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과 기독교의 주도성에 대한 연구-

김동춘 목사 (서울제일교회 담임,전 SFC 대표, 연변대 역사학박사/만주근대사 전공)
김동춘 목사 (서울제일교회 담임,전 SFC 대표, 연변대 역사학박사/만주근대사 전공)

북간도¹ 3.1운동은 한국 3.1운동과 비교하면 유사점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북간도 3.1운동은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꾸준하게 항일운동이 있었고, 3.1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주도층에 있어서도 한국은 종교인의 연합(기독교 16, 천도교 15, 불교 2)에서 시작되었지만, 만주 3.1운동은 시작도 끝도 기독교가 주도한 운동이었다. 또한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결성되었을 때 그것을 촉매 촉진케 한 것도 북간도였으며, 한 해 뒤인 1920년에 있었던 15만 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이 북간도의 항일운동단체 특히 기독교계 단체에서 주도된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3·1절을 사흘 앞둔 27일 대구 달서구 월성코오롱하늘채 1단지 아파트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해당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는 2·28 민주운동 기념일과 삼일절을 맞아 아파트 1동 130세대에 태극기 100% 달기를 목표로 태극기 달기 시범운동을 추진했다. 2024.2.27 / 코닷-연합 제휴 재사용 금지.
3·1절을 사흘 앞둔 27일 대구 달서구 월성코오롱하늘채 1단지 아파트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해당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는 2·28 민주운동 기념일과 삼일절을 맞아 아파트 1동 130세대에 태극기 100% 달기를 목표로 태극기 달기 시범운동을 추진했다. 2024.2.27 / 코닷-연합 제휴 재사용 금지.

 

¹ 북간도를 아십니까? (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서간도, 만주, 연변과 연길, 중국 동북의 차이) “간도1860년대 이후 우리 민족이 개척한 이래 주로 두만강 이북을 지칭하던 용어였다. 이후 압록강 너머로 개척이 진행되면서 북간도, 서간도로 호칭되다가, 1931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만주라 불렀다. 북간도는 현재 행정구역상 연변”(중국 동북 길림성)에 속한다. “간도만주는 중국 정부 수립이후 사용을 금기시하였고 동북 지역으로 통칭하여 사용한다.

1. 북간도 교회의 3.1운동 준비 과정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기 전 북간도에 있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교회에 알려왔다. 이것은 북간도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자주독립할 수 있다는 큰 희망을 갖게 하였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체적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북간도의 교회들은 국권 회복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19189월 말부터 11월까지 함북노회 특별회를 4차례나 개최하였다.

함북노회 제3회 회의록에 의하면, 특별회에 참가한 북간도 지역의 교회는 국자가교회, 장암동교회, 와룡동교회, 동불사교회, 명신동교회, 천보산교회, 두도구교회,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 태양동교회, 명동교회, 용정교회 등이었는데 이들 교회들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는데 앞으로도 그 중추 세력이 될 것을 결의하였다. 특히 북간도교회의 행정체계인 세 시찰회- 간동시찰회, 간북시찰회, 간서시찰회-의 조직을 통하여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 시찰회를 중심으로 북간도의 목사, 장로, 선교사들은 협력하였고 선두에 나섰으며 각 교회들에게 독립시위운동을 홍보하기 시작하였다.

191812월에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사들과 각 교회의 대표자들로 발기인을 구성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연합할 것을 결의하였고, 성탄절을 맞이하여 전 간도지역 교인들이 함께 하는 연합기도회를 용정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이 기도회는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이 철폐되고 불평등조약이 폐기되고 영토 침략주의가 종식되어 자유, 평등, 박애의 기독교적 이념의 사회가 구현될 것을 소망하자는 의미로 개최되었다.

