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고신 총회장)이 주최하고 코람데오닷컴(대표 김대진 목사)가 후원한 2022 미포 전국대회가 지난 12월 5일 서울제일교회(담임 김동춘 목사) 예배당에서 "고신총회70주년과 한국사회와 교회"라는 주제 아래 개최되었다.

2022 미포 전국대회가 지난 12월 5일 서울제일교회(담임 김동춘 목사) 예배당에서 "고신총회70주년과 한국사회와 교회"라는 주제 아래 개최되었다.
2022 미포 전국대회가 지난 12월 5일 서울제일교회(담임 김동춘 목사) 예배당에서 "고신총회70주년과 한국사회와 교회"라는 주제 아래 개최되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심창섭 목사(총신대 신학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고신 70주년과 바램”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심창섭 교수는 “그동안 한국 개혁교회는 “기독교강요의 가르침을 교리화 혹은 신학화하여 통전적이고 역동적인 칼빈의 개혁사상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몰입시켰다.”며 “이러한 신학적 이론에 집착한 한국교회의 개혁신앙과 신학을 칼빈의 통전적인 개혁신학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작업을 고신교단이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히 심창섭 교수는 “고신교단이 먼저 탈 교권주의를 위해 현재의 총회의 관료제도(bureacracy)를 개혁해야 한다.”며 “총회장의 위상을 총회의 사회 의장(moderator)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심 교수는 “교권주의자들이 서식하지 못하도록 방대한 총회 기구를 축소하고 대부분은 노회에서 처리하도록 하자”고 도전함으로 참석자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아래 발제문 전문.


발제하는 심창섭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명예 교수)
발제하는 심창섭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명예 교수)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고신 70주년과 바램1)

-고신총회의 정체성 확립과 바른 방향성-

심창섭 총신대 신학대학원 명예 교수

 

I. 서론

교단 출범 70년을 맞이한 고신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교단의 발전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강구할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고신자체의 발전만을 위한 케토형식의 방안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고신의 역할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항상 침체와 개혁 그리고 회복의 질곡을 경험 하였다. 초기 4세기 동안 초대 교회는 로마제국 황제들의 핍박 속에서 잘 연단되었다. 그 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A.D 313)한 후 기독교 세력은 로마 제국의 후원을 힘입어 급성장 하였다. 급성장의 과정에서 교회가 제도화 되고 물질화 되면서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부패를 청산하려는 개혁의 몸부림이 중세초기 교황이었던 교황 그레고리 1(590-)에 의해 시도 되었다. 그 후 중세교회는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교황 그레고리 7세에 의해 다시 개혁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레고리 7세의 개혁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중세교회는 부패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는 대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연대적으로 분석해 보면 대략 500년을 주기로 서방교회는 부패와 개혁을 되풀이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16세기 종교개혁을 한지 500년의 주기를 지나고 있다. 다시 한 번 개혁의 물결이 일어나야 할 시점으로 보인다. 16세기 요한 칼빈은 미래 지향적인 발전을 이미 선포하였다. “교회는 개혁되어졌기 때문에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였다. 한국교회의 역사도 서방교회와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다. 서방교회가 핍박 속에서 영적으로 다져진 것처럼 한국교회도 일제의 강정기의 교회 탄압과 6.25의 전쟁을 통해 수많은 교인들이 옥고를 치르고 순교 한 댓 가로 신앙의 열정이 고조되었고 믿음이 단단해지고 정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교회사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서방교회의 전철을 밟아 침체와 부패의 늪에 빠져 들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주의적인 영성과 의지는 실종 되었고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높아져서 과거 한국교회가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민심은 바닥을 치고 반응은 싸늘해져 버렸다.고신교단이 이런 상황 속에서 교단 역사의 70년을 맞이하고 있다. 고신이 과거를 돌아보고 교단과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개혁의 몸부림을 치는 모습은 시대적인 요청이며 한국 교회사적인 소명으로 보인다.

고신 교단은 120년의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옥중 성도들의 신앙의 순결과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 하면서 의롭고 외로운 투쟁으로 생존해 왔다. 부언할 필요 없이 고신교단 출발의 명분은 옥중성도 중심의 한국교회 재건운동이었다. 일사 각오 정신으로 출발한 그 투쟁의 역사는 신앙의 순결성과 개혁신학의 정통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신앙적인 투쟁과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좌경화를 염려하면서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바로 세우기 위한 운동이었다. 특히 신앙적 투쟁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옥중성도를 중심으로 진행 되었다. 바른 신학의 정통을 보수하기 위해서는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였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신학적 정통을 위해서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를 교수로 영입하였고 순결한 신앙적 수호를 위해서는 한상동 목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신학을 바르게 세우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이처럼 고신교단과 고려신학교는 진리투쟁의 명목으로 설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고신교단의 1960-70년대 강단의 메시지를 보면 읽을 수 있다. 당시 고신교단 특히 신학교 채플시간 설교에서 많이 회자 되었던 용어들은 통회자복,’ ‘일사각오,’ ‘신사참배,’ ‘진리파수’, ‘회개그리고 재건운동등이었다. 그러나 고신의 출발은 대외적으로 한국교회의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분파주의자들, 분열주의자들, 독선주의자들 그리고 바리새파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2)

하지만 이러한 순결한 신앙과 개혁신학을 세우기 위한 고신교단의 외침은 한국의 다른 교단과 차별화 할 수 있는 교단 특유의 외침이었다. 이처럼 고신교단의 출발은 정당했고 바른길이었다. 지난 70년간 고신교단은 이와 같은 건단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교회와 더불어 복음 전선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고신교단은 칼빈의 신학을 계승한 화란의 개혁파와 연대하면서 개혁신학을 주창했고 신앙적으로 청교도적인 믿음을 실현하고 전승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 내의 내부적인 갈등과 분파도 동반하였다. 고신 교단의 갈등의 주제는 고소와 반고소 논쟁이었다. 특히 한상동 목사(부산노회)와 송상석 목사(경남노회)와의 갈등은 교단 분열을 심화 시켰다. 고소파와 반고소파의 논쟁이 지속되면서 분파의 아픔도 경험하게 된다. 그 외에 신학적인 갈등도 있었다. 고신대학 교수였던 안영복 교수의 성령운동에 대한 주장은 고신교단의 전통적인 성령론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영적으로 메말라가던 교단의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의 물결로 반응했다. 그리고 돼지파의 등장으로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타 교단들은 만 교회 운동 등 교세학장을 위한 정책이 진행되었지만 고신교단은 이러한 갈등 속에서 성장의 답보 상태로 머물렀다. 1990년대에는 고신교단의 갱신을 위해 고신정신잇기목회자협의회교단미래정책연구회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고신교단이 교권에 좌우되어 타락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목회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또한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고신교단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이러한 정풍운동은 특히 복음병원의 운영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복음병원을 둘러싼 이권개입이 주된 불만의 요인이었던 것이다. 이 운동에 교단의 젊은 세력과 교단정치 목사들에게 불만을 품은 많은 목사들이 동조하였다. 그러나 총회를 중심한 반대 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두 세력 간의 충돌은 고신대학과 복음병원 운영의 자정능력을 상실할 지경으로 몰고 갔다. 이는 관선이사 파송이라는 고신교단에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교단갱신을 위해 조직된 이러한 개혁운동이나 정풍운동도 종국에는 또 다른 계파정치의 장이 되고 말았다. 교권을 둘러싼 정파운동으로 전락한 것이다. 총회장과 임원 선거를 중심으로 계파들이 형성되었고, 고신대학교와 고신의료원의 운영진을 두고도 계파운동이 발생하였다.

고신교단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한 이러한 내적인 갈등 외에 외적인 요소들도 존재했다. 외적인 원인은 그동안 고신교단은 영남 중심의 지역주의에 함몰되어 왔다는 것이다. 지역주의가 고신교단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총회본부를 서울 강남으로 옮겼다. 그리고 고려신학대학원도 천안으로 옮겨 수도권과 중부지역의 공략을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제 고신교단은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다음 시대를 위해 준비해야 할 단계이다. 70주년을 맞이하여 미래지향적으로 고신교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논자는 본고를 통해 고신교단의 출발 정신을 되새김하고 고신교단이 걸어온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후, 고신교단이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과 가능성을 진단해 볼 것이다. 특히 개혁주의를 표방한 교단의 이념에 부응하여 칼빈의 개혁정신을 반추함으로 고신교단의 발전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려 한다.

