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없는 복음의 더 풍성한 나눔이 있는 교회를 기대하면서

 
   
▲ 이세령 목사
노테르담사랑의교회 담임목사
 

방금 벨기에에 있는 브뤼셀 한인교회의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로테르담의 집으로 돌아왔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이다. 오늘은 브뤼셀 한인교회와 강단 교류 주일이어서 양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가 서로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브뤼셀 한인교회는 주일 오전예배만 드리기에 오전예배만 인도했다. 브뤼셀 한인 교회를 섬기는 최용준 목사는 우리 교회에서 주일 오후 예배도 인도해야 한다. 이상이 오늘 진행되는 브뤼셀 한인교회와 로테르담 사랑의 교회와의 강단 교류주일의 상황이다.

필자가 6년 전에 네덜란드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주변의 교회들과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강단 교류였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독일 등지에 교제권이 형성될 수 있는 교회들과 접촉을 하였다. 제일 먼저 암스테르담에 있는 화란 한인 교회와 시도하였다. 당시 안재경 목사가 봉사하고 있어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우리 교회의 당회와 화란 한인 교회의 운영 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서 시작되었다. 일년에 두 차례씩 봄 가을에 진행되었다.

강단 교류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정해진 원칙이 있다.
첫째는 예배 전체를 인도하는 것이다. 즉 외부 강사가 오는 경우 그 교회 목사나 장로가 사회를 보고 설교만 한다. 그러나 강단교류는 우리 교회와 같은 예배 인도를 하는 것이다. 즉 양 교회를 모두 내가 섬기는 교회로 보고 주일 예배를 인도한다. 사회와 설교 그리고 축도까지 함께 인도한다.

둘째는 사례나 차비는 받지 않는다.
강단 교류는 방문하는 교회를 내가 섬기는 교회라는 차원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한다. 자기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하루 종일 봉사한다고 사례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례는 물론 없고 소요된 교통비도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서 경비를 청구한다. 경제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말씀의 나눔과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사례의 원칙을 깨뜨린 경우가 있다. 당시에 합신 소속의 뮌스터 한인 교회와 강단 교류를 가질 때였다. 뮌스터 한인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서 로테르담까지는 3시간을 차로 달려 와야 한다. 우리 교회는 재정적인 자립을 하지만 뮌스터의 교회는 그렇지 못해서 우리 교회 당회의 제안을 따라서 제직회는 강단 교류를 오시는 목사님께 차비를 드리도록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사례나 차비를 받지 않고 돌아왔다. 원칙은 현실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복음의 은혜를 나누고 풍성히 하는 원칙이어야 한다.

셋째는 주일 하루를 온전히 봉사한다.
이것은 주일 오전 예배뿐 아니라 오후 예배, 혹은 회의 인도를 제외한 그 이상의 봉사도 온전히 섬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차로 1시간15분 정도 떨어진 지역인 에인트호번 지역에서 지역 예배를 별도로 오후에 드리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교회와 강단 교류를 하는 교회의 목사는 굉장한 피곤한 하루를 보내었다. 로테르담에서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 예배, 그리고 에인트호번에 내려가서 거기서 주일 예배를 인도해야 했다. 여기에는 심한 불균형이 있었다. 필자는 다른 교회 주일 오전예배만을 인도했고, 그 교회의 목사는 세 번의 예배를 인도하는 상황이었다. 시간도 아침 이른 시간에 출발해서 에인트호번을 들어서 다시 올라가면 밤 늦은 시간이 되었다. 불균형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섬김의 교제였지만 주변의 교회들은 복음의 풍성함으로 기쁘게 감당하였다. 그야말로 필자에게는 강단 교류 주일이 더 없는 쉼의 주일이었지만 다른 상대방 목사에게는 긴 주일이었다.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귀한 경험들이었다.

필자가 지금 강단 교류 주일을 함께 지키는 교회들은 대부분 고신 출신의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들이다. 화란 한인교회(박태현 목사), 브뤼셀 한인 교회(최용준 목사), 에인트호번 사랑의 교회(권준 목사)가 정기적으로 일년에 두 차례, 혹은 한차례씩 가지고 있다. 최근에 화란 한인교회의 청빙을 받은 박태현 목사는 적어도 네 번씩은 하자고 적극적인 제안을 해 왔다. 필자도 바라던 바였다. 향후 당회와 운영위원회가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최용준 목사가 브뤼셀 한인 교회를 봉사하기 전에 독일 쾰른 한빛 교회를 봉사할 때 한번의 강단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독일의 뮌스터 한인 교회와도 교류를 가졌다(당시 합신의 김남규 목사 시무). 이제 벨기에의 선교 교회와 그리고 헤이그의 이준 기념 교회와도 강단 교류 주일을 가지려고 논의 중에 있다.

베네룩스 도시에 한 두 개의 한인 교회가 있어서 서로 교제권을 형성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말씀의 은혜를 나누다 보면 상호 교회에 대한 교인들의 신뢰가 증진되게 된다. 그래서 실제적인 협력이 쉽게 이루어진다. 몇 년 간의 강단 교류가 진행된 가운데, 연합 당회가 일년에 두 차례씩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중고등부 연합 수련회와 청년부 연합 수련회가 진행되고 있다.