이 기도회에서 부두일(Foote) 선교사는, ‘파리강화회의에 재미 한인 대표들이 미국정부에 탄원하여 미국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참석한다는 소식을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제창병원 원장 민산해(Martin) 선교사도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대한 다과회에서 파리강화회의는 자유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진행될 것이므로 영국에 있어서 인도의 문제와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견해를 들은 북간도교회 지도자들은 조선의 독립문제가 파리강화회의에서 결정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런 때에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준비사항이 통보되었다. , 미국에서는 안창호 이승만, 연해주에서는 이동휘, 동청철도연선 대표자로는 백순, 이들의 수행원으로는 명동학교 교사를 지낸 박상환이 추천되었고, 시베리아 대표자로는 러시아의 연추한족회회장인 최재형이 추천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곧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어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로 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열리는 회의에 간도 대표자를 선출하여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이에 따라 간도에서도 즉각 대표자를 선출하기로 결정하고 1919125일 국자가(연길) 소영자에서 20명의 각 지역위원들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러시아 연해주 회의에 파견할 6명의 대표자가 선임되었는데,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장로), 용정교회 정재면(전도사), 국자가 이중집(장로)이 뽑혔고, 그 수행원으로 국자가 와룡동 창동학교 교사 정기영(집사)과 훈춘지역의 대표 2인으로 황구교회 양하구(장로)와 박태환(전도사)이 선정되었다. 이들 6명은 2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열리는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 가기로 결정되었다.

계봉우의 북간도 과거와 현재에 의하면마침 이 때에 예수교 전도대회가 신년 1월 총회로 모여 국자가(연길)에 개최하게 되었다. 이런 때를 이용하여 신도 중의 일반 동지가 단합하여 충분한 계획을 의결한 후에... 강봉우씨는 내지로, 김약연 정재면 제씨는 러시아령으로 파견한 일이 유하였다.” 라고 하였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는 만주, 연해주, 조선국내에서 파견된 대표 약 8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단으로 연해주 대표로 이동휘, 동청철도연선 대표로 백순, 국내 대표로 이용이 내정되었지만, 상해에서 온 신한청년단 대표 여운형이 국제적 감각이 있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로 이미 파견한 사실을 전하였다. 이에 당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영어, 불어 등 외국어를 해득하고 다소 교육이 있어 세계의 정세에 통하는인물인 윤해와 고창일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3단계 독립운동방략과 대한국민의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창립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공포한 뒤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북간도에서는 연해주에 대표단이 출발한 바로 그 즈음에 121일 사망한 고종의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 독살설이 함께 퍼지면서 모든 국민들이 분노했고 각 교회에서는 추도예배를 거행하였다. 이 기회를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선언서를 공표하며 각지에서 시위운동을 하자고 결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21일 무오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다. 무오 독립선언서는 국내외 명명가들 39명이 서명한 것으로 길림에서 발표되었다. 만주지역에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인 김교헌,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여준, 이동휘, 문창범 등이 포함되고 있고, 육탄혈전을 강조한 점에서 이후 3.1운동 이후에 대한 발판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218일 국자가(연길)에서 연길도윤공서 외교과 직원인 장로 박동원의 집에서 결혼식 축하연으로 위장하여 15명이, 20일에는 이동식의 집에서 각지의 대표들 33인이 모여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비밀집회에서 북간도 시위운동을 위한 3가지의 구체적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1. 간도 내 각 교회 및 단체는 서로 단결, 협력, 일치하여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한다.

2. 로령에서 독립선언서를 공표함과 동시에 간도 내 각 단체는 일제히 시위운동을 개시한다.

3.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간도 내 각 단체의 대표자가 용정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기세를 앙양시킨다.

1항에서는 모든 종파와 단체가 연합하여 반일시위운동을 벌인다는 것이고, 2항은 러시아 연해주에 모인 국민회의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함과 함께 간도각지에서 일제히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고, 3항은 용정에서는 대표자가 회집하여 연합시위를 벌인다는 것이다.

