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드 브레와 같이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할 것

강병훈 박사는 지난 10월 31일 현지시각 오후 3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신학대학교에서 “귀도 드브레의 성찬론 : 사역과 신학을 중심으로”(Guy de Bres on the Lord’s Supper As the Focus on his Ministry and Theology)라는 주제로 박사논문 방어식을 치뤘다.

이 박사 방어식은 학교명을 캄펜 신학교(Theologische Universiteit Kampen)에서 위트레흐트 신학교(Theologische Universiteit Utrecht)로 공식적으로 변경한 후 위트레흐트 학교 본관에서 처음 있었던 방어식이었다. 강병훈 박사는 위트레흐트 신학교 건물에서 박사학위를 최초로 받은 역사적인 학생이 되었다.   

학위를 수여하는 지도교수 이어릭 드 부어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지도교수 이어릭 드 부어 박사

방어식은 총장 조지 하링크 박사의 사회로 시작되었으며, 강병훈 목사의 논문 발표가 10분 가량 이어졌고, 공격측 질문자들이 질문을 던졌고 강병훈 박사의 대답이 이어졌다. 문답시간이 종료된 이후, 강병훈 박사는 짧은 박사과정 연구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할 때에는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후 총장, 지도교수 및 부 지도교수, 공격측 질문자들은 잠시 자리를 비웠고, 10분여 시간이 흐른 후 박사학위 수여가 결정되었다는 총장의 발표가 있었다. 지도교수 이어릭 드 부어(Eric de Boer)교수는 학위증을 전달하고 강병훈 박사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드 부어 교수는 강병훈 박사 및 가족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귀도 드 브레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연구작업을 계속할 이어갈 것을 바랬다.

총장 조지 하링크(George Harinck) 박사는 “위트레흐트로 학교를 이전하고 교명을 바꾼 이후 학교 건물에서 첫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이가 강병훈 박사였다. 오늘의 방어식은 우리 대학교가 국제적인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는 바를 나타내 주는 상징적인 행사였다”라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히며, 강병훈 박사가 위트레흐트 신학대학교의 첫 박사 학위 수여자가 되었음을 확인해 주었고, 한국과의 더 많은 학술적 교류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도교수 이어릭 드 부어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강병훈 목사는 비 유럽 한국어권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네덜란드어 및 프랑스어, 라틴어를 잘 공부하여 아주 훌륭한 논문을 작성했다”라고 평가하며, “강 박사의 논문은 아주 거대한 성취이며 학교 논문 심사기구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고, 향후 귀도 드 브레를 연구하는 국제 학계에서 편집위원 등으로 자연스럽게 활동 할 것을 기대한다”며 좋은 동료가 생긴 것에 대한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미 로테르담사랑의교회에서 4년간의 목회 경험이 있는 강박사에게 드 부어 교수는 “먼저 목사로 어느 정도 활동하길 원하고, 이후 교수로 헌신하길 원한다”고 “아주 좋은 교회사 교수 후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 박사를 추천했다.

내년 6월 은퇴를 앞둔 에릭 드 부어 교수와 강병훈 박사 가족들
내년 6월 은퇴를 앞둔 에릭 드 부어 교수와 강병훈 박사 가족들

본 객원기자는 2023년 11월 2일 현지시간 오후 7시 강병훈 박사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 논문 발표에서 처음 북한의 핍박받는 지하교회 성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강병훈 박사: 논문은 북한 교회랑 상관이 없습니다. 올해 5월, 네덜란드 오픈도어 선교회에서 박해를 받은 목회자였던 귀도 드 브레를 연구하는 제게 강의를 요청했습니다. 귀도 드 브레와 북한성도들을 엮어 이야기를 해 주길 바랬습니다. 그 경험을 논문 발표 서두에 언급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신대원 시절 안인섭 교수님의 수업 시간에 매 수업마다 처음 10분간 북한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사를 전공한 한국교회 목사라면 박해 중에 있는 북한 교회에 대하여 적어도 목소리는 내야겠다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귀도 드 브레를 연구하면서, 앞으로 어떤 외침이 있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기자: 귀도 드 브레의 성찬론에 대해서 발표하셨습니다. 독자들을 위해 그의 성찬론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강병훈 박사: 귀도 드브레의 성찬론은 한 마디로 육체적 임재설의 대항하는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드 브레는 화체설을 반대했고, 칼빈의 성찬론을 엄격히 반대하는 강성 루터파들의 공재설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적 임재설을 부정했던 칼빈과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드 브레는 성찬이 단순히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소위 “기념론”에 반대 의견을 표했습니다. 성례에서 예수님께서 임재하시는데, 영적으로 임재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영적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기자: 그렇다면 드 브레의 성찬론은 단순히 칼빈의 재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병훈 박사: 그렇지는 않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뿐만 아니라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했지만, 드 브레는 그 부분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드 브레에게 있어 강조점은 성도들이 ‘우상숭배’적인 성찬을 피해 오염되지 않은 성찬을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드 브레에게 중요한 것은 성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잡혀가 심문을 당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바른 성찬론으로 무장을 시켜줄 수 있을까”에 있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대체 드 브레가 대적했던 ‘우상숭배’적인 성찬은 어떤 성찬이었습니까?

