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한상동(韓尙東, 1901-1976)1)목사는 일제하에서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고, 해방후에는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고, 교회를 쇄신하려고 했던 영적쇄신운동의 중신인물이었다. 이 일을 위해 주남선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상동목사는 부산 초량교회(1946-1951)와 삼일교회(1951.10-1972)에서 목회했던 목회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생의 여정은 크게 4가지 측면에서 논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과 반대운동(1936-1945), 둘째, 해방 후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교회쇄신운동(1945-1952), 셋째, 초량교회, 삼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목회활동(1946-1972), 넷째, 고려신학교 설립과 신학교육 활동(1946-1974)이 그것이다. 그의 생애와 신앙 혹은 신학은 이상의 4가지 측면에서 논구될 수 있는데, 이 모든 사역은 ‘교회건설을 위한 봉사’였다. 이 글에서는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그의 신앙과 신학이 어떻했던가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주고자 한다.


1. 1930년대 이후의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신학적 상황

  한상동 목사의 생애와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동했던 1930년대 이후의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신학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한상동 목사의 신앙과 삶의 행로를 결정했던 193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적 상황에 대해 한상동 목사는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이해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선교사들이 주도하에 있었다. 적어도 1930년대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신학교육과 연구와 집필 등 신학활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884년 미국선교사들의 도래에서 1930년 이전까지 약 50년간의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하며,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신학은 ‘한국적 신학’(Korean theology)이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신학’(Theology in Korea)이라고 할 수 있다.2)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장로교 선교사들의 경우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를 따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3) 이점은 1890년에 내한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4) 그는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이었으나 1930년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교회에는 신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로 넘어 오면서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신학의 대두를 보여주는 3가지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5) 그 대표적인 경우가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미국교회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Fundamentalist vs. Modernist Controversy), 미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변화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지만, 일본을 통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들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 물론 1930년대 이전에도 캐나다연합교회의 선교지역에서 보수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니 지역적 한계 안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부터 자유주의 신학은 한국장로교회 총회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하였다. 그 첫 변화가 성경관 논란이었다. 특히 1930년대의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는 김재준과 박형룡의 논쟁 속에 뚜렷이 반영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기에 와서 보수적인 입장의 신학이 퇴조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그 지경을 넓혀 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 강요는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적 신학의 퇴조를 초래하였고, 보수주의적 인사들의 주도권이 친일적 진보적 인사들에 의해 대치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한상동 목사의 신앙운동

1) 신사참배 반대와 신교의 자유

  한상동의 신사참배 반대 혹은 신사불참배운동(1937-1945)은 후일의 그의 생의 의미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는 조선 침략을 개시할 때부터 식민통치를 효율화하고 소위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한 의도에서 신사참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신도국가주의(Shinto Nationalism)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하여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형성하기 위한 의도였다. 다른 한편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서 식민통치에 가장 큰 저항세력인 기독교회를 탄압하고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기독교는 일제통치 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고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1910년 이래 한국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 운동과 독립 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 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1905년 이래 1945년 해방 때까지의 조선 총독부의 대(對) 기독교 정책은 회유 혹은 탄압이라는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 내부의 정치적 변화6), 곧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자 신사참배 강요가 심화되었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皇民化)정책의 거점을 신도(神道)에 두고 소위 ‘일면일신사주의’(一面 一神社主義)를 강행하여 전국 각처에 신사, 신사(神社, 神祠)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여 신사를 ‘비종교화’하고 참배를 강요하였다. 1936년 8월에 미나미(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학교 강요되었으나 점차 교회와 교회기관에로 확산되었다. 많은 학교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므로 폐교되었고, 로마 가톨릭과 감리교회 등이 일제의 강압에 굴복했다. 심지어는 장로교회도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라 하여 참배를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한상동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할 당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할 때였다. 신사참배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반대 의지가 문헌상 공식적으로 표시된 것은 1936년 10월 24일 그가 부산 초량교회 전도사로 일했던 때였다. 이때부터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입장 취했고, 이를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즉 자신과 조수옥(趙壽玉), 손명복(孫明復), 배학수 등은 부산지방에서, 최덕지(崔德支), 태매시(太梅是, M. G. Tait), 염애나(廉愛拿), 이찬수(李贊秀) 등은 마산에서, 주남선은 거창지방에서, 이현속(李鉉續)은 함안지방에서, 황철도(黃哲道)는 진주지방에서, 또 통영지방은 최덕지, 김영숙(金英淑), 남해지방은 최상림(崔尙林)목사가 주도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경남 지방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화하였다.

