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춘식 목사의 여섯 번째 작품집 해설

윤춘식 6시집2023년 5월 1일간

카누에서 맞이한 그분의 선견자先見者

​ 해설 : 최세균 목사(한국크리스천문협회장계간 상록수문학 발행인)
​ 해설 : 최세균 목사(한국크리스천문협회장계간 상록수문학 발행인)

. 그는 누구인가?

윤춘식, 그는 누구인가?

그는 카누에서 주님을 맞이한 그분의 로에(Roeh 선견자)이다. 윤춘식 박사, 그의 사역은 다양하고 진지하다. 선교사와 교수, 목사와 문인의 네 사역을 따라 어느 하나 작은 것이 없다. 선교사로서 머나먼 남미 대륙 아르헨티나의 오지 인디오 선교에 30대 이후를 바쳤고 신학대학원과 해외 대학에서 학문적 깊이를 유감없이 펼쳤다. 그리고 이미 5권의 시집을 상재하여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고 평론가로 등단하여 명실 공히 한국문단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로서의 전국적이며, 전 세계의 86개국에서 복음을 증거한 활동들, 동시에 에스겔이 체험한대로 쉼 없이 탐색하는 비상한 바퀴처럼 그야말로 일인 4역의 환상적 움직임이라 할 만 하다.

그의 삶에는 내밀한 힘이 있다. 그 내밀한 힘이 카누에 오신 성자를 모시고서 어디든지 동행하는 종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폭발적 힘을 발휘하여 카누에 오신 성자의 수종자가 되게 하는 그 힘이 설교가 되고 시가 되고 저술가가 된다. 그의 눈은 언제나 통찰력으로 빛난다. 에스겔이 본 바퀴에 눈이 가득하여 만물을 통찰하듯- 네 굴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듯(1:18). 이번에 발행하는 제6시집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출간한 600여 편의 모든 시작詩作들과 연구 저술들은 모두 그 통찰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윤춘식은 하루아침에 태어난 시인이 아니다. ·고교 시절 감수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꾸준히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연마하였고, 그 성실성과 실력을 인정받아 중·6년간 문예특기 장학생으로 학비 감면 혜택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2때는 문예부장을 거치기도 했다. 고신대학시절에 벌써 대학 후배 전광식(고신대총장)과 함께 미션 시화전을 열었고, 기독교 문학의 토대 없는 보수 교단의 척박한 풍토 속에서 <로뎀 문학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스무 명의 동인지까지 낸 바 있는 그는, 신학도로서 비전공이었던 대학원진학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는 문학교육론에 관심을 두었다. 이는 한국문학은 물론 특히 현대 시학에 관한 이론적 정립을 위해 기울인 학문적 노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그러한 그가 총회로부터 해외선교사 파송을 받고 순수문학에서 멀어진 긴 세월을 복음증거와 함께 보내게 된다. 아마도... 제가 해외선교에 파송 받지 않고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더 좋은 작품이 이뤄졌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그가 술회하는 것처럼 오직 문학가로서의 길만 걸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문단의 족적이 더 뚜렷했을 것이고 독보적 문학가로 우뚝 섰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하지만 카누에 오신 성자와 같이 낯선 대륙의 현장감 있는 시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해외 선교지에서 언어와 미션 사역에 사투를 벌이는 분주한 가운데서도... 시를 외면하지 않고 틈틈이 썼다는 것은 저에게는 축복이자 기적이었습니다.

그 축복과 기적으로 카누에 오신 성자, 그 신비로운 감동은 이제 한 권의 시집이 되어 저자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풍경이 되었다.

 

2. 윤춘식, 그는 어떤 시인인가?

