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나비 논평

 

샬롬나비 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사무총장 김윤태 박사
샬롬나비 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사무총장 김윤태 박사

 

이승만은 자유민주 국가를 세우려고 헌신한 일제와 타협 없는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이승만은 평생의 독립운동 결실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하였다.

 

104주년 삼일절 기념행사가 지난 31일 행정안전부의 주관으로 열렸다. 행정안전부는 3.1운동 기념식에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걸었다. 이 사진에는 안중근, 김구, 안창호, 유관순, 윤봉길을 비롯한 여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지만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했던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사진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반면에 국가보훈처는 삼일절 104주년 기념식을 맞이하여 15인의 흑백사진을 컬러 이미지로 복원해 제작한 영상을 328일부터 411일까지 광화문광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 전광판에 송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승만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행사에서 이승만의 사진이 누락된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제라도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 과오(過誤)를 역사적 진실의 견지에서 공정하게 평가해야 좌파에 의해 날조된 건국의 정통성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샬롬나비는 이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이승만의 3.1운동과 독립운동에서의 공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자 한다.

청년 이승만
청년 이승만

1. 이승만은 이미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대통령제 정치제도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그 결과로 189811월에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한 달 후에 만민공동회 해체 방침을 정함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를 귀국시켜 황제를 폐위하려는 모의에 가담한 혐의로 18991월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승만은 수감된 후에 탈옥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종신형 복역(服役)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에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이승만은 이 독립정신에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이 고립되어서는 안되며, 외교의 중요성을 말하며 외국과의 통상이 부국의 방법이며, 신학문, 신문물을 익혀야 하고, 도덕 수준 향상, 민주주의와 자유·백성의 권리·의무, 자유를 존중하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이승만은 이미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넣어준 다양한 서적을 읽고 미국과 프랑스의 자유민주주의의 대통령제의 정치제도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부국강병의 길임을 주장하였다.

 

2. 이승만은 사면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한국 이민자들을 결집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출소 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의 독립운동을 차단하고자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이들을 체포할 때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하와이로 건너가 1918년부터 한인교회와 한인학교를 세우고 한인들을 결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들을 미국시민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던, 미국감리교회와 분리하여 한국인들의 감리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이민자들에게 한국인의 정신을 심어주며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여기서 한국인 이민자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심어주며 외교독립노선을 추구하였다. 물론 이 외교독립노선에 반대하여 무장독립투쟁을 주장하던 박용만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3. 미국교포들은 191812월에 파리강화회담에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대표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승만은 정한경, 민찬호와 함께 미국교포들에 의해 191812월 제1차 세계대전을 처리하는 파리강화회담에 참여하는 한국 대표로 선정되었다. 미국교포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파리강화회담에 우리나라의 대표를 파송하여 독립을 호소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가장 먼저 191812월에 우리나라 독립운동 지도자들 가운데서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등의 대표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이 일본 언론을 통해 일본의 동경유학생들에 알려지자, 이들은 동경 조선YMCA 회관에 모여 2.8독립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동경 2.8독립선언이 국내로 알려지면서 국내의 3.1운동이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므로 미국동포들이 이승만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파리강화회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국내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4. 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2월 말에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던 윌슨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국제질서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는 것에 호응하여, 19192월 말에 우리나라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문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때는 이승만의 파리강화회담의 참석이 미국 정부의 불승인(不承認)으로 불가능해지고, 윌슨 대통령과의 면담도 무산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정한경은 국제법에 정통한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청원서를 작성한 후,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검토와 승인을 거쳐 위임통치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위임통치청원서는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분명한 전제조건 하에 한국을 일정기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와 함께 한국을 미국이 주도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이 지배하는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신한청년당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은 위임통치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 전개는 당시 온건성향의 독립지사들이 위임통치청원을 독립구상으로서 공유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민족자결주의가 고취되고 국제연맹이 창설되는 유리한 국제정세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1910년대 말경의 한국실정과 국제정세를 감안한 현실적 차선책으로 위임통치를 청원하면서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다.

 

5. 이승만과 미국교포들은 3.1운동 이후에 조직된 임시정부의 헌법이 민주공화정을 채택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3.1운동 후 411일에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 헌법의 초안을 조소앙이 작성하였는데, 이 초안에는 대한민국은 북미합중국의 헌법을 모방하여 민주정부를 채택함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구가 들어가는 데는 이승만과 미국교포들이 민주정부를 세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현순을 상해에 파견하여 밀접한 연락을 취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최종적으로 이 조항에서 북미합중국의 헌법을 모방하여가 빠지고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수정되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임시정부 제1조는 이승만과 미국교포들의 독립운동의 열망과 함께 대한민국 전체의 의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6.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교포들을 모아 19194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자유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면서 한국인의 갈망과 목적이란 선언서를 채택하였다. 이 선언서의 1조는 정부는 그 피통치자로부터 나온 권력에 기초해야 하며, 그러므로 정부는 그가 다스리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되어있고, 2조는 우리는 가능한대로 미국의 정부 형태를 따른 정부를 가질 것을 제안한다.”고 하였다. 이승만을 중심한 미국교포들은 국민의 동의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열망하였고 이승만은 3.1운동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므로 이전의 위임통치청원을 철회하고 민족독립을 분명하게 요구하였다.

 

7. 이승만은 국민의 동의를 받은 한성임시정부를 가장 중요시 하였다.

이승만은 정부는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감리교 지도자인 이규갑이 4월 말경에 전국의 지도자들을 모아 그들의 동의를 받아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한성정부의 집정관으로 이승만을 추대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국민들의 동의를 받아 세워진 한성정부의 집정관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임시정부 가운데 한성정부에 법통성을 부여하였다.

 

8. 이승만은 임시정부들의 통합으로 설립된 19199월의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안창호의 중재노력으로 상해임시정부, 노령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 등을 통합하여 세워진 19199월의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였고, 이승만을 제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상하이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미국정부가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시체를 넣는 관에 들어가 밀항을 하여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가 상해에 입성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그 이후에 심각한 노선투쟁이 시작되었다.

무장독립노선을 추구하던 박용만과 상해공산당에 소속된 이동휘를 중심한 세력들은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에 대해 망국적 매국논리라고 비판하며 퇴진운동을 일으켰다. 이 갈등은 기본적으로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노선투쟁과 함께 임시정부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권력다툼으로 발생하여 이승만은 1925년에 탄핵을 당하였다.

 

9. 이승만은 이후 미국에서 외교독립노선을 추구하며 독립운동을 한 후에 1948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하였다.

이승만은 1904년에 저술한 독립정신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우수성을 인식하였고, 그 정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외교독립노선과 실력양성론을 추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장독립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좌파에 의해 친일파와 미국과 손잡고 분단을 획책한 권력의 화신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좌파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승만이 평생동안 대한민국을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하려고 노력한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해야 하겠다. 앞으로는 3.1운동 기념식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기념식에서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공로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당당하게 그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으로 대우해야한다.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노력해야 하겠다.

 

2023417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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