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튤립혁명 사실상 성공

2005년 튤립혁명으로 아스카르 아카예프 전 대통령을 몰아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은 이번에는 자신이 반정부 시위대에 위해 쫓겨났다. 레몬혁명 또는 핑크혁명이라고도 튤립혁명(Tulip Revolution)은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 두 번에 걸쳐서 행해진 키르기즈스탄의 의회 선거 이후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키르기즈스탄 집권여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선거 부정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전국적으로 반정부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5년간 장기 집권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러시아로 도피했고, 니콜라이 타나예프 총리 역시 사임했다. 이후 선거를 거쳐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뉴욕타임즈는 이번 키르키즈스탄 사태를 놓고 튤립혁명 이후 5년 만에 일어난 또 다른 혁명으로 인해 키르키즈스탄은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지만, 이 새로운 정권이 얼마나 안정적일지는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 불에 탄 대통령궁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간의 충돌로 인해 4월 7일 키르키즈스탄 수도 비쉬켁에서는 75명이 사망했고, 1000여명이 부상당했다. 경찰은 도시 중심에 있는 대통령 궁 앞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수류탄과 최루가스를 발포했고, 놀라서 흩어지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정부의 건물을 점령하고 방화를 저질렀다. 그날 오후 쿠르만베크 바키에프 대통령은 키르키즈스탄 북부와 중부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자신은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자신의 항공기로 수도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오슈 인근의 잘랄아바드에 머물렀다. 지난 15일 공식 사임한 후에는 카자흐스탄 남부 타라자로 이동했으나 17일 벨라루스의 스도 민스크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바키예프가 국외로 피신했음에도 키르기즈스탄 과도정부 수반 로자 오툰바예바는 “바키예프는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동안 바키예프 정권의 관료들과 권력이양에 관련된 협상을 진행했다. 다니야르 우세노브 수상은 사임했고, 그 자리는 다음 선거가 치러질 6개월 동안 과도정부를 이끄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맡았다. 오툰바예바는 아스카르 아카예프 전 정부에서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던 인물이다. 국내외적으로 아카예프의 독재체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던 가운데 결국 2005년 총선이 부정선거로 얼룩지자 일어난 튤립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혁명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바키예프 역시 독재 정치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올해 초 키르기즈 정부는 전기와 난방 요금을 2-5배 인상했다. 바키예프는 에너지, 통신 등 국영기업에 대한 민명화를 주장하며 자신의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팔아 남겼다. 바키에프 대통령의 족벌주의 정치행태와 관료들의 극심한 부패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고통으로 작용했다. 아카에프 대통령 시절보다 더 하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4월 7일 비쉬켁에서의 시위는 전 날 키르키즈스탄 북부에 위치한 탈라스에서의 시위의 연장이었다. 키르기즈 남부 출신의 바키에프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남부 출신 인사들로 채웠었다. ▲ 바키예프와 오툰바예바
뉴욕타임즈는 바키에프 대통령은 두 가지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첫째는 명백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시위가 일어난 날 아침 반정부 인사들을 체포한 것이다. 후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이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때는 이미 늦었다. 둘째로 시위대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잘못된 계산을 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대처했던 방법으로 인해 바키예프는 더 이상 권력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됐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충돌한 경찰은 시위대에 비해 훨씬 많았다.

 

지난 3월 23일, 튤립혁명 5주년 기념일 당시 바키에프 대통령은 키르기즈스탄에 적합한 인권과 민주주의 도입에 대해 연설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못되어 ‘제 2의 튤립혁명’이 일어났다. 바키예프는 민주주의와 경찰 개혁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므로 그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부패근절과 경제운영에 실패했으며, 요직에 자신들의 친척들을 대다수 등용시키므로 자신이 축출시켰던 전 대통령에 비해 훨씬 권위주의적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한편 키르키즈스탄의 이번 사태는 가난한 국가에 군사기지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와 미국에 상당한 함의를 제공한다. 미국은 키르키즈스탄 북부 마나스 기지로부터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낸다. 뉴욕타임즈는 미국의 마나스 기지 사용이 “마나스 기지가 폐쇄되기를 바라며 키르키즈스탄에 2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는 러시아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결국 러시아는 바키에프 대통령이 선임자와 같이 러시아로의 망명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8일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마나스 공군기지를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키르키즈스탄의 이번 사태는 중앙아시아의 나머지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5,000명 남짓한 시위자들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정권을 전복시킨 두 번째 사건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즈는 “키르키즈스탄의 이웃국가들은 더 이상 권위주의 정원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라며, “키르키즈스탄의 국민들이 이번 두번째 혁명을 통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보도했다. (미션투데이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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