그가 맑고 밝고 뚜렷한 이미지들을 구사하는 측면에서 보면 다형, 김현승 시인을 닮았고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작품세계를 보면 정지용 시인을 연상케 한다. 윤춘식은 고향 산천에서 겪었던 유년의 기억을 뿌리로 하여 진지한 윤리적 휴머니즘을 시학과 신학의 접목으로 형상화한 인류문화시인이다. 그의 시작품들을 중심으로 정돈해보면, 첫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시인 둘째, 크리스천 공동체적 과제를 고민하는 사역자 셋째, 선교실천을 우선하며 현장을 먼저 생각하는 목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고전적 교양과 현대 문예이론의 성찰 그리고 정서의 훈련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러던 중에 언어에도 결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결을 순순히 따라가는 시 쓰기를 하고 있다. 그러한 그가 삶의 텍스트로 삼게 된 성경의 시편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접한 감흥의 모델이었고 세계와 인생 그리고 문학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렌즈가 되었다. 다음은 구약 시편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시편에는 저자들이 하나님을 찬양만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찬양은 물론 탄원, 감사,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고난과 저주, 지혜 등 참으로 다양한 장르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열강에 둘러싸여 지리적으로 불리한 가운데 침입, 지배당하면서 영육이 갈급함에 처해 있었습니다. 나아가 종교적 탄압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요. 내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명 속에서 저는 고난의 정체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진정한 매력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현실의 고통 가운데 탄식하면서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고 결국 찬양과 감사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저로 하여금 삶과 신앙과 자연을 재조명하게 했습니다. 특히 고난 속에서도 결국에는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의 삶에서 상황을 관조하며 시편을 읊조렸던 넉넉함, 다윗의 이러한 격조 있는 신앙과 기록의 문화는 저에게 세계와 인생 그리고 문학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렌즈가 되었습니다. (2003년 들소리 문학상대상 수상 인터뷰에서)

그는 시상詩想의 원천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시인들마다 시적 영감과 발상을 떠올리는 매개물이 다릅니다.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시인인 실러는 상한 사과 냄새를 맡고서야 시를 썼다고 합니다. 그의 서랍 속에는 언제나 부패된 사과가 들어있었다지요.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는 시를 쓰기 전 먼저 손을 씻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감각보다는 고향 산천에서 겪었던 유년의 기억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푸르른 고향의 강산과 산하, 언덕과 숲 등 행복했던 유년의 필름에서 시가 출발합니다. 단 이러한 기억에 의한 시작詩作이 관념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북부에 현존해 있는 인디오들의 모습에서 젖어오는 고향의식이 그대로 시적 이미지로 견인되는 삶, 그는 한국문단에서 항상 타민족을 향한 문화의 화해자로 소개된다. 그의 시에는 인디오 문화에 대한 명상과 통찰이 배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인류문화시인이다.

 

3. 그의 시는 무엇을 노래하는가?

(1) 카누에 실려 오는 구원의 노래

카누하면 수상 스포츠용 빠르고 멋스러운 유선형 배가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열대우림 원주민들에게는 밀림을 헤치고 고단한 삶을 나르는 삶의 일환이다. 때때로 고깃배도 되지만

정글 오지에서는 물살이 거센 상류와 평화로운 하류를 오르내리는 이동수단이 된다. 나무껍질이나 짐승의 가죽, 또는 갈대나 통나무 등으로 만든 다분히 원시적인 작은 배로 시작하여 지금은 모터를 장착한 현대식 교통수단이 되었을 이 카누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착잡하고 애틋하다. 16세기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삶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숨을 곳을 찾아 들어와 모질게도 살아왔던 정글. 이제 500년이 훌쩍 넘어 정글 속의 강을 끼고 생활의 수단으로 살기 위해 만들었을 그들의 카누가 어느 날 예배당 지을 흙을 싣고 강을 건널 때 그것이 현실에 흐르는 십자가의 눈물로 보였으니.

엠베라 갈릴레아 공동체는

별빛처럼 평안하네

풀잎 하나라도

저들의 것이 아닌 게 없건만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땅에

숨을 곳은 거친 정글밖에 없었는가

 

수십 미터 나무들의 키와

아름드리 안을 수도 없는

열대식물의 근육이며

수십 길 얽히고설킨 밀림의 신경들...