 

II. 본론

1. 고신교단의 태동: 신앙의 순결과 바른 신학

고신교단의 출발은 신앙의 순결과 개혁주의의 바른 신학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순교적 신앙과 정절을 지켜낸 옥중성도들의 신앙적 유산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한상동, 주기철, 주남선, 손양원, 이인제 등 신앙의 정절을 지켜낸 위대한 선배들이 있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한상동 목사는 당시 정부가 정의 및 신의(神意)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면서 신사참배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3)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보지 않고 자의든 타의든 지지했다. 1936129일 조선총독부의 교육국장으로 있던 와타나베 도요니치코는 윤치호(尹致昊)와 감리교회 총리사 양주삼 외 7명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신사참배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며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행위와는 무관한 조상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사참배는 학생들이 천황에게 경의를 표하며 신민(臣民)이 되도록 하는 교육목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분하에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정부의 탄압이 점점 가중되자 많은 목사들이 입을 다물거나 신사를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반면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들은 투옥되었다. 1940년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 2,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 중 70명의 지도자들은 장기 복역 자가 되었다. 이들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자들이었다.4)

투옥된 옥중 지도자들은 6, 7년간의 긴 옥고를 치르면서 독립 후에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한 방안을 옥중에서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상동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修道院建設하여 日帝彈壓밑에 信仰良心을 더럽힌 敎職者들을 修養시켜 新出發을 가지게 할 것. 둘째, 神社參拜 拒否閉鎖神學校復舊 再建하여 眞理를 위하여 生命을 바칠 수 있는 참된 敎役者養成할 것. 셋째, 大傳導運動을 일으키기 위하여 前導者大量 養成할 것.5)

 

한상동 목사 외에 다른 옥중성도들도 한국교회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옥고를 치른 만큼 해방 후 교회의 재건에 대한 기대와 각오도 남달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敎權的 野心에서가 아니라 敎會를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解放과 함께 올 敎會再建에 관한 問題念慮하게 되었고, 具體的方案까지 硏究하게 되었다. 그와 反對로 밖에 남아 있는 敎職者들은 解放豫見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敎會再建에 관한 問題念慮해 보지 못했다. 解放獄中聖徒들이 勝利의 기쁨을 안고 敎會로 달려왔을 때 現職 敎役者들의 대부분은 痛悔氣色이 별로 없고 도리어 敎權執着되어 자기 位置 確報沒頭한 모양이 歷然히 보였으며 敎會를 떠나 政界로 나아가는 敎役者들도 적지 않게 있었음으로 出獄聖徒들은 저들의 構想했던 交會再建方案急速 實踐必要를 느끼게 되었다.6)

 

출옥성도를 중심한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재건운동의 외침에 부응할만한 지도자의 확보가 필요했다. 외국선교사들은 아직 귀국하지 아니한 상태였으므로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다가 만주에 피신한 박형룡 박사를 국내로 초청하였고, 그가 제시한 교회재건의 방안을 공동성명서로 발표했으나 일부 유력한 교직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한편 1945918일 경남노회의 조직이 시작될 때 경남노회는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현 교직자들의 두 가지 자숙 안을 제안하였다.

 

첫째는 목사, 장로, 그리고 전도자는 자숙하는 자세로 일선직분을 사의하고 교직을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둘째는 자숙기간이 만료되는 교회는 투표로 그들의 은퇴를 결정할 것 등이었다.7)

 

경남노회의 이와 같은 결정에 이어 동년 920일 출옥성도 20여 명은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한국교회 쇄신을 위한 경남노회의 선언과 유사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규정 하였다.

 

. 교회의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勸懲)의 길을 취하 여 통회정화 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 간 휴직하고 통회자복 할 것.

.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전국 각 노회 또는 지 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케 할 것.

.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8)

 

이러한 교회재건의 움직임과 자성의 목소리는 총회의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교회의 개혁운동은 홍석기 당시 총회장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부딪치고 경남노회의 결의안도 교권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교직자들은 교권에 대한 영구권을 주장하며 자숙안을 폐기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던 것이다.9)

그러나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이러한 자숙운동의 정신은 경남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므로 전승되었다. 그 중심에는 한상동, 주남선, 주기철, 그리고 이인제 목사 등이 있었다. 김영재 교수는 출옥성도들의 주장처럼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새로 시작되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영적이며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공적인 회개와 고백을 했어야만 했다고 주장한다.10) 출옥성도의 참회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주도한 홍택기 총회장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에 대해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사참배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해야 할 성격임을 주장하면서 공적인 참회와 책벌을 거부했던 것이다. 출옥성도의 주장대로 신사에 참배한 교역자들이 한국교회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교회가 2차 대전 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통절하게 회개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신사참배의 행위를 정당화 하면서 도리어 출옥성도들을 배척했던 것이다.

정리하면 한상동 목사를 중심한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고신교단의 출발은 한국교회가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신학이 좌경화 되어 갈 때 성경적 신앙과 개혁신학을 기반으로 교회의 재건을 위한 충정에서 시작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신교단의 건단정신은 한국의 어느 교단보다 분명한 성경적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 보수에 있었던 것이다.

고신교단이 출발한 후 승동측 교회와의 연합운동이 있었다. 승동측 교회와의 합동을 수용한 고신교단은 1960910차 총회에서 합동을 추진하도록 결의하였고, 같은 해 12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전격적으로 합동 하였다.11) 그러나 고신측과 승동측은 합동한지 3년 만에 결렬하게 되는 아픔을 경험하였다. 고려신학교 폐교문제와 교권의 주도권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고신측이 환원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신 교단의 환원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아쉬운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고신의 환원은 명분이 없다는 것이 일부 학계의 견해이다. 즉 신학적 명분이 없는 단순한 정치적인 환원이라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기장측과의 분열(1953)과 승동측과 연동측의 분열(1959)은 신학적인 명분이 있었지만 고신의 승동측과의 분열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양측은 합동원인부터 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승동측은 연동측과 WCC 문제로 분열하여 내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고신측은 박윤선 박사의 고려신학교와의 결별과 경기노회 문제로 난국에 처해 있었다. 특히 고신측의 한상동측과 송상석측의 교권 주도권 문제가 고신이 합동을 추구한 정치적인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마디로, 한상동은 당시 고려파 내에서 급속히 부상하고 있던 송상적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합동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19599, 고려파 총회는 송상석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황철도 목사가 송 목사의 지원에 힘입어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에는 다시 황철도가 송상석을 후원하여 총회장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교단 내에서 송상석 목사의 세력이 급부상했는데 한상동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승동측과의 합동을 신속히 추진했다는 것이다.12)

 

 

양측은 자신들이 처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합동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즉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과 환원 그리고 분열은 신학적인 명분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하나 됨의 가치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각 교단이 당면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선택된 임시변통 혹은 임기웅변일 뿐이었다. 두 교단이 합동한 후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아 그 합동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13)

 

실제로 고신측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송상석 목사는 승동측과의 합동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 상동 목사는 합동을 주도하였지만 송 상석 목사는 합동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주도권 문제였다. 송 상석 목사의 반대 명분은 수적으로 열세인 고려파가 승동측과 합동하면 교권의 주도권을 승동측에 빼앗기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판단이 옳았다. 즉 송 상석 목사의 예견은 1962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최한 제 47회 총회에서 그대로 현실화 되었다. 총회의 임원 선거결과 한 상동 목사는 3선 총회장에서 탈락되었고 회의록 서기가 된 고신 측의 전성도 목사를 제외하고는 총회 임원회에 승동측 인사들이 대거 선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총회신학교의 이사직도 대부분 승동측으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두 개의 교단이 합동한 총회에서 고신측이 합동한 교단운영의 임원진 진출에 참패한 것이다. 이에 한 상동 목사는 고려파의 환원과 고려 신학교의 복귀 운동을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한 상동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전국교회에 환원을 탄원하였다.

 

교제는 이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실책을 인정하고 고려신학교를 도로 찾아 놓고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앉을 것을 당초부터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성명서를 환영하여 이 사실을 공언한 바 있고 고신 이사회에는 정식으로 사표까지 제출해 두었으니 곧 수리될 것으로 믿고...또 수리되지 않는다 해도 교제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결심이니 변치 않을 것입니다.14)

 

결국 고신의 환원은 표면적으론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고신의 환원을 연구한 학자들도 고신환원의 신학적인 명분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과 고신의 환원이 단순히 정치적이었지만 몇 가지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1. 양측은 교회의 일치라는 대외적인 명분이 있었다.

1. 송 상석 목사의 정치적인 판단이 옳았다.

1. 한 상동 목사의 3선 총회장 무산이 있었다.

1. 총회임원과 신학교이사진은 승동측이 대세였다.

1. 한 상동 목사의 환원 선언의 정당성은 확실하지 않지만 신앙양심의 선언으로 보인다.

 

위의 5가지 사실 중에서 환원 조치가 이루어진 가장 큰 원인은 한 상동 목사의 총회장 선출 무산과 승동측의 총회임원진과 신학교 이사진의 독식으로 보인다. 결국 고신측이 교권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 고신환원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3년 반 만에 승동측과의 결별을 선언한 고신대표자들은 합동에 대한 자신들의 잘못되었던 결정을 인정하였고 사과문으로 대신하였다.

 

합동위원 사과: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19601213일 승동측과 합동측과 합동함으로 우리에게 부닥쳐진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그 당시 합동위원 대표로 선정된 회장 송 상석 목사와 부회장 황 철도 목사와 한 상동 목사가 각각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뼈아프게 사과할 때, 이 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알고 온 회중 함께 회개와 감사의 마음으로 이 사과를 받고 회무를 진행하기로 가결하다.15)

 

위 사과문에서 합동위원들은 우리에게 부닥쳐진 불미스러운 일들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뼈아프게 사과한다는 후회의 심정을 고백하고 있다. 불미스러운 일은 결국 총회장 선임과 총회임원 그리고 신학교 이사 선임에서 승동측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아픔에 대해 고백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상동 목사의 환원을 선포하자 고려신학교 재학들의 상당수가 환원 쪽을 지지하였고 고신측이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보았다. 즉 고신 측의 환원은 총회임원진과 신학교이사진의 승동 측 독식에 대한 불만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교권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규 교수도 한국교회의 분열을 연구하면서 그 동안 교권주의자들의 횡포가 한국교회의 분열의 주된 원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이 상규 교수는 고신교회의 발전, 반성과 성찰이란 논문에서 이점을 잘 파악 하고 있다. 이 상규 교수는 조선신학교의 경우에서나 고려신학교의 경우에서 동일한 것은 논란의 핵은 신학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권의 문제였다는 점이다.”16) 이 상규 교수는 북한교회 내의 분열도 교권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다.

