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로잔운동과 한국사회선교운동 주제로 논의하다

로잔너머 2차 심포지엄이 2023829일에 서울영동교회에서 열렸다. 이번 주제는 국제 로잔 운동과 한국 사회선교운동이다. 20249월에 로잔대회가 인천에서 열린다. 로잔 운동이 한국교회에 준 영향과 맺은 관계를 살피면서 2024년 대회에 담아야 할 '총체적 복음'의 이슈와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한국교회와 사회선교운동이 로잔 정신의 자양분을 가지고 어떤 실천과제를 가졌는지 살피고 있다. 주최는 로잔너머이고, 주관은 성서한국이다. 1회 심포지엄은 로잔운동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문식 목사가 발제하였다.

좌로부터 구교형, 백소영, 이성영, 박현철.
좌로부터 구교형, 백소영, 이성영, 박현철.

이번 발제는 구교형 성서한국 이사장과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교수가 한다. 구교형 이사장은 국제 로잔 운동과 한국 사회선교운동이란 주제로, 백소영 교수는 제4차 로잔대회는 무엇을 넘어야 하나, 한 여성신학윤리학자의 제언이란 주제로 발표한다.

평통연대 상임대표인 강경민 목사가 여는 말을 하였다. 내년이 로잔 50주년이고, 한국에서는 40년이다. 오정현 목사를 제명할 때 월 이백만원의 후원을 포기한 것을 기억하면서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되어 거둔다. 10:24절에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해라는 말씀은 서로 연대해라는 의미이다. 성서한국운동은 연대 운동이다. 이 정신으로 꾸준히 정진하기를 부탁했다.

로잔 운동의 특별함은?

구 이사장은 먼저 로잔 운동이 많은 국제 선교운동과의 가진 차이가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왜 로잔인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자는 운동이다. 로잔의 특징이나 정체성과 차별성은 총제적, 혹은 온전한(whole)에 있다. 총체성을 강조하게 된 이유가 있다. 순복음과 비교된다. 총체성을 쓰는 것은 어디와 비교한다. 그동안의 선교가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치우침을 의식하는 것과 자신이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그리스도의 정신, 복음의 정신과 일치하는가? 9:35-38이 예수님의 사역을 압축해 보여준다. 선교, 전도, 치유사역이다. 치유사역은 사회선교운동을 포함한다. 3년의 공생애 속에 하나로 다 담았다. 총체적 복음은 복음 자체가 총체적이라고 한다. 교회는 더하거나 빼지 않고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총체성이 담긴다.

그러나 이천년 역사는 항상 어딘가에 치우쳐 있었다. 로잔 운동을 하는 분들도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총체성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로잔 운동의 배경은?

74년 이전에 20세기부터 시작한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는 극적인 변화의 시기이다. 서구문명이 세상을 이끌던 시대이다. 산업혁명이후 물질적 풍요와 과학과 학문의 발전이 있던 시대이다. 유토피아 관념이 생겨났다. 교회도 이런 측면에서 선교를 이해했다. 선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서구화와 선교가 같은 맥락을 이어갔다.

낙관주의적 행보가 1차 세계대전으로 끊겼다. 문명국가들, 기독교국가들, 서구국가들끼리 싸웠다. 개신교, 구교, 정교회 국가들이 전쟁했다. 전쟁 후 선교에서 반성이 일어났다. 1장의 문화명령처럼 선교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반성하자고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히틀러의 행위가 기독교의 축복 속에 진행되었다. 선교를 더욱 반성하게 했다. 그때 선교는 인간화의 과정과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삶의 복지까지 간여하게 된다. 인간화의 과제를 안고 WCC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인간화의 움직임에 대한 근본주의 진영의 반대가 일어났다. 에규메니칼 운동과 근본주의와의 갈등이 있었다.

복음주의 운동은 사회적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는 운동으로 탄생했다. 원래부터 있었던 복음주의이지만 새롭게 조명되었다. 74년 대회부터 한국 대표가 참석했다. 같은 해 엑스폴로 74가 있었다. 국가와 교회의 환대 속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로잔대회의 총체성이 유신 시대에 환영받지 못하고 함구하고 있었다. 이후에 조종남, 이승장 목사가 로잔을 소개했다. 80년대 들어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간접적이며 우회적이고 사후적이다. 로잔을 수용하는 새로운 모습이다.

