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해야 하나…고심 깊은 경찰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안정훈 기자 =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 신고는 하지 않은 이른바 '유령 영아'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갓 태어난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유기한 사례를 두고 고심 중이다.

지금까지 지방자체단체에서 협조요청 또는 수사 의뢰된 이들 '행방불명 영아'의 상당수가 베이비박스에 신생아를 놓고 간 사례로 파악되면서다.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기 14년간 2천220명[연합뉴스 자료사진]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기 14년간 2천220명[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경찰청의 경우 5일 현재 유령 영아 사건 38건에 대해 사실관계를 조사 중으로 그 중 베이비박스 유기 사건 24건에 대해선 법리 판단까지 병행하고 있다.

광주·전남에서도 이날 기준 유령 영아 34건을 조사 중인데 이 가운데 29건이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긴 것으로 확인됐거나 추정된 사례다.

이 밖에도 부산과 경기북부, 인천 등에서도 베이비박스 유기 사례가 계속 확인되고 있다.

경찰은 일단 정부, 지자체에서 통보받은 사례 중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경우엔 일단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유기죄나 영아유기죄 등 혐의를 선별해 적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유기 과정에서 베이비박스 설치 기관과 상담한 사실이 확인되면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했다면 원칙적으로 형법상 유기죄와 영아유기죄를 적용할 수 있다.

친부모가 아이를 충분히 양육할 수 있는 상태인데도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놓고 갔다면 유기죄가 성립한다.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된다.

아이를 유기했으나 정상을 참작할만한 이유가 있다면 유기죄보다 처벌이 가벼운 영아유기죄가 적용된다. 2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 수위가 낮아진다.

주로 성범죄로 인해 임신해 출산한 경우나 극심한 생계 곤란으로 양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유기죄 대신 영아유기죄를 통상적으로 적용한다.

친부모가 베이비박스를 설치한 기관과 충분히 형편을 상담한 뒤 아이를 인계했다면 영아유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례도 있다. 경찰은 이 판례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7월 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에 두 아이를 잇달아 맡긴 20대 친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두고 장소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 담당자와 상담을 거쳐 맡긴 사실이 인정된다'는 이유였다. '유기'가 아니라 보육기관에 아이를 맡긴 것과 다름없다는 취지다.

서울경찰청은 이를 근거로 접수된 베이비박스 유기 사건 24건을 전수 조사해 베이비박스 설치 기관과 상담한 사실이 있는지, 해당 기관에 직접 아이를 인계한 사실이 있는지 등을 살펴볼 계획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법원 판례에 따라 영아유기죄가 성립하지 않는 사안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해 입건 여부 등을 결정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베이비박스 유기 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 수사로 베이비박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지면 자칫 불법 입양이나 영아 살해 등 극단적인 범죄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주사랑공동체 양승원 사무국장은 "친모가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기는 대신 불법 입양을 할 수도 있다""영아가 유기돼 죽었거나 불법 입양을 한 경우에만 경찰 수사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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