 

엠베라 부족민이 모인 성전

블로크 벽을 지나 모퉁이엔 돌이 없구나

거기 견고하게 놓인 땀과 단단한 노동력

부족민 형제들이 카누로 흙을 실어 나른

단순한 도강에

흐르는 십자가의 눈물

 

정글은 열대에서 숨 쉬는 보화

문을 두드리면

찾는 자의 눈동자에 열리는

초록의 열매와

흑갈색의 뿌리와

자연으로 먹고 마시는 무공해 창고

 

카누를 타고서

발사강 출렁대며 모터소리 번지면

인디오의 영혼에 거듭나는 메시아의 자비심

하늘엔 별들이 반짝이고

창공엔 더운 공기 흐르지만

지상에 외로이 살아있는 순례의 마음엔

 

가랑비 젖은 별빛이

물길 따라

촉촉하게 목적지를 비춰주네 <1, 카누와 별빛> 전문

 

열악한 만큼 쌓여있을 원주민들의 땀과 눈물을 싣고 사나운 환경과 싸워 온 카누. 살기 위해 그들은 강물 위에서 더 사나워야 했을 것이다. 밀림 속 강물을 헤치며 달려오는 카누의 모터 소리가 오죽하면 사납다 했을까. 사납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또 하나의 장치가 된다. 모터소리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부활을 대신하는 종소리이다. 그 언약의 소리는 적도를 지나 열대의 강물을 거슬러, 작은 카누에 찾아오신 성자 예수의 모습으로 환치된다. 이 은유로 말미암아 어둡던 정글이 환해지고 초라한 카누가 훤칠해지는 걸 본다. 화이트 가문비나무처럼.

 

고난 받은 하루

뼈저린 창 자국 상처가 저물면

아리마대 요셉은

무덤을 정돈한다

 

누구도 머물고 싶지 않은 캄캄한 돌무덤에

환한 수의를 입은 유대인 청년

갈기갈기 뼈가 어그러져도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킨 핏빛의 기적

 

천사들이 돌문을 열었던

여호와의 아들이 무덤에서

깨어난 부활의 아침이여

 

고통의 주간이 지나면

영광스런 교회 헌당식의 새 시대 구령...

엠베라 부족민은 카누를 타고

파나마 가장 동쪽

발사강 거슬러

갈릴레아 공동체로 올라가고 있었다

 

섭씨 41도 살갗을 태우는 정글엔

낡은 카누의 모터소리 사납게 울려

부활의 종소릴 대신하네

 

뜨거운 정글 땅끝까지 선포된 언약은

복음을 위해

동역을 위해

화이트 가문비나무처럼

세마포에 생명으로 물들이셨네

 

적도를 지나

열대의 강물

작은 카누에 찾아오신 예수 <1, 카누에 오신 성자> 전문

 

작은 카누가 떠 있을 강가에는 수영을 하는 아이들이 보이고, 파나마의 발사강 강변으로 빽빽한 숲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어여쁜 새들이 손에 잡힐 듯 정겨운 곳이다. 습도가 높은 만큼 높게 자라는 나무들과 날씨가 더운 만큼 시원한 그늘이 있는 곳, 초록 열매가 익어가고 흑갈색 뿌리가 자라는 그 곳을 윤 시인은 무공해 창고라 썼고 숨 쉬는 보화라 노래했다. 그곳이 비록 다리엔 갭(파나마와 콜롬비아 국경지대의 간격)이라 부를 만큼 험한 산과 늪의 사각지대로서 반군세력들, 밀수꾼, 마약생산자 강도, 도망자들의 은신처로 만신창이가 되었다지만, 시인은 카누에 오신 성자를 통하여 그곳 전체를 부활시키고 있다. 그곳 인디오의 영혼을 노래한 <달과 카누>에서는 그들을 아무도 억누를 수 없는 영혼이라 했고 인디오의 서러운 강물엔 눈도 내리지 않는다고 읊조렸다. 윤 시인은 인디오, 그들의 얼굴에서 격조를 보았고 그 격조가 달빛 속의 카누를 닮았다고 비유했다. 카누에 실려 온 구원의 노래가 아닌가!

 

영혼을 사랑해 보았는가?

인디오의 영혼은 아무도

억누를 수가 없다 어둠마저도...

 

카누에 부딪치는 저 물결

부서지고 부서지고

발사강에 들국화송이처럼 별빛 튄다

인디오의 서러운 강물엔

눈도 내리지 않는다

 

풀잎 하나에도 파편은 있어

인디오의 열정이 들꽃 속에 휩싸이고

토양 한 줌에도 그루터기는 살아있다

 

하늘은 달무리로 돋아나

강물엔 카누만이 따가운 여름밤을 흐른다

너그럽게 물거품을 내어 미는

달빛 속의 카누

격조 높은 인디오의 얼굴 <1, 달과 카누> 전문

 

그의 시가 노래한 첫 번째 담론은 구원이다.