 

이북 지역의 출옥성도 중심의 쇄신론자들과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기성교회 지도자들 간의 최초의 만남이었던 교역자퇴수회는 상호간의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었고, 향후 한국교회의 험난한 행로를 예견케 해 주었다. 즉 최초의 만남에서부터 신사참배의 죄에 대한 회개 등 교회 쇄신의 문제는 양측의 대립을 심화 시켰다. 교역자들의 태도가 구태의연하여 회개의 빛은 없고 계속하여 교권 지배에만 급급한 현실을 목도한 박형룡은 실의를 안고 봉천으로 돌아갔다.17)

 

북한교회의 분열의 주된 원인이 교권주의자들의 분쟁에 있었던 것처럼 해방 후 서울에서의 분열도 교권이 주된 문제였다는 것이다.18) 이러한 교권지배가 북한과 서울에서 교회 분열의 원인되었던 것처럼 경남에서도 발생하였다.

 

북한과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산경남지방에서도 교회재건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교회 쇄신론 자들과 친일전력의 교권주의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을 가져왔고, 결국 교회분열의 원인이 된다.19)

 

김 양선 한국교회사 사학자도 동일한 견해로 한국교회의 분열을 진단하고 있다. 특히 1946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남부총회가 열렸을 때 교회의 주도원은 이전의 지도자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敎會主導權實際變化는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20)

 

김 양선 목사는 1945년 경남노회가 현 교직자 자숙 안을 통과 한 후에도 교권주의자들이 암암리에 자숙 안을 폐기시켰고 자숙 안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출옥성도 주 남선 목사를 47회 정기노회에서 노회 장으로 선출하여 현 교직자들의 자숙을 철저히 시행토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一部敎權主義者들은 自肅拒否하고 如前敎勸 掌握運動에 몰두 하였다는 것이다.21)

 

그러면 한상동 목사와 고신측의 환원도 교권의 주도권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는가. 고신측 지도자들은 신사를 참배한 신앙지도자들의 회개와 자유주의 신학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려는 강한 신앙적 결단이 있었던 자들이었다. 이 두 가지는 한 상동 목사를 중심한 출옥성도들과 이에 동조하는 목사들의 교권투쟁의 바닥에 흐르고 있었던 개혁신앙의 에너지였다.

 

학자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데이터를 조합하여 해석하고 결론은 내린다. 역사학자들의 자료를 보면 한국교회의 분쟁은 명문보다는 교권주의자들의 횡포가 대세였다. 고신의 환원도 이러한 범주에서 자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고신이 환원한 자료적 분석과 해석보다는 환원사건의 정황적 관점에서 환원을 접근하려 한다. 고신교단은 신사참배에 반대한 옥중성도들의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출발하였다. 신앙의 순결과 신학의 정통성을 보수하고 개혁하는 것이 고신교단의 출발정신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경주하였다. 승동측과의 합동도 이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합동초기 1-2년간은 한 상동 목사가 총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연합된 교단의 개혁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입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합동 3년에 접어들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승동측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WCC와 같은 신학적 자유주의는 반대하였지만 고신이 요구하는 교회갱신에는 중도적인 입장에 선 자들이 많았다. 승동측은 고신측과의 합동에서 3년간 밀원을 가졌지만 오래가지는 아니했다. 고신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가진 승동측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동측은 이미 연동측과의 WCC문제로 분쟁하면서 맷집이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다. 맷집이 다져진 승동측 교권주의자들은 총회임원진과 총회신학교 이사진을 반반으로 구성한다는 고신측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독식한 것이다. 송상석 목사가 제의한 신학교 일원화에 대한 해석도 달리한 것이다. 환원한 고신도 또한 환원에 대한 비난의 별미를 남겨 놓았다. 한 상동 목사가 총회장 3선을 연임하지 못한 것과 한 상동 목사의 조카인 이 근삼 박사가 총회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지 못한 사건이었다.

 

환원한 고신은 신앙의 순결과 개혁신학의 정통성을 교단의 브랜드 가치로 표방하면서 영남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그동안 타교단과 마찬가지로 교단 내의 갈등들이 있었지만 비교적 건강한 교단으로 고신교단의 정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통합측과 합동측에 비해 교세는 열악하지만 견고한 교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제기관인 고신의료원과 교육기관인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여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노력을 한 것이다. 고신교단의 고유한 브랜드 가치인 신앙의 순결과 개혁신학은 양보할 수 없는 성경적 가치이며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과제임을 재확인하면서, 고신교단의 발전과 고신교단이 한국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견해를 다루려고 한다. 고신교단의 건단 이념인 칼빈의 개혁신앙을 바탕으로 접근할 것이다. 첫째는 칼빈의 캐노시스 정신을 다룰 것이다. 둘째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다룰 것이다. 셋째는 통전적 개혁신학을 다룰 것이다.

 

2. 고신교단: 미래적 비전

 

1) 고신파의 탈 교권주의 회복: 칼빈의 캐노시즘

 

신사참배 반대로 옥중에서 고통을 감내했던 출옥 성도들이 중심한 초기 경남노회의 분위기는 자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모두 자신을 내려놓은 캐노시스 정신이었다. 모두들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은혜로운 가운데서 회무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인맥을 통해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교회의 덕을 세우면서 서로를 존경하면서 진행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노회에 참석한 황방청은 자신의 일기에서 慶南老會 第55참관수기(參觀手紀)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 경남노회 제 55회는 95馬山文昌交會에서 모였다. 나의 소감은 이렇다. 성회(聖會)이다. 은총이 충만하다. 감격사에서 나오는 회개와 복종의 기도이다. 서로 직임(職任)을 양보하는 천진난만한 싸움이다. 딱한 문제가 일어날 때는 조용히 존경(尊敬)을 받는 선배(先輩)의 의견(意見)을 듣는다. 듣고 순종한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힘써 따르려고 애쓴다. 얼마든지 어렵지 않게 회무(會務)를 진행시킬 수 있다. 방청석에서도 감격의 아-멘 긍정의 표정이 보인다. 2. 이 축복(祝福)이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한말로 말하면 노회원들의 마음속에는 신령한 복이 충만하다. 또 그것을 간절히 사모한다. 이 신령한 축복은 그들과 노회의 보이지 않는 무궁 (無窮)한 재산이다. 구체적으로 표시한다면 1) 순교자들의 정신인데 주기철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이 노회원들의 것이다. 이 순교자들은 이 노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 같다. 2) 신앙의 정조를 지키려다가 구사일생 주님의 도우심으로 간신히 살아나온 옥중성도 들이다. 그들의 육체는 약하게 보이지마는 그분들의 말이면 신임하고 순종한다.22)

 

고신이 환원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특히 환원을 주장한 목사 중의 한 분인 송상석 목사는 승동측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신앙과 신사참배에서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투옥되었던 출옥성도들은 교권주의자들의 전형에 맞설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출옥 성도들은 순수하고 겸허한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출발한 고신 교단의 초기의 정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성하고 회개하는 비움의 정신이었다. 이것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할 때 가졌던 케노시스 모습이었다.

 

16세기 제네바의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컨시스토리움을 장악한 시의회에서 파송된 장로들의 정치적인 권력에 맞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한 칼빈의 무기는 자신을 비우는 캐노시스 정신이었다. 칼빈이 권력을 탐하고 타협하였더라면 종교개혁은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였을 것이다. 칼빈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면서 청빈한 믿음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개혁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제네바 대학을 설립하였지만 자신이 총장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로잔대학의 교수였던 베자를 초청하여 총장으로 세웠다. 칼빈은 제네바 개혁의 초기부터 정치권력이나 교권 장악 등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도리어 교권주의자들에 맞서 치리회에서 격렬하게 논쟁을 하였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위해 출발한 제네바 치리회의 의장을 맡지도 않았다. 칼빈은 제네바 시민권이 없는 자로서 처음부터 정부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1936년 처음 파렐에 의해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제대로 월급을 지급받지도 않았다. 제네바시 시의회록에는 그냥 프랑스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23) 칼빈이 제네바시의 막강한 정치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력에 맞서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저력은 자신을 끝없이 낮추고 비우는 겸허한 신앙의 순결성이 큰 힘이 되었다. 칼빈을 반대한 대적들은 칼빈이 수천 달러를 투자해서 부동산을 매매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칼빈의 대답은 그의 삶이 청빈한 비움의 삶이였음을 대변하였다.