  신시참배 반대운동이 조직화고 있을 때인 1940년 6월 이후 이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한상동 목사는 그해 7월 3일 체포되어 경상남도 경찰부 유치장에 투옥되었다. 이로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고자 했던 노력은 좌절되고 만다. 이때로부터 한상동은 1945년 8월까지 약 5년간 평양형무소에 구금되어 있었다.


2) 해방 후의 교회쇄신(Church Renewal)운동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타협과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고 교회쇄신을 이루는 일이었다. 1942년 한국교회는 고유한 명칭을 쓰지 못하고 소위 ‘교단’(敎團)이라는 교파명을 가지게 되었고, 1945년 8월 1일에는 한국의 모든 교파를 통합하여 일본기독교에 편입시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개칭했다. 결국 1907년 조직된 한국 장로교회는 해체되고 만다. 그래서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교회를 재건하고 재조직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일제하에서 범한 죄과를 회개, 청산하는 영적 쇄신이었다.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던 17명은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석방되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 쇄신운동이 전개되었다. 교회 쇄신운동은 북한(특히 평양)에서 시작되었고 9월 20일에는 5개항에 이르는 교회쇄신을 위한 재건 원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교회재건운동은 친일적 신사참배자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권징과 자숙을 통해 영적쇄신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교회쇄신운동은 김일성 공산정권의 수립과 탄압으로 좌절되었고 오늘날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서울에서의 경우 신사참배를 반대하거나 투쟁했던 인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19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南部總會)’를 조직하므로 써, 교회의 기구적 조직,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부산, 경남 지역, 곧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교회 쇄신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인물이 한상동 목사였다. 한상동목사는 출옥 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었으나, 1946년 3월 남하하였고, 주남선 목사 등과 함께 부산, 경남지방 교회재건운동을 추진하였다.

  1945년 9월 18일 부산진 교회에서 경남 재건노회가 조직되었다. 이 때 일제하에서 범한 죄를 통회하기 위한 자숙안이 상정, 결의 되었으나 친일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폐기되었다. 이 점은 교회쇄신운에 대한 최초의 조항이었다. 이 때부터 경남노회 내에는 김길창으로 대표되는 친일적 교권주의자들과 한상도, 주남선으로 대표되는 반일적 쇄신론자들 간의 대립이 형성된다. 물론 노진현 등이 중간파가 있어 문제를 더 어렵게 하고 있었다.

  당시 친일 전력의 교권주의자들은 수적으로 우세하였고, 이들은 서울에서 조직된 남부총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남부총회의 중심인물들은 친일적 전력의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상동, 주남선 등은 교회의 영적쇄신을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의 영적 투쟁, 곧 생활의 순결과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려는 교회쇄신운동은 후일 고신교단 형성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3)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신학교육

  한상동목사의 고려신학교 설립은 그의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의 신학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 1946년 당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위 신학적 자유를 교육이념으로 하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었고, 이 신학교는 남부총회에 의해 총회직영 신학교육기관으로 가결된 상태였다. 한상동에게는 이 자유주의 신학교에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이 긴박성 때문에 교사(校舍)나 교수, 도서관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학교 설립은 신학교육을 통한 한국교회 재건과 교회건설의 의지였다. 이것은 새로운 신학교육 없이는 한국교회를 쇄신할 수 없다는 확신의 결과였다. 이 점은 주남선, 한상동의 이름으로 발표된 “고려신학교설립 취지서”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4) 목회 활동

