇠퇴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통계청의 종교별 인구 조사결과를 근거로 분석한 것이다. 세계의 50대 교회 중 한국에 25개 교회가 있고, 목회자들이 설교도 잘하는데 기독교만 홀로 쇠퇴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개신교 세는 급속히 줄어들 것이다’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 기사가 교회를 향한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통해서도 그 분명하신 뜻을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중심부에 계시지 못하시고, 중심부에는 목회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 같은 실례와 현상들을 미루어 본다면, 미련한 사람이라도 이 시대가 기독교의 위기라고 진단하기에 무리가 없지 않은가.



II.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상기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 원인은 예전의 우열(優劣)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체계의 문제도 아니다. 조직적인 운영체계의 문제도 아니다. 기윤실에서의 발표에서 ‘무엇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서, 42%의 응답이 교인과 교계 지도자들의 언행일치의 삶이라고 했고,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 25.8%, 사회봉사가 11.9%, 재정사용의 투명성이 11.5%, 성장제일주의 개선이 4.5%, 강압적인 전도가 3.8%로 나타난다.


 위와 같은 응답은 한마디로 ‘기독교 이미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비 기독교인들에게 호감도가 낮은 것은, 말뿐이고, 독선적이며, 너그럽지 못하고, 교회의 재정을 하나님의 재물이라고 조심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이름을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천명한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Let God be God)하지 않는 데에 한국 교회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또한 진리를 진리답게(Let truth be truth)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있다.

   

 문제를 누가 만들었는가? 내부적으로는 일부 교계지도자들과 교회 비판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며, 외부적으로는 기독교 안티세력들과 일부 방송언론들이다. 비신자들은 대부분 언론에서 종교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고 하니, 언론의 영향이 컸음도 부인할 수 없다.


 현재 한국 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기이한 일들이 연속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교회와 목회자를 비판하는 것이 일과성이나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이 같은 일은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며, 교회에 대한 악선전의 장이 되게 하여 교회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하여도 그들의 입만을 막는 것이 문제 해결 방법은 아니다. 먼저는 왜 그 같은 일이 생겨났는가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어야 하고, 종교개혁의 모토처럼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 현대 교회의 개혁은 진리수호의 문제라기보다는, 목회자의 언행일치의 삶, 전하는 내용을 삶으로 실천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의 성결회복이 우선이다.

    

 교계의 문제는 평신도들이 만들지 않는다. 대부분 목회자들이 만들어 낸다. 혹시 평신도가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들을 세운 목회자의 책임으로 돌려야 맞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목회자가 나서서 우리의 책임이라고 떠안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비판이나 외침이라면 먼저 목회자가 들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나서야 하고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옳다고 본다. 하나님 말씀을 벗어난 것이 문제라면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범죄적인 문제라면 이제라도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야 한다.

   

 교회가 교회답고, 목회자가 목회자다워야 한다는 교회 안팎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곤잘레스(Justo L. Gonzalez)의 “교회는 바티칸(Vatican)에서가 아니라 카타콤(Catacomb)에 있을 때에 힘이 있었다.”는 말은 옳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히브리서 11:38) 초대교회가 극심한 박해 중에서도 견디어 내며, 복음이 생명의 진리임을 증거했었던 것, 진리가 진리임을 세상에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인들의 ‘순결한 삶이라는 거룩한 그릇’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데 순결한 삶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시대는 결코 복음이 쇠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오히려 칭송을 들었다. 그로 인하여 구원 얻을 백성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7)


