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2년 10월 2일 주일설교 원고 전문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 2)

 

강영안(고신대학교 전 이사장, 서강대 명예교수, Calvin Theological Seminary 교수)
강영안(고신대학교 전 이사장, 서강대 명예교수, Calvin Theological Seminary 교수)

여러분 평안하셨습니까? 2019년 12월 8일 주일 여러분을 뵈었습니다. 3년이 거의 되어 갑니다. 그때 우리들교회의 성경 읽기와 묵상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 그해 겨울과 봄 <읽는다는 : 독서법 전통을 통해서 성경 읽기와 성경 묵상> 작업하여 IVP를 통해 출판하였습니다. 사이 우리는 코비드 19라는 초유의 팬데믹을 겪었습니다. <전도서> 7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지금은 여전히 걸어가던 멈추고 뒤돌아 보고 물어보고 생각해 보아야 입니다.   시기에 <전도서>만큼 좋은 책은 없습니다. 전도서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수장절) 읽는 성경입니다.  올해는 10월 9일부터 주일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여전히 지킵니다.  그러니 전도서는 가을에 읽는 책인 셈입니다. 다음주부터 큐티 내용도 전도서라 전도서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어 볼까 합니다.                 

 


 

먼저 (첫째로) 전도서가 어떤 책인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서는 크게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 1절부터 11절까지를 전도서의 시작이라 있습니다. 그리고 128절부터 14절까지가 전도서를 마무리 짓는 부분입니다. 사이에 들어있는 1 12절부터 12 7절까지가 전도서의 몸통 부분입니다. 시작 부분과 끝나는 부분은 3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전도자의 말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 1-2) 다시 12장 8절에 전도자를 3인칭으로 등장시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는 지혜자여서 여전히 백성들에게 지혜를 가르쳤고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많이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억하였느라”라고 쓰면서 마지막 가지 권고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리라.”  

몸통을 이루는 1 12절부터 12장 7절까지 전도자는 1인칭으로 등장합니다. “나 전도자는…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1:12), “내가 아래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1:14)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한 내용을 서술하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12장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선언합니다.   

전도서 히브리어 이름은 ‘코헬렛’(קֹהֶלֶת)입니다. 코헬렛은 모으는 사람, 모임을 주선하는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문장을 모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서 수집가나 민담 채집자처럼 단순히 수집가나 정리자에 머물지 않고 그것들을 토대로 지혜를 가르치는 현자(賢者) 가까운 모습을 사람이라 있습니다. ‘코헬렛에는 ‘수집가’, ‘집회 소집자’, ‘설교자 뜻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1장 12절부터 코헬렛은 1인칭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나 코헬렛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1:12-13). 여기서 코헬렛은 솔로몬 왕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늘 아래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일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하늘 아래에서, 아래에서, 다시 말해 땅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관찰과 탐구의 대상입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물건을 사고팔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묻고 따지고, 공부하고 사람들과 관계하는 , 정치경제예술학문교육 등이 모두 사람이 하는 일에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인생과 관련된,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일이 탐구와 관찰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땅에 하는 모든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 코헬렛의 과제입니다. 우리의 삶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한 가치, 살만한 의미가 있다면 어디서 그것을 찾을 있을 것인가

전도서 전체와 관련해서 여러분께 먼저 적용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적용질문 1. 여러분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삶의 가치에 대해서, 삶의 방향에 관해서 질문을 던져 보십니까? 질문을 그리스도에서 던질 때와 그리스도바깥에서, 그리스도와상관없이던질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제 전도서에서 삶을 보는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서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날개에 비유하기도 하고 주제음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한쪽에서 흐르는 선율은 허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쪽은 삶의 기쁨에 관한 선율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선율, 우리에게 익숙한 한쪽 날개는 허무입니다.

○1: 2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14 내가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2:1 나는 마음에 이르기를 ,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2: 11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손으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2:16-17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잊어버린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2:21-23 어떤 사람은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악이로다. 사람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헛됨에 대한 자각과 한탄은 1장과 2장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4, 5, 6, 7, 8그리고 마지막 11장과 12장에서도 계속됩니다.

