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미완성의 교회개혁가”

   
홍치모교수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한상동목사의 위치를 “한 마디로 말해서 미완성의 개혁자”라고 할 수 있겠다고 제안하였다.1) 홍교수는 그의 글의 결론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상동목사는 결과적으로 신학대학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꿈이 반쪽만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가 중심에서 간절하게 염원하여 마지 않았던 한국교회의 회개와 정화는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교회가 과거에 저질렀던 신사참배에 대한 죄는 완전히 회개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미숙하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마치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겨 버렸다. 고신교단은 합동측과 합치므로 회개운동은 중단한 셈이다. 선지자적 정신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갖는 고생 끝에 신학교를 세우고 교단을 창설한 한상동목사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고독한 신앙가로서, 미완성의 교회개혁가로서 남게 될 것이다.”2)

“미완성의 교회개혁가” - 사실, 교회개혁이란 언제나 미완성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상에서는 완전한 교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개혁가를 “완성의 개혁가”라고 할 수 있겠가? 루터가 그러한가? 칼빈이 그러한가? 그 이후의 어느 누구에게라도 “완성의 개혁가”라는 호칭을 붙일 수 없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한상동목사를 “미완성의 개혁가”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모든 개혁가들이 ‘미완성의 개혁가’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치모교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미숙함, 혹은 미완성을 생각할 때, 한목사가 그렇게 열망하였던 것의 미완성이라는 면에서, 그를 “미완성의 교회개혁가”라고 부름직도 하다. 이 신사참배문제로 인하여 야기된 한국교회의 타락으로부터 갱신과 쇄신, 혹은 개혁을 위해서 그처럼 열망한 사람을 손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상교회의 너무나도 자명하고 명백한 명제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명제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한국교회에 있어서 “개혁된 교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그런 “개혁된 교회”가 한국교회사에 존재하기나 했었는가? 과연 한국교회의 어떤 사람이 “개혁된 교회”를 언급할 때, 그 교회는 미국의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아니면, 영국이나 화란 등의 어떤 나라들 속에서의 어떤 교회들을 말하는가? 아니면 독일의 교회역사 속에 있는 교회들인가? 아니면 스위스의 교회들의 역사 속에 존재했던 그런 교회들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노라면, 개신교선교 100년의 짧은 역사 가운데에서 아무래도 한국교회에는 “개혁된 교회”가 존재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서구교회에서 요청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부단히 교회를 새롭게 개혁해 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좀 더 탄력적으로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이 점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한상동목사의 개혁신학과 언약신앙을 말할 때, 이 “개혁”과 “언약”이란 용어를 또한 유연성있게 해석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2. 한상동목사의 개혁신학

a. 한상동목사에게는 개혁신학이 없는가?