 

(2) 장엄한 안데스산맥 현장의 노래

안데스산맥은 그 길이가 무려 7,000km에 달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길게 뻗은 산맥의 이름이다. 남아메리카 서부 해안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평균 고도 4,000m를 자랑하며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7개국을 아우르고 있다. 이 거대한 산맥에는 생태계의 생존하는 것들이 많다. 그 중에 비탈진 산지의 노래 소리가 있는가 하면, 햇빛으로 반사되는 묵직한 우수憂愁의 소리도 있고 너르고 긴 고원의 울음소리도 있다. 소리의 주인공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화자는 당연히 사람이다. 1,600미터 고지보다, 황금이슬이 맺힌 태양의 나무보다, 하루 US4$를 벌려고 까페콩 대신 가지 끝에 매달린 아이들, 그 현장의 노래는 장엄하고 숙연하기만 하다.

(전략)

야마, 과나코가

좁고 비탈진 산지 농장의 노래라면

비쿠냐, 알파카는 너르고 긴

고원의 울음소리

 

안데스산맥 인디오의

가파른 가르마엔 우수憂愁를 빗는

목장의 묵직한 소리들이

햇빛으로 반사된다 <2, 미완성 안데스 1> 전문

 

(전략)

소년은 자신 보다 더 소중히

까페나무 뿌리를 밟으며

까페 콩을 따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런 경건한 땀방울이

원두에 배어나 까페의 잔이

더 향기로움을 잊지 말라 <2, 까페 나무 1>에서

 

황금 이슬 맺힌

신비한 태양의 나무에

금빛 피부를 가진

아이가 목을 매고

나뭇가지 끝엔

까페콩 대신

황금 캐는 아이들이

줄줄이 매달렸네 <2, 까페 나무 2>에서

(후략)

 

안데스산맥,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이 산맥의 품에 안겨 산다. 그중에는 이름 모를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별도 있다. 꽃들 중에는 소경이 없다고 그는 노래한다. 맑은 눈 오롯이 열어 눈동자로 노래하는 모습이 선연하다. 그러한 꽃들이 밤에는 별이 되고 하늘을 밝히고 그 별빛의 조명을 받으며 정글에 묻혀 사는 형제들을 위하여 울릴 수 있는 기도는 애처롭게도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였다. 이불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엠베라 부족의 서러운 정글에서는 더워하며 살기를 기도했는데 안데스 고지의 쌓인 눈 속에서는 추워하며 살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아멘의 칼날을 갈기 원한다. 쉽게 터져 나오지 않는 아멘의 현장이기 때문이리라. 현장은 언제나 이처럼 엄중하고 삭막하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현장 가운데 안데스산맥이 숨 쉬고 있으며 그 현장을 지키는 비결로써 기도를 택한다. 윤 시인은 마침내 주님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나는 비상구 쪽으로 갑니다

 

천국 창고를 여는 열쇠는

내게 맡기셔도

기도하는 노동을 통해

우레와 같은 찬송이

우러나오는 단단한 숫돌에

아멘의

칼날을 갈게 하소서 <2, 기도 1>에서

(후략)

 

하나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2, 기도 2>에서

(후략)

 

그의 시가 노래한 두 번째 담론은 선교 현장이다.

 

(3) 슬픔이 빚어낸 기쁨의 노래

슬픔이 과연 기쁨을 낳을 수 있을까. 시인은 슬픔 속에 감추어진 기쁨을 보았다. 그래서 슬픈 망고가 낳은 기쁜 망고를 선보인다. 그가 6년 터울의 지난 다섯 번째 시집 슬픈 망고에서 망고는 스스로 익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굳은 몸 시퍼런 피부를 후려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익을 수 있었고, 태양의 빨랫줄에 걸려 운명인 양 대지의 열기를 견뎌야 하는 슬픔의 존재였다. 그늘처럼 우뚝 선 심장으로 누군가의 뜨거운 밥이 되어야 하는 그 슬픈 망고에 은하수 줄기가 내려와 별무더기 꽃으로 피었고, 햇살이 내려와 가지 끝 푸르런 희망, 화려한 제왕의 기쁨이 되었다.