 

우리가 앉아 먹는 식탁도 우리가 잠자는 침대도 우리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는데...어디에서 이런 소문이 났을까? 나의 절친들은 내가 1피트의 땅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나는 1에이커를 구입 할 만한 정도의 돈을 한 번도 가져 본적이 없었다.24)

 

  어느 날 로마 가톨릭교회 추기경인 사돌레토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incognito) 제네바에 나타났다. 그는 제네바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추기경이었다. 그는 칼빈과 신학논쟁을 한 로마교황청의 대변자였다. 그는 제네바를 지나다 캐논 거리에 위치한 칼빈의 집에 도착하였다. 추기경은 자신의 저택에 비해 소박한 칼빈의 집을 보면서 개신교의 대표주자로 유명한 칼빈이 이런 집에 살고 있는데 대해 경악해 했다. 사돌레토는 추기경들은 화려한 저택에서 살고 있는데 전체 개신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이런 집에서 살면서 초라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칼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돌레토가 칼빈을 만난 후 당시 교황인 파이어스 4(Pius IV)에게 어떻게 보고했는지는 몰라도 교황은 칼빈이 죽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이단[칼빈]의 가장 큰 힘은 돈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서 나왔다.”25) 교황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생활에 시달렸지만 나는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에 진정한 부자이다.”라고 고백하였다.26) 이 얼마 안 되는 수입은 칼빈이 손님을 대접하고 약값을 지불하고 문전에 찾아온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항상 시 의회에서 빌린 돈을 갚지 않고는 시의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칼빈의 병든 기록을 남긴 1546년 시의회 서기록에는 “who has no resources”라고 기록되어 있다.27)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시의회는 딱한 사정에 처한 칼빈에게 치료비 약 값으로 10 crowns를 보냈다. 그러나 칼빈이 회복되었을 때 칼빈은 그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돈으로 자신을 위해 와인 한 통을 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용목적이 달라 그 돈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칼빈은 도리어 자신의 봉급에서 10 crowns를 가장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소 의회는 칼빈 집에 있는 모든 가구들도 7년 후에야 선물로 기부하도록 동의하였다(1548). 칼빈이 비로소 편하게 잠잘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자신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25달러를 시당국에서 차용하였다. 칼빈이 차용한 돈을 돌려주려 했을 때 의회는 차용한 돈을 수령하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이때 칼빈은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는 강단에 서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받을 당연한 봉급의 일부를 거부했다. 동료 목사들이 칼빈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에게 봉급을 시 의회에서 올려 주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 칼빈은 시 의회에 자신의 봉급을 평준화해서 다른 목사들에게 나누도록 도리어 역제안을 했다.28)  또한 칼빈은 시편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의 일생동안 내가 부유하지 않았고 돈이 없었다는 것을 설득시킬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나의 죽음이 최후로 그것을 보여줄 것이다.29)

 

칼빈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가 병석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마지막 4개월의 봉급은 수령을 거부했다. 칼빈은 사역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사례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마지막 4개월간은 병으로 인해 자신의 목회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자신의 가난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Satisfied with my humble condition, I have ever delighted in a life of poverty”30) 칼빈의 삶은 그의 주인(Master)의 본을 따라 살았던 철저한 캐노시스의 삶이었던 것이다.

 

1564527일 칼빈이 사망했을 때 자신의 장례에 대해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나의 몸은 축복된 부활의 날을 기다리기 위해 일상적인 형식으로 매장되어야 한다.”31) 그래서 그의 무덤에는 어떤 말도 기록된 것이 없고 무덤을 표시하는 비석도 없이 장례되었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원동력은 자신의 삶을 비우는 정신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면서 자신의 생활에 경제적인 기반이었던 노용 시의 가톨릭교회가 주는 성직록을 포기했다. 그는 자신을 비움 속에서도 스트라우스에서 이민목회를 할 때나 제네바교회의 목사로서 종교개혁을 할 때나 목회자로서 만족하면서 사역을 했다. 그리고 그는 권력과 직위를 탐하지 않았다. 그는 법률학자로서 받을 수 있었던 박사 학위도 거절하였다. 그는 정말 비움의 목회자였다.

 

고려파가 출발한 순교자의 정신이 바로 이러한 자기 비움의 정신과 믿음이 아니었을까? 출옥성도들은 실로 교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신앙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비움의 신앙이었다. 고신교단이 자력갱생하고 한국교회의 사표가 되어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으로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 역사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교단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고신파가 고유의 정신인 출옥성도들의 신앙의 순결과 건강한 개혁주의 신학을 실현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는 고신교단의 자기 비움의 실천이 선행 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신교단은 대대적인 구조적인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 교권과 금권과 세속주의의 탈피를 위한 길은 교단의 권력투쟁의 구조인 교단총회 구조를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 한국장로교회의 정치구조는 세계의 어느 장로교 교파보다 관료제도(bureaucracy)가 심화 되어 있다. 총회의 이런 구조는 총회장을 구심점으로 방대한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고 각 조직의 장과 위원의 선출을 두고 보이지 않는 갈등과 경쟁을 심화시켰다. 목회자 간의 파벌 형성이 현실화 되면서 교단은 목회자들의 교권주의 쟁탈을 위한 정치판으로 전락 되었다. 그리고 심한 경우는 교권 장악을 위한 금권도 동원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인 악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고신교단이 이런 잘못된 관행을 깨고 한국교회의 부패한 교권주의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신교단은 타 장로교단에 비해 아직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모습과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예를 들면 현재의 총회장의 역할과 총회제도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총회 부서에 굴닥지 처럼 붙어서 기생하는 교권주의자들의 파쟁을 종식시키고 교단의 진정한 모습과 역할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이다. 현재 한국장로교회는 교권주의자들이 기생할 수 있는 총회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정치 목사들이 등장 할 수 밖 에 없다. 결국 구조조정을 통해 이러한 기반을 없애 버리는 수 밖 에 없다. 대안은 다음과 같다.

 

한국장로교회의 현재의 총회장의 위상과 역할은 잘못된 것이다. 총회란 1년에 한번 모이는 전체 총대들의 모임(convention)이요 교단의 축제이다. 총대들이 투표하고 총회장을 선출하고 총회장이 회의를 주관한다. 총회장의 본연의 의무는 총회기간 동안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moderator)에 불과하다. 그리고 총회기간 동안만 의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총회가 파회한 후에는 명칭은 존속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상실되는 것이다. 총회장의 역할을 총회기간 동안 회무처리를 위한 회의의 의장으로 제한하고 총회장 산하의 관료제도(bureaucracy)인 방대한 구조를 간소화해야 한다. 총회의 기구가 단순화되면 목사들이 현재의 방대한 총회기구에 관여하기 위한 공간이 축소되어 자연적으로 교권주의자들의 전형이 축소 내지 사라질 것이다. 대부분의 안건들은 노회에서 다루어지도록 정책을 세우고 총회는 예배가 중심이 되어 기도와 성도의 교제로 이어지는 축제가 되면 될 것이다. 총회구조가 축소되고 교권의 전형이 살아지면 총회장 선거 때마다 되풀이 되는 금권선거와 같은 최악의 범죄행위가 살아질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총회개혁을 고신교단은 할 수 있다. 한국의 다른 교단들은 교권주의자들의 세력이 워낙 방대하고 심화되어 자정능력이 불가능하다. 고신이 혁신적으로 총회장의 역할과 총회기구의 단순화를 실행한다면 고신교단은 물론이고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의 정치세력을 몰아내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엄청난 역사적인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교권과 금권 욕에 함몰된 목사들의 부패한 영성을 바르게 회복하고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패한 인간을 바꿀 수 없다. 부패한 인간이 서식하고 기생 할 수 있는 제도를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칼빈의 겸손과 자기 비하를 본받아 실천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모든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한 없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캐노시스 정신에서 출발하면 된다. 고신교단은 캐노시스의 정신으로 출범하였다. 고신이 환원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비움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교권주의자들의 세력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신이 환원하지 말고 교권주의자들의 행패에 맞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었더라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조금 더 좀 변화된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제라도 고신교단은 고신자체의 정풍운동에 멈추지 말고 한국교회의 변화를 위해 마지막 그루터기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교권주의자들의 온상이 된 총회의 제도를 과감하게 개혁하는 데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칼빈은 개혁을 위해 몸을 내던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지만 대가는 항상 비참하였다. 개혁을 위해 투쟁한 칼빈의 일성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 그는 친구 비례에게 부서지고 망가진 한 남자라고 고백한다. 우리도 교단과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부서지고 망가진 한 남자로 남을 수 없을까?

 

못된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교회의 정돈된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력 있게 유지된다는 것을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다네, 특히 내가 하는 일들을 통해서 말일세.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이지 아주 부서지고 망가진 한 남자일 뿐일세.32)

 

고신교단 목회자들이 먼저 교단의 갱신과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칼빈처럼 부서지고 망가진 한 남자로 남는다면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2) 고신파의 연합운동: 에큐메니즘의 조정자 칼빈

 

고신교단은 교단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공헌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바로 합동측 과의 재합동이다. 물론 합신 측도 포함된다.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개혁자 칼빈의 교회개혁의 원리이며 보편교회(catholic church)의 속성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모두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실질적으로 반 칼빈주의와 반 개혁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교파간의 연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장로교회는 칼빈의 에큐메니즘에 반하는 많은 교파로 나누어져 있다. 세계장로교 역사에서 처음 보는 현상이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정신이 아니다. 특히 칼빈의 연합정신과는 괴리가 있다. 한국장로교단의 분열은 칼빈의 개혁신학 전통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한국교회의 모순이며 수치이다. 칼빈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본받아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야 한다. 더군다나 한국교회의 미래는 각자 도생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 개혁교회의 연합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은 어느 종교개혁자 보다 에큐메니즘을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교회의 일치운동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교회의 분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라고 지적하면서 초대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us)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의 연합은 교회의 속성임을 강조하였다.