이 점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한상동목사를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서영일교수같은 경우이다. 서교수는 박윤선교수의 개혁신학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곧 박윤선의 신학이었다”고 한다.3) 이때, 그는 덧붙이기를 “한상동이 자신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 불렀는데, 신학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그가 개혁주의라는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고 한다.4) 그 의심의 이유는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50년대 이후였다는 홍치모교수와 인터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한상동목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까? “개혁주의”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이 1950년대였는데, 한상동목사가 그 이전에 “개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한상동목사의 개혁주의에 대한 관심이 시대를 앞질렀고, 또한 탁월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도 이미 한상동목사는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서교수는 말하기를, “한상동목사가 의미하였던 바는 구(舊)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재건하고 이어가는 신학이었을 것이다”고 한다.5) 이것은 “구(舊)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재건하고 이어가는 신학”은 “개혁주의라는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처럼 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서교수의 ‘구(舊)평양신학교의 신학’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이런 편견은 그가 연구하고 있는 박윤선교수의 ‘구(舊)평양신학교의 신학’에 대한 평가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박윤선교수는 자신이 수학하였던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수준을 회상하면서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Reformed) 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6) 물론 교수진이 성경의 권위를 칼빈주의적으로 믿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는 그 교수진들이 제공하는 수업을 통해서 신학생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가 “칼빈주의”를 해득하게 된 것은, 바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의 수업을 통해서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가 미래에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7)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의 칼빈주의에 대한 확신을, 그는 “예수 믿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박교수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칼빈주의에 대하여 확신하게 되었다고 하면, 평양신학교에서는 칼빈주의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요, 그의 말대로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 것을 뜻”하므로, 그는 평양신학교시절에는 “예수를 믿는 것”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박교수의 평양신학교시절에 있어서의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는 그의 “예수 믿는 것”에 대한 이해와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그의 평양신학교에서의 “칼빈주의”에 대한 수업들이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는 못했다”는 그의 말 그대로라면, 그 당시 그의 “예수 믿는 것”도 “선명한 이해”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그렇다.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주의를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박윤선교수가 자기의 평양신학교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에는 “(교수진들이)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는 못하였다”는 말을 상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평양신학교시절에 예수를 믿지도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믿기는 하였지만 웨스트민스터신학교시절과 비교해 볼 때 평양신학교시절에 예수 믿은 것은 상대적으로 칼빈주의적 관점에서의 신학적 통찰이 부족하였다고 보였을 것이다.8) 이렇게 본다면, 박교수의 평양신학교에서의 칼빈주의 현황에 대한 회고도 상대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박교수 자신의 관점에서 평양신학교의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임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평양신학교에서의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에 대한 교육이 완전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개혁교회’는 이 지상에서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개혁주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9) 보다 더 성숙한 ‘개혁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성숙’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이런 면에서 평양신학교에서의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교육은 상대적으로 부실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아직도 선교적 상황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그 당시 평양신학교의 교육에 있어서 인정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10) 그러므로, 한상동목사가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서 비록 상대적인 면에서 박윤선교수가 웨스트민스트신학교에서 확신을 갖게 된 그런 ‘개혁주의’의 이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개혁주의’라는 개념을 ‘바르게 이해했는지 의심이 간다’는 서영일교수의 평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심지어는 박윤선교수의 ‘개혁주의’조차도 후학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진한 바가 있다. 유해무교수는 “개혁주의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던 설립자(ie. 한상동목사)나 송상석 목사 등이 칼빈주의나 개혁신학을 운위한 것은 전적으로 박윤선목사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박윤선목사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한 마디로 성경주의”라고 결론짓는다.11) 이러한 박목사의 “성경주의”는, 유교수에 의하면, “성경이면 그만이다”는 신앙논리에 안착하며, 이런 성경관이 박교수가 평생 몰두한 성경주석작업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한다.12) 그리고, 이러한 박윤선교수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유교수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 “그의 주석에는 구속사적 언약신학과는 대치되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며, “개혁파의 중요한 특징인 말씀과 성례라는 은혜의 방편에 진정한 관심”을 박교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3) 이렇게 박윤선교수의 “개혁신학”도 후학에 의하여 미진하고 아쉬운 것으로 보인다면, 상대적인 면에서이다. 유교수도 그의 후학에 의해서 그렇게 평가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평가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한상동목사가 개혁주의신학에 대해서 공언하고 있는 것을 한목사가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목사 자신이 공언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을 것이다.


b. 한상동목사의 개혁신학

이런 관점은, 한상동목사가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한상동목사는 일제말 평양감옥소에서 지내시던 중 일본의 패망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직감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상을 하게 된다: 

“1. 수도원을 설립하여 일본 정치 하에 타락된 목사들을 수용할 것. 2. 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서 한국교회와 운명을 같이할 목사를 양성할 것. 3. 전도인을 길러서 교회를 설립할 것.”14)

한목사의 해방 이후의 족적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 구상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목사님의 신앙과 신학을 평가하는데 오해가 생기기 쉽다. 위의 구상은 실제로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쇄신운동에 대한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로 인하여 변질되고 더럽혀진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이것은 소극적이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대안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올바른 신학에 기초한 신학교건립에 대한 구상이다.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복구재건’한다는 것이 그 당시의 구상이었지만, 그 후 그렇게 ‘복구재건’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보시고, 새로운 신학교를 건립할 구상을 세우시게 된 이다. 세 번째 구상의 전도자 대량양성은 이러한 올바른 정통신학교건립에 부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후 세우게 된 ‘고려신학교’는, 그 당시 평양에 존립하고 있었던 가짜평양신학교와 소위 자유주의신학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서울의 조선신학교에 대해서 진짜평양신학교의 신학과 정신을 잇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평양이나 조선이라는 이름과 필적할 수 있는 이름이 바로 ‘고려’였던 셈입니다.15)