 교회는 인간의 영혼구원의 본래적 사명 외에 시대마다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아왔었다. 구한말의 한국 교회는 절망하던 시대에 희망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었다. 1920년대에 한국 최고의 지성 중에 하나였다고 평가되던 춘원 이광수는 “우리 민족은 기독교에 감사해야 한다” 고 하였다. 한국 교회 초기에 기독교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다고 인정받았다.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의 글에는 청천강 인근 지역 연동교회에서 두 집 살림을 하던 김 씨라는 영수의 윤리적 문제를 들어서 그를 파직한 일이 있었다. 당시 교회가 추구하는 삶의 정신이 사회윤리보다 우월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곳에 진리는 힘이 있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교회가 사회를 새롭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보다 더 높은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럼에도 세상에서의 등불은 꺼지고, 소금은 맛을 잃었음을 실망하는 이들이 많다. 교회가 세상의 짐을 져 주어야 하는데, 교회가 세상에 짐이 되고 있는가? 라며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다. 신선한 샘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하는데, 오염을 더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에 교회가 필요치 않다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그 말이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문제요 교회지도자들의 책임이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맛 잃은 소금은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불 꺼진 등은 등경 위에서 치워진다.(눅 14:33-34)


 교회의 문제들을 고쳐서 새롭게 하겠다는 시도, 그 개혁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종교개혁자들의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sempre reformasta)는 정신은 계승되어야 하며 실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교리의 문제나 진리의 문제라면 공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만 일부인사들의 실천적 문제에 대하여는 인민재판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교계 일부의 상업주의(commercialism), 혹은 소 영웅주의적인 방법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티들의 숙주(熟紬)역할만 할 뿐이며, 교회에 대한 비난여론만 가중시킬 뿐이다. 교회는 비난으로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난보다 눈물의 기도, 복음적 헌신을 보여줌으로 성령의 역사로 되어진다는 사실은 역사의 증거이다.

   

 교회 간에도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대형교회에 장점, 혹은 순기능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교회의 역기능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어진다. 소형 교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러움과 동시에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몇 가지 문제들을 발생시켜서, 한국 교회를 향한 안티(anti)들의 공격거리를 만들어 놓고, 선교적 손해는 작은 교회가 떠안아야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접하고, 진정성이 있는 겸손으로 그들을 대하며 귀히 여기고 있는가? 라는 비판의 소리를 깊이 되새겨야 한다.



III.  신학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


 현재의 한국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업으로서의 신학교 운영이 아니라, 탐욕스런 인간들의 사업이 되고 있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상업주의적 신학교 운영에 번영신학(Theology of Prosperity)의 전파로 인하여 절대 진리의 상대화와 세속화가 문제다. 불교의 승려배출학교는 손가락을 헤아리고, 신부를 배출하는 천주교 학교는 하나인데, 목사를 배출하는 학교의 수는 얼마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아마 하나님도 모르실 것 같다는 조크도 있다. 학력이라는 표현을 쓰기조차 무색한 무인가 신학교의 문제는 한국 교회와 사회에 골칫거리이다.

   

 일찍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은 “신학교가 가는 곳으로 목사가 가고, 목사가 가는 곳으로 교회가 가고, 교회가 가는 곳으로 사회가 간다”고 했는데, 현재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문제라면, 그 연원(淵源)은 신학교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딘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신학교육의 문제점은 결국 목회자의 부실로 이어진다. 교회(Chapel)의 뿌리가 외투(Capella)라는 말에서 연원하였고, 진정한 목회자(Chaplain)는 헐벗고 소외된 자에게 외투 반쪽을 걸쳐주는 심정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인데, 왜곡된 신학교 교육에서 과연 그 같은 목회자를 배출해 낼 수 있을지는 매우 의문이다.


 어느 종교에서는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가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키면 ‘가짜이기 때문이다’라는 변명이 통하게 한다. 한국 교회를 향하여 큰 피해를 입히는 가짜 목회자의 분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방안도 함께 강구해야 한다.


 교회 문제의 근본이 목회자의 문제라면,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의 전반적인 점검과 그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 신학교를 검증하고, 이를 구분할 수 있는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 단지 친목적인 기구는 별 의미가 없다. 미국의 경우처럼, AABC(Association of American Bible Colleges/ 신학대학협의회), ATS(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 신학대학원협의회)와 같은 기구 운영도 한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이 일은 빠를수록 좋다.