이 모임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할 기구로 독립선언운동 의사부를 결성하였다. 또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될 경우 희생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이 주축된 결사대를 운영하기로 하였다. 결사대원들은 1918년 가을에 결성된 철혈광복단이 주축이 되어 회원 모집 및 운영을 하기로 하였다.

만세시위운동은 차근차근 준비되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와 개회통지서를 등사하여 간도 각지에 보내는 한편,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만들어 교회조직을 이용하여 간도 전역에 수일 만에 전달하였다. 또한 용정의 목사대표단은 서고덕(Scott) 선교사를 방문하여 용정촌에서 거행될 독립선언 축하회 및 시위운동 상황을 북경주재 미국공사와 상해의 외국인 기독교 목사단에 전보로 통보해 줄 것을 의뢰하였고 서고덕 선교사는 이를 승낙했다.

한편 북간도의 학생과 청년들도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준비하였다. 이들은 215일 영신학교에 모여 기독동지청년회를 조직하고 각 학교의 학생대표를 선출하였는데, 명동학교 유익현, 국자가(연길) 도립중학교 최웅렬, 김필수, 소영자의 광성학교 김호, 정동중학교 송창문 등이었다. 학생대표들은 만세운동의 실행에 관해 구체적 행동을 협의하였고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독자적으로 감행하기로 하였다. 먼저 명동학교 유익현을 북간도 한인 학생 대표자로 선출하여 16일 연해주에 파견하였고, 31일에는 용정촌 기독교학교와 용정교회에서 3회에 걸쳐 만세운동을 벌였다.

 

2. 북간도 기독교 3.1운동의 경과 및 의의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중국과 조선에서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자는 계획에 따라, 북간도에서는 러시아에서의 선언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독립선언서의 발표가 번역 등 준비관계로 늦어졌고, 3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이 이미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37일에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용정, 국자가(연길)의 위원들은 북간도 각지의 대표들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대책을 간구하였다. 이 회의에서 북간도 자체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김영학목사를 대회장, 구춘선장로를 부회장으로 하여 313<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38일부터 북간도 각지의 교회에는 본격적인 집회준비가 시작되었고, 310일에는 각 사립학교가 휴교 조치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연길의 행정책임자(도윤) 도빈에게도 경비를 부탁 교섭하였지만 10일에는 찬성하다가 11일에는 일제의 압력에 따라 불허한다는 통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313일 용정의 장날에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312일에는 독립선언 서명자의 이름으로 중화민국 외교부와 길림성장 앞으로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에 관한 통첩을 발송하였다.

313, 북간도의 모든 사회, 교육, 종교단체 지도자들이 망라된 조선독립의사부의 지도 속에, 2만 명 가까이 모인 한인들은 상부지(商埠地) 밖의 기독교학교인 영신학교 앞마당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위가 시작되자 중국 군경 맹부덕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군중들을 흩으려고 하였고 군중들은 결국 장소를 옮겨 동북쪽으로 수십미터 떨어진 서전벌(瑞甸大野)로 옮겨가 시위를 진행하였다. 용정 서전벌에 집합한 한인들은 독립을 선언하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명동학교 학생들은 교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로 나섰으며, 명동학생 앞에는 충렬대가 깃발을 흔들며 나아갔다. 이들은 식이 끝나는 대로 일본영사관에 돌진하여 독립선언결의를 선포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충렬대원 중 다수는 권총까지 휴대하였다. 당시 시베리아 지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 시위대가 간도주재 일본총영사관을 지날 때 일본 군경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발사하였다. 현장에서 10명이 즉사하고 중상을 입은 시위대원 9명이 후에 숨졌다. 3.13 만세시위운동에서 총19명의 사망자와 46명의 부상자가 생긴 것이다.