  한상동은 그의 나이 1921년 곧 그의 나이 21세 때부터 인생 문제로 고민하였고, 24세가 되던 1924년 3월 박창근전도사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되고 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이듬해인 1925년 세례를 받았다. 호주선교부의 배려로 진주 광림(光林)학교에서 1년 6개월 교사로 일한 일이 있으나, 목회자로의 길을 가기 위해 1928년에는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건강 때문에 곧 낙향하였고, 경남 여전도회의 지원을 받아 경남 고성군 학림(鶴林)이란 곳에서 개척전도자로 일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상동의 목회자로서의 생의 시작이었다. 1931년 11월 초에는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辰橋)면 소재리로 옮겨갔는데, 이곳에서 한상동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며 기도의 체험을 얻는 중요한 기간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사역은 체계적인 신학 연구의 필요성을 실감케 했고, 결국 193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7) 3년간의 교육을 받고 1936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그해 4월 부산 초량교회 전도사(조사)로 부임하였다. 이 당시 이약신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지만 그는 미국교회 방문 중이었기 때문에 한상동은 임시 교역자로 가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약 1년 간 일했다. 1937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주기철 목사의 후임으로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했다. 한 목사가 이 교회에서 일한 기간은 신사참배 반대 이유로 1939년 5월 사임할 때까지 만 2년간에 불과했다. 신사참배강요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말살하려는 타협할 수 없는 요구였기 때문에 한상동은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선한 싸움’의 대상으로 파악했다. 그의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기는 모든 신자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유 때문에 문창교회를 사면하였으나, 이 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었고 그 후의 그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대한 교회를 향한 목회적 동기에서 구체화된 사역이었다.

  문창교회를 사면한 이후 부산으로 돌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잠시 밀양에 있는 마산교회를 담임한 일이 있다. 한상동은 우상 숭배자와 우상 숭배하는 한국 교회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구약 성경의 계시사적 조명을 통해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에8) 신사참배가 커다란 범죄임을 알려주고, 이로 말미암아 임하게 될지도 모르는 영적 배교에 대해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한상동은 평양 산정현교회에 시무하고 있었으나 1946년 3월 남하하였다. 그해 7월에는 초량교회에 청빙을 받고, 해방 후 혼란한 와중에서 5년간 사역하였다. 1951년 5월 부산 중앙 교회당에서 속개된 제36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고려신학교에 관여하는 인물들을 축출하였고, 이때로부터 3개월 후인 1951년 9월 8일 총회는 한상동에게 초량교회 명도(明渡)를 요구하고 나왔다. 이때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김양선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교회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교권주의자들에게 바친 이유 때문에 일어난 일대 불상사들이었다. 한국 교회 70년 사상에 있어서 이처럼 교권이 행사된 적이 없었다.”9) 고 평했을 정도였다. 당시 초량교회의 약 500명의 교인 중에 9할 이상의 교인들이 한목사와 그가 중심이 된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했지만 한상동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빈손으로 초량교회를 나와 1951년 10월 14일 주영문장로 저택에서 삼일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때로부터 은퇴하기 까지 21년간 삼일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기도하는 목회자였다. 새벽 기도 강단은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고 자신이 항상 인도했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성경을 나열하거나 인용하는 방식으로 일견 평범한 설교 같았으나 능력의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는 신앙 세계의 신비로움을, 그리고 믿음은 기적을 동반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다니엘을 비롯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여러분, 잘 믿읍시다.”는 그의 주된 권면이었고, 그의 설교 속에는 ‘믿으라, 바라라, 의지하라’는 3대 요소는 그의 설교의 근간을 이루었다.


4. 한상동의 신학

1) 한상동목사에게 신학이 있었는가?