한목사에게 있어서, 자유주의신학에 대결할 수 있는 정통신학에 기초한 신학교건립은 그의 인생의 중차대한 사명이었다.16) 그래서, 정성구박사는 ‘한상동목사의 일생 중에 두드러진 것은 역시 신학대학의 설립’17)이었다고 말합니다. 박윤선박사를 중심으로 하는 진해강좌를 거쳐서 1946년 부산진 (前)일신여학교 교사를 빌려서 신학교창립개교식을 드디어 가진 이후에도 한목사님의 족적은 줄곧 이 신학교를 통한 목회자양성과 관련되어 있다. 신학교교사건립을 위한 모금을 나서게 되고, 화란의 31조파의 원조로 신학교교사건축을 완공하게 된 것이 모두 이와 관련된다. 이런 신학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상동목사가 나름대로의 어떤 신학적 소신이나 개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 심지어는 한목사가 “서구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평가하는 것은,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신학이 옳은가 그른가를 인식하고 분별할 줄 아는 것은, 나름대로의 신학적 소견과 식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인식하고 분별할 줄 모르면서도 그 신학을 추종한다면, 그것은 맹종이고, 신학이나 그 신학적 전통을 우상화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박형룡교수나 박윤선교수를 고려신학교의 중심축으로 삼고자 하였던 한상동목사의 식견과 분별력은, 나름대로의 신학적 좌표설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윤선목사가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한상동목사가 묵종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박윤선목사가 가르치는 신학이 옳다고 볼 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존중하였던 것이다. 더욱이나 그렇게도 염원이었던 신학교설립을 염두에 두고 이 신학교의 방향설정이 어떠해야 하느냐 할 때에 그 방향감각은 비록 자신이 그것을 강단에서 가르칠 만큼의 학문적 깊이를 가지지 못했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감각은 기회만 있다면 충분히 만개하고 표현될 수 있는 하나의 씨앗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상동목사의 개혁신학은 그런 하나의 씨앗의 형태로 그에게 간직되어 있었고, 그 씨앗과 같은 감각으로 박형룡박사와 박윤선박사의 개혁신학을 고려신학교의 신학으로 삼고자 분별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상동목사님이 그렇게까지 염원해왔던 신학교설립이 이루어졌을 때, 그 ‘고려신학교설립취지서’를 보면, 분명하게 ‘개혁파교회’나, ‘칼빈주의신학’을 의미하는 용어가 등장한다:

“...신학운동(神學運動)이라고 하여 오인(吾人)은 백과사전식(百科辭典式) 종교적(宗敎的) 지식(知識)을 교수(敎授)하는 것을 목표(目標)하지 않고 성경(聖經)의 독자적(獨自的) 신임성(信任性, αυτοπιστια)를 믿는 개혁교신학(改革敎神學)18)의 원칙(原則)에 확립(確立)하야 밝히도 정왜(正歪)와 시비(是非)를 단(斷)하는 칼빈주의(主義)의 신학(神學)을 수립(樹立)코자 하는 바입니다. 그리하야 우리 교계(敎界)의 신앙사상상(信仰思想上) 혼란(混亂)을 교정 또는 통일(統一)하려고 간원(懇願)하야 마지 않슴니다....”19)

이 설립취지서는 1946년 여름에 작성되었다. 비록 홍치모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1950년대말까지는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고려신학교의 설립취지서에서는 이 용어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국교계의 일반적인 수준보다는 고려신학교의 “개혁신학”에 대한 관심의 수준이 훨씬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였고 그렇게도 신학교설립을 염원해왔던 한상동목사가 이 용어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취지서작성에 박윤선목사가 주도적이었다고 백보양보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20) 물론, 한상동목사가 개혁교회의 아주 구체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박윤선목사조차도 개혁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개혁교회에 구체적인 청사진을 가지게 된 것은, 그 이후에 화란에 유학을 다녀온 뒤에 형성된 것이다. 비록 그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시절에 화란의 신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화란어를 독학하여 바빙크의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개혁교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에 대한 것은 아무래도 화란을 직접 다녀와서 체험한 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미국에서부터 박윤선박사가 화란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이런 취지서에 함축시켰다고 한다면, 그와 더불어 신학교설립에 앞장 섰던 한상동목사가 개혁주의라는 용어나 개념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박윤선박사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박윤선박사 외의 그 당시 다른 이들보다는 앞선 견해를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한상동목사의 개혁주의신학에 대한 관심은 초기 고려신학교관련 문서에 거듭 표명되고 있다. 한상동목사와 주남선목사는 조그만 소책자를 통해서 고려신학교가 추구하는 신학적 이념은 개혁주의신학임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다. 이 글을 작성하는 것에는 박윤선박사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또 장로교원본 신조서인 웨스트민스터신조개요서의 교리대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하여 교리와 및 생활을 순결하게 할 목사양성을 이념과 목적으로 하고 현하 한국교계에 거대신학자인 박윤선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칼빈적 개혁파의 사상 그대로 생활하도록 노력하여 왔고, 앞으로도 일층 노력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21)

여기서 한상동목사는, ‘칼빈적 개혁파의 사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장로교원본 신조서’인 ‘웨스트민스터신조개요서’로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 글을 쓴 때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남선목사님이 돌아가신 연대(1951년)을 염두에 둔다면, 1950년대 이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고려신학교가 설립된지(1946년)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이다. 곧, 한국교회내에서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이전부터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이 용어를 사용하고 또한 이 신학을 정통신학으로 인정하고 분별해 왔던 것이다.