 

오직 하나의 교회가 존재한다. 그것의 열매에 의하여 다수의 교회로 존재케 된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빛 밖에는 없지만 태양의 많은 광선이 있듯이, 그리고 하나의 나무둥치가 있지만 많은 가지가 있듯이, 또 하나의 샘의 원천에서 많은 물줄기가 형성되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이 많은 가지와 지류들이 형성되어 있지만 원천적인 일치는 보존된다. 태양의 본체에서 광선이 분리되어 발산하지만 빛의 일치성은 나누어지지 아니한다. 나무로부터 가지가 꺾어지면 부러진 가지는 소생치 못하는 원리와 같다. 물줄기가 샘물로부터 끊어지면 말라버리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한 하나님의 빛에 의하여 조명 되어지고 그것의 햇살을 온 지상에 보낸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곳을 비추더라도 하나의 빛 임에는 틀림없다.33)

 

칼빈은 기독교 강요 41장에서 참 교회란 반드시 통일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란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기 때문이다.”이라고 연합을 강조한다.34) 칼빈의 이러한 교회연합의 정신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사돌레토(Sadoleto)와의 논쟁에서도 잘 나타난다. 칼빈은 논쟁에서 로마교황주의자들이 자신과 종교개혁자들을 교회를 저버리는 자로 비난 하는데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내가 새로운 교사들과 의견이 맞지 않은 한 가지 점은 그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내가 귀를 기울여 그들의 가르침을 경청

하였을 때 나는 그들이 교회의 존엄을 손상시킨다는 말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교회 분열과 교회 자체에 감염되어 있는 과오를 시정하기 위한 연구 노력과는 얼마나 다른 것임을 나에게 깨닫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존귀하게 여기며 교회의 연합을 촉진하려는 최대의 소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35)

 

칼빈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는 교회의 일치는 반대하지만 동시에 교회의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자신뿐만 아니라 개신교도들이 얼마나 교회의 일치를 염원하는가를 변증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16세기 개신교도들에게 교회의 평화를 깨뜨린 선동죄를 적용하면서 개신교를 비난한데 대해 반박을 하면서 그는 개신교도들의 교회의 일치에 대한 염원을 피력한다.

 

사돌레토여 주님이 당신과 당신 쪽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지하기를 바란다. 즉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키셨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현재의 흩어져 있는 우리들을 그의 몸의 교제 안으로 모아서 그의 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연합되도록 한다면 교회의 유일한 참된 결합은 이루어 질 것이다.36)

 

칼빈을 에큐메니칼 운동가로 호칭하면서 칼빈의 교회 연합을 위한 노력들에 관해 저술한 독일의 네이언하위스(Willem Nijenhui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칼빈은 교회론을 통해 유럽의 종교개혁에 아주 특별한 기여를 했다. 교회의 일치성과 보편성에 대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가견적 일치의 회복을 위해 지칠 줄 모르게 일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 점이 그로 하여금 개혁자들 중에 교회 연합운동의 선구자가 되게 했다.37)

 

칼빈의 교회연합을 위한 생각은 그냥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개신교의 일치를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선 목회자였다. 그는 교회의 불일치는 사탄의 행위라고 간주하였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교회에 이와 같은 메세지를 보냈으며38) 그가 추방당하여 스트라우스부르그에 있을 때도 제네바교회에 유사한 교훈을 전달하였다.39)

 

칼빈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와의 재결합을 위해서는 컨퍼런스(conference) 통한 해결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기꺼이 이를 위해 가톨릭 지도자들과 직접 재결합의 논의를 원하고 있었다.40) 칼빈이 로마카톨릭과의 대화를 원했지만 그의 에큐메니즘이 강하게 표현된 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연합을 위한 노력에서 볼 수 있다. 우선 칼빈은 개혁파와 루터파와의 갈등이 증폭되는 어려운 상황에서 루터에게 화해의 태도를 보이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당신에게로 날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이라도 당신과의 교제의 행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위해서도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이 일이 우리에게 허락되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곧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안녕. 가장 유명한 스승이요.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나의 영원한 공경하는 아버지. 주님께서 당신을 그의 성령으로 다스리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그 자신의 교회의 유익과 공동선을 위해 끝날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41)

 

칼빈은 루터파의 지존의 인물인 필립 멜랑톤과 교리의 일치에 있어서 한 때 어려운 관계였다. 특히 칼빈을 괴롭혔던 그것은 교리에 대한 멜랑톤의 분명치 못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교리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연합을 위해 멜랑톤을 향한 칼빈의 태도는 고무적이었다. 그는 멜랑톤이 죽었을 때 그에게 돈호법으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오 필립 멜랑톤씨여!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전에 있는 당신에게 호소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축복된 안식에서 당신과 연합할 때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당신께 호소합니다. 일에 지치고 슬픔에 눌린 당신은 허물없이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싶다고 수 백 번 말했습니다. 나도 이 가슴에 죽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수천 번 연합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기를 바랬습니다.42)

 

이와 같은 문장에서 칼빈은 교회의 일치(church unity)를 위한 일이라면 단순히 립서비스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칼빈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다른 개혁자들과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개혁자들 사이에 차이점들이 나타났을 때 중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불링거(Bullinger)에게 비록 마틴 부쳐가 잘못이 있어도 그와 결별하지 않도록 상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43) 칼빈은 또한 루터와의 화해와 상호 이해를 위해 듀 보이스(Du Bois)와 같은 다른 개혁자들에도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제네바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개신교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다.44)

 

칼빈의 연합을 위한 노력은 개 교회에게도 요청되었다. 그는 런던의 감독에게 하나님의 교회들이 기구적인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고무시켰다.45) 그는 취리히 교회와 스트라우스부르그의 교회에게 동의를 구하는 서신에서 완벽주의자들에 대해 혐오스런 표현으로 개탄하고 있다.46) 그는 핍박을 받고 있는 프랑스의 왈도파를 위해 여러 번의 편지를 보내면서 스위스로 오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47) 그는 덴마크에 피난 온 홀란드 개신교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는 선하신 하나님이여! 기독교인들 사이에 이런 비인간적인 것이 너무 많습니다. 바다가 차라리 더 자비롭습니다.”라고 통탄하였다.48) 이러한 모든 칼빈의 모습은 에큐메니즘에 대해 그가 실제적인 관심과 실현을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칼빈은 개혁교회의 로마인 제네바의 개신교의 사령탑으로 유럽의 개혁교회의 연합을 위해 경주하였던 것이다.49)

 

흥미로운 것은 칼빈은 세속정부의 지도자들에게도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영국의 크레머(Crammer)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교회의 일치의 중요성과 시민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들 간에는 현세적이거나 인간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습니다. 신자들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찢겨 있다면 그 몸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저에게 큰 관심거리이므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리고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면 저는 이 일로 인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기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목적이 모든 선한 지도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법칙에 따라 분리된 교회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50)

 

칼빈은 유럽의 다른 세속통치자들에게도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과 협조를 간구하였다. 예를 들면 섬머셋(Somerset, Duchess of Ferrara)와 아란의 얼(Earl of Arran) 그리고 모레이의 얼(Earl of Moray) 등이었다.51) 그리고 칼빈은 그의 친구들이 제국의 주들(states)이 교회의 질서의 원인에 흥미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을 지원하였다.52)

 

 

(null) 주목할 것은 칼빈은 교회연합을 위한 노력에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은 교리나 예전(liturgical) 문제가 아니라 토론자들의 성격이 문제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토론자들의

고집스로움(recalcitrance)이 문제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53) 칼빈은 이러한 사람들은 소란을 피우는 성질 급한 자로 세상의 평화를 파괴하는 자라고 하였다.54) 특히 칼빈은 루터주의자들의 성만찬에 대한 고집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표현들을 하고 있다. 칼빈은 개신교의 연합을 위해 온건주의를 택하지 않고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 루터주의자들의 모습이 개탄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의 교리를 재형성하고 교회의 조직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강한 개성의 부딪침은 해결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야기 시키며 소용돌이치는 조류와 같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사소한 문제로 교회의 연합을 헤치거나 개신교의 내적 화해를 위협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55)

 

(null)

칼빈은 개신교 목사의 승인 문제에 있어서도 다른 지역에서 목사의 형식이 서로 다른 점이 있어도 용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교회마다 다른 성격이 있지만 한 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를 용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교회의]의 가르침의 다양성이 한 예수를 향해 가며 진리 안에서 만약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한 몸과 한 영으로 함께 자랄 수 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하나 된 우리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또한 외칠 수 있다.56)

 

칼빈의 연합을 위한 다른 가르침에 대한 관용은 재세례파의 관계에서도 표현된다. 그는 스트라우스버그의 교회에 멤버로 들어오려는 재세례파에 대해 교리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순결하지 않아도("not so pure") 관용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는 자유의지, 중생, 유아세례 등은 칼빈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했지만 예정론에 대해서는 주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재세례파를 교회의 멤버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57)

 

칼빈은 개신교의 참된 교리도 흩어진 교회의 연합을 가져오고 참된 교회를 지속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보았다. 즉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상실되었던 참된 예배와 구원에 대한 교리를 회복하였고 이 참된 교리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58)

 

칼빈의 에큐메니즘을 연구한 크로밍가는 서로 다른 주장들에 대해 무조건 비난하거나 갈라서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주장들을 조명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견해라는 것이다.59) 크로밍가의 연구에 의하면 칼빈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교회의 에큐메니즘을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가톨릭교회, 개신교, 세속국가와도 언제든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칼빈의 에큐메니즘에 대한 레이드의 긍정적인 입장도 크로밍가의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에큐메니즘을 논함에 있어서 레이드는 자신의 논문 서두에 서 16세기 종교 개혁자 중에서 칼빈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소위 칼빈주의적이라는 교회가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분파의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이 사라질 때 교회의 연합이 실재하게 된다는 가정도 언급한다.60) 레이드는 칼빈이 교회의 분파에 대해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칼빈의 교회관을 논하면서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분리를 철저히 반대하는 칼빈은 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61) 그리고 교회의 분리에 원인이 된 사람들을 양을 무리로부터 몰아내어 이리의 입에 던지는 자들이라고 증오하였다.62) 그래서 칼빈은 교회의 멤버 중에서 어떤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 해도 그로 인해 가시적인 교회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칼빈은 사소한 교리적인 문제 때문에 분리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리하기 이전에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63) 칼빈은 실로 개혁교회의 연합을 위해 최선에서 조정역할을 감당 하였던 것이다.