○11: 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헛되도다.

○12:7-8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때 ‘헛되다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말로헛되고 헛되다’라고 번역한 말은 히브리어로하벨 하발림’(הֲבֵל הֲבָלִים)입니다. 하벨(הֲבֵל)또는 헤벨(הֶבֶל)공기’, ‘수증기’, ‘숨’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하벨 하발림’은공기 중의 공기’, ‘수증기 중의 수증기’, ‘ 중의 숨’입니다. 히브리어는 최상급을 표현할 이렇게 말합니다. 아가서를쉬르 하쉬림’( שִׁיר הַשִּׁירִים) ‘노래들 중의 노래’ 최고의 노래’라고 표현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벨 하발림’은 ‘최고의 공기’, ‘최고의 수증기’, ‘최고의 숨’, 이라고 직역할 있겠지요.

문제는 여기서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가, 은유적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자적으로 곧장 이해하면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공기’, ‘수증기’, ‘숨’은 어떤 공통점이 있겠습니까? ‘안개’나 ‘바람’을 여기에 보태 보십시오. 그러면 무슨 뜻이 공통으로 떠오릅니까?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실체를 잡기가 힘들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공통점일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잡을 없고, 지적으로는 파악할 없고 이해할 없고, 지속적인 가치가 없다는 말로 이해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벨 하발림’은 ‘뭔가 알맹이가 없다, 이해할 없다, 가치가 없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 것입니다. 우리 손에 잡을 수도 넣을 수도 없고,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우리 마음대로 도무지 없는, 한순간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질 아니라 지속적인 가치가 없는 것들로 우리 삶이 가득 찼다는 말로 이해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관점으로 보아서는 실체나 알맹이가 없고, 인식론적 관점에서 때는 없으며, 가치론적 관점에서는 가치가 없는 삶을 일컫는다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코헬렛의 ‘하벨 하발림’은 니체나 카뮈에게서 있는 허무주의와 구별됩니다. 니체나 카뮈의 허무주의는 단적으로 말해 세계와 인간 존재를 떠받혀 주는 토대, 근원, 원인이 없다는 사상입니다.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인 토대와 원인, 나아가 궁극적 목적이 되는 존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무신론이 필연적으로 개입됩니다. 존재하는 것에는 어떤 초월적인 원인이나 이유, 초월적인 목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때 말하는 ‘허무’는 원인과 토대와 목적이 되는 ‘어떤 무엇이 없다’라는 의미에서의 ‘허무’(Nothing)입니다. 이것을 카뮈는 ‘부조리’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삶 이란, 존재가 ‘부조리하다’고 해서 아무렇게 살거나 무의미하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가치와 의미, 목적으로 인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코헬렛은 부조리에 대한 경험보다는 시간의 유한성과 죽음에 직면한 인간 실존을 ‘헤벨, ‘하벨 하발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코헬렛의 한쪽 표어를 말하자면 ‘메멘토 모리’,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라고 말할 있습니다.  

 

적용질문2. 여러분은 삶의 헛됨을 분명하게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것을 어디서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허무주의 그리스도안에서 삶을헛되다 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코헬렛의 가르침은 ‘허무하다고 가르치는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날개, 하나의 주제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적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도서 2: 24)라는 인식이 하나의 흐름입니다.

○3:11-13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없게 하셨도다.

○3:22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5:18-19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8: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아래에서 살게 하신 동안 수고하는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9:7-9 너는 가서 기쁨으로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머리에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헛된 평생의 모든 하나님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몫이니라.