  한상동목사에게는 신학적 지성이 있었고, 그에게도 신학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의 신학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한상동은 주남선과 함께 1946년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실제로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주로 박윤선에 의해 교수, 연구되었다. 사실적으로 말해서 한상동의 교회쇄신과 교회건설의 의지를 신학화 하고 역사화 시켰던 학자는 다름 아닌 박윤선이었다. 그는 성경신학 뿐만이 아니라 주경,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 그리고 성경언어까지 가르쳤다.10) 이것을 보면 고려신학교에서 그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의 고려신학교의 신학연구와 신학교육은 전적으로 박윤선에 의해 주도되었고, 고려신학교의 신학이란 바로 박윤선의 신학이었다.11)

  어떤 점에서 한상동은 소박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삶의 여정은 학문의 현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영일은 한상동목사의 사역에서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만 과연 그에게 개혁주의 교회라는 용어를 지칭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 비교적 제한된 교육을 받았던 그가 ‘개혁교회’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그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12) 말하자면 한상동은 서구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홍치모는 1950년대 말까지는 한국에서 개혁주의(Reformed)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지도 않았고, 또 그것이 바로 이해되지도 않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한상동목사의 글이나 설교에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한상동은 신학적 논구나 논설을 남긴 일이 없고, 현대 유럽 언어나 성경원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신학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삶의 여정 속에 역사와 현실, 교회와 생활에 대한 그의 인식과 성경에 기초한 반응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단지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머리의 신학자’라기 보다는 ‘가슴의 신학자’였다. 한상동에게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조직신학적인 체계를 기대한 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생애와 활동 속에서 그의 신학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몇 가지 측면


성경중심주의 (Bible-centered)

  한목사의 생애 여정과 신앙고백적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성경이었다. 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성경무오에 대한 확신은 그의 신앙과 삶, 곧 그의 신학의 기초였다. 그는 항상 ‘말씀대로 살자’는 순수하고도 소박할 정도의 신뢰와 확신으로 생애를 살았다. 이 성경중심 사상이 그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고, 해방 후 교회 쇄신운동, 곧 회개와 자성운동의 근거였다.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싸웠던 이유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사참배 강요는 성경을 기독교신앙과 행위에 적용해야 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의(神意)에 반하는 신사참배 요구는 일제의 패망을 자초할 뿐”이라고 설교했던 것이다.13) 한상동은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고 성경을 매일의 생활에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으로 인식했다.

  그는 “신자에게 성경이 있는데 다른 무슨 책이 필요한가”14) 라고 했을 만큼 성경의 유일한 권위와 완전성과 충족성을 신뢰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복종과 신뢰 그리고 신앙적 결단이 철저했던 분이었다.

  그래서 한상동은 성경말씀에의 순종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영적 간음’이며,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런 범죄는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를 가져올 뿐이라는 확신으로 살았다.15) ‘말씀대로 살자’라는 그의 소박한 표현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신학적 사고의 출발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경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고 순행했던 성경중심주의자였다. 곧 성경중심주의는 그의 신학과 삶의 기초였다.


정통주의 혹은 보수주의 신학

  한상동의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이었다. 이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신사참배 강요에 순응적이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안이었다. 한상동은 한부선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시대조류에 대한 타협으로 인식했다.16) 한상동이 인식한 자유주의 신학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따라서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옛 평양신학교의 복구라는 성격이 강했다. 한목사가 그 스스로 말한바와 같이 오직 옛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복구하고 이를 계승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신학교는 학제도 평양신학교의 그것과 유사한 본과 3년, 예과 1년, 별과 3년, 여교역자 양성과 3년 등이었고 교과 과정도 평양 신학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하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려신학교는 “교회 내에 보수주의 사상을 심어 줄 터전이 되었다. 이 신학교는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사상을 의심해서인지 평양신학교의 옛 사상들을 계승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17) 고려 신학교가 1949년부터 발행한 잡지의 제호를 ‘파수군’(把守軍)으로 명명한 것은 당시 고려 신학교의 신학적 지향점이 성경적 진리파수에 두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적어도 이 당시 한상동의 관심이 정통신학이었음은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불신앙의 신학으로, 정통신학을 성경진리의 신학으로 간주하고 있다.