한국의 80년대 광주사태와 신군부 독재정권이 복음으로 잘 해석이 되지 않았다. 이때 기독교 실천가들이 로잔언약을 들었을 때 이 운동에 참여한 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8090년대 초의 몇 가지 조직화 과정을 거친다.

복음주의는 언제나 쓰였지만, 총체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8~90년 초에 시작되었다. 통일된 모습은 로잔의 모습과 같다. 전통적, 역사적 고백이 있었지만, 사회와의 상관성을 가지게 된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에 참여하는 것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새로운 현상의 결과이다. 한국형 복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적 과제

변화된 세대 속에 로잔은 어디로 갈 것인가?

과거에 이원론의 문제가 있었다. 현세를 무시한다. 지금 세대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똑같은 세계관을 이야기하지만 어떤 세계관은 강압적이고 힘으로 행사하려는 정복적인 모습이다. 일차대전 이전의 형태이다. 정복주의적 모습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봉착한 현실이다.

결론은 서로 다른 운동들과 세대가 공감하지 못한 부분은 있지만 운동장을 같이 쓰고 있다. 각자 하다가도 공유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각 영역의 고민이 한 사회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과제가 있다. 그 과제가 무엇인가를 찾자.

이어 백소영 교수가 발제하였다.

자신은 복음주의의 딸이 아니라고 소개했다. 진보진영에서 양육받았다. 로잔도 잘 모른다. 여성신학학회 회장으로서 로잔에 제안을 한다. 로잔대회에 바라는 바를 제시할 수 있겠다고 시작했다.

로잔 운동의 '우선성'과 여성의 '전문성'

로잔과 여성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한글로는 논문 하나가 나온다. 이슬람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로잔의 문헌을 통해 분석해 보았다.

로잔은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고 명시한다. 남자의 가부장 틀을 넘어서고 있다. 여성의 희생적 공헌도 인정하였다. 그러면 평등성과 다양성의 실천으로 나아가는가? 넘지 못한 지점이 있다. 소윤정 교수의 글이다. 여성 안수 부분과 여성 사역의 전문성을 제안한다. 선교현장에서 어떤 실제적인 제안을 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복음전도의 우선성이 강조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삶의 총체성이 제한되어 있다. 일상의 공간을 선교현장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마닐라 선언은 평신도들의 직업 전문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삶의 현장을 선교현장으로 보는가? 평신도 선교라 함은 일터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만들어진 것을 일터에서 전하는 것으로 수평적이지 않다. 이것을 여성 사역에 적용하면 남성 목사들이 만들어 놓은 틀을 적용하는 것인데 그러면 여성목사는 과로사한다. 근본적 의제를 가리게 된다 총체적으로 가져야 하는 자기 부양, 자기 해석이 필요하다. 여성의 자기 부양이 결여되게 된다.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총체성이나 사회적 책임을 다르게 읽는 사람을 로잔이 초대해야 한다. 특히 여성이란 부분이다. 30-40대 내부자적인 역할을 한 여성이 발표할 필요가 있다.

총체성 개념은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와 비슷하다. 주체성 확장의 방향으로 나아갔듯이 로잔의 총체성의 개념도 빠져있는 사람이 포함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마닐라는 ' 구조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후 2000년과 그 이후의 도전 운동이나 영적 전쟁 네트워크의 결정 등의 보수화가 진행된다.

화해의 우선성

보편적 복음이란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가치가 아니라 전하고 듣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출신을 물어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점을 가지고 수평적 화해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 총체성으로 나아가는 진일보가 있었다. 화해 네트, 총체적 네트워크,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 네틑워크, 등이 있지만, 남자와 여자 네트워크는 빠졌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권리가 박탈당한 자들이 많다. 여자들의 인권이 충분하지 않다. 여성들이 이야기 해야 한다.

