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희 / 행복한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Th.D.)
최광희 / 행복한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Th.D.)

올해 43일부터 한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이다.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는 나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나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다 보면 고마움을 넘어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조금은 고통스럽게 살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가 지옥 형벌을 받지 말라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에서 고난받으신 것을 생각하며, 성도가 고난주간에 고난을 받는 것이 과연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일까?

집마다 아빠들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일은 때로는 보람되지만 때로는 고통스럽다. 일 자체도 힘들고 일이 잘 안 풀려서 힘들고 위아래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할 때 더욱 힘들다. 그 괴로움이 너무 심할 때는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아빠들은 절대로 때려치우지 않는다. 힘든 그 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렇게 노래하는 자녀를 생각하면 힘이 들어도 힘을 낸다.

아빠들이 힘들게 일해서 가져오는 수입 덕분에 가족이 편안하게 생활하며 화목한 가정이 유지된다. 평소 가족들은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버이날이 되면 아빠의 은혜를 생각하며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어버이날에도 함께 기뻐할 뿐 아빠 고통 체험하기행사는 하지 않는다. 아빠가 고생하는 것은 덕분에 가족들 고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세상에 어떤 아빠가 가족들에게 자기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라고 하겠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받으심은 우리가 지옥 형벌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평소에도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지만,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을 더욱 생각하며 경건하게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경건함이란 침울함이나 고통스러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고난주간이라고 해서 웃지도 않고 음식도 맛없는 것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대학에 다닐 때 고난주간 금요일에는 의례 점심을 주지 않았고 우리는 금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고난주간 외에도 개인적 금식을 자주 했다. 만일 금식에 자발성이 없다면 그것은 굶식이 될 것이다.

금식이라는 개념이 확장되어 오늘날 미디어 금식이라는 말도 있다. 미디어 금식이란 TV 안 보기, 인터넷 안 하기, 게임 안 하기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생활 영역에서 미디어를 분리해내는 것은 소고기 마블링에서 기름을 분리하는 것처럼 어렵다. 그러므로 미디어 금식이란 일상생활 비능률적으로 하기가 되어버린다. 다만 오락을 절제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고난주간에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하지만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 몸을 괴롭히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놈들아, 내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느냐?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좀 느껴보아라. 특히 고난주간에는 너희도 최대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며 살아라.”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 고기를 금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을 앞두고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기는 날이 생겼다. 고기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카르네(carne)와 결별을 뜻하는 라틴어 발레(vale)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단어 카니발(Carnival, 고기와 결별)은 후에 축제라는 의미가 되었고 우리나라 말로는 사육제(謝肉祭, 고기 감사 축제)라고 번역되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40일간 고기를 안 먹기 위해 고기를 실컷 먹고 야단스럽게 축제하는 것이 과연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고난주간은 나를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주간이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내가 고난받는 것이 중심이 되거나 카니발 같은 이상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예수님에게나 우리 성도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내가 고난받는 고난주간이 아니라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묵상하는 본래 의미의 고난주간을 되살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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