한상동목사가 이 “개혁주의”, “개혁신학”에 근거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고려신학교와 신학대학을 운영해 왔고, 또한 삼일교회를 목양해 왔느냐 하는 것은, 또한 다른 탐구의 주제일 수 있겠지만, 서론에서도 언급하였거니와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참고할 때, 계속 개혁되어가야 할 점을 한상동목사 역시 인정하였음을 전제한다면, 이것 또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미완성의 교회개혁’은 바로 그의 발걸음을 따라서 따라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과업으로 넘겨진 것이고, 우리 모두 또한 미완성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3. 한상동목사의 언약사상

a. 개혁신학과 언약사상

언약사상은 개혁신학을 개혁신학되게 하는 것이다. 박윤선목사는 1954년도에 발간된 조그만 등사판 소책자, 『우리의 신앙노선(信仰路線)』에서, 현대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알미니안주의, 복음주의와 신비주의 등을 비판하는데, 그 중에 ‘복음주의’를 비판하면서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 신학을 깨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契約神學)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저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신앙은 안가진다”고 한다.22) 여기서 말하는 ‘계약신학’은 ‘계약/언약사상을 주장하는 신학’을 말한다. 박윤선교수의 논조는 개혁신학을 주장한다고 하면서도 계약/언약사상을 강조하지 않으면 그것은 계약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로 비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사수해야 할 ‘우리의 신앙노선’으로 개혁주의(칼빈주의)를 제시하면서 그 특징을 아홉 가지로 나열하는 중에도 이 계약/언약사상을 강조한다. 그 다섯 번째 특징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칼빈주의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운동을 일정한 체계와 원칙으로 영원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은혜로운 계약(契約)과 계시(啓示)와 성취(成就)의 결과로 본다. 이렇게 그는 신자가 받은 구원이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의 천박한 근거에서 설립되는 줄로 생각하지 않고 영원하고 근거깊은 구원사(救援史, Salvation History)의 전개로 나타난 결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구원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거깊은 계획과 결정에서 안심하며 믿는다. 따라서 그가 저렇게 근거깊은 구원을 받은 줄 아는 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모든 난관 많은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에게 복속(服屬)하게 하려고 생각도 바치면서 돌진한다.”23)

박윤선교수에게 있어서 계약/언약사상은 개혁주의신학의 중심에 있다. 사실, 구약과 신약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언약이라는 말은, 인간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탁월한 표현이다.24) 이 개념은 신자의 개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삶을 위한 기초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의 초기시기에는 완전히 전개되거나 조직화되지 않았다가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후 2세기를 지내오면서 이 언약교리의 뼈대가 조직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언약신학은 쯔윙글리, 불링거, 칼빈, 우르시누스, 그리고 코케이우스와 같은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들의 주석이나 신학적 숙고에 있어서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특별히 스코틀란드 언약자들(Scottish Covenanters)과 이들의 계승자들은 이 언약개념을 자신들의 신학적, 정치적 사상의 축으로까지 삼았다.25) 우리는 이 스코틀란드교회의 언약신학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언약사상을 역사신학적인 측면에서 해외에서 연구하여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서요한교수는,  그의 책 『언약사상사』의 결론부분에서 스코틀란드교회의 언약신학이 갖는 문제점으로, 스코틀란드교회는 이 언약을 여러 중심주제들 중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오직 유일한 중심주제인 것처럼 강조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26) 성경에는 놓쳐서는 안되는 다른 많은 중요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지적이다. 오히려 언약은 성경의 여러 중심주제들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현재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교수인 마이클 호튼이 제시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의 중심주제들을 다룰 수 있는 일종의 배경이요 뼈대이다.27) 성경을 이해할 때 언약이라는 뼈대와 배경을 고려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희생, 구원, 하나님, 하나님 나라 등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중심주제가 아니고, 오히려 다른 중심주제들을 다룰 수 있는 배경이 바로 언약이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언약사상은 개혁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혁신학은 간단하게 말하면 언약신학”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28) 우리가 상대적인 의미에서라도 한상동목사에게 개혁신학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의 그 개혁신학에 있어서 언약사상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b. 한상동목사의 언약사상

뜻밖에도 한상동목사의 언약사상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고신총회 내에서 발간된 한상동목사에 관한 어떤 책에서도 한목사의 언약사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글은 거의 없다.29) 이것은 심군식목사가 한상동목사의 신앙사상을 압축해서 찬송가사로 삼기 위해서 요청받았을 때 한국찬송가공의회에 제출한 가사의 제목이 ‘언약의 주 하나님’(찬송가248장)이라고 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현상이다.30)