복음이 그 좋은 소식이 되기를 원한다면, 여성의 삶에서도 총체적이고 주체로서 초청되어야 한다. 그런 한국대회였으면 한다. 한국 사회는 지난 5-6년동안 젠더 전쟁을 치루었다. 근현대사를 물려받았다면 성과 젠더가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고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 흘러야 한다. 동질 집단은 변하지 않는다. 선언만 하고 뒤로 간다. 로잔 운동의 DNA를 바꾸어야 한다. WCC 부산대회에서 한신대 전총장 채수일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이 고이니까 모든 선언은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보수화되더라. 북미와 유럽 중심으로 가더라".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면 무엇하는가? 주변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후속적으로 담길 수 있으면 좋겠다.

여자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내어주다 보면 로잔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이어 논찬이 있었다.

먼저 이성영 희년함께 토지정의센터장이 했다. 구교형이사장의 글에 대한 논찬이다. 제목은 한국형 로잔운동. 성서한국대회-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이란 제목으로 논찬을 했다.

20년 성서한국과 함께 한 고민을 공유한다. 고신교회에서 주일성수와 복음전파를 하다가 성경적 토지정의, 공평과 정의를 외치는 단체로 오기까지 고민과 성서한국대회를 만나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사회선교에 대한 신학적 체계와 세계관을 제대로 정립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로잔언약의 총체성으로 당시 기독인들이 얼마나 해방감과 격려를 얻었을지 짐작된다.

로잔 이후의 고민이 있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을 세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는 서로 사회 참여 방향은 다른가? 이것은 세대와 지역 서있는 지점의 차이가 아닌가?

둘째는 소통과 대화를 통해 접점과 협력지점을 만들어 내면 분열이 아닌 다양성으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셋째는 서로 다르면 쉽지 않는 관계가 된다. 소통과 협력은 가능한가? 이를 위해 고도의 영성이 필요하다. 사랑과 포용의 영성이 아니라 혐오와 증오만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다름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사랑을 주고받는 좋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 쉼과 성찰을 돕는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확신에 대해 여지와 여백을 두는 훈련이 필요. 교회와 수도원운동이다.

개신교의 기도원 중심 방식이 통성기도로 나타난다. 피정과 수도원 운동, 독서방식은 무한 경쟁 방식에 휘둘리지 않게 만든다. 템플스테이는 경쟁 문화와 속도에 지친 자들의 대안이 되고 있다. 간구와 강청 기반의 기도원 운동에서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무한경쟁 물질 만눙주의에 질식감을 느끼고 있다.

박현철 청어람 간사가 백소영 교수의 글에 대해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넘을까요?라는 제목으로 논찬을 했다.

2000년대 초반 복음주의 운동과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를 접하고 신앙의 틀을 형성했지만 지금은 복음주의자가 아니고 혼란과 애중이 있다. 물론 배움은 있었다.

세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로잔의 성격과 기여와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로잔언약이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전통을 넘어 기독교 전체에 얼마나 의미있는 선언이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WCC선교모라토리움선언과 인간화에 대한 고민, 그 이후의 신학적 의제와 비교해 보자. 사회참여에 중요한 기여가 있었는가?

로잔 운동의 총체적 성격이 현재 24년 로잔대회가 대형교회들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다면 이것은 로잔의 한계가 아닌가?

두번째는 얼마나 총체성을 노력했는가? 한국 진영에 대한 진정성에 질문이다. 89년 마닐라 대회 이후 한국 로잔위가 성립되고 다수 대형교회와 연결되었다. 신학교 교수회와 연결되었다. 로잔의 실체적 계승은 대형교회 그룹이다. 실천한 성과는 폄하할 수는 없지만, 담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는가? 현장은 많고 설득해야 할 대상이 많다. 비판이 필요. 누구의 세계관이 옳으냐; 삶의 진정성과 신앙적, 사회적 설득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세번째 사회선교운동은 누구를 위한 누구의 운동이었는가?

8-90년 한국사회의 과제가 그렇듯이, 민주화와 경제정의로 요약할 수 있다. 이천년대를 지면서 한국사회가 다변화하면서 이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선교운동은 아직 교회가 관심을 가지지 못한 영역이다. 소수자들을 위한 노력을 했는가?