 

간밤에

은하수 줄기가 내려와

화급한 별 무더기

망고꽃이 피었네 <3, 기쁜 망고 1>에서

(후략)

 

(전략)

적막한 숲에서 깨어나

어쩌다 문명을 맛본 이후

세상 제왕의 가슴 위에

올려진

화려한 기쁨이 되었네 <3, 기쁜 망고 2>에서

 

기쁨을 빚어내는 슬픔의 열매, 망고는 어떤 과일인가?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열대 과일 중 하나다. 일본에서도 기호도가 높아 언젠가 도쿄에서 태양의 타마고()’라는 망고 2개 값이 40¥(한화 약 410만원)으로 경매장에 나왔다는 정보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기호식품으로 회자되는 맛의 과일, 과일 중의 여왕.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걸린 밥이요 일상의 벌이었기에 슬픔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얻어내는 선물로서의 삶, 곧 기쁨이었다. 이 슬픔과 기쁨은 탈문명의 메시지를 담고 보다 처절한 명암으로 작동하고 있다. 페이지 없는 역사책이 되어 새들의 둥지가 되고 천국이 되어.

 

열대 정글의 망고는

자연 은총입니다

망고는 페이지 없는 역사책

그것은 인류입니다

 

망고가 정글 신문입니까?

망고가 그 나라 재림하는 환상입니까?

고급 경매장에 나온 붉은 태양의 알입니까?

 

열대의 망고는

인디오 가족들의 밥상입니다 <3, 망고의 철학>에서

(후략)

 

망고는 꽃필 때

열정의 설렘을 어찌할 줄 몰라

평생

한 번 절정에 오른다 <3, 망고꽃>에서

 

그가 노래한 세 번째 담론은 기쁨이다.

 

(4) 산에서 다듬은 믿음과 소망의 노래

윤 시인은 <치악산>에서 산은 산 끼리 / 높은 뜻을 품고 산다고 선언한다. 산으로 산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고 산의 높이로는 험난한 길이지만 휘황찬란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산은 존재하는 법을 알기에 산끼리 품은 높은 뜻을 그 무엇에도 빼앗기지 아니하고, 쓰러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산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높은 뜻이 믿음일진대 그 믿음은 당연히 산 같은 믿음이 되겠다.

 

산은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는 지형이다. 오르막의 정상에는 두 가지 명령어가 있다. “올라오라!” “내려가라!” 시인은 주목한다. 그리고 실행한다. <산행>에서는 길을 만들어 오르고 <>에서는 허리와 목을 굽히고 내려온다. <치악산>에서는 가파른 등허리를 돌아 오르고 <산정에 오르는 이유>에서는 까맣게 익은 햇볕을 품고서 비로소 어른이 되어 내려온다. 그리고 <>에서 고백한다. 오르며 내리면서 창조를 배우고 창조주의 품에 안긴다고.

 

산은 산 끼리

높은 뜻을 품고 산다

태백산맥의 전설을 일깨워

치악의 숭고한 꿩 한 마리

백두대간에 날고 있구나

 

가파른 등허리를 돌아

오르고 다시 오르는

수직 사다리 완고한 바윗길

 

거친 돌팍 위

암벽도 가지런히 두 무릎 짚고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스페인어 가능법의 어려운

불규칙 동사를 외우 듯

고지마다 리듬이 바뀌는

돌계단의 엇박자들...

 

산그늘은 절벽 높이

말등바위를 점령하고

순례객 사무치는 발목 아래로

초여름 해가 지네 <4, 치악산> 전문

 

허리를 낮추고

몸을 떠나 위로 쳐다보면

, 본향의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비로봉이 보여주는 것

하늘은 무척 높다는 것

산정은 손 내밀어

오를 자를 부른다

 

멀고 험한 낙타의 길에

그대도 내려가는 것을 배우라고... <4, 치악산 비로봉>에서

(후략)

 

가슴속 다 토해 내고

까맣게 익은 햇볕을 품고서

비로소 어른이 되어

산정을 내려올 수 있으려니... <4, 산정에 오르는 이유>에서

(후략)

 

(전략)