심군식목사는 과연 한상동목사의 신앙을 이 가사를 통해서 잘 압축해서 요약하고 있는 것일까? 심군식목사가 한상동목사 가까이 생활하면서 들었던 한목사님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들에 기초해서 저술하였다는 한상동목사전기의 제목이 『세상 끝 날까지』인 것도 언약사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마태복음28장20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심목사에 의하면, 이 표현은 한상동목사가 하동 진교교회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중에 무력함에 빠져서 뒷동산에 올라 기도하는 중에 들었다는 첫 ‘영음’(靈音)이었다.31) 이 전기가 비록 때로는 “작가가 재구성한 영화 대본 같은 인상”을 가진다고 평가될 정도로 가공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32) 이 전기에서 한상동목사가 너무나도 자주 이 약속을 상기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인상적이다.33) 또한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박윤선목사가 한상동목사의 구술을 받아 적었다고 하는 『주님의 사랑』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본다.34) 그러므로, 이런 표현들은 한목사의 전기를 쓴 심군식목사나 한목사의 옥중기를 구술한 박윤선목사의 의견이 들어갔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한상동목사가 자주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는 언약사상의 너무나도 중요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35) 

그렇다면, 한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이런 언약사상을 어느 정도로 드러내고 있을까? 그의 설교집은, 출간된 것으로는 『신앙세계와 천국』(부산, 아성출판사:1970)36)과 『고난과 승리』(부산, 교회문제연구소:1980)37) 두 권이고, 나머지는 자필원고형태로 스프링노트 20권이 있는데, 현재 합본하여 7권으로 보관되어 있다.38) 이 설교집들을 통하여 한목사의 생각을 판단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상규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이 설교집의 설교들은 대지중심으로 요약되어 있었던 것을 설교문으로 재작성한 것들이기 때문에, 설교집을 편집하여 출간한 이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대지 자체는 한상동목사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39) 이 대지를 중심으로 해서라도 그의 생각의 편린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40)

그의 자필설교노트모음집들에 보관되어있는 설교들은 모두 629편이다.41) 그의 육성이 녹음된 설교는 모두 4편만 보관되어 있다. 이들 중 언듯 그 제목만을 보아도 언약사상과 관련이 있는 설교들을 보면, 자필설교원고모음집1에 있는 모두 66편의 설교들 중에서 4편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하심에 대하여”(1-23)42),“하나님의 약속”(1-26), “세례는 주님명령”(1-30), “무지개에 대하여”(1-58)라는 제목의 설교들로서 모두 출간된 두 설교집들에는 없는 것들이다.43) 수량적으로 비교해 보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44) 하지만, 이런 판단은 너무 성급한 것 같다. 자필설교모음집2에 나오는 “주님의 약속”45)이라는 제목의 설교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경의 다른 주제들을 곧 선택사상, 구속사상, 인간의 연약성교리와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세 개의 대지만 설교노트에 있고, 그 대지에 대한 설명이 첫째 대지에 간단히 있을 뿐 둘째, 셋째 대지에는 설명이 없다. 첫째 대지는, “택하신 까닭에”라 해놓고 어린 아이들을 잃어버린 예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면서 야곱이 형 에서에게서 피난한 생활을 메모해 두고 있다. 둘째 대지는, “보혈로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라고만 되어 있고,46) 셋째 대지도, “우리가 약한 까닭에”라고만 되어 있다.47) 하지만 서론은 유난히 긴 편이다.48) 이 서론 부분에서, 한 목사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있다면서 바로 그 많은 약속들 중에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는 본문(마28:16-20)으로 설교하겠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천사가 지어준 이름인 “임마누엘”과 연관시킨다. 또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다고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 대한 설교는 삼일교회에 일찍부터 출석하셨던 분들이 참 자주 들었던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49) 곧 다니엘의 세 친구에 대한 설교도 한상동목사의 언약사상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서론에서 계속 말하기를, 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고 한다.

이 설교의 본론 중에 한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를 세 가지 대지로 요약해놓고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우리를 택하신 까닭”이요, 둘째는 “주님의 보혈로 우리를 사신 까닭”이요, 셋째는, “우리가 약한 자인 까닭”이다. 이 대지로만 되어 있는 부분을 확대해석하는 것은 한목사의 생각을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이 대지들을 나름대로 확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다른 언약설교들을 참고하면, 한목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는 언약신학의 본질을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나름대로의 깊이를 갖고 성경의 다른 주제들과 결합시키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한목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는 언약사상을, 첫째 대지를 통해서 선택사상과, 둘째 대지를 통해서 구속사상과, 셋째 대지를 통해서 인간의 연약성과 각각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언약설교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언약을 선택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언약사상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한목사가 알고 있었느냐 알지 못하였느냐는 것은 현재 관심사항이 아니다. 단지, 독특한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50) 또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보혈로 값주고 사셨기 때문”51)이다. 이 점을 한목사는 “하나님의 약속”((1-26)이란 설교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기이하게 성취가 되는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종노릇하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4백년뒤에라도 성취가 되었다고 하고,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은 2천년 뒤에 주님탄생하사 만백성이 복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 대지인, “우리가 약한 자인 까닭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그의 설교, “무지개에 대해서”(1-58)가 보충하고 있다. 이 설교에서 한목사는, 인간생활을 “雨중의 인생”, “빗없는 세계”, “폭雨의 세계”,“걱정근심의 세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계”(폭풍우의 세계)로 묘사하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이렇게 망할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데, 그것이 바로 “구속사의 언약”인데, “다시는 멸망치 않게 할 것을 무지개로 언약하였다”고 한목사는 설교한다. 그러면서 “인생은 의롭다 선하다 참되다 할 인생이 없을 것”이라면서 “죄로 인하여 망할 것이 자연의 천리가 아니냐”고 질문하면서, “이에 언약 있으니 주의 십자가를 믿는 자의 구원의 언약”이라고 결론짓는다.