용정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있은 후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등 북간도 전역에서 교회나 학교가 서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독립운동의 시위가 있었다. 연길현을 위시하여 이도구, 두도구, 삼도구, 흑정자, 화전자, 국자가, 구사평 등지였으며, 화룡현에서는 양무정자, 토산자, 칠도구, 팔도구, 이도구, 하광포, 신흥평, 청산리에서 각각 시위운동이 있었다. 왕청현의 백초구와 수분대전, 라자구 등지의 한인들도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훈춘현에서는 동구, 황구, 남별리 등의 주민들이 320500여명이 모여 무장을 갖추고 반일시위운동을 벌였다.

한편, 서간도 지역은 통화현 금두화교회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191942일 대황구교회에 약 3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삼원보 부민단의 총기구입문제를 협의하고 성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예배를 마친 후 교회에서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투쟁에 대비하였다. 19195월에는 유하현 삼원보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기독교인 안동식, 김창환 등은 한인의 교육을 통한 신민회의 기본목표인 해외독립운동 기지건설에 전념하였다. 통화현의 최봉석 목사와 흥경현의 오대규 목사 등은 급진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일제와의 투쟁을 준비하였다. 집안현의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의용단, 청년회 등의 단체를 설립(총장-허선노장로)하여 이후 급진파와 연대하여 항일연합 전선을 구축하였다.

북간도 교회의 3.1운동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장기간의 문화계몽운동을 통하여 만주의 한인들에게 반일민족의식이 크게 고취되었고,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반일운동의 선두에서 서서 대중을 이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 외에 북간도3.1운동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립선언서의 발표는 북간도지역 특유의 독특성이 있다.

이미 만주지역에서는 21일에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북간도 3.1운동에서 발표된 선언서는 서울에서 발표한 3.1 선언서와 비교해 볼 때 유사성은 있지만 다른 내용이다. 3.13때 발표한 선언서는 <독립선언포고문>이며, 그 명의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이었다. 그리고 서명자는 김약연 등 북간도 대표 17명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다른 서명자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자신의 지역에 맞도록 지역의 인사들을 발기인으로 하여 각 지역마다 <독립선언서 발표축하회>의 형식으로 계속 시위운동을 하도록 하는 취지였다. 또한 북간도3.13운동은 소수가 먼저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과는 달리 대중적 반일집회를 열고 독립선언 포고문발표와 함께 경축회 형식으로 만세시위운동을 하였다.

둘째, 북간도3.1운동의 진압을 중국 군경이 주도한 것으로 지금까지 왜곡하였는데 사실은 일본이 진압을 주도하였다. 또한 시위에서 사용한 깃발은 태극기 뿐 아니라 중화민국 국기도 있었다.

이전에는 시위를 무장으로 탄압한 것이 중국군경들이었다고 하였다. 일제 역시 그 책임을 중국군경들에게 떠넘겼었다. 그러나 간도총영사는 그날 일본경찰도 중국군경과 함께 시위대오를 제지하였다고 실토하였고, 실탄 조준 사격은 일본 경찰이 자행하였음이 밝혀졌다. 홍상표는 제창병원 민산해원장과 자신이 직접 본 바를 증언하였는데, 사망자에게 나온 총알은 일본경찰의 권총 탄환으로 중국 군경이 가지고 있던 장총 탄환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3.13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여 조선인과 중국인의 공동투쟁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울러 이런 대규모 시위운동을 목격한 중국 동북인들이 북경, 상해 등 본토인들에게 3.1운동을 선전하였고, 그것이 중국의 5.4운동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쳤다.