정상에 오름만이

목적이 아니라

오르며 내리면서

창조를 배웁니다

창조주의 품에 안깁니다 <4, >에서

 

성경에서의 중요한 사건은 대부분 크고 작은 산에서 이루어진다.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무지개 약속을 받았고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산상수훈이 선포된 곳도 산이었고 제자들이 변화산 특별체험을 한 곳도 산이었다. 떨기나무의 호렙산, 십자가의 갈보리산, 언약의 시온산... 성경에서 산은 여호와를 깊이 체험하는 장소이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구원의 상징이다. 시편기자는 산을 향해 눈을 들리라 했고(121: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으며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실 것이라 했다(125:1, 2). 평소의 산행과 강원도 명산의 등정에 삶의 철학을 담은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시인은 성경의 산에 안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뚜렷이 보여주었다. 올라가는 순종의 믿음과 내려가는 겸손의 믿음을. 그가 신의 섭리를 관조하며 노래한 산정은 그의 내면세계의 진면목이며 신관神觀을 형상화하고 있는 믿음의 시적 파토스(Pathos)라 하겠다. 이러한 감성적인 호소는 <너도 바람꽃>의 새싹을 바라보며 더욱 간절히 표출된다. 비록 짧은 시이지만 얼음 속에서 박차고 나오는 꽃을 대면하는 형식으로 인류가 코로나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고 있다.

 

너도 꽃이거늘

지나는 초혼의 봄바람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면하리

 

험준한 죽령竹嶺 너머 동면의 어름골

순한 꽃술의 톱니로 자르고 뚫어

재난의 땅에 봄을 외치니

 

사람마다 면사포를 두른

절박한 호흡에도 겸허한 앞니를

지상에 피어 올리며

기도의 혀를 우슬초에 씻은

너 야생의 눈부신 제사장 꽃이여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과

험난한 시국의 감염병을 네 봄꽃의

하얀 바람결에 죄다 실어가 주렴 <4, 너도 바람꽃> 전문

 

그의 시가 노래한 네 번째 담론은 믿음이다.

 

(5) 그리움으로 만나는 문화인류의 노래

평생을 교육가이며 선교사로 헌신한 윤 시인의 문화인류학적 관점은 당연히 글로벌한 범위를 형성하고 있겠지만 그 뿌리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원초의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본다. 5부에서 시골, 물새, 목화, 새벽, 과원지기, 뻐꾸기, 단풍, 추석, 군고구마, 열무 그리고 어머니 등의 소재가 말해 주듯이 그가 문화인류학적으로 그리워 한 대상들의 정서는 다분히 향토적이다.

 

<어머니>에서 그의 그리움은 나이 들지 않는 품이고 <뻐꾸기의 노래>에서 그의 향수는 목을 간질이는 남은 노래 소리이다. ‘가지 끝 / 황토의 날개로 / 피어나는 / 그리운 나비 떼로서의 <단풍>이나, ‘유년의 옷섶에 굵은 느티나무처럼 자라나 있는’ <시골의 노래> 속에서 그는 그리움이 어떻게 문화인류학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어머니는 나이 들지

않으신다 <5, 어머니>에서

(후략)

 

해 지는 숲 위에

저녁 빛은 다시

저무는데

뻐꾸기 남은 노래 소리

목을 간지럽힌다 <5, 뻐꾸기의 노래>에서

(후략)

 

가장 우직한 껍질에서

가장 부드러운 의상을 토하는

흙과 씨앗의 자애로운 에너지

 

너희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 좋은 면화가 되어

흙과 씨앗의 조화를 이뤄

공기 중에 강물 가운데 <5, 목화송이 되어>에서

(후략)

 

계곡은 더 이상

푸른 빛깔로

질주하지 못하네

발목에선 어언於焉

단풍잎이 흘러내린다

 

가지 끝

황토의 날개로

피어나는

그리운 나비 떼여 <5, 단풍>에서

(후략)

 

(전략)

내 유년의 옷섶에

굵은 느티나무처럼 자라나 있는

마음 속 외갓집 동네

농부들, 목수들, 석공들

삯바느질하는 시골 마을

대지에 묻어나던 어머니 품,

흙의 내음이 나를 부르고 있기에 <5, 시골의 노래>에서

 