몇 가지 설교들을 참고할 때, 한목사의 언약사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과 이 함께 하심이 “하나님의 선택”, “십자가의 구속”, “인생의 연약함과 죄인됨”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다른 설교들을 찾아보면 그의 언약에 대한 설교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의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라는 주제는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출간된 그의 첫 번째 설교집의 제목이 『신앙세계와 천국』인데, 이 제목에 나타나는 “신앙세계”는 한상동목사가 자주 사용하는 너무나도 독특한 용어이다. 이 점을 심군식목사도 잘 간파하여 이 제목으로 나타나는 설교를 이 설교집의 제일 첫 번째에 싣고 있다. 그것이 “신앙세계는 천국을 보여준다”이다. 두 번째 설교집을 출간한 이들도 이런 점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 『고난과 승리』라는 제목의 설교집의 첫 번째로 실은 설교의 제목은 “신앙의 세계”라는 제목의 설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형규교수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학위논문 속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52) 김형규교수에 의하면, 한상동목사에게 있어서 “신앙세계”(the world of faith)는 한목사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경험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신학자 죠지 래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이미 성취되었으면서 또한 완전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죠지 래드의 강조점 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한상동목사의 이 “신앙세계”는 “현생에서 그리스도와 갖는 친밀한 교제”(the intimate fellowship with Jesus Christ in this life)이다. 김교수는 이것이 한목사의 “여주동행”(與主同行)의 신앙이라고 한다. 언약을 한목사가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보고, 그것을 또한 “신앙세계”와 “여주동행”과 같은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그의 설교들은 거의 다 이런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설교들 속에는 암묵적으로 모두 “언약사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이클 호톤교수가 그의 『언약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53) 한목사의 언약사상은 그의 신앙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주제라기 보다는 중요한 모든 주제들을 다루게 되는 일종의 “배경”이요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54) 이렇게 그의 언약사상이 성경의 다른 중요주제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언약사상을 담고 있는 그의 설교들의 숫자는 크게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55)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한 가지 문제를 한목사의 언약사상과 관련해서 짚고 싶다. 그의 동방요배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이다. 한목사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56) 그의 동방요배문제에 대해서는 견해들이 다르다. 고신내에서도 그는 동방요배를 하였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견해를 갖는 이유들은 이 문제에 관한 재건파에서 나온 견해들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목사 자신이 증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재건파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한목사의 견해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일이 아닐까? 한목사의 육성이 녹음되어 있는 것은 흔하지 않다. 설교로는 테이프로 녹음되어있는 네 개뿐이다.57) 그 중의 하나가 한국선교100주년기념대회에서 남긴 것인데, 이 설교는 한목사가 소천하시기 전 3년 전의 것이다. 이 설교에서 그는 강력하게 동방요배가 잘못된 것임을 비판하고 있다.58) 또한 심군식목사가 쓴 전기에서도 동방요배를 비판하고 있는 한목사의 입장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59) 이런 입장은 한상동목사의 생전을 기억하고 있는 삼일교회의 교인들이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일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반대운동이 한창 고조되고 있던 때에 한목사가 섬겼던 밀양마산교회의 교인들 중에도 한상동목사는 신사참배만 아니라 동방요배도 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이들이 생존해 있다.60) 이 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살펴본 그 교회의 현재 담임으로 시무하는 박시영목사는 최덕지 전도사가 일제 수난기에 잠시 밀양마산교회에 칩거한 적이 있다면서 “당시 밀양마산교회에서 한상동목사님과 함께 할때 동방요배를 한 목사님께서 묵과하거나 동조했던 것처럼 와전되어 전해져 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최훈목사는 전언받은 이야기를 사실화시켜 마치 한 목사님께서 동방요배를 용인하신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마산에 있던 테메시선교사댁에 방문했을 때 한상동목사님께서 다소 동방요배에 대해 유화적인 발언을 했던 것을 두고 재건파는 두고두고 이를 고신은 동방요배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61) 