 

고신은 한국의 어느 장로교단보다도 일찍이 화란의 개혁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화란개혁파교단과 교단간의 교류를 한 최초의 한국교단이다. 그리고 고신의 많은 신학자들도 화란개혁파교회에서 연구하였다. 지난 70년간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 고신은 이제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첫 번째 단계로 합동측(총신과 합신)과 연합해야 한다. 이것은 개혁주의 정신이며 상생의 원리이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이다. 하나의 교회 그리고 하나의 교단이 개혁주의 에큐메니즘이다. 합동측과 고신측이 다시 하나로 재결합 한다면 한국교회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한국 보수 개혁교단의 승리요 한국교회의 승리이다. 고신이 이러한 역사적인 행보에 앞장서야 한다. 교단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거대한 역사적인 결단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거대한 함선이 서서히 침몰하듯이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낸 후 침몰하고 있다. 출생인구의 감소로 한국교회는 지난 70년간 호황을 누려온 주일학교가 바닥을 치고 있다. 재차 언급하지만 한국교회는 이제 각자 도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대로 지속한다면 공생이 아니라 공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칼빈의 에큐메니칼 정신에 부합하여 교단이 연합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고신이 주도적으로 연합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지난 70년간 다져온 고신교단의 건단의 정신인 확고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역사적 소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3) 고신파의 신학적 역동성: 칼빈의 총체적 신학

 

칼빈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전통을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삼는 고신교단은 철저한 칼빈의 개혁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칼빈주의 신학을 전통으로 삼는 한국의 다른 장로교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고신교단도 칼빈의 개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기보다는 기독교 강요를 중심한 교리의 가르침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은 기독교 강요를 중심한 성경중심의 개혁신앙과 교회를 회복하는데 머문 것은 아니었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제네바 시 전체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화시키는 총체적인 개혁이었다. 교회와 사회가 이완되지 않는 바른 신앙 고백과 신앙적인 삶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동반하는 개혁이었다. 이러한 칼빈의 총체적인 개혁사상은 칼빈이 1541년 제네바시 의회의 초청을 받아 입성할 때 그가 시의회에 보낸 답신에서 발견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를 여러분들의 목사로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무질서를 고치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신실한 마음으로 저를 망명생활에서 다시 부르신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하고 있는 범죄와 방탕함을 제거하십시오. ……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 입니다. …… 선행을 겸비하지 않은 죽은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악한 생활이 진리를 가장하고 행동이 말을 부끄럽게 한다면 진리 자체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저로 하여금 두 번째로 여러분들의 고장을 버리고 떠나 새로운 망명지에서 제 고통의 쓰라림을 삭히게 하시든가 교회 안에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도록 해 주십시오. 순수한 훈련(discipline)이 재건되게 하소서.64)

 

칼빈은 이미 1536년 바질에서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개혁교회의 기본 지침을 마련하였다. 1537년 기욤 파렐에 의해 설득을 당했을 때 이러한 개혁사상으로 제네바 개혁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반대파에 의해 축출 되었다. 그런데 15412차로 제네바 개혁을 위해 초청되었을 때 위와 같은 초청 답신을 한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제네바 시민의 도덕적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는 하나님 말씀대로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 과제이지만 성경의 가르침대로 제네바 시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도성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개혁과 변화에 대한 칼빈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그의 사역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1) 치리회의 가동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신앙과 시민의 윤리와 도덕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초청한 시의회와 협의하여 치리회(consistorium)를 가동 시킨 것이다. 칼빈은 정부 주도의 치리회의 성격이 강했던 베른과 추리히와는 달리 제네바 치리회를 목회적 성향을 띤 교회법정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는 교회와 제네바시 정부 사이에서 조정자로 치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도덕적 윤리적 성격의 치리회를 만들고 제네바 시민의 윤리적 삶을 종교개혁의 주요한 모토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치리회에 참석하는 장로의 자격으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적인 지혜를 지닌 사람을 요구하였다. 치리회의 교회주도에 대한 칼빈의 의지는 1561년의 제네바 교회의 교회법 (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de l'Eglis de Geneve)에 다른 도시들의 치리회 (Consistorium)와 구분되는 교회치리회 (Consistoire Ecclesiastique)’라는 용어가 사용하므로 분명하게 드러난다.65)

 

칼빈은 실로 치리회를 통해 시민의 악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와 사회의 질서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는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의 금지, 혹은 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66)

 

제네바 치리회는 사회개혁이 동반된 일벌백계 주의의 법정 기관 성격을 가진 기관이 아니라 상담, 중재, 교육을 통해 치유의 기능을 동반한 것이다. 치리회는 대. 소의회와 함께 시민들의 삶을 바로 세우고 제네바시를 거듭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래서 존 낙스는 제네바를 “the perfect school of Christ"라고 하였다.67) 시 당국과 수없이 부딪치면서 제네바시를 개혁하려 했던 조정자 칼빈의 모습을 지켜본 존 낙스의 평가였다.

 

(2) 종합사회복지기관 구빈원

 

구빈원은 칼빈의 시민사회개혁 구현을 위한 대표적인 프로젝트였다. 그가 시 당국과 함께 구빈원을 확장하여 시민복지를 위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칼빈의 의도대로 제네바 시당국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존의 구빈원을 활성화 하면서 옛 교회의 물건들을 종합 구빈원(Hopital General)으로 사용하였다. 치리회와 구빈원은 사회개혁의 동반자로 협조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영육간의 번영을 위한 총체적인 치유로 접근했으며 이것은 그의 개혁의 의지와 비전이었다. 특히 치리회가 구빈원을 확대 운영하도록 하는 데는 칼빈의 역할이 있었다. 구빈원의 필요성이 사회의 절대적인 요청이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은 백년전쟁(1337-1453) 그리고 흑사병으로 시달리면서 종말론적 열망을 가질 정도로 열악한 삶의 환경 속에 빠져 있었다. 봉건사회에서 자본, 상업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가난한자와 거지들 그리고 사회적인 부랑자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인 약자를 돌봐야 할 사회복지 문제는 시급한 사안으로 대두되었다. 그 중심에는 제네바시의 담임목사였던 칼빈이 있었던 것이다. 구빈원은 칼빈의 목회적인 계획안에 있었던 시민사회개혁의 일환이었다.

 

제네바 종합구빈원(Hospital General)은 칼빈의 도움으로 확장 되었고, 구빈원에서 행해진 구제 사업은 다목적이었다. 전쟁고아, 돌봄이 필요한 사람, 노인, 병자, 심장 장애, 가난한 자, 나그네 등에게 빵과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자신들의 숙박료를 지불할 수 없는 제네바에 도착한 방문객에게 매일 저녁 쉼터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구빈원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자선 행사도 있었으며 책임은 집사가 복지 행정사로 사역하도록 하였다. 칼빈이 교회의 조직에서 4직분을 말할 때 집사는 바로 이러한 구제활동에 전념하기 위한 직무를 위한 것이었다. 칼빈은 또한 집사의 두 직분을 말하면서 구제와 행정을 전담하는 집사와 병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는 집사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양자 다 교회 중심의 집사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고 대 사회적인 역할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집사를 예전을 돕는 집사나 성직자가 되는 중간 계급으로 인식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3) 프랑스 기금(Bourse Francaise) 설립과 운영 조정자

 

구빈원의 역할이 프랑스 난민의 유입으로 한계에 달하게 되자 칼빈과 기부자들이 이방인들을 돕기 위한 새로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프랑스 난민 뿐 아니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에서도 개신교의 난민들이 유입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기금제도는 1540경에 세워졌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제네바로 이주해온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기구였다. 프랑스 기금 역시 기부자들이 선정한 평신도 집사들이 운영하였다. 이들은 모금운동과 분배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심방 사역을 담당했다.