  박윤선의 고백과 같이 평양신학교는 어떤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쳤다고 보기 어렵다. 1931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던 박윤선은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Reformed) 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했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으며 교수들로부터 ‘성경신학’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18) 이상의 점들은 역시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던 한상동은 신학정신을 헤아려 보는데 도움을 준다. 그는 정통주의 혹은 보수주의 신학을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1960년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문제가 거론될 때 한상동의 강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상동목사는 1960년 11월 28일 부산대학교 학생신앙운동(SFC)이 주최한 부산남교회에서 모인 노진현, 양성봉, 박손혁, 한상동 4인의 합동강연회에서 “한국교회의 신앙보수를 위해서는 양 진영이 합동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교단합동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보수신학 혹은 정통신학의 보수에 두었다.19) 보수주의란 교회가 전통적으로 신앙해 왔던 성경적인 가르침을 보수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한상동의 생의 여정에서 가장 성경적인 신학으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상동목사는 보수주의 신학을 추구하는데, 그에게 오늘 우리가 말하는 신학과 생활, 역사와 세계, 문화 변혁적 소명에 대한 개혁주의적 신학과 그 전통을 이해했는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분이 중심이 된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 1960년대 그리고 1970년대의 한국의 역사와 현실에 있어서, 교회와 신조, 교회 연합, 기독교와 문화, 사회현실과 역사현실에 대한 조망과 기독자적 응답 등의 문제와 고려해 볼 때 그러하다. 그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공격당하고 신앙의 자유가 유린당하고, 우상숭배가 강요당할 때, 곧 1930년대 이후의 한국의 교회현장에서 그 이전부터 믿어오던 신앙을 파수하려고 했던 보수주의자였다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교회쇄신의 신학

 한상동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교회였다. 그의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은 바로 교회의 거룩을 지켜가기 위한 것이었고, 해방 후 친일적 타협주의자들, 신사참배 옹호론자들의 회개와 자숙을 요구했던 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 쇄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일제에 대한 투쟁은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고, 신학교의 설립은 교회를 쇄신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혹자는 주기철의 경우와 같이 한상동의 일제하의 저항을 민족적 동기에서 보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그의 투쟁의 진정한 동기를 곡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20) 한상동의 진정한 동기는 주님의 교회였다. 해방 후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해방된 조국에서 교회의 미래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다.

  한상동은 회개와 자숙을 교회쇄신운동의 중요한 출발로 보았다. 이것 없이는 영적 쇄신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상동에게 있어서 교회재건, 곧 일제하에서 해산 혹은 통폐합된 교회의 기구적, 제도적 교회의 재건은 일차적인 관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교권주의자들의 가장 긴요하고도 시급한 관심이었을 뿐이다.

  한목사에게 있어서 해방된 조국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새롭게 세워가는 교회쇄신은 시급한 과제였다. 이것이 해방 후 부산,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회쇄신운동이었다. 그는 비록 부산 일우에 있었으나 그의 관심은 전 교회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대한 교회’(大韓敎會)21)라는 표현을 썼다.


 교회건설의 과제

  한상동의 생애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교회건설의 의지였다. 그의 모든 활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려는 일관된 활동이었다.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고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 때문이었고, 고려신학교를 통한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서 시작되었다. 신학교육은 그 교회가 처한 시대와 상황 가운데서 교회로 하여금 증거와 변증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가져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생각할 때 한상동에게 있어서 신학 교육이야말로 교회 건설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고려신학교의 교수로 혹은 행정책임자로 큰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목회사역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실천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국 교회를 바로 세워 보자’고 하는 교회 건설의 의지가 그의 생애를 이끌어 갔던 축(軸)이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그의 신학을 ‘교회건설의 신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한상동목사의 삶은 신전생활(神前生活)이었다. 그는 비록 코람 데오라는 용어의 사용을 즐기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실천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통치에 대한 삶의 고백이었다. 그의 신앙고백적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었다. 그것은 그의 유신론적 세계관이자 인생관이었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섭리적 통치에 대한 고백이었다. 오스터하벤의 지적처럼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식은 칼빈의 종교사상의 근본이며 일관된 그의 사상이었다. 그는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무엇을 행하든지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22)고 했다. 한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은총과 능력을 힘입었고, 성령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를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한목사는 옥중에서 5년간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그 생활전부가 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추호도 없다. 진실로 주님은 살아계셔서 나의 생활 전부를 주관하시고 계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하였다.”23)고 했다. 워필드에 의해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린24) 칼빈은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유효하게 당신 자신과 연결시키기 위한 줄”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께 연결존재로 규정했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께 연결된 존재란 바로 하나님과의 교통속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를 의미한다. 칼빈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강조는 그 후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 있는 가르침이 되었는데, 그 단적인 예가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 1문이다.