셋째, 시위를 주도한 집행부의 대부분이 기독교계 목사, 장로들이었다. 대회장에 김영학목사, 부대회장에 구춘선장로 등 집행부의 대부분이 기독교계였고, 시위를 주도한 청년들도 기독교계학교인 명동학교, 영신학교, 창동학교 학생이거나 출신이었다. 북간도 3.1운동 모든 과정의 기저에는 기독교 단체와 교회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3. 3.1운동 이후 일제의 박해와 북간도 교회의 피해

기독교에 대하여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일제는, 3.1운동 후 북간도 교회 및 학교, 단체를 강력하게 핍박하였다. 3.13운동 후 처음으로 열린 함북노회 제4(1919913, 와룡동교회) 모임에서 북간도의 세 시찰회에서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간북시찰회는 사망자 3, 중상자 3인이요, 옥중에 있는 자 10, 구속되었다 풀린 자 12인이며,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 영생동교회, 천보산교회가 속해 있는 간서시찰회에서는 사망자 3, 중상자 2, 감금자도 수인이며, 명동교회, 용정교회가 소속된 간동시찰회는 사망자 2, 갇힌 자 32명 중 6인이 구속이라고 하였다.

간북, 간서, 간동시찰회의 보고와 함께 총회록에도, “금년 봄 독립만세사건으로 교인 중 총과 창에 별세한 이가 9인인데 그 중에는 교사와 학생이 많다. 중상자는 10인이요, 일 년 반 이하 징역으로 선고 받고 감옥 중에 있는 이가 아직도 30여인인데, 그 중에 명동교회 김약연 장로는 국자가에 갇혔고, 또 얼마동안 감금되었다가 태형만 받고 석방된 자가 용정 등지에서 여러 사람이요, 훈방 조치 당한 자도 회령, 용정, 두도구, 국자가 등지에 백 명 가량 된다.”

이처럼 죽거나 구류 감금된 교인과 수난당한 교회 모습은 당시 기독교가 3.1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한편, 3.1운동 이후 봉오동, 청산리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네 개 사단을 동원하여 이른바, "경신년대토벌을 실시하여 가는 곳마다 삼광(三光)-죽이고(殺光), 태우고(燒光), 빼앗는(抢光)-을 행하면서 항일 일반 백성 가리지 않고 참혹하게 살해하였다. 이때 북간도의 4개 현(연길, 화룡, 왕청, 훈춘)에서 5,058명이 체포되고 3,500여명이 피살되었으며, 28개 교회당, 36개소의 사립학교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그 중에 명동촌, 창동, 길동 등 기독교학교가 있는 곳 혹은 기독교가 활발하여 반일 정서가 깊은 마을의 피해가 가장 컸다.

함북노회 제7회 회록에 기록된 교회의 피해 상황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경신년 대참안으로 피해를 받은 교회

교회 명

피해 상황

청산리교회

영수 1, 교인 14인 피살, 교인 가옥 소실

장암동교회

교인 33인 피살, 교회, 학교, 교인 집 충화

양무정자교회

교회소각, 학교 소실

금당촌교회

영수 1, 전도인 2, 교인 7인 피살

혼춘 남별리교회

교인 50명 피살, 감옥에 갇힌 자, 징역선고 받은 자, 유리자, 행방불명자 불가등수.

명동교회

명동중학교 소실, 교인 집 소실

장은평교회

교인 가옥 소실, 구속된 자 10여인

합마당교회

교인 가옥 소실 3, 피살자 3

구세동교회

교회 소실, 교인 가옥 소실 피살자 수 십 인

청산리 백운평교회

교회학교 소실, 참살교인 9

 

이들 교회들의 공통점은 반일 정서가 깊고 항일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한 교회였다. 특히 화룡현 장암동교회와 훈춘의 남별리교회의 피해는 극심했다. 장암동마을 및 남별리 주민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었으며, 이들 다수가 항일 운동에 적극 투신한 열성자들이었다.

연변조사실록에는 19201031일 일본군 70여명에 의해 저질러진 화룡현 장암동의 참사를 소개하였는데,

일본군대가 집둘레를 포위하고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칼로 학살하기도 하고 파 놓은 큰 구덩이에다 수 백 명의 무고한 청년들을 생매장해 버리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10여리에 산재해 있는 장암동 마을을 한꺼번에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는데 마우계견(馬牛鷄犬) 같은 짐승도 한마리 남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날 교회당에서 참살 당한 숫자는 33명이다.

