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인가?’, 한국기독생명윤리협회 세미나 개최

시작은 엄격한 기준, 갈수록 기준 느슨해져서 생명경시 문제로!

‘존엄사’라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고 경고!!

2022년10월27일(목) 오후7시부터 한국컨퍼런스센터 지하1층에서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주최로 안락사 세미나가(‘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인가?’) 열렸다. 2016년에 제정되고 2018년 2월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의해 현재 법적으로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만이 허용되고 있으며,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은 의료계와 법조계와 종교계와 정부 등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올해 6월에 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연명의료결정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우리 사회에 안락사 논쟁의 불을 다시 지폈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주체로 "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인가"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주체로 "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인가"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안락사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를 전략적으로 미화하기 위해서 ‘존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다가 이제는 ‘의사조력자살’을 미화하기 위해서 ‘조력존엄사’라는 말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죽음에 이르는 약물을 처방하여 자살을 돕겠다는 것이 개정안의 핵심이며, 개정안은 기존의 연명의료결정법의 제17조(추정판단)와 제18조(대리판단)를 악용하는 발판으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법으로 자살을 권하고 부추기겠다는 것이며, 이후에는 환자의 뜻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생명을 종결하는 안락사로 확대될 수 있다. ‘조력존엄사’라고 지칭하는 ‘의사조력자살’은 의사가 환자의 자살을 돕는 것이며, 결국에는 안락사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촉매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안락사가 과연 존엄한 죽음인지,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과 안락사는 어떻게 다른지, 환자의 생명을 종결하는 문제를 추정판단과 대리판단으로 할 수 있는지, 죽음을 선택할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연명치료와 관련하여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밝힌다. 의료 분야에서 문지호 원장(명이비인후과), 법률 분야에서 연취현 변호사(법률사무소Y 대표), 신학 분야에서는 이길찬 목사(새길교회)가 발제하고, 장보식 변호사(법무법인 한중)가 좌장으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좌측부터 좌장 장보식 변호사, 문지호 원장, 연취현 변호사, 이길찬 목사.
좌측부터 좌장 장보식 변호사, 문지호 원장, 연취현 변호사, 이길찬 목사.

문지호 원장은 어느 나라나 안락사를 도입하기 위해서 그 시작은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다고 했다. ‘말기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환자 중,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로만 한정하여 안락사를 허용하기로 하고 법안이 마련된다. 하지만 일단 안락사가 허용되면 기준은 무너진다고 했다. 문 원장은 2001년부터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한 네덜란드를 예로 들었다. 말기환자로 국한했던 기준을 2018년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로 범위를 확대했고, 2020년에는 중증 치매와 본인이 희망했다고 보기 어려운 12세 미만 불치병 어린이에게까지 안락사를 허용했다. 아무리 엄격하게 시행하더라도 안락사를 한번 열린 문은 더 많은 사람을 안락사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질 수밖에 없고 매년 조력자살을 택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의 실례가 되었다고 했다.

 

문 원장은 자기결정권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안락사의 가치관은 생명의 존엄이 아닌 생명을 경시하는 ‘자살’의 가치관과 같다. 법안이 만들어지면 말기 환자의 통증과는 무관하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우울감이나 사회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사람마저 안락사나 조력자살의 대상이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에게 죽음은 극복하고 싸우는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일부다. 이 가치를 가지고 무의미한 연명치료 대신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다. 내 뜻대로 주어지지 않은 생명을 내 마음대로 종결하는 안락사를 권리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의료인의 입장에서 안락사 문제를 발제하고 있다. 
의료인의 입장에서 안락사 문제를 발제하고 있다. 

연취연 변호사는 '조력존엄사라는 이름의 죽음선택권에 대한 법률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의 개관을 설명하며, 조력존엄사로 어떻게 확대되는지를 이어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형법상의 문제와 남아있는 법률상 의문과 책임 문제를 논하였다. 연 변호사는 입법만능주의(立法萬能主義:사회의 어떤 문제든 법률을 제정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언급했다. 최근 정치의 흐름이 입법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만 흐르고 있는데, 그것이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점까지 외면하고 있는 행태는 몹시 안타깝다. 법률 제정 후에 부작용을 수정한다면, 이는 엄청난 사회적 대가를 치른 다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대한민국 국회가 국가와 국민의 먼 미래를 충분히 숙고하고 논의하여 좋은 입법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적극적 안락사를 도입하자는 입법 논의가 과연, 국민들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법인지 생각해볼 일이라며 발제를 마쳤다.

 

마지막 발제로 이길찬 목사는 ‘존엄사’라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왜 굳이 이런 용어를 사용할까?”라며 반문했다.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라는 말 자체는 ‘좋은 죽음, 평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라는 뜻이지만 절대다수의 사람은 안락사를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한다. 안락사라는 말만 들으면 히틀러를 생각하고, 일제의 생체실험을 생각한다. 그래서 소극적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소극적 안락사라는 말 대신에 전략적으로 ‘존엄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에서 연명의료장치에 의존해서 경우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한시라도 빨리 연명의료장치를 제거하여 죽게 함으로써 환자가 존엄하고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하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존엄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존엄사’라고 부르든, 안규백 의원의 개정안처럼 ‘조력존엄사’로 부르든 전자는 안락사이고, 후자는 ‘의사조력자살’이다. 둘 다 살인이다. 아무리 양보해도 ‘의사조력자살’은 자살방조죄에 해당하며, ‘존엄사’는 환자 당사자의 뜻을 확인하지 않고 추정판단과 대리판단에 근거하여 시행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살인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법률가의 입장에서 발제하는 연취현 변호사.
법률가의 입장에서 발제하는 연취현 변호사.

또 근원적으로 따질 경우, 과연 죽음이란 말에 ‘존엄’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가? ‘존엄사’라는 개념 자체가 가능한가? 안락사가 존엄한 죽음이라면 이외의 다른 죽음은 모두 비참한 죽음인가? ‘존엄사’라는 말만 들으면 “존엄하게, 품위 있게 죽도록 한다고?” 좋은 말, 좋은 제도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친동성애자들이 ‘차별금지법’이라는 말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듯이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존엄사’라는 말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목사는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언급하며 발제를 마쳤다. 우리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죽음 속에 살아가는 존재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람이 상당한 고통을 겪는다. 이것은 타락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죽음과 고통을 회피하려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의연하게 죽음과 고통을 껴안아야 한다. 의연하게 죽음과 고통을 껴안는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존재론적인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