○11: 9   청년이여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이렇게 최소한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기쁨(simcha)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코헬렛은 우리의 일상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까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불렀습니다. (호레이스, 라틴어로 Horatius가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라는 말입니다. 코헬렛은 이를 두고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2:24)라고 말합니다. ‘마타트 엘로힘’( מַתַּ֥ת אֱלֹהִ֖ים)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전도서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 이라는 표현을 만납니다. 1 13 삶의 의미 탐구의 괴로움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고, 2 24절에서는 먹고 마시고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말합니다. 둘을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의미 탐구의 노력은 괴로움을 안겨주고 결국에는 절망에 도달하게 합니다. 코헬렛은 삶을 미워하는 비관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삶을 되돌아봅니다. 삶의 의미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두는 대단한 업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순간 시간 무엇을 하든지, 하는 속에 기뻐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있음을 발견합니다. 코헬렛은 비관주의자이기는커녕 삶을 강하게 긍정하는 낙관주의지요 심지어 쾌락주의자로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하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 몸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었습니까? 우리 부모들 없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부모없이 우리가 자랄 없었습니다. 우리 몸을 우리가 스스로 지탱해 나갑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 스스로 먹어야 합니다. 먹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음식을 입안으로 넣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들을 보십시오. 어느 하나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은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벼를 거두고 밀을 거두고 배추와 무를 거둔다고 합시다. 씨를 뿌리는 것은 농부이지만 씨가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먹는 채소, 우리가 먹는 고기, 모두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들을 먹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삶은 우리 아닌 것들, 무수한 타자의 죽음을 토대로 가능합니다. 타자의 죽음없이 나의 육신은 지탱할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사상은 어떻습니까? 내가 생각한다고 하지만 타인들로부터 배우지 않고서는 생각할 없고, 없고, 지식을 축적할 없습니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느라 내가   애쓰지만 그러나 나의 애씀에는 언제나 타인의 생각, 타인이 힘겹게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 이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평화를 누리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안겨 주셨습니다. 이보다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선물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성찬을 서양말로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릅니다. ‘감사라는 말이지요. 성찬에 참여하는 삶은 다름 아니라 감사의 삶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감사로부터 우러나온 삶입니다.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 있습니다. 우리 삶이 이렇게 보면 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 우리의 자녀, 우리의 선생님, 우리의 친구, 우리의 교우, 우리의 교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자연,  모두가 우리에게 선물입니다.

선물에 대한 태도는 가지입니다. 방금 언급한 감사입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받은 선물에 대해서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우리의 삶의 기조를 이룰 우리에게는 자족과 기쁨, 이로부터 오는 평안이 있습니다. 삶에 감사가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남과 비교하게 됩니다. 비교하면 할수록 나에게 부족한 , 내가 이루지 못한 것만 눈에 보입니다. 자조에 빠지게 되고 자신을 비하하게 되고 삶을 비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감사가 없으면 오히려 자신의 환경과 타인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게 됩니다. 불평은 타인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기보다는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관계에 들어서게 합니다. 삶은 행복하기 보다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지금 내가 처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감사하는 삶을 배우는 것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선물에 대한 번째 태도는 받은 선물을 방치하지 않고 선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선물을 받은 아이는 장롱 속에 그것을 고이 아껴 두지 않습니다. 열심히 그것을 가지고 놉니다. 삶을 선물인 아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남의 유익을 위해서 선하게 사용합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 않은 사람은 드뭅니다. 누구라도 조금은 남에게 나누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힘이든, 지식이든, 관심이든, 무엇이든 필요한 사람과 나눌 , 그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결코 쟁취해서 얻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주어집니다. 행복은 마치 선물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수용할 저절로 주어집니다. “내가 행복해야지! 소리 지르면서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사람은 결코 행복할 없습니다. 자기만 행복하다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남들도 행복해야 진정 행복을 누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으로 남을 돌아보는 삶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남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든, 자기 것을 내어 주는 것이든, 고통받는 사람에게 말건냄이든 그냥 곁에 있어주든 남과 함께 행복할 우리는 행복할 있습니다. 것이 없는 사람은 그곳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받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줍니다.

 

적용질문 3. 여러분은 삶을선물, 받은 선물을 제대로 쓰야 과제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어떤 방식의 삶이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선물로 선용하는 것이 될까요? 그냥 있어 주기만 해도 타인에게 선물이 되는 경험을 보셨습니까

                                                                                 


 

이제 끝으로 교회 전통에서 코헬렛을 읽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교회 전통에서도 전도서를 보는 입장이 극단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라틴어 불가타 성경 번역을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420) 대표되는 금욕적비관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1526 루터가 강의에 나타나는 향유적낙관적 해석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영어로는 세인트 제롬(St. Jerome)이라고 하지요] 전도서를 읽을 가지 원칙을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세상의 멸시’(contemptus mundi)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모든 일은 무익한 (pro nihilo)이라는 원리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원리를 적용해서 전도서 전체를 읽어 냅니다. 세상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무가치한 것이므로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에로니무스는 전도서에 나오는 먹고 마심으로 기쁨을 주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의 먹고 마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에 참여함을 두고 말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렇기에 히에로니무스는 우리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언제나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를 그린 대부분의 초상화에 해골 바가지가 곁에 놓여 있는 것도 때문입니다.