IV. 복음적 사명감 결여로 인한 복음의 능력 상실,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라


 목회자들의 복음적 사명감 결여는 필경 복음을 위하여 살고, 복음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충성과 헌신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설교가 사람들의 인기에 따라 그 내용과 전달이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인공적 가공을 한다.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내용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회중들은 복음적 삶이 아니라, 복음을 이용한 자신의 축복만을 바라보게 되고, 복음적 사명 수행을 도외시 하게 된다. 목회자가 목회현장의 머릿수를 늘리려는 야망에 빠져들게 된다. 이 처럼 복음진리를 떠난 곳에 교회의 위기가 찾아온다. 소위 목회성공이란, 교회의 대형화를 일컫는 말이 되고, 그 성공 강박증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교회의 존재가치를 의심받게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5:31)


 골목 안에 있는 교회보다 큰 길 가에 있는 화려하고 큰 교회가 더 잘해야 한다. 더 겸손하고 더 섬겨야 한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고, 사진 찍히는 일에 열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에 있다. 복음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이며,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삶으로 증거 할 때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에 붙잡혀서 살아가야 한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새롭게 하려는 여러 방법들을 찾으나 복음의 능력을 놓치면 안 된다.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주의 말씀과 진실한 기도와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에 거룩한 성령께 붙잡혀서 헌신하여 살아가는 목회자의 본분을 회복해야 한다.



V.  오염된 교회 정치는 한국 교회를 타락시킨다.

교회 정치문화를 새롭게 해야 한다

 교회 정치라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생겨난 조직이고 체제이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정치에 종속되고, 오히려 교회정치를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 같은 현실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 정치가 본질대로 아비의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는 것이라면 다르겠으나, 독재자와 같다면 그 존재의 필요성까지 의심을 받게 된다.


 먼저 교회 정치가 세상 정치와의 관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내었다. 가깝게는 현 정권과의 관계이다. MB가 교회에서는 장로지만, 국가의 수장(首長)이다. 기독교 신앙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일에는 비판이나 책망이 있을 수 있으나, 통치를 잘하도록 기도하고 도우며, 국가의 지도자로써 평가받을 수 있도록 기다려야 했었다. 그러나 일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으로 종교편향이라는 비난의 빌미를 주었었다. 기독교를 흠잡고 MB를 흠잡으려는 사람들이 MB와 기독교를 동치(同値)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았어야 했었다.


 다음으로 교회 정치 현실에 관한 문제이다. 잘못된 교회정치가 교회를 어렵게 한다. 결국 사회까지도 불행하게 한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법체계가 문제라기보다, 법적용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문제다. 교회 분열의 원인도 교리, 진리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이해득실이 기준이었다. 이것은 세속정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교회정치가 이러하면, 세상을 향한 선지자의 목소리를 낼 수가 있겠는가? 19세기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교회정치가 세상정치보다 더욱더 추악하다”고 했는데 과연 현재 한국 교회 정치는 다른가?


 목회자는 신학교 문을 나서면 자신의 영혼을 살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무리의 영혼을 돌보고, 위탁받은 복음적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 그런데 먼저 왜곡된 교회정치 문화에 오염되어 간다. 패와 당 짓기, 돈의 유혹을 따르고, 정직하지 못한 언행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이익을 위함이다. 이같이 되면, 교회 정치라는 말이 정직하지 않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되어간다.


 정치적인 블록화로 인하여 교권이 세습되고, 그 권력의 향기에 취하여 종의 본분을 잊은 목회자는 이미 주님의 종이라 말할 수 없다. 교인들의 수가 교계 리더십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교회 규모가 크면 동원할 수 있는 재력이 크고, 인원 동원에도 위력이 된다. 교권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불협화음이고, 냄새는 세상까지 오염시키고 자라나는 세대까지 그 영향권 아래 둔다. 기성세대의 목회를 따라가는 다음 세대는 기성 교회정치를 혐오하지만, 때가 되면 또 닮아간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어 온 것이 한국 교회 정치의 부정적 모습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희망의 공급처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현실이 되었다. 한국 교회는 비난에 대하여 변명만 할 수 없다. 이제 타락한 교회 정치문화를 버려야 한다. 그 끈질긴 유혹을 이기려는 노력을, 스스로 가슴 찢는 회개와 뼈를 깎는 반성을 새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실까 두렵다.