필자가 봉사하기 이전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교회들이 연합적인 모임을 가졌었다. 부활절 연합 예배를 가지고 연합 체육대회를 가졌다. 그런데 일 이차 시행되면서 점차 연합이 진행되지 않았다. 교인들 간의 실제적인 연합을 시도하는 일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말씀의 교제가 우선되면서 진행되는 연합과 교제는 서서히 실제적인 연합의 일로 진행에 신뢰를 더해가고 있다. 어떻게 더욱 발전된 연합의 모습이 나타날 지 기대해 본다.

오늘도 필자는 오전예배만을 인도하고 로테르담 사택으로 돌아왔다. 최용준 목사는 오후 예배를 더 인도하고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이기에 우리의 모든 울퉁불퉁함을 부족함이 없이 채우신다.

강단 교류 주일은 주변의 교회들이 서로 섬기는 목사들의 설교들을 들으면서 교제를 나누고 풍성한 복음의 은혜를 나누는 주일이 된다. 외부 강사를 교섭할 때마다 드는 비용이 전혀 없이 교회는 자신들의 교회를 잘 목회하고 있는 좋은 목사들의 설교를 그야말로 값없이 듣게 된다. 복음이 아닌가?

이와 더불어 강단 교류 주일이 가지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가장 큰 유익은 목사 자신이다.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가면서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사에게 있어 자기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디에 있는가? 강단 교류 주일을 맞으면서 목사는 한 주일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는 일을 쉬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교회를 방문하여 복음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다른 모습을 보며 충격, 혹은 자극을 받는다. 얼마나 유익되는가?

실제로 필자가 노회나 총회에 참석하는 경우, 교회의 모임이 주말에도 있어야 하는 경우, 혹 집회를 인도하러 주간을 비워야 하는 경우 등에 이런 강단 교류 주일이 얼마나 목회에 유익을 주는지 모른다. 한국 교회와 같이 부 교역자가 없는 한인 교회의 형편에서 강단 교류 주일은 복음적 가치를 구현하면서 복음 안에서 한 교회됨을 나누면서 목회자가 혹사되는 일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 한국 교회를 생각해본다. 천차 만별의 교회 차이가 규모에서 존재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소개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이를 위해서 필자가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강단교류를 하게 되었는지 근원을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네덜란드 개혁교회들에서 생활한 경험이다. 필자가 공부를 하던 시절 깜뻔에서 3년 넘게 생활을 했다. 고신 교회와 자매 교회인 소위 31조파 교회(화란 개혁자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인구 삼만의 도시 깜뻔에는 31조파 교회가 두 개 있다. 주일 예배를 각기 두번 드린다. 오전 9:30분과 오후4:30이다. 그런데 이 두 교회를 담임하는 두 목사가 거의 매주일 상대방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인도한다. 두 교회는 원래 한 교회였는데, 천명이 넘어가자 두 교회로 분리를 했다. 지역을 나누어서 교인 수를 거의 절반으로 분리를 했고, 예배당까지 지어서 분리를 했다. 각기 담임 목사가 있어서 개별적인 교회로 서 가지만 두 교회의 주일 예배는 늘 한번씩 방문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심지어는 유아세례나 성찬식의 인도까지도 방문하는 목사가 인도하기도 한다. 이런 강단 교류의 실체를 몇 년간 경험하고 난 이후 새롭게 목회를 시작하자 마자 강단 교류를 시도했던 것이다.

우리 고신 교회의 강단 교류는 몇 해전 총회적 결정에 의해서 당회의 결정으로 진행되도록 하였다. 물론 당시 상황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총회장이나 기타 유명세의 목사들이 교단이나 교회의 정체성을 넘나드는 교제를 위해서 총회가 일괄적인 결정을 하지 않고 당회의 재량에 맡긴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현실에서 강단 교류의 실제를 우리는 고려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런 고려에서 중요한 사항은 모든 고신 교회와 강단 교류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회는 자신의 교회와 강단 교류가 가능한 교회를 결정할 수 있다. 원하는 목사와 교회를 결정한다. 목사가 이런 정보에 앞서 있다면 당회에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제발 그 놈의 교회의 크기를 비교하지 마라. 좋은 목사의 설교를 강사비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심지어는 노회가 개입하지 말아라. 왜 그 교회하고만 강단 교류를 하고 노회 안에 있는 교회하고는 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지 마라. 복음의 원칙으로 하나됨과 말씀의 풍성함으로 나누라. 값없는 은혜를 함께 나누는 좋은 방식으로 우리 교회들이 고려해 보기를 권한다.

최근에 총회장끼리 강단 교류를 한다고 서로 방문해서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다. 주일이 다른 날 강사 초대하듯이 서로 방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소개하는 강단 교류는 서로 같은 시간에 상대방의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다. 고백에의 신뢰, 한 교회됨, 규모를 떠난 복음에 기초한 교회적 사고. 이런 모든 것이 어울려서 가능한 시도들이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강단 교류는 성가대의 교류라는 방향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복음적 원칙이다. 그리고 한 교회됨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복음을 풍성하게 누리는 또 한 길이 있음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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