  실로 한상동목사의 일생동안의 삶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었다. 그는 어떤 가면이나 위선도 없이 일평생 동안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그리고 덧입은 의인으로(simul instus et pecator)  서 있었다. 그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바로 그의 신관이었고, 그의 신학이었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한상동목사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신학을 그가 살아왔던 1930년대 이후 역사-신학적 정황가운데서 고찰하였다. 한상동목사는 지도적인 신사불참배 운동자였고, 확신 있는 신학 교육자였으며, 교회쇄신을 위해 고투하였던 교회의 신학자였으며 영력 있는 목회자였다. 교회의 순결과 교회쇄신 등 그의 모든 생애 자취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추구하는 교회 건설을 위한 일관된 봉사였다.

  그의 생애는 진실로 일관된 삶이었다. 그는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보냄을 받았고 그에게 위임된 신적 사명을 충직하게 감당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를 교회건설의 신학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일 수 있으나 한국교회사가 서울을 중심으로 수적 우위 교단의 범주에서 씌어졌기 때문이고, 한목사 자신이 생애 대부분을 경남.부산 지방에서 활동하였으므로 한국 교회의 삶과 신앙운동의 중심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보다 더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에 관한 논자들의 역사관 때문일 것이다. 보다 더 내면적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지가 없었던 한목사 자신의 겸허한 삶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떤 것을 사람 앞에 나태내는데 주저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무명(無名)에의 의지’로 살았다. 자신의 명예나 인간적인 평가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고, 자신에 관한 어떤 것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한상동목사를 ‘무명에의 의지로 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상동은 자신에 관한 어떤 형태의 것도 남기려는 의지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는 교회 주보를 만드는 일이나 자신의 설교집을 출판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서 깊은 신앙의 소유자였고 하나님의 말씀에의 복종과 진리파수를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한상동목사는 ‘한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The minister of Word of God in Korea)였다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이 말씀은 한상동목사가 평생 동안 믿고 확신했던 말씀이었다.


1) 한상동은 1901년 7월 30일 경남 김해군 명지(鳴旨)에서 한재훈(韓在勳)씨와 배봉애(裵奉愛)여사 사이에서 4남 4녀중 4째로 태어났다. 1916년 다대표의 실용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21년 5월 31일 동래군 기장면 출신 김차숙(金次淑))과 결혼하였다. 1924년 박창근(朴昌根)전도사의 전도로 입신하여 1925년 세례를 받았다. 호주장로교선교부(APM)의 배려로 진주 광림학교 교사(1927-8)로 일하던 중 목회에의 소명을 얻고, 피어선 고등성경학교(1928)를 거쳐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1933-36). 1929년 하동 진교리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여, 부산초량교회(1936. 4- )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1937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마산문창교회(1937-39)에서 목회하였으나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를 사면하고, 일시 밀양 마산리교회(1939)에서 봉사하였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한 이유로 1940년 7월 체포, 구금되었고, 5년간 투옥되어 있다가 1945년 8월 17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1946년 5월 모친의 별세로 남하하였으나 38선이 고착화됨으로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해 7월 30일에는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46년 6월 23일 시작한 진해 하기신학강좌가 모체가 되어 9월 20일에는 주남선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51년 10월에는 초량교회를 사면하고 삼일교회를 설립하여 1972년까지 목회하였다. 1954년에는 훼이스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받았고 1971년에는 고려신학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74년 1월 정년퇴임 하였고, 1976년 1월 6일 소천하였다.