 사도 바울은 올바른 주님의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해산의 고통을 다시 하겠다고 했다.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논쟁으로 새롭게 되지 않는다. 햄프턴 시드니 대학 학장인 존 홀트 라이스(John Holt Rice)는 “교회는 논쟁으로 정결케 되지 않고, 거룩한 사랑으로 정결케 된다”고 했다.(Church is not purified by argument but by holy love)



VI. 재정운영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라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가난을 친구처럼 여기며 살았었다. 아직도 청빈은 한물 간 수도원의 입원 서약이 아니다. 목회자가 좀 불편하게 살고 가난한 이들과 친구로 살아가는 모습이 귀하다. 돈으로 영혼을 살 수는 없으나, 사랑으로 친구를 얻을 수 있다. 세상은 목회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일에 더욱 힘쓰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목회자는 말로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행동의 메신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 재정운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선순위를 정하여야 하고, 헌금한 성도들이 흔쾌히 동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져진다면 재정 투명성의 시비가 없어질 것이다. 교계 단체장 선거에서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없어져야 한다. 교회당, 건물을 팔고 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다.


 레오나르드 레이븐힐(Leonard Ravenhill)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유복한 그리스도인들은 돈으로 때우려는 것 같다. 그들은 소위 ‘복음 토크쇼’와 ‘찬양 쇼’에 거액을 기부하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에게 돈을 받는 ‘기독교 쇼’ 기획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느라고 바쁘다”라고 했는데, 이는 1세기 전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현실을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귀하게 사용해야 한다. 헌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도의 의무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우선순위를 따라서 사용되어져야 한다. 목회자 개인의 필요를 위한 용도로 원칙도 없이 사용된다면 이는 범법행위와 다르지 않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국가예산을 함부로 사용한 공무원들은 비난 받고 단죄를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물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교회가 세상 어느 단체, 어느 종교보다 더 많은 봉사와 사회를 향한 수고가 있어도(사회 복지 민간부분 70-80% 감당)정당한 평가를 못 받는 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름인데, 이제는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가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지혜롭게 할 일이다.


 교회의 재정을 사용함에 있어서 화려한 외형적 실적을 자랑하기 보다는 아직도 국내에 많은 목회자들과 은퇴하신 목회자들의 가난한 삶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VII. 마치는 말

   

 한국 교회 미스바대각성 운동은 골방에서부터 해야 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 교회는 지난해 1907년 평양대부흥100주년기념 행사를 근사하게 치러냈다. 그런데 지금 남은 것이 무엇인가? 회개하기 위하여 모여야 하는데 기념행사만 했다. 기도한다고 선전하고, 봉사한다고 신문에 사진 먼저 찍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이벤트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의미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미 상을 다 받고나면 그만인 것이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소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이 믿을 수 있고,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소망을 말하면서 왜 땅에 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며, 교회의 문제를 왜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서 온갖 추문을 다 만들어 보이는가? 목회자는 목회자답고, 성도는 성도답기를 힘써야 한다.


 세례요한처럼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셔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이 시대의 교회를 다시 세우시는 역사를 보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려는 전도자의 심정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 교회 암흑기의 종교개혁자들처럼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계 1:1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받들어 섬기면 예수님의 제자이고 사도이지만, 회중의 머리가 되고자 한다면 이미 종이 아닌 주인이 되어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복음의 종 되기를, 복음을 위하여 죽고자 한다면 한국 교회는 이제도 민족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이 땅에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하여, 주의 종들이 그 받은바 사명을 따라서,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고,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헌신으로 몸을 던질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막대기도 사용하시고, 촛대도 옮기실 수도 있다는, 절박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해야 한다.(사 10:5, 계 2:5)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셨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 126:5-6)고 하셨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들로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발을 씻기고, 세상을 섬기고, 복음을 위하여 죽고자 한다면(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다시 사는 역사, 한국 교회 부흥의 새로운 역사가 있을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주님을 닮아서 앞서 나아가면 뒤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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