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사형제도 존폐론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다수의 여야 국회의원과 천주교회는 사형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1960년대 윤형중(尹亨重)신부는 고의적 살인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사형 존치론을 강력하게 주창한 바 있으나, 지금 천주교회는 선배 신부의 고언에도 불구하고 폐지론으로 선회했다.


개신교회의 경우 일관된 입장은 없으나 NCC를 비롯한 진보적 교회는 폐지를 선호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비롯한 보수적 교회는 정치적 악용의 가능성이나 오판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창세기 9장 6절,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등을 근거로 ‘고의적 살인’의 경우는 사형제 존치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기 교부들은 사형제를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사형제도는 형법의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고, 기독교가 생성되던 1세기 그레꼬 로망사회에서 사형은 통치수단으로 이용되어 처형은 자연스런 처벌의 수단이었다. 그 때는 사형존폐에 대한 논의자체가 없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제도를 옹호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땅에 살았으나 심리적으로 그 땅으로부터 이민을 떠난 이들이었기 때문에 케둑스(Cadoux)의 지적처럼 세속의 일에 유념하지 않았던 것이다.


2세기 초엽의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은 군인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을 만큼 국가권력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것은 이교적 로마제국의 구조 속에서 군인이나 공직 취임을 금지함으로서 우상숭배의 위험성과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종교적 동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의적으로 볼 때 초기 교부들은 폭력과 전쟁을 반대한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사형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물론 이 점이 초기 교부들의 논쟁적인 주제가 아니었으므로 이 점에 대한 명시적인 기록을 남겨주고 있지는 않지만, 전쟁에 대해 반대했던 교부들은 살인이나 살해(사형집행)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부정적이었다.


이런 견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펠릭스(Minicius Felix), 히폴리투스(Hippolytus), 락탄치우스(Lactantius) 등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비폭력 평화주의적 관점에서 군복무를 반대하면서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락탄치우스(c. 240-320)는 4세기 초 반 기독교적인 비난에 대한 철학적 반론으로 기록한 <신의 교훈>(Divinae institutiones)에서 ‘살인의 금지’라는 차원에서 사형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락탄치우스는 로마의 정의는 '평등'(平等 aequitas)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한 보편적 형제애에 기초 할 때 더 완전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살인을 금지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3세기 이전의 교부들은 로마제국의 우상숭배, 이교적 가치, 전쟁정책과 더불어 처형 등과 같은 물리적 폭력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적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4세기를 거쳐 가면서 형세는 바뀌고 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얻게 되자 국가, 혹은 국가권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로 국가는 더 이상 우상숭배 집단도 아니며 반기독교적인 집단도 아니었다. 이것이 국가권력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동시에 주류의 기독교회가 국가권력에 의한 사형집행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드리는 계기가 된다.


이제 국가는 우상숭배 집단이 아니라 기독교를 보호하고, 악을 제어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기구였다. 교회는 국가권력의 공권력을 지지했고, 국가는 교회에 하나님에 대하여 불경한 자, 이교숭배자. 이단자, 잡신숭배자 등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했다. 즉 악의 세력은 국가적 강제력에 의해 제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 아퀴나스 등이 사형 제도를 수용했던 배경이 된다.


특히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는 정당전쟁론을 수용했고, 이단 투쟁에 있어서 국가권력의 구속력과 강제력을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그의 ‘강제권’이론(Compelle intrare)이다. 즉 어거스틴은 ‘정의에 근거한 경우엷 국가권력을 통해 이단을 억제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단 박멸에 있어서 국가권력의 무력행사를 정당화했다. 이것이 소위 강제권(Compelle intrare) 이론이다. 그의 ‘강제권’ 이론은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4)는 말씀에 근거하였다. 그가 국가권력의 무력행사라고 말할 때 처형(사형)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의 이 주장은 후일 중세 시대에 잘못 적용되어 이단자 색출과 종교재판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16세기에는 이 근거에서 루터는 농민들에 대한 탄압을, 칼빈은 세르베르투스 처형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생명을 빼앗는 사형보다는 개선의 형벌이 범법자에게 개선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보다 더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범법자가 교회의 요청으로 얻은 자유를 남용하여 계속하여 살인을 자행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우 최종적 형벌은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결국 어거스틴도 국가권력의 사형집행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이런 입장이 16세기를 거쳐 가면서 루터, 칼빈, 파렐, 멜랑히톤, 불링거, 베자 등 개혁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그 이후의 주류 기독교회의 입장이 되었다. 칼빈이 관련된 세르베투스 처형에 대해 이들은 그 불가피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예컨대, 불링거는 세르베투스 처형에 따른 비난을 변호하기 위해 칼빈에게 책을 집필하도록 권면했으나 사형제도 자체를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칼빈이 불링거의 권면을 받아드리고 쓴 책이 <세르베투스 오류에 대한 삼위일체론에 관한 정통 신앙의 변호>(Defensio orthodoxae fidei)였다. 이 책은 불어 및 라틴어로 기술되었는데 전자는 350쪽, 후자는 250족의 책으로 1554년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제네바의 목회자 15명이 연대 서명하여 세르베투스 처형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제네바의 개혁자들도 사형 제도를 받아드렸던 것이다.


칼빈은 이 책에서, “세르베투스의 체포를 종용하고 고소인을 정하여 고소한 일은 인정하지만 그가 이단으로 판결되고 난 후 나는 그를 사형에 처하고자 하는 일에 동의한 일이 없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안다”고 말했으나 당시 독자들의 심증은 칼빈의 고백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일본의 칼빈 학자 구로사끼고 기찌(黑崎)는 평가했다. 칼빈은 육체를 죽이는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헤치는 이단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기독교 통치자의 의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멜랑히톤의 견해도 동일했다. 멜랑히톤은 1554년 10월 14일자로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귀하가 세르베투스의 혐오할 만한 불경스러움을 논박한 글을 읽으면서 귀하의 투쟁의 중재자가 되셨던 하나님의 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역시 현재와 미래에서도 구기하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구기하의 판단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정상적인 재판 후에 귀하의 시 당국이 그 이단자를 사형에 처한 것이 정당한 판결임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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