한편, 소백산의 <죽령>과 태종대의 <수국 페스티벌> 등에서 보여주는 환희의 열린 정서는 그리움의 줄기가 세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상도 등지고 / 단양으로 돌아서니 / 로스 안데스 산맥을 넘어 / 칠레로 가는 길이 / 저으기, 여기에 있었구나’ -<죽령>에서

경상도와 충청도를 오가는 발길이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로 이어지는 인류적 발걸음, 어쩌면 이것이 문화의 본류이고 믿음의 행로가 아닐까 싶다. ‘태종사太宗寺 경내에선 / 흙이 꽃으로 피고 싶다 / 수국은 하얀 꽃대 위에 / 물결 같은 기와집을 짓는다’ -<수국 페스티벌>에서

 

꽃으로 피려는 흙의 기도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에게 향기가 되어주고 싶고 어느 곳엔가 아름다움이 되고 싶은 소원에서 인류애는 출발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꽃대 위에 물결 같은 기와집을 짓는 페스티벌이야말로 문화인류학적 축제로 승화된 매우 탁월한 발상이며 지성의 이미지이다. 이 페스티벌은 <신년의 아침>에서 눈부신 1월이 되고, 꿈꾸는 아침밥이 되어 열대에서의 <기쁜 망고>와 이어진다.

 

말없이 맞이하는

눈부신 1월을 보세요

어제 오갔던 길이건만

오늘은 새 길이 됩니다

 

지나간 날은 기억 속에 얼어붙고

새해는 눈 내리듯

시간이 펄펄 녹아내리며

1월의 농토에 봄을 심겠습니다

(중략)

 

희망의 심장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얀 귓불들 어루만지며

나의 가족을 위해 ㅡ

내가 속한 교회를 위해 ㅡ

꿈꾸는 아침밥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5, 신년의 아침>에서

 

(전략)

겨울나무는 앉아서 기도하지만

나뭇가지는 언제나 비상하고

새해新年가 밝아오면,

비둘기 날갯짓과 나무들의 발목은

더욱 굳세어지리라

 

대지는 춥고 삭막해도

세상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장작불 희망을 부르고 있다 <5, 새해맞이>에서

 

그의 시가 노래한 다섯 번째 담론은 문화인류이다.

 

4. 그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시적詩的 메시지는?

 

시어의 선택과 구성은 만물을 바라보는 심안을 통해 얻어지는 섬세함의 결과들이다. 그의 시에는 언어를 섬기고자 하는 명징한 이미지들로써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오로라>에서 우주의 경이로움을 선사하며 천체 서정이 찬탄으로 향상된다.

 

주위는 초록

다슬기 차림으로 불타오르고

나는 하얀 설원 위에 춤추는

따뜻한 복사꽃을 보았다

 

폭풍 속에 날아온 학

족두리처럼 너울거리는

천사들의 영혼

완벽한 어둠을 몰아내고

꼭두새벽 이전에야 승전가

높이 부르는

불수레의 목소릴 듣는다 <서시, 오로라>에서

(후략)

 

<목화송이 되어>에서도, 가장 우직한 껍질에서 / 가장 부드러운 의상을 토하는 / 흙과 씨앗의 자애로운 에너지 / 라고 목화(식물)를 관조하는 정교한 자각으로 일관한다. 비유와 이미지들이 이리도 선명한 까닭은 언어를 결코 가벼이 대하지 않고 성실하게 교제하는 저자의 섬김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황무지 태양 아래서

하얀 솜을 틔우는

이름 없는 목화송이

 

가장 우직한 껍질에서

가장 부드러운 의상을 토하는

흙과 씨앗의 자애로운 에너지

 

너희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 좋은 면화가 되어

흙과 씨앗의 조화를 이뤄

공기 중에 강물 가운데

 

세계와 십자가 너머

천만 영혼들 위해

무명옷을 지어주며

몸 바쳐 일할 수 있으면... <5, 목화송이 되어> 전문

 

<히아신스><가을은> 그리고 <물새>에서도 언어를 섬기는 모습이 면면히 드러난다.