 

프랑스 기금을 위해 봉사했던 집사들의 명단과 기부자들의 명단은 잘 기록되어 있는 반면, 수혜자들의 이름은 회계장부에 사실상 익명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치리회의 문서와 소송사건이 남긴 메모들 여기저기서 수혜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수혜자들은 대체로 여성, 아이들 그리고 실직한 남성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기금의 도움을 받았던 피난민들이 나중에는 그 기금의 후원자들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프랑스 기금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155471일에는 프랑스 기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칼빈의 집에서 가지기도 하였다.68)

 

프랑스 기금은 또한 프랑스로 파송되는 개혁 선교사를 위한 파송비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기금은 광범위하게 사용 되었던 것이다. 특히 프로방스에 심한 박해를 받은 개신교들이 집과 토지 그리고 자산을 잃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 이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 기금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교회중심의 개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회복지 개혁을 동반한 기독교사회 개혁이었다. 프랑스 기금을 설립한 칼빈은 실로 가난한 사람은 물론이고 난민들을 향한 박애 정신을 가진 개혁자였던 것이다. 프랑스 기금은 구빈원과 대등한 위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기부자들은 성직자들과 긴밀한 관계 하에서 구제 사업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기금을 정기적으로 헌금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기금이 다양한 원조 물자를 프랑스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도 관심을 갖고 보내진 것은 특이한 점이다. 프랑스 기금의 설립과 운영을 위한 칼빈의 역할은 지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칼빈이 시작한 개혁교회는 신앙과 사회개혁이 이완되지 않은 유기적 통합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4) 고리대금, 임금, 노동조합

 

흥미로운 것은 칼빈은 당시 사회적인 경제활동의 이슈로 등장한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기독교사회의 지평을 교회라는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적용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리대금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루터와는 달리 정당한 고리대금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1545년 사키누스(Sachinus)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리대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우선 성경의 증거가 고리대금업을 전면적으로 정죄한다는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고리대금업이 전면 금지된 것은 아니다. 고리대금업은 공익을 용인하는 것이 필요하며,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허용하셨던 상황과 다른 많은 형편들은,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이 없이도 그들 사이의 거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이 공의와 자선에 배치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면 금지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69)

 

칼빈의 고리대금에 대한 입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을 해서는 안 되지만 부자들을 대상으로는 고리대금의 사용을 용납함을 볼 수 있다. 즉 이자놀이는 공평과 형제적인 협력을 위배하지 않는 한 서로의 도움을 위해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리어 돈을 빌린 자들이 원금에 대한 소득의 일부를 대금업자에게 지불하는 것이 공평한 행위라는 것이다. 칼빈은 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자가 합당하게 이자를 받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단지 그로 인해 상대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입장을 정리하면 고리대금의 행위는 공정한 규칙과 균등한 기회의 제공을 토대로 정당하게 사회적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난했다.

 

이 세상에서 고리대금업자가 토색 꾼이 아니며, 부당하고 수치스러운 이득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옛날 카토(Cato)가 고리대금업과 살인을 동일한 범죄로 취급한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의 피를 빠는데 있기 때문이다. …… 더욱이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들의 이자놀이 때문에 고역을 치르는 쪽은 부자들이 아니라, 마땅히 구제되어야 할 가련한 사람들이다 …… 우리가 고통과 곤경에 처해 있는 가련한 자들을 약탈하거나, 집어 삼키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사실은, 모든 민족과 모든 세대에 걸쳐서 통용되는 정의의 일반 원칙이다.70)

 

칼빈은 악덕 고리대금업으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의회의 현물에 대한 이자의 비율이 5%로 감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가난한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한 칼빈의 생각이었다. 칼빈의 요청이 있은 지 1년 후 1544년 시의회에서 칼빈의 의견을 수용하여 입법조치 하였다. 이 조치는 소 의회, 200인 의회 그리고 총회와 모든 부르주아지 회의에서 수용되었다. 그리고 1547년에 농민으로 구성된 지방의 교구민들을 위한 교회법령으로 가결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도 고리대금이나 이익을 위해 5% 이상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어길 시에는 사건의 요건에 따라 원금의 몰수 내지는 임의의 벌금형을 받게 될 것이다.71)

 

이러한 법령을 통해 지주들과 도시의 성주들의 횡포를 막고 농민과 가난한 자들이 보호하게 되었다. 칼빈은 농민들과 빈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리대금의 일곱 가지 규정을 두었다. 가난한자에게 이자를 부과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들로부터 지나친 담보를 요구하는 것도 안 되며, 담보가 없다고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도 잘못이며, 그리고 법이 정한 이자 이상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었다. 칼빈은 고리대금에 대해 양면성을 갖고 있다. 칼빈은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고리대금 행위는 건전한 경제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한편으로 지나친 이기적인 상업행위로서의 고리대금은 사회악을 조장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지주들과 영주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과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을 합리적으로 법제화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투기, 독점, 시장 조작 등 부정직한 상행위를 비난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사회의 와해는 물론 하나님과 인류의 연대성을 파괴하는 행위로 정죄하였다. 이를 통해 칼빈은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72)

 

칼빈은 또한 기업주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단합해서 임금을 올리거나 동결시키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노사문제가 발생했을 때 칼빈은 법률가로서 조정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동 계약 제도를 옹호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노동자가 받은 임금이나 기업가의 남은 이익은 자신의 공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기업가가 임금을 속이거나 시장을 조작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낮추는 행위는 도둑질하는 것으로 비난하였다. 칼빈은 경영주들과 직공들의 이기적인 횡포를 막기 위한 법령을 선포하였다.

 

경영주들이나 직공들은 누구든지 직업을 막론하고 …… 이전에 공표된 어떤 법령이나 포고령들이나 조례들을 이용하여 …… 불법적인 집회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을 어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정도에 따라 60수의 벌금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73)

 

칼빈은 시 당국에서 책정한 목회자들의 생활비의 합리적인 책정을 위해 시 당국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월급을 다른 목회자들과 동일하게 책정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특히 빈약한 봉급으로 생활을 어렵게 꾸려나가는 동료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칼빈의 견해는 목사도 부유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정직하게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시의회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하는 포고령을 통과시키는 상황에서 칼빈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의미 있는 결단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할 권한을 가진 시의회원들은 대부분 상당한 토지와 부를 소유한 경제적인 지배계급들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유산자계급(bourgeoisie)과 무산자계급(proletariat) 사이의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중재자로 나섰던 것이다.74)

 

(5) 교육을 통한 개혁

 

기독교사회 건설을 위한 칼빈의 또 다른 노력의 중심에는 교육프로젝트가 있었다. 칼빈은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은 인재 양성과 더불어 가능함을 인식한 듯하다. 치리회를 통한 징계와 다스림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시의 기독교사회 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엇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시 당국의 정책에 동의하였다. 그는 청소년을 위한 신앙 교육서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제네바에 추방되어 3년간 스트라우스버그에서 교육자 스트륨을 만나면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킨 것 같다. 그가 두 번째 제네바로 돌아온 후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1541년에 선포했다. 그것은 장차 개혁교회를 지도할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칼빈은 단순히 목회자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일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대망은 여러 가지 종교개혁을 위한 일들과 시 당국의 몰이해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고 1558-1559년에 이루어졌다.

 

1558년 대학설립을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대학설립 장소가 정해졌다. 1559년에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되었는데 대학 건축비로 30,000플로렝 정도의 모금이 이루어졌다. 시 정부가 앞장서서 제네바시를 도주한 범죄자들이나 참수당한 자들의 동산과 부동산을 기금으로 마련하기도 하였다.75) 이뿐만 아니라 시의회 위원들이 모금 운동에 동참하였고 변호사들이 고객들의 유산세 등을 높이 책정하여 건축 경비에 헌납하도록 하였다. 칼빈도 적극적으로 후원자를 모집하였다. 칼빈 스스로 집들을 방문하여 건축비를 위한 기부금을 간청하였다. 시민들은 기부금을 내었고 유산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스에서 온 피난민들의 모금 운동 동참이 두드러졌다. 칼빈은 대학시설의 건축과 더불어 유능한 학자들을 모셔오는 것을 우선시 하였다. 당시 베른 당국과 로잔느의 대학교수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칼빈에게는 훌륭한 교수들을 제네바로 유치하는데 유리하였다. 칼빈은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와 비레(Viret) 같은 실력 있고 덕망이 높은 개혁자들을 영입하게 되었다. 베자는 초대학장으로 학교를 이끌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젊은 인재를 대학의 지도자로 세우는 용단을 내린 것이다. 제네바 대학은 종교개혁을 위한 지도자 양성이 목적이었다. 교회를 위한 목회자 양성과 정부기관을 위한 지도자 양성이었다. 제네바 대학은 신학, 법학, 의학과 같은 전문 학문을 하기 전에 철저하게 인문학(liberal arts)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즉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7과를 이수하도록 하여 전인적인 인격의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개학을 하자 600명의 학생들이 몰려왔고 그 중 유럽 각지(스코틀랜드 영국, 네델란드, 독일, 헝가리, 그리고 프랑스 등)에서 160명의 학생들이 제네바 대학에 등록하는 등 첫 해에 900명의 학생이 모였다.76) 그 후 10년이 되었을 때 1600명의 학생이 수학하는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칼빈은 대학이 단순한 지식의 토론장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요람지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학교의 목적을 홍보하고 지역사회에 부응하는 내용을 주민들에게 알렸다. 또한 지역사회의 요구에도 경청하였다. 칼빈은 지속적으로 학교의 발전을 위해 시의회와 협의하였고 시 당국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를 양성했던 것이다. 칼빈은 중세 대학이 중세사회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던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독교사회의 성경적 실현을 위해서 제네바 대학교육의 필요성과 대학의 역할이 지대함을 인식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설립했던 대학의 지도력을 베자에게 넘기고 자신은 오직 대학의 발전을 위해 조정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칼빈은 목회자로서 참된 기독교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사역을 감당했던 개혁자였다. 그는 자신이 설립하였거나 관여한 기관들의 장으로 그것들을 주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조력자와 조정자로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칼빈의 제네바 개혁은 역동적이었다. 정치, 사회, 노동, 교육 등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개혁운동이었다. 단순히 중세의 잘못된 신학과 신앙고백을 개혁하는 신학적인 개혁의 틀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제네바시의 삶의 전 영역에 신정이 도래하기 위해 개혁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 개혁교회는 칼빈의 개혁사상을 신학적 개혁과 전통에만 몰두해 왔다. 통전적인 칼빈의 개혁 신앙은 전수 받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기독교 강요의 가르침을 교리화 혹은 신학화하여 통전적이고 역동적인 칼빈의 개혁사상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몰입시켰다. 이러한 신학적 이론에 집착한 한국교회의 개혁신앙과 신학을 칼빈의 통전적인 개혁신학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작업을 고신교단이 앞장서야 한다. 고신교단은 일찍이 화란 개혁파의 신학자요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권 영역 사상을 한국교회에 소개한 저력을 갖고 있다. 고신은 한국교회에 모범되게 사회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도록 역동적인 개혁신학을 실현하는 데 선두주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잘못된 성령운동, 신비주의, 기복신앙을 통한 교회성장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으로 건강한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과 신앙이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고신도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고신교단은 아직도 성경말씀을 쫓아 인격적인 신앙과 삶을 구현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본다. 고신교단은 이제 통전적인 개혁신학의 터전을 넓히고 실천하는 일을 통해 건단의 정신을 다시 확인하고 실현해야 할 것이다.