 이런 사실들이 한목사의 언약사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언약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다. 이런 언약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목사의 행적에 있어서 모든 순간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인간이었고, 또한 실수라고 보여지는 일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요배는 그가 직접 잘못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일인데도 그가 실제로 동방요배를 일제시대때 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의 신앙인격을 모독하는 것만 아니라 또한 그의 인간성까지도 불신하는 것이 아닐까? 소천하기 바로 몇 년 전까지 한목사는 동방요배가 잘못임을 강력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는가? 설령, 한목사가 동방요배를 하였다고 한다면, 동방요배가 잘못임을 강력하게 설파하고 있는 그의 생애에 한 번이라도 동방요배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회개하지도 않은 채로 강력하게 이 동방요배를 그렇게 강력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 대해서 재건파와 그 의견에 공감하는 이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대부분의 설교가 이렇게 그의 언약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될 수 있고, 또한 그의 언약사상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고 할 때, 이런 생각을 기본으로 해서 살아왔을 한목사가 (비록 그의 생애에 실수와 문제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회개도 하지 않은 채로 동방요배가 잘못이라고 그렇게 역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목사의 동방요배 사실여부와는 관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언약사상에 대한 본고의 주장은 여전히 실효하다. 그의 언약사상은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개인적으로 체험되어진 것에 기초해서 그의 여러 가지 중요한 성경적 주제들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있는 그의 사상의 틀이요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언약도 “성취”되었지만 그 “완성”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개혁주의자의 신학과 신앙이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아직 없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상동목사의 개혁신학과 언약사상을 조명해 보았다. 그의 개혁신학은 다른 사람들이 아직 이 용어나 개념을 널리 사용하고 있지 않던 때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박형룡박사와 박윤선박사가 자신이 설립코자 하였던 고려신학교에 꼭 필요한 인물들인줄 알고 교장으로 교수로 모셔오고자 하였다. 자신의 일생의 목표였던 신학교설립의 사명을 이들을 통하여 구현시키고자 하였다. 아무 신학이나 가르치는 신학교를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주의, 혹은 신정통주의신학과의 논쟁과 대립을 통해서 파악하게 된 정통적 개혁주의신학에 기초한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런 그에게 개혁신학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말임에 분명하다. 비록 상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보다 완전한 개혁신학을 지향한다고 하는 의미로서의 개혁신학을 그의 주장과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이것은 언약사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언약사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너무나도 성경적인 진리를 개인적인 체험으로 확신하게 되었고, 체험된 그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여 주장하였고 설교하였다. 또한 성경의 다른 여러 중요한 교리들, 특별히 선택사상, 구속사상, 인간의 연약성과 죄성과 관련시킬 수도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언약사상은 하나의 틀이었고 배경이었다. 언약이란 말이나 용어가 ‘언약사상’이라고 표현할 정도에 이르도록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등장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약사상은 “신앙세계”나 “여주동행”의 주제와 얽혀 있기 때문에, 그의 신학이나 신앙생활을 논하는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한상동목사의 신학과 사상을 지금까지 언약사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신총회 내에서조차도 그러했다. 이것은 언약사상이 개혁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장로교신학의 관건이라고 할 때, 무언가 아쉬운 감이 있다. 고신총회가 참으로 개혁신학과 장로교신학을 추구하고 있다면, 고신총회의 설립자인 한상동목사의 신학과 사상을 이런 관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아쉬운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 관점에서의 조명이 필요할 것이다. 한상동목사의 신학과 신앙만이 아니라, 고신총회에 속해 있는 우리들 모두의 것들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본고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나 미진한 점을 안고 있다. 첫째,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한상동목사의 동방요배에 관한 견해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제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증언해 줄 수 있는 증인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필요하다. 이 문제를 좀 더 철저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둘째, 한목사에게서 언약사상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이러한 그의 언약사상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깊이 추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얼핏 스치는 생각으로는, 한목사의 언약사상은 박윤선목사의 언약사상이나 박형룡박사의 언약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은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레이놀즈교수의 영향을 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강력하게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추측은, 그가 하동 진교교회에서 체험한 ‘영음’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하였던 것처럼, 약간 다른 스타일이긴 하지만, 한목사도 “나와 함께 하리라”는 예수님의 영음을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기록된 성경, 곧 마태복음28장20절에 있는 성경말씀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모두 종합적으로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은 이 글의 아쉬움이다.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해 본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시는 약속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다. 한상동목사는 이 복을 누리셨고 지금도 그렇다.