중세 1000년을 지배한 해석을 교회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반대했습니다. 루터는 전도서가 가정이나 정치, 경제 현실적 삶에 무관심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적 삶의 강한 긍정을 전도서에서 읽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책의 목적을 요약하면 이렇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우리의 일상사 가운데 평안과 안정된 마음을 주어 우리가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 없이 현재에 만족하게 살고 바울이 말하듯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기를’( 4:6) 원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라는 구절에 대해서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전도자가 자주 반복하게 , 주요 결론이며 전도서 전체의 요점이다. 구절은 주목해야 구절인데, 앞에 나온 것들과 뒤따라오는 것들 모두를 설명해 준다.

루터는 우리에게 ‘카르페 디엠’, ‘일상의 나날을 즐거워하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해석은 양쪽 극단에 있는 보입니다. 히에로니무스의 해석은 현실 부정이나 세상 멸시를 요구합니다. 루터의 해석은 현실 긍정 또는 세상 향유를 요구합니다. 히에로니무스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하고 금욕적인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루터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즐겨야 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요? 교회개혁 운동을 통해서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루터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일하는 전체를 하나님 안에서 귀한 선물로 누리면서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루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25-33)라는 말씀과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면을 우리는 이해하고 일상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일상의 삶을 의미 있게 사는 바탕에는 감사함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상은 코헬렛이 반복해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는 가운데 즐거워함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우리가 보일 있는 반응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치솟아 오를 찬송이 따르고, 찬송이 우리의 입술로 새어 나올 우리 삶은 아무리 일시적이고 덧없이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한 것일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히려 풍성하고 행복할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무슨 커다란 업적이나 성과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덧없이 지나가는 일상을 안에서 즐거워하고 감사함에 있다면 이때 비로소 마치 먹고 마시고 속에서 누리는 기쁨이 좋은 것처럼 지혜와 지식, 그리고 우리가 속에서 누리는 일이나 업적도 좋은 것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일하는 가운데 즐거워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우리 삶은 동물적인 삶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 가운데서 누리는 기쁨만 있다면 우리 삶은 정신적 삶에만 국한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을 선물로 주셔서 같이 누릴 있도록 해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 주어진 것들은 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고, 내가 누리는 것을 이웃도 함께 누리도록 나누어 주는 이야말로 우리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것입니다.   

일상을 선물로,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고 나눈다고 해도 우리가 잊어서는 것은 모든 것이 일시적이며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헤벨 그대로 남습니다. 땅의 우리의 삶은 헤벨이 드리워진 삶입니다. 사실을 의식하면서 전도자는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의 몸체로, 삶의 몸둥아리로 삼으면서 메멘토 모리와 까르뻬 디엠을 양날개에 달고 날아 간다면 우리는 무조건적인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무조건적인 낙관주의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고 현재의 삶을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되,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평강과 화평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한편으로는 삶이 헛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 비로소 상황에 따라 때를 분간할 아는 법을 배울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겠습니다. 부활은 기쁨과 허무를 넘어서 모든 삶을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가는 삶으로 이해할 있게 줍니다. 부활은 2000년전 예수께 일어난 사건이면서 미래에 우리에게도 일어날 사건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에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이미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안에 분의 영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살게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때로는 슬픔을 경험할 있지만 지금, 여기서 누리는 부활의 삶은 우리의 삶이 이제는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손에 있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부활의 공동체로 부활의 삶을 가을에, 다가오는 모든 나날가운데, 땅의 순례자 길을 마칠 때까지, 그리고 그뒤에도 영원히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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