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貴宰/ 프로필- 1952년생(만71세)- 고향 : 전북 진안- 신앙배경 : 결혼 후 만29세에 직장내 네비게이토모임에서 복음 들음. 37년동안 네비게이토와 동역하면서 직장인 간사(staff)로 섬김. 7년전 제자들교회(합동)로 공동체를 변경(현재 묵상과 성경공부 인도자, 구역장 멘토 등) - 경력 : 보병 소대장(ROTC 13기), 산업은행(31년 근무), 현재 장애인 활동보조(12년차) -학력 : 진안 좌산초, 서울 중앙중, 중앙고, 서울대(전기공학과) - 현재의 관심 : 성경묵상, PBS, 다음 세대 지도자 섬기는 것.
李貴宰/ 프로필- 1952년생(만71세)- 고향 : 전북 진안- 신앙배경 : 결혼 후 만29세에 직장내 네비게이토모임에서 복음 들음. 37년동안 네비게이토와 동역하면서 직장인 간사(staff)로 섬김. 7년전 제자들교회(합동)로 공동체를 변경(현재 묵상과 성경공부 인도자, 구역장 멘토 등) - 경력 : 보병 소대장(ROTC 13기), 산업은행(31년 근무), 현재 장애인 활동보조(12년차) -학력 : 진안 좌산초, 서울 중앙중, 중앙고, 서울대(전기공학과) - 현재의 관심 : 성경묵상, PBS, 다음 세대 지도자 섬기는 것.

1. 들어가는 말

구원은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정에서, 하나님의 역할(은혜)을 강조하는 것을 칼비니즘(C), 그리고 인간의 책임(믿음)을 강조하는 것을 알미니즘(A)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양쪽 측면을 다 말씀하고 있다.

작금(昨今)의 교계 분위기는 하나님의 은혜(C)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으나, 이 글은 우리의 책임(A)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A)”이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C)”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다. 그런데 주여! 주여! 우리가 주님을 믿습니다하던 많은(many) 사람들이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쫓겨날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고 있다(7:21~27).

그리고 생명의 문은 좁고 길이 험해서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고 있다(7:14).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구원받는 사람은 소수(few)라고 말씀하고 있다(22:14).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종교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떤 경우에는 다를 수 있다. 즉 종교활동은 하지만 신앙이 없을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다. 구약시대에도 종교활동에는 열심이면서 막상 하나님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꾸짖으셨다.

(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지금도 얼마든지 교회 마당만 밟으면서 헛된 제물을 바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아래에 구원 얻는 믿음을 5가지 측면으로 살펴보지만, 이들은 각각 별도의 것이 아니라 결국 동일한 내용을 다른 관점으로 본 것이다.

 

2. 구원 얻는 믿음의 몇 가지 측면 (동일한 내용을 여러 관점에서 본 것)

<1>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위 말씀처럼 영생(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성경에서 알다라는 의미는, 지식적으로만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다.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2:19). 성경에서 알다라는 의미는, 부부간의 육체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친밀한 관계이다. 참고 : (1: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잉태)이 있으리이까

내가 조용필의 공연을 보면서 열광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조용필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활동을 통해 만족을 누릴 수 있지만, 내가 조용필을 모르듯이 예수님을 모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최후 심판 때 예수님께서도 모른다고 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7:23).

믿음에 대한 오해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속(救贖)하여 주신 사실을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은, 우리를 구속하여 준 사실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여 준 구속주(救贖主)이다. “하나님에 대하여아는 교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아는 인격적인 믿음 곧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형성이다.

이처럼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아 가야 하기 때문에, 믿음을 갖는 데 시간이 요구된다. 단순히 교리적인 사실만을 믿는다면 단시간에도 믿음을 갖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2> 믿음은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1:12).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뿐 아니라 왕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2:36, 5:31).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 현관이나 거실이 아닌, 안방(주인이 쓰는)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주인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19:16~22). 이 청년은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였다. 이 청년은 율법을 잘 지킨 높은 수준의 종교생활을 한 사람이다. 요즘 교회에서도 이 청년만큼 열심 있는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였지만, 이 청년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 청년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 청년에게는 재물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재물이 안방 차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6:24). 주인은 하나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보다 명예, 건강, 가족, 진로, 일락 등이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주인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과 왕으로 모셔야 한다.

이처럼 믿음이란 보험을 들듯이 리스크를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믿음의 대상에 거는 것이다. 마치 보화가 숨겨있는 밭을 사기 위하여 나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과 같다(13:44).