 

III. 결론: 고신교단은 한국교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감당하자

 

고신교단은 한국교회가 일제의 종교적 탄압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출옥 성도들이 해방 후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일념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성경 중심의 개혁신학 토대 위에 세워진 교단이다. 이것이 고신교단이 출발한 원인이고 존재한 이유이다. 즉 이것이 고신교단이 세워질 때 가졌던 큰 뜻이었다. 그동안 고신교단은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구제기관인 고신의료원과 교육기관인 고신대학교를 설립하여 개혁주의 신앙의 전파와 실천을 위한 기관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해외 선교를 위한 센터도 대전에 마련하였다. 이것은 지난 70년간 고신교단은 내분이 있긴 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이루어 낸 지대한 성과로 볼 수 있다. 이제 고신교단은 고신의 신앙과 신학적 유산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논자는 고신교단은 어느 교단보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저력을 가진 교단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신이 먼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첫째는 고신교단이 먼저 탈 교권주의를 위해 현재의 총회의 관료제도(bureacracy)를 개혁해야 한다. 총회장의 위상을 총회의 사회의 의장(moderator)으로 바꾸면 된다. 그리고 교권주의자들이 서식하지 못하도록 방대한 총회기구를 축소하고 대부분은 노회에서 처리하도록 하면 된다. 둘째는 고신교단이 선제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연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합동 교단이나 합신 교단과는 신학적인 근본적 차이가 전혀 없다. 오직 교권주의자들의 기득권이 연합운동에 방해가 될 뿐이다. 지금은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각자 도생할 수 없다. 한국의 미래의 복음화를 위해 교단들이 안주할 때가 아니다. 고신교단이 선제적으로 연합을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셋째는 고신교단은 한국 장로교단의 신앙과 신학을 통전적인 개혁신학과 신앙으로 자리매김 하도록 개혁신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한국사회는 신앙과 삶이 이완된 기독교 종교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비정상적인 사이비 이단들의 신앙이나 비인격적인 성령운동 그리고 신비주의와 차별화 될 수 있도록 인격적 삶이 동반하는 믿음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고신교단이 먼저 개혁주의 신학의 이데올로기에 머무르지 말고 통전적인 개혁신학의 삶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고신교단은 다시 한 번 한국교회를 개혁하고 재건하기 위해 출발했던 건단의 정신을 회복 복귀(ad fontes)하고 실현하는데 매진해야 한다. 논자는 교단 설립 70주년을 맞이한 고신교단에 대한 소망과 바람으로 졸고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신교단이 한국교회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졸고를 마감한다.


▼미주

1) 본 논문은 고신 70주년 건단 기념논문집에 수록된 논자의 논문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고신 70주년과 바램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하였다.

2) 이상규, ‘고신교회의 법정 소송 견해’, 한국에스라 성서연구원, 2021, 910일 작성.

3)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서울 SFC 출판부, 2006, pp. 23~24.

4) 김영재, 한국교회사, 합신대학 출판부, 2004, pp. 261-262.

5) 김양선, ibid., p. 149.

6) 김영재, ibid., p. 285.

7) 김양선, ibid., p. 149.

8) 김영재, ibid., p. 26.

9) 심창섭, ‘한국장로교회의 합동연구’, 한국장로교회의 합동, 새한기획출판부, 2009, p. 97.

10) 양 낙홍 한국장로교회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8, pp. 269-630.

11) 양 낙홍, ibid., p. 264.

12) 양 낙홍, ibid., p. 659.

13) 양 낙홍, ibid., p. 674.

14) 이 상규, ‘고신교회의 발전, 반성과 성찰 in 고신총회 설립 70주년 기념 학술집, 2022, p. 160.

15) 이 상규, ibid., p. 162.

16) 이 상규, ibid., p. 163.

17) 이 상규, ibid., p. 165.

18) 金 良善, ibid., 1956, p. 52.

19) 金 良善, ibid., p. 149.

20) 황방청, ‘慶南老會 第 55참관수기(參觀手記)’, 파수군 10, 도서출판 목양, 1990, p. 26.

21) Thea B. Van Halsema, This was John Calvin, Baker Book House, p. 80.

22) Thea B. Van Halsema, ibid., p. 164.

23) Ibid., p. 164.

24) Ibid., p. 165.

25) Ibid., p. 165.

26) Ibid., pp. 165-166.

27) Ibid., p. 166.

28) Ibid., p. 166.

29) Ibid., p. 216.

30) 정미현 역, 요야킴 스태트케 지음, 장로교의 뿌리 칼빈, 만우와 장공, 2009, pp. 90-91.

31)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2.6.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XXI. p. 1047.

32) 김재준 역, T.H.L Park, 칼빈의 모습, 대한기독교서회, 1958, p. 116.

33) 김재준, ibid,. p. 116.

34) 이상규, "칼빈과 연합운동" in 칼빈과 교회,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 2007, p. 45.

35) Jules Bonnet, tr, letters of John Calvin, III, 307, in John H. Kromminga, ‘Calvin and Ecumenicity’ in Richard C. Gamlbe, edit.,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Garland Publishing Inc., 1992, p. 40.

36) A Letters of John Calvin. I, 142. in ibid., p. 40.

37) Richard C. Gamble, ibid., p. 154; 이러한 만남을 통해 그는 몇몇 가톨릭지도자들의 태도에 대해 평가하고 있다. Archbishop of Cologne은 개혁자들에 대해 나쁜 경향의 태도를 갖고있지 않고 있다. Archbishop of Treves는 조금 선호하는 편이지만 머뭇거리는 태도였다. Archbishop of Mainz는 공개적으로 호전적이었다.

38) A Letter of John Calvin. I. 440-42. in Richard C. Gamble, ibid., p. 42

39) Richard C. Gamble. ibid., p. 43.

40) Ibid., p. 43.

41) Ibid., p. 43.

42) Ibid., p. 43.

43) 칼빈은 교리의 완벽을 주장하면서 서로간의 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ibid., p. 44.

44) Ibid., p. 44.

45) Ibid., p. 44.

46) Ibid., p. 44.

47) CO 14, 314. in 이상규 ibid., pp. 55-56.

48) Ibid., p. 44.

49) Ibid., p. 44.

50) Ibid., p. 46.

51) Ibid., p. 46. in Bonnet, III, p. 118.

52) Ibid., p. 48.

53) Ibid., p. 50.

54) Ibid., p. 50.

55) Ibid., p. 50.

56) Ibid., p. 53.

57) W. Standford Reid, ‘The Ecumenism of John Calvin’, in Richard C. Gamble. ibid., p. 31.

58) Ins, 4.1.10. in Gamble. ibid., p. 98.

59) Ins. 4. 5. In Gamble. ibid., p. 98.

60) Gamble. ibid., p. 98.

61) 심창섭, ‘종교개혁과 시민사회 개혁’, p. 2. 2016, 5. 10, 한국기독교 목회자 협의회 세미나. 덕수교회, in 김병환, 사회복지 사업에서 본 칼빈연구, 목양, 2010, 361.

62) 심창섭, ibid., p. 3.

63) 심창섭, ibid., p. 3.

64) 심창섭, ibid., p. 3.

65) 심창섭, ibid., p. 4. cf, 박경수 교수, 교회의 신학자 칼뱅, 대한기독교서회, 2011, pp, 286-287.

66) 김병환, ibid., p. 384.

67) 김병환, ibid., p. 385.

68) 김병환, bid., p. 386.

69) 김병환, ibid., p. 391.

70) 김병환, ibid., p. 34-395.

71) 김병환, ibid., p. 397.

72) 김병환, ibid., p. 373.

73) 김병환, ibid., p.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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