 

(전략)

밤의 한 조각

어둠에 버려져도

낮의 한 조각

하늘이 달려와도

 

불같은 겨울

냉랭한 여름철에도

숨 막히는 아침나절

생명의 꽃은 피어나리 <3, 히아신스 >에서

(후략)

 

물새니까 그래

물새 둘이 주고받는 목소리가

교회당 종소리를 닮는다

(중략)

 

너흰 어쩌면 그렇게도

목소리가 곱니?

햇살이 아직 부서지기 전

네 날갯짓 이념이 기도가 되었으면... <5, 물새>에서

 

이렇듯 윤 시인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언어 의식의 시행詩行은 예사롭지 않다. 따라서 그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가장 큰 시적 메시지는 언어를 섬기는 자세라 하겠다. 언어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늘 이 부분에서 절망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그가 피력한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이 아득한 지난날의 기억이었으면 참 좋겠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언어를 휘어잡아야하며 또한 시시때때로 강조도 해야만 하는 설교자도 되고, 동시에 언어를 졸졸 따르며 섬겨야 하고 언어의 결을 순순히 따라야 하는 시인이 될 수 있겠는가? 통상 설교자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우리>라는 말에 길들어져 있다. 하지만 시인은 시 안에서 <우리>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시인은 자기 자신의 혼자만의 세계도 풀어내기 힘겹다. 내재율과 외형률에 있어 운율의 전문가가 되기란 더욱 어렵다. 더욱이 설교자라면 어떻게 궁극의 목적성 없이 설교문을 작성할 수 있으랴.

 

목사와 시인은 모두 언어를 통하여 의사를 표현하는 메신저이지만 양립할 수 없는 원리 앞에 서 자리를 잃을 때가 많다. 전혀 다른 언어사용법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언어를 마구 쏟아낼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많은 영성 작가들은 할 수 있으면, 시인들과 자주 만나라고 권유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선견자(roeh 로에)들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보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들은 허공을 잡는 이상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산문에서는 정보를 얻고 지식을 획득하지만, 시를 읽을 때는 전혀 다르다. 너무 서둘러 말하려하면 작가들은 왜곡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시는 독서의 속도를 늦추게 하고 가끔씩 멈추게 한다. 다시 말하면 읽었던 시를 다시 읽게 만들고 다시금 의미를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꿈처럼 아련한 추억의 자리에서 의식의 가장자리를 맴돌게 했던 시들이 있다면서 윤 시인은 말한다. 어떤 장벽에도 막히지 않고 거침없이 달려가는 세월마저도 잠재우며 사명에 불타던 한 목사가 있었다. 그리고 모국어와 외국어에 집중하며 감성의 심전을 기경하고 서정의 이랑을 파던 시인도 한 사람 있었다. 어쩌겠는가? 아름다운 시어들이 활어처럼 펄펄 뛰며 살아있는 영성과 지성, 감성까지 다 구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인의 길을 정녕 나는 가고 있는가?” 길이 진정으로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설교자와 시인의 길, 이 고민의 끝에서 그가 던지는 질문은 곧 답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려 하는가?”

 

활어처럼 펄펄 뛰는 언어로써 구도자(목사)의 길을 가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야하는 길임을 아는 시인은 치열한 작시作詩를 결코 끊지 않고서 묵묵히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시편의 잠재력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경 속 시편에 관한 윤 시인의 다음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천년 동안 시편에 미술이 동반되지 않음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히브리어 시에 그림이나 사진이 없음은 당연하다. 시편의 로고스에는 이미 찬송하며 예배하는 내면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대가 시를 짓는 예배자라면 본서의 독서 중 시인이라는 말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시는 언어의 승부일 뿐 이름 앞뒤에 붙어 다니는 붙박이가 아니다. 그렇지만 시편은 히브리인이 노래하는 소망의 가치이자 신앙고백적인 가사이며 삶의 운율이다. (그의 저서, 시편의 표현과 이미지예영 커뮤니케이션 2022에서)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시적 메시지로서 여운이 있기에 옮겨 놓는다. 그는 시편을 가리켜 노래하는 언어라고 정의한바 있다. 해설자가 제6집의 시를 읽으면서 그를 향해 시적 선견자(로에)라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다. 오랫동안 슬픔의 망고와 기쁨의 망고를 노래한 그가 다음엔 어떤 망고를 선보일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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