당사자성, 교차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보이지 않으면 그들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복음주의 운동이 제국주의 시혜적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 복음주의 사회운동은 2020년대에 당사자 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복음주의사회선교운동은 이후 담론 운동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복음주의의 틀과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교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소수자들을 지향해야 한다. 운동이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을 향해 있었으면 좋겠다.

이후 질의 응답시간

첫째 질문은 우리가 너무 낡았다. 세월호 예배, 이태원 참사현장 등에 복음주의권에는 2-30대가 없다. 에큐메니컬은 많고 주최적으로 활동한다. 이번 총무인선 관련해서 청년들이 운동 주최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 권은 조용히 교회를 빠져 나가고 있다. 성서한국대회를 보고 심각하다고 느꼈다. 공론장이 필요하다. 공론장이 활성화되지 않고 빠져나간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구심점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구교형, 박현철 간사님께 질문드린다.

구교형이사장의 답변이다. 고민이 많다. 이어질 수 있을까? 새로운 변화의 과제; 담론에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맞다. 고민하지만 느끼지 못한다. 청년때 6.25를 매일 듣지만 느끼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80년 광주를 안살아본 세대에게 정치적 이슈가 공감되지 못한다. 같은 이야기이다. 이런 주제가 앞선 세대의 고민이 아니다. 왜 못느끼는가? 기성세대는 청와대가 더 느낌이 있다.

이런 공감의 차이를 기억하면서 문제들을 많이 제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왜 제기하지 않는가? 제기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해라. 자리를 만들고 싶다. 개별 주제가 중요하지만 그러나 거대담론은 살아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는가? 정치적 과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주의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고향과 집이 어디인가는 기억하자.

박현철간사가 답변한다. 선배들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지만 전체적인 아쉬움이 있다. 에큐메니컬의 상황은 거기도 전략적이기 보다는 우발적으로 진행되고 성공해서 자리 잡았다. 어떤 그룹이 특정 의제로 자리잡고 성공하면 변화가 될 것이다. 의미 성과를 만들어내는 다음 세대를 기다리는 입장이다.

다른질문자가 질문했다. 정치, 기후, 여자 의제가 중요하다. 의문이 드는 것은 거대 담론을 가지고 간 사람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교회와 예배 카타콤도 결국 사집단화가 되었다. 한국사회와 교회의 문제는 먼저 인간됨을 상실했다. 방향성도 성품적 인간의 형성과 더불어 둘째는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연합해야 한다. 명성교회 세습과 성문제 등으로 기성세대에 막힌다. 연대와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주변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반성해야 한다.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더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발제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백소영 교수의 답변이다. 세가지는 연결되었다.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지 않고 공간으로 나오지 않는다. 로잔을 넘어가야 한다. WCC는 인간화를 과제로 삼았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총체성을 담아내야 한다. 잘 전하려면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장에 들어와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화에 답이 있다. 로잔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인간화를 동의할 수 있는가? 사유할 수 잇는가? 선후배ㅡ 남녀간 적대 갈등하는가? 공론의 장은 따뜻한 품성과 귀가 있으면 만들어진다.

이상영 센터장은 자신의 고민으로 답변을 시작한다. 내가 우리 사회가 유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과연 내 삶이 세상을 유익하게 하기 보다는 잘못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아름답게 기여할 수 있을까? 무엇을 놓쳤을까?

