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의 개, 소통이 될까?

천헌옥 목사
천헌옥 목사

거의 모든 하루의 일과를 걷기 운동으로 끝낸다. 평균 1만 보 정도를 걷는 도심의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여러 가지 풍경과 일들을 만나는데, 돌발적인 일들도 많다. 이사를 했어도 걷는 길이 달라졌을 뿐 평소와 같이 걷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집 앞에서 매여 있는 개를 만났다. 덩치가 송아지만 한 큰 개다. 처음 그 개는 너무나 사납게 나를 보고 짖으며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한 태도를 보여 무섭기까지 하였다.

개가 줄에 매여 있다는 것이 한가지 안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도 그 개는 여전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이웃집 개와는 소통이 될 수 없을까? 그 개가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며 반갑다는 표시를 할 수는 없을까?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생각하기를 개를 보지 않고 외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개를 보지 않고 지나쳐 갔다. 그랬더니 짖어대는 강도가 약해졌다. 다음 날은 강도와 빈도가 조금 더 약해졌다. 역시 곰처럼 반응이 없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아예 개를 외면하며 지나다녔다. 점점 소리와 빈도가 낮아지더니 어느 날인가부터 개는 짖지 않았다.

궁금해졌다. 그래서 개는 뭐 하고 있나 슬쩍 훔쳐보니 내가 그를 외면하듯이 개도 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놈 봐라. 사람이 개에게 외면당하다니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래서 그다음 날은 그를 보며 손을 흔들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내가 개를 보자 개도 나를 보며 다시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 악의가 없는 것을 알았는지 전처럼 그리 심하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계속 손을 흔들기로 했다. 그것이 그에게 인사라고 하는 것이 인식될 때까지 말이다. 날이 갈수록 짖는 목소리와 빈도는 낮아지기 시작했다. 비록 누운 자리에서지만 감추었던 꼬리도 살랑대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가 나의 진심을 알아줄 날이 있을 거라며 오늘도 그 집 앞을 기대를 가지고 손을 흔들 준비를 하며 지나간다.

개와의 소통 작전은 성공한 듯하다. 소통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와 나의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말이나 행동 등을 통하여 상대방과 의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서로의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잘 통한다는 것은 소통이 잘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통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소통이 잘 되는 관계는 아마 부부관계가 아닐까 한다. 그 부부 사이에 원만한 소통이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소통을 위한 진통이 있는지 부부는 잘 알 것이다. 다투고 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죽이는 그리고 다시 화해하는 과정을 수백 번 거쳐야 해로할 수 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 소통을 위해 제일 먼저 사용되는 것이 대화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직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 아기에게 부모들은 끝없이 이야기한다. 홀로 대화를 하지만 그 아기가 1년을 지나 돌을 지나게 되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까꿍하는 어른들의 행동에 아기가 까르르 웃는 것은 아주 단순한 소통이다. 그런 단순한 대화가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화는 내 말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도구이다. 반면에 소통은 대화를 넘어 그와의 어떤 공감을 나누는 것이다. 진정으로 상대방의 의중에 공감하고 그와의 뜻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이 소통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화 역시 기도를 하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대화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가?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일방적이지 않은지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내 뜻만 전달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을까?

통하지 않은 개와도 소통하려고 애썼던 나는 정말 하나님과 소통하려고 노력하였는지 돌아본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면서 세상을 일방 통행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깊은 자성의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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