또한 1022일 일본군 37여단의 73연대장이 인솔한 토벌부대는 청산리전투의 실패를 보복하기 위하여 두 개 촌의 30여채 민가와 교회당을 전부 불사르고 불령선인가속이라 하여 70여명의 군중을 살해하였다. 청산리의 대랍자구 거주인은 19호에 72명이였고 백운평은 12호에 39여명이었는데 이들 112명 중에 70여명이 살해된 셈이었다. 이들 주민들 다수는 화룡현 구세동에서 이사하여 왔는데 대부분 기독교를 신앙하는 빈농이었다.

이처럼 경신년대참변(일제는 대토벌)” 기간에 일제가 북간도에서 감행한 죄행은 처참하였다. 독립신문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군이 북간도에서 체포한 인수는 155, 살해한 숫자는 3,664, 민가 3,520, 학교 59개교, 교회당 19개소를 불살라 버렸고, 태워버리고 짓밟아버린 농작물은 53,993석이나 되었다.

한국 전체에서 사망자 수가 7,500여명인데 북간도에서만 3,664명이 죽었으니 그 절반의 피해가 북간도에서 있었던 것이다. 교회당 피해도 한국 전체에서 59개소 그 중 장로교는 12개소인데, 북간도에서만 19개소가 피해를 입었으니 그 피해 정도가 짐작이 된다. 또한 제암리교회에서 29명이 참살당했지만 용정의 장암동교회에서는 33명이 불에 타죽거나 일제의 총칼에 희생당했다.

제일 참혹한 피해를 받은 곳 대부분은 일본군이 패배한 봉오동과 청산리 부근 촌락과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는 마을과 기독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3.1운동 및 북간도 항일운동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이다.

 

4. 3.1운동 이후 기독교계 독립운동 단체인 간도국민회의 결성

3.1운동 이후 325일 북간도에는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도국민회가 결성되었다. “대한임시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그 이름에 맞추기 위하여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920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는 북간도의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에 7개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확대하였는데, 각지의 지회의 간부와 경위대, 모금대 등 임원만 하더라도 천 여 명이나 되었다. 특히 국민회는 교회의 시찰회 조직을 활용하여 회원을 확충하였으며, 그 회원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다음 일제의 기록을 보면 국민회가 기독교 조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민회의 운동기관 및 계통에는 간도 용정촌의 캐나다 장로파 예수교회에 속한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은 간도 각지를 야소교 전도구역으로 하여, 구역에 매 구역장을 배치하고 구역장은 국민회 운동에 관한 불온 간행물을 취급하여 기부금을 모집한다.”

고 하였다. 국민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며 교회 조직(구역관리)을 이용하여 독립운동 선전물 배포 및 기부금 모집 등을 조직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강훈의 민족해방운동과 나에서도, “국민회는 대개 기독교신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양적으로도 방대하여 동만주 4현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국민회가 북간도에서 기독교 조직을 중심으로 방대한 회원을 가진 단체임을 설명하였다.

북간도교회의 행정조직은 노회 아래 동시찰회, 서시찰회, 북시찰회 등 세 시찰회 구역이 있으며 그 아래 지교회의 각 당회가 있다. 국민회의 계통도 교회의 행정조직과 일치하여 총본부, 지방회, 소속지회 등 3단계로 구분되며 총본부는 노회와 5, 지방회는 세 시찰회, 지회는 각 교회의 당회에 대비된다. 각 시찰회에 속한 대표 교회와 국민회 지방회 및 지회를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북간도교회 지방조직과 국민회 지방회 비교

시찰회

대표 교회

국민회 지방회

지회

간도북시찰회

합마당교회, 와룡동교회,

장암동교회, 잠전동교회,

국자가교회, 적안평교회,

만진기교회, 모아산교회,

영고탑 태성교회, 일락거우교회,

동구교회, 석현교회,

북 부

(합마당)