기도원 문화와 수도원 문화의 대조가 있다. 이를 엎어야 하는가 기다려야 하는가? 사람들의 필요가 더 느껴진다. 명상 등 기독교 전통안에 있는 것이다, 유익한 툴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찰의 툴을 잘 사용해야 하겠다. 그리고 사람주의이다. 북한 사람들까지 감동을 주어야 한다. 진보진영에서 진영의 갈등을 품어내는가? 북한 사람들을 나중에 이등국민 취급하지 않을까? 이념 보다는 감동시켜낼까가 고민이다. 성찰이 된다. 나부터 성품적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로잔운동의 총무가 발언을 이었다. 로잔과 같은 좋은 기회이다. 중립적인 위치이다.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별하지 않는 운동이다. 장점의 양이 크다. 82년부터 평생을 해 왔다. 사회에 영향을 주려면 계량을 해 보아야 한다. 보건 복지부 예산은 40조이다. 한국교회는 다 모아도 8조가 안된다. 양으로 한국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조그만 섹트에 불과하다.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말자.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는 것을 선배들이 다 해결할 수 없다. 자신은 재활의학과 의사이다. 198번째. 처음에는 희귀했다. 장애자 의료가 필요하다면 누군가 하면 된다. 바로 내가 하면된다. 변한다,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된다고 일을 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누군가 하지 않으면 구조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백소영 교수는 시스템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구교형 이사장은 답변을 이어간다. 각자의 문제들에 로잔과 관련해서 제기했다.공론장에 들어오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하고 움직일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는가? 전문적인 분야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공론장의 활성화의 장애물이 무엇일까? 살면서 세월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뀐다. 자기가 하면 안되는 것을 더 이해하고 경험한다. 자기가 하는 것이 맞은 것이 아니라고 후회가 된다. 다 안다는 생각을 버리자. 확정적이라는 것을 중단하자 동에서 서로 변하는 것이다. 판단을 쉽게 하지 말고 넓게 보자. 역사를 공부하자.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만들자.

성서한국대회 20대가 60%30%로 줄었다. 선교단체가 줄었다. 20대의 소통의 방식이 다르다. 서로 소통의 방식이 다르다.

백소영교수가 답변을 한다. 공론의 장은 한 의제에 대해 모두가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2-30대때에 50대와 함께 여성 의제를 제시하였지만 우선성에서 밀렸다. 나중에 보자라고. 공론의 장을 가져보지 못했다. 공론화 되지 않았다. 공론의 장에 가도 공론화되지 않는다. 주변화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공론의 장에 초청되지 못하는 사람을 불러야 한다. 힘있는 사람이 듣고 응답해야 한다.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로잔언약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계를 알려 주어 감사하다. 24로잔대회에 큰 기대가 없다. 신화와 펌프질은 아닌가? 사회적 실천을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실천한 것이 로잔을 통해서 방어된 것이었다면 이 시대에 성도들이 더 배울 것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강경민 이사장이 발언을 한다. 우리가 근본적인 면에서 합의되지 않는 것이 있다. 에큐메니칼은 미시오 데이가 있다. 복음주의권에서 하나님의 나라이다. 둘은 거의 접합점이 있다. 어떻게 하면 세계를 복음화시킬 것인가? 그동안 전했던 복음이 좁은 의미였다.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복음화시키자. 로잔 운동의 신학적 선언이 복음주의 선교개념하고 차이가 나는 것이다. 복음화의 목표 설정이 로잔의 한계이다.

우리가 다른 전제로 이야기 하지 않는가? 세대간의 소통의 문제가 있다. 선교 운동이었기에 로잔은 시작이고 총체적인 방향을 과제로 가지고 있다. 이런 방향으로 심포지움 진행이 되면 좋겠다.

마지막 발언 발제자와 논찬자들의 발언이 있었다.

박혆철 간사는 로잔의 한계를 보자. 큰 흐름에서 WCC의 하나님의 선교와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가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세대ㅍ간의 차이와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이성영 센터장은 이문식 목사의 구로희년선교회, 산울교회 지역운동 등 의제의 실천 역량이 탁월하다. 현재와 연결이 왜 안될까? 청년들의 필요가 있는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해보자고 제안했다.

백소영 교수는 로잔을 모르기에 배우고 들으러 왔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여자가 사라진다. 공론화가 되지 않는다고 하소하였다.

구교형이사장은 로잔을 기회로 삼자. 복음주의와 로잔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로잔대회보다 그 이후의 과제가 중요하다.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해서 로잔이 복음을 어떻게 더 잘 전할수 있을까? 한국사회의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묻지마 범죄들, 후쿠시마 원전방류, 교육계 문제, 세대간 갈등들, 젠더, 소수자의 문제들이 있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후 전재중 변호사가 기도하고 모임을 마무리하다.

3차 심포지엄은 202310317시에 서울영동교회에서 로잔운동과 청년운동이란 제목으로 세 사람의 발제가 있을 예정이다.

로잔 운동에 대한 냉정한 비판,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가 참여를 통해 소리를 내도록 하라는 요청, 사회적 진보와 교회의 진보가 궤를 같이 하는 방식 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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