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은 죽음과 허무를 극복하고 인간 역사에 영원한 생명과 소망 길을 여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명 포기를 넘어 생명 희망으로, 피조물 전체 생명으로 나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샬롬나비 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사무총장 김윤태 박사
샬롬나비 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사무총장 김윤태 박사

20243월 마지막 주일은 인류와 모든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2000번 가까운 부활절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인류는 여전히 폭력과 전쟁을 범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상존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아직도 북한과 휴전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겪음으로써 삶을 포기하는 죽음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의 쏘는 것”(고전 15:55)에 두려워 떨고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가장 절망적일 때에, 다시 말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던 절망의 시간에 시작되었다. 예수님 옆에 매달렸던 행악자 중 한 명은 죽음의 극단적 절망 앞에서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고백했을 때 낙원을 약속받았다(23). 그 어떤 희망도 남지 않은 무덤에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갔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28).

하나님의 창조 빛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희망이 사라졌던 예수님의 죽음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부활 희망을 통해 이제 샬롬나비는 가장 절망스러운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거기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희망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우리 삶과 실존이 기초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세속인들이나,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지만 자유주의 신앙에 가까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만을 기준으로 삼아,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확실하며, 그렇기에 죽은 자들이 결코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절대화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한계를 지닌다.

분명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빈무덤이 사실이었음을 밝힌다. 당시 사람들은 올바른 사실은 아니었을지라도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두루 알고 있었다(28:11~15). 나아가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들의 정직함 때문에 이 빈무덤의 첫 번째 증인들이 여성임을 숨기지 않았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강하게 입증하고 싶었다면, 오히려 약점이 많은 당시의 빈무덤 소문과 여성의 첫 번째 부활증언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빈무덤 소문과 당시 증인으로 인정받기 힘들었던 여성들의 증언을 묵묵히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시의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결코 숨기거나 왜곡할 수 없었던 사실들이었기 때문이다.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빈무덤과 최소한 제자들이 그것을 직접 목도했다는 분명한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았고, 그와 관련된 사건을 제자들이 목도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이다. 이것은 부활사건이 단순한 믿음의 차원을 넘어 사실의 차원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얼어붙었던 가지에 꽃이 먼저 찾아온다. 죽었던 가지에 생명이 찬아온 것이다. 부활은 그렇게 올것이다. 사진: 천헌옥
얼어붙었던 가지에 꽃이 먼저 찾아온다. 죽었던 가지에 생명이 찬아온 것이다. 부활은 그렇게 올것이다. 사진: 천헌옥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과 삶의 허무를 극복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몸의 살아남을 넘어 죽음 자체가 더 이상 우리를 허무로 돌릴 수 없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삶을 위협하는 허무 극복의 사건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8:51).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따르는 우리를 죽음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오심 자체가 세상의 종말이며(1:15), 그분의 오심을 통해 자연의 질서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의미한다.

타락한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질서는 생명이 있는 자들은 반드시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3:1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된 종말은 바로 이러한 첫 번째 질서를 깨어 부수고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죽지 않으며, 또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가장 먼저 선취한 사건이다. 이제 죽음이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종말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아직-아님이지만, 이 죽음의 끝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우리의 삶 안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자들은 다시 깨어나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인류는 삶의 허무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죽음, 고통, 노화, 나약함 등 인류의 부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희망을 통해 극복되며, 더 이상 이것들은 우리에게 허무함을 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부정성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멸절(滅絶)되기 시작했으며,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어떤 허무함도 없는 삶을 영위할 것을 희망한다.

 

3. 자살률 1위 대한민국은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통해 생명의 포기를 넘어 생명의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안락사 등 또 다른 형태의 자살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해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음의 극복이고 허무에 대한 승리라면, 이제 우리는 삶의 고통과 무의미함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죄 됨을 우리 사회에 일깨워 주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상들은 자신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1:1)는 기독교의 고백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나아가 6일째에, 즉 가장 나중 지음받은 창조의 정점(頂點)으로 고백한다. , 6일째에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한 수동적 존재자이면서, 동시에 앞서 5일간 창조된 다른 피조물들 이후에야, 그것들의 바탕 위에서야 창조되어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수동적 존재자이다. 이처럼 우리 마음대로 생명을 얻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생명의 포기 역시 우리 마음대로 선택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자살이나 안락사가 살인과 다름없는 범죄인 이유는 우리 생명의 수동성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더불어 모든 생명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다(37). 모든 죽은 자들 부활의 선취(先取)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살의 저주를 넘어 생명의 희망에 이를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죽음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으며, 우리는 모든 죽음의 공포를 넘어 영생을 희망할 수 있으며’, 또한 희망해야 한다.’

 

4. 인간 욕망에 따른 과학 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생명의 죽음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환경의 위기와 생태계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고, 이것은 단연코 우리의 삶과 생명 전체의 갱신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이 부활을 신앙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모든 생각의 기준을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타락한 인류의 인간중심주의는 부활을 믿지 못하며, 그 어떤 부활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함부로 죽음으로 내몰고 거기로부터 자신의 안정을 획득하려 한다.

예를 들어, 과학의 발달은 인류의 삶을 지켜주는 소중한 항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의 중심에는 오직 인간의 욕망과 욕구 실현만이 위치했으며, 그렇기에 과학의 발달은 더욱 더 많은 다른 생명의 죽음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되는 생명은 실험 대상이 되는 실험실의 귀중한 생명들(동식물 등)이다.

 

5. 예수님의 부활 생명은 하나님 중심의 생명 사상이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것을 선언해준다.

죽음과 폭력이 난무하는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희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희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이란 우리의 욕망과 욕정을 통해 나타나는 단순한 기대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나 다른 생명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중심과 기준이 되는 희망이며, 오직 그분만이 이루어내실 수 있음에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그러할 때에만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과 삶의 허무를 극복하게 하고, 생명의 포기를 넘어 생명의 희망으로 진입하게 하며, 부활의 사건이 인간을 넘어 전체 생명으로까지 확장되게 할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통해서 생명의 희망은 온 지구상의 생명체에 확장되어야 한다.

과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의 중심과 기준에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계셔주신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그분이 모든 피조물이 중심이 되어준다면, 환경과 생태계 절멸의 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중심과 기준에 하나님이 위치하신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신앙의 항목을 넘어 우리가 희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사실로 인정될 수 있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인간의 자기중심성 때문에 피조물은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8:2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부활은 이제 인류의 구원과 부활을 넘어 지구촌 전체 생명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실현하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나를 내어주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과 생명의 희망은 이제 우리에게 지구촌의 전체 생명을 보존하는 삶을 요구한다.

 

2024329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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