강병훈 박사: 그에게 로마 카톨릭에게 미사는 곧 우상숭배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육적 임재설이라고 할 수 있는 화체설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실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찬 후 남은 떡을 버릴 수 없고 보관했습니다.

사람들은 보관된 떡에 경배를 했습니다. 떡이 지역을 돌면 사람들은 거기에 절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떡으로 사람을 치료하려 했습니다. 실질적인 떡 숭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완전한 제사를 드렸고, 마지막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마지막 제사를 모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제제물 되심은 이 교회에서 무너졌습니다. 바로 성찬을 통해서 말입니다.

기자: 그렇다면 드 브레는 어떻게 이런 것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나요?

강 박사: 동시대에 살았던 칼빈은 로마 카톨릭교회에 동의하지 않지만 박해가 두려워 여전히 로마교회의 성례에 참석하는 자들을 니고데모에 비유하여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의 미사를 우상숭배라고 가르쳤습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도 하나님께 죄짓는 것이라고 가르친 칼빈의 글들이 이웃 국가들에서 회람되었습니다. 강제적으로 미사에 참석해야 하는 지역에 사는 신자들에게 칼빈은 “순교를 하던지 도망을 가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드 브레는 20대에 칼빈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루터는 미사를 강요하는 지역에 살 경우에, 로마교회의 성례에 참석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드 브레는 미사를 우상숭배로 여겨 그의 고향과 조국 ‘저지대’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런던에서 다른 개혁파 신학자 및 성도들을 만나 미사는 곧 우상숭배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자: 그래서 드 브레는 핍박을 피해 계속해서 런던에 머물렀나요?

강 박사: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1552년 자발적으로 고국의 성도들을 섬기고자 다시 귀국 했습니다. 이후 드 브레는 1556년-1559년 로잔과 제네바에서 종교개혁가인 칼빈과 베자에게 신학을 배웠습니다. 신학을 배울 때에도 오직 자신의 성도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드 브레는 가정을 꾸려 프랑스의 스당(Sedan)지역에서 궁정목사로 섬기고 있을 때에도 1566년에 다시 자신의 성도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미사를 거부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임에도 드 브레는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성도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드 브레는 고향으로 복귀한 후 1년 뒤 순교를 하고 맙니다.

기자: 정말 드 브레는 특별한 사람이었군요. 벨직 신앙고백을 작성한 것 보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강병훈 박사: 저는 개인적으로 드 브레가 너무 좋은 목사였다는 점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드 브레는 조국의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목숨을 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귀도 드 브레를 연구한 사람으로 이런 것을 항상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드 브레는 조국의 성도들을 생각하고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항상 자신의 성도들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기자: 그렇군요, 다시 성찬으로 돌아가서 개인적으로 성찬에서 은혜를 누리시는지요?

강병훈 박사: 감사하게도 어릴 적 모 교회 목사님께서, 성찬시에 떡과 피가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개혁신학이 가르치는 영적 임재나 영적 양식의 개념은 몰랐지만, 예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인지, 내가 지금 잘 믿고 있는지,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찬에 참여할 때 위로와 확신을 얻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내가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제 떡과 포도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통해, 주께서 내 영혼을 먹이시고 기르시며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와 더불어, 성찬을 준비하는 유익도 누리고 있습니다. 개혁파 교회에서는 성찬 전에 심방 등 성도들의 삶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개혁파 교회들은 고전 11장을 인용하며 주의 몸을 분별하고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육을 했습니다. 성찬 준비는 거룩한 삶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기자: 많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한국에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한국에 돌아가서, 성도들, 우리 교회, 우리 교단(합동)의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시작할 때에는 신학교에서의 교수사역만이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귀도 드 브레를 통해 목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 로테르담사랑의교회에서 4년 간 사역한 경험도 목사가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 주었습니다.

유학 생활을 통해 목사가 나라와 교단, 교회의 성도를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난 후 신학교만이 중요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일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공부를 마치고 나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