즉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여야 하는 것이다.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부자 청년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내가 죽는 것이다.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의식이 곧 세례이다. 세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듯이 나도 예수님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며,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의식이다(6:5). 예수님이 나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나는 안 죽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부활의 새 생명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죽지 않고 형식상의 세례만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한 사람다운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6:4). 즉 죽어야 산다. 자기부인(곧 죽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

 

<3> 믿음은 주님 뜻대로 행(순종)하는 것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구원은 오직 믿음과 은혜로 얻는 것이며 행함은 필요 없다(2:8~9). 즉 구원을 얻기 위한 사전적(事前的)인 행함은 필요 없다. 즉 어떤 행함(혹은 공적)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사후적(事後的)인 순종 곧 믿음의 행함이 자연적으로 따라온다(2:8~9에 이어 나오는 10절 말씀 참조).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행함 즉 믿음의 순종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순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행함(곧 순종)이 없는 믿음은 구원 받을 수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2:14,17,24)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위 말씀은 믿는 자의 행함이, 주인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이라도(7:22~23) 하나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되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언약백성의 표지는 순종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한 강도의 경우에는 아무런 행함도 없이 쉽게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 강도는 십자가상에서 처음에는 예수님을 비난하였다(27:44).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게 되고, 죽기 직전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 강도는 죽음 직전에, "당신의 나라(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23:42)"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천국비유 등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여러 번 설명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체포되자 다 도망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재교육을 시키셨다(1:3).

이러한 제자들과는 달리 이 강도는 예수님 부활 전에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 강도가 단순한 잡범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소망하는 민족주의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강도는 죽기 직전 구원받을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았다.

따라서 만약 이 강도를 풀어 주었다면, 이 강도는 자신이 고백한 믿음에 걸맞은 행함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종종 병상에서 죽기 직전 겨우 믿음을 고백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이들이 이 강도와 같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는지 쉽게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순종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근심이나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이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신뢰라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커피숍에 가서 차를 마신다고 할 때, 나는 그 커피숍 사람을 신뢰하고 그 찻잔 속에 독극물이 없다는 믿고 내 생명을 맡기면서 차 한잔을 마신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내가 믿고 있는 그 대상에 나의 생명과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걱정과 근심에 쌓여 있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커피숍에 차 한잔을 마시면서 불안에 떠는 것과 같다. 물론 우리에게 순간순간 걱정과 근심이 몰려 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이 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평안 속에 거하는 것이다.

 

<4> 믿음은 주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는 것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고전 1:9) 너희를 불러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구원이란 어디에서(from) 건짐을 받아서, 다른 어디로(to) 옮겨 가는 것이다. 즉 구원은 내가 주인이던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왕인 나라로 소속을 바꾸는 것이다. 구원이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와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서, 그 나라의 질서와 법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이란,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지속적으로 받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천국 티켓을 얻듯이 한번 받고 끝나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다. 구원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느냐는 관계의 문제이다.

관계는 소유와 같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다. 칼빈도, 구원이란 일생에 걸친 과정(life long process)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여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 교제의 형태는 성경묵상(Quiet Time)이나 성경읽기, 예배, 기도, 찬양 등 다양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나눔이 지속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지속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주님을 닮아 가게 되어있다. 즉 성령의 열매(5:22-23)를 맺게 되는 것이다.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성령의 열매(성품의 변화)를 맺게 되어 있다. 종교적인 활동(예배, 찬양, 기도, 헌금, 봉사, 성경공부, 교제 등)input이라고 하면 가장 확실한 output(열매)은 성품의 변화이다. 과연 나에게서 예수님을 닮은 성품이 드러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1:4). 그런데 성품의 변화(성령의 열매), 거듭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을 믿은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났는데 그 삶에서 예수의 향기를 볼 수 없다면 과연 그를 거듭난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5> 믿음은 공동체와 연합하는 것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함께 연합된 지체들이다. 따라서 머리인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는 지체는, 그와 동시에 몸 안의 다른 지체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와는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지체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는 지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구원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공동체와의 연합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따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요일4:20)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이렇게 어렵다면, 과연 우리 중 얼마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구원 받는 사람이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와 같이 오직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만 구원받은 사람이다(8:4~15).

그런데 때로는 목회의 편의를 위하여 무책임하게 구원의 문을 너무 넓혀 놓은 것(주님께서는 분명 그 문이 좁다고 하셨는데)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칫하면 나처럼 교회 오래 다니고 봉사하는 사람은 당연히 구원 받는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갖고 종교활동에만 안주할 위험성이 있다.

이처럼 짧은 글로 구원이라는 방대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는 있다. 어쨌든 복음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6:4)"고 한탄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13:15)"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꾸준히 복음을 더 깊이 배워가고 알아가야 한다. 알아야 길이 보인다. <>

 
※ 나의 주장은 기고자의 순수한 견해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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