1지방회

12

2지방회

중 부

(국자가)

1지방회

14

2지방회

간도서시찰회

관도구교회, 동불사교회,

명신동교회,두도구교회, 장은평교회, 태양동교회,

명월구교회,구세동교회, 천보산교회

서 부

(명월구)

1지방회

16

2지방회

간도동시찰회

명동교회, 양무정자교회,

용정교회, 남양촌교회, 전선촌교회, 황구교회, 훈춘성내교회, 토성보교회, 훈춘상하4교회, 화룡현 남두만강연안교회,

남부(용정무산간도)

1지방회

9

2지방회

동부 (남양촌 종성간도)

1지방회

1

2지방회

훈춘지방회

3시찰회

100 여 처 교회

513지방회

72개 지회

 

국민회는 북간도 각 지방에 본부, 지방회, 지회를 두고 교회의 시찰회 조직과 연계하여 자치 행정, 군사 조직, 항일 투쟁 등 지방 정치와 행정 및 군사 활동을 일원화하였다. 그래서 산하에 국민회군이라는 군사조직도 만들었다.

국민회의 간부들도 대부분 기독교인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본부가 왕청현 합마당에 있을 때, “임원들이 매 일요일에 지 교회에서 예배를 행하였다고 할 정도로 임원들 다수가 기독교인임을 알려준다. 이들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신앙의 의()로서 인식했고 적극적인 참여로써 그들이 처한 정치적 현실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다.

1921년의 간도노회 설립을 위해 모인 각 교회의 목사, 장로들의 명단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부분 북간도 항일운동의 중추세력을 이루었던 국민회 지도자들이었다. 결국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국민회 임원이었던 것이다.

또한 국민회는 북간도 각 지역에 연락사무소 및 통신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때에 통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 목사들이었다. 예를 들면 명월구교회 최봉의 목사, 간서시찰회구역의 김내범 목사 등이었다. 이들은 전도를 목적으로 각지를 순회하면서 아울러 통신사무를 전담했다. 명월구(연길현 숭례향 옹성라자)는 돈화, 길림, 하얼빈과도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국자가, 용정 등지로 통하는 국도변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국민회의 연락처로는 최적지였다. 상해임시정부로부터 중요 서류와 독립신문이 명월구에 도착되면 북간도의 지역교회 조직망을 중심으로 전역에 전달되었다.

국민회는 백초구, 국자가, 용정촌 두도구, 훈춘 등의 상업지역,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하면서, 기독교들이 이주해 온 밀집지역 및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어 있는 농촌 등지에 기본 조직을 구성하였다. 국민회는 다른 단체와는 달리 넓고 촘촘한 튼튼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조직력으로 군자금을 쉽게 모집하였고, 잘 갖춘 통신 연락망을 통하여 일본군의 동향 파악을 수시로 하여 그 정보력을 바탕으로 무장 독립군의 숙식제공, 독립군의 교통로 확보 및 지역이동을 쉽게 하게 하였다.

국민회의 특징은 민정 조직과 아울러 군정 조직이 있었던 산하에 국민회군”(사령관-안무)이라는 군사단체를 두었다. 국민회군의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용이 파견되어 왔으며, 항일전투를 수행하는 무장부대로 대원총수는 450, 군총 400정통, 권총 160정을 보유하였다.

국민회군은 다른 독립군과의 연합도 모색하였는데, 19201월 우선 국민회군과 홍범도부대가 연합을 실현하였고, 221일과 3월에는 국민회의 본부인 합마당에서 2차례나 각 단체대표의 연석회의를 소집하였고, 55일 신민단, 북로군정서, 도독부, 광복단, 의군부, 국민회가 연합으로 항일투쟁 할 것을 결의하였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훈춘한민회와 군무도독부는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로 개편하였다.