2) 필자의 ‘한국적 신학’ 혹은 ‘한국에서의 신학’이라는 표현은 한국인의 주체적인 신학활동 여부에 따른 표현으로서 1930년대 이전 한국장로의 경우 한국인의 주체적인 신학활동이 거의 없었고, 선교사들이 신학활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1930년대 이전의 신학활동은 주로 선교사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 신학의 내용도 서구신학의 소개와 변증이었다. 그러나 감리교의 경우는 달랐다. 1916년부터 발간된 「신학세계」에는 1930년 이전에 이미 한국인 신학자들의 글이 주축을 이루었고, 한국인의 주체적인 신학운동을 고양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학에 대한 종교사적 접근, 토착화 작업 등 소위 한국적 신학의 모색이 뚜렷했다. 이런 경향성은 「신학세계」 창간사에도 나타나 있다. 즉 “성경과 신학의 연구한 바를 게제하야 ... 조선인의 신덕(信德)을 배양하고 ... 교역자의 지식을 증진케 함”이 감리교의 신학잡지 발간 목적이었다.

  그러나 장로교의 경우, 1918년 창간된 「신학지남」은 신학연구 논문보다는 목회자와 신학생을 위한 지남(指南)을 주목적으로 했다(「신학지남」 제1권, 1호, 사설 참고).

3)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논자들의 주장이 일치한다. H.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An Historical Outline", Part I, The Wester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XXIX No. 1 (Nov. 1966), 26ff; Chun Sung Chun, Schism and Unity in the Protestant Churches in Korea, (PhD Thesis, Yale University, 1955), 67.

4) H. Conn, 27, 김양선, 190-191.

5) 1930년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교회에 대두된 3가지 신학적 변화는,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 신비주의 사상의 대두, 그리고 일본의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의 유입이었다.

6) 일본에서는 1930년 11월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1930년 국민의 절대적 지지로 선출된 유꼬 하마구찌 정부를 전복시키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로부터 일본은 군국주의자가 득세하게 되었고, 신사참배 강요, 전쟁정책의 수립 등 군국주의가 심화되었다.

7) 한상동은 1931년 1월 6일 소집된 경남노회 제29회 노회에 이수필, 윤술용, 홍성만, 박찬규, 주상수 등과 신학교입학 허락청원을 냈으나, “한상동씨는 아즉 학비도 확뎡이 업고, 또한 거리낌이 잇슴으로 아즉 기다림이 조흔줄 아오며”라고 하여 부결되어, 댕 해에 입학하지 못했다.「경남노회록」, 147.

8) 한상동, “현하 대한교회에(上)”, 「파수군」 제2호(1950, 1월), 8-10

9) 김양선, 53.

10)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서울; 영음사, 1992), 97.

11) 이상규, “한상동론,” 「한상동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부산: 도서출판 광야, 1986), 236.

12) Seu, Young Il, To Teach and To Reform; The Life and Times of Dr Yune Sun Park, (PhD Thesis, Wester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2), 294.

13) 평양지방법원 예심종결서 (平壤地方法院 豫審終結書), 1, 2, 3, 4항 참고(심군식, 「세상끝날까지」, 433).

14) 한상동, 「신앙세계와 천국」, (부산: 아성출판사, 1970), 5(머리말)

15) 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上,” 8.

16) 한상동, 현하 한국교회에, 12-13.

17) H.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An Historical Outline", Part IV, The Wester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XXX No. 2 (May. 1968), 136

18) 박윤선, 55-56.

19) 「파수군」, 105호(1960. 12), 49 참고.

20) 이상규,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199, 230-232.

21) ‘大韓敎會’란 한상동이 즐겨 사용하던 용어로서, 비록 지역적으로는 경남. 부산 지역에서 교회 쇄신운동을 전개하지만 그 범위는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상동「現下 大韓敎會에(上)」파수군 제2호(1950, 1월), 8-13 참고.

22) M. E. Osterhaven, The Faith of the Church, 1982.

23) 한상동, 「주님의 사랑」, 46.

24) 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res. & Reformed, 1956), 49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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