이처럼 국민회를 통한 연합부대가 결성되었기 때문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승리하게 되었다. 결국 북간도 3.1운동은 시위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연해주 국민의회와 함께 간도 국민회를 결성되게 하였고, 독립군을 만들어 연합부대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연합의 힘이 뭉쳐 상해임시정부를 결성케하고 1920년의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이끌게 한 것이다.

 

5. 요약 및 결론

첫째,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진원지는 북간도이다.

북간도 지역의 3.1운동은 한국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독특성이 드러났다.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 이전에 독립선언의 시발점이 되었던 만주 무오독립선언서가 있었다.

1) 21일 만주 길림에서 무오 대한독립선언서가 있었다. 무오선언은 국내와는 달리 무장투쟁을 선포하였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를 현양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하라 독립군! ()하라 독립군!......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2) 국내 3.1운동은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무오선언은 해외한인지도자들이 총망라되었다.

조소앙을 포함하여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문창범, 박찬익,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유동열, 이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이세영, 정재관 등 해외로 망명했던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이서명했고 이들 대부분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다.

 

둘째, 북간도 3.1운동은 국내와는 다른 특이성이 있다.

국내에서의 3.1운동이 만세시위운동으로 그쳤다고 한다면 북간도에서는 3.1운동 이후 민정과 군정의 통합, 지방자치단체와 자치군이 설립되어 지속적인 투쟁을 이끌어 왔다. 또한 중국인들과 연대 및 러시아 연해주와의 연합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의 기조에는 북간도 기독교와 교회가 있었다. 기독교와 교회가 이 모든 일에 주도성을 가졌기에 가능하였다.

1) 연해주와 훈춘 독립선언서는 기독교 정신을 드러낸다.

19193.1운동 당시 나왔던 연해주와 북간도 훈춘에서의 독립선언서는 당시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얼마만큼 관여되었느냐와 당시 연해주와 북간도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현금 조선에서 기독교는 거의 국민적 종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국민을 위한 기독교의 가치는 위대하다. 기독교는 서구의 민주적 사상인 자유와 동포주의 이상의 최량의 수입자이니 조선에서 기독교도가 압박을 받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로서...... 야소교는 우리 민족문화사 일생명이거늘 일본은 이를 증오하여 박멸시킬 음모수단을 강구하여” (1919 3 17일 우수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2) 북간도의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하였다. 북간도 3.1운동은 교회를 위시하여 기독교계 학교, 기독교단체(국민회의 전신인 간민회)가 주도하였다.

3) 북간도의 독립선언서는 독립축하식이다. 이는 망명정부의 설립과 함께,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이 상해 임시정부 설립을 촉매하였다.

4) 북간도의 3.1운동은 상해임시정부의 결성과 독립군의 연합,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전투의 승리의 근원이 되었다. 3.1운동 후 설립된 기독교계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는 여타 독립운동 단체를 연합시키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로 귀결되게 하였다.

 

셋째, 북간도 3.1운동의 한국교회의 적용점

북간도 기독교인들은 만주에 망명해 오면서 조국을 회복하자, 조국의 모델이 되어보자는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북간도를 조선 팔도로 나누어 마을을 만들었고 기독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3.1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기독교가 바탕인 독립운동 단체가 북간도 지역의 항일운동을 견인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이 민족과 사회를 주도해야 함을 보여 준다. 정치 세력을 갖자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선도적 역할 즉, 선도성, 선구자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이 시대를 선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선구자로서 보여줘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가, 남북관계를 풀게 해야 한다.

북한의 문을 여는 단초를 제공해야 한다. 75년 분단이 긴 것은 아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100년이 넘었는데도 잊지않고 기도하면서 예루살렘을 재건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탄식 속에 끈질긴 과부의 기도는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둘째, 결혼 출산 장려운동을 벌여야 한다.

셋째, 분열과 혐오 속에 조국 및 민족사랑 운동을 벌여야 한다.

넷째,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연합운동, 하나됨 운동을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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