부록1:

주님의 약속은62)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가리켜 신약이라 구약이라 합니다. 이 약(約)자는 약속이라는 약자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약속하시고 또 그 약속을 성취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살아 생전에 이루어 주신 것도 많고 또 그가 죽은 후에 이루어 주신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 중에는 인생에게 성취하신 일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약속도 있습니다. 남아있는 약속이 반드시 다 성취될 것을 믿는 것은 과거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 많은 약속 가운데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본문 말씀인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시라라>는 말씀입니다.(이 약속의 말씀은 참으로 든든하고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만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서울에 있으면서 나를 도와준다면 그것도 흐뭇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대통령께서 나와 한집에서 한방에 같이 있으면서 나를 보호해 준다면 나는 얼마나 만족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 나를 도와 주심도 만족하고 귀한 일인데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며 항상 나를 지켜 주시며 보호해 주시겠다니 너무나 감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가 지어준 이름이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이란 말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흡족한 일입니다. 사드락와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 하나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은대로 하나님은 그들의 머리털 하나 타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 택하신 까닭에(우리를 택하신 까닭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 인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겠습니까?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택하셨습니다. 잃어버리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잃어버리는 일은 기막히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를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부모들을 봅니다. 잃어버림은 이와 같이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은 범죄한 자입니다. 야곱은 욕심쟁이였습니다.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용서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43장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을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과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사랑하십니다. 이유는 택한자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택함 받은 것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주님이 믿어지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사실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성령을 받는 다 할 때 방언을 하여야 성령받은 증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을 수 있는 그 사실입니다.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실을 증명해 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주심을 믿는 이 사실은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2. 보혈로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주님의 보혈로 우리를 사신 까닭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이유는 값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벧전1:18)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주님의 그 피로 우리의 죄는 씻음을 받았고 우리는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값을 주고 산 것은 귀한 것입니다. 주님의 귀한 피를 주고 사셨으니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함께 하십니다. 사람들도 자기 것은 다 귀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자기의 소유물은 값있게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혈로 사셨으니 귀하게 보십시다.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우리가 약한 까닭에(우리는 약한 자인 까닭입니다.

인생은 강해 보이지만 실상 한없이 약한 존재들이 옳습니다. 인생은 약한 자인고로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무능한 존재이고 한없이 약한 자들입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달나라로 간다고 자부하지만 역시 인생은 약한 자입니다. 인생이 약한 자임을 주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에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리고 연약한 인생을 도우시기 원하십니다. 내가 연약한 자임을 알 때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루터(Martin Lurther)는 노래하기를 <내 힘만 의지할터면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구뇨? 내 예수 그리스도 곧 만유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뇨? 불가불 이기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전쟁의 곳입니다. 싸움의 곳입니다. 불의와 싸웁니다. 마귀와 싸웁니다. 죄와 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옳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 때 우리는 어디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인생은 한 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그 증명으로 인생은 죽음 앞에 큰소리 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뽐내는 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떠날 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이 약속이 없었다면 내 생명이 어찌 될번 한 것이겠습니까? 이 세상 떠날 때 갈 곳 몰라 방황하지 않을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참으로 든든하고 기쁘기 한량 없는 일이 옳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이 말씀은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은 별세계 나홀로 떠나면 어대로 가리오? 나와 함께 해주심에는 여기 큰 의미가 있는 것 뿐이다(주님의 많은 약속 가운데 오늘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보혈 흘려 구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약한 인생이 옳습니다. 약한 나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내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겠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 복된 말씀입니다. 인생은 아무도 죽음에 대한 절박감을 느끼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죽음의 길은 나와는 상관없는 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도적같이 삽시간에 우리에게 오고야 말것입니다. 이 죽음의 길에 만일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 없었던들 우리는 어찌 될 것이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니 나는 믿고 또 의지하며 맡기고 평안히 지내는 것입니다.)


1) 홍치모,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한상동목사의 위치”, 『장로교회와 역사』2호(2009년), p. 37.

2) 홍치모, 전게서, p.38.

3)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0), p.213. 이 책은 1992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 제출된 박사학위논문, 『To teach and to reform: The life and times of Dr.Yune Sun Park』을 장 동민목사가 번역한 것이다. 서영일교수는 자기 논문이 번역출간된 것을 보지 못한 채 2000년도에 작고하였다.

4) 서영일, 전게서, p.214.

5) 서영일, 전게서, p.214.

6)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정암 박윤선목사의 자서전』 (서울, 영음사:1992), p.55.

7) 박윤선, “신학연구,주석,설교에 바친 생애”, 『신앙계』(1983년1월호), p.38-41), 서영일, 전게서, p. 146에서 재인용.

8) 이 점에 대해서, 박윤선교수의 신앙간증을 좀 더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유학 가기 전의 “예수 믿는 것”에 대한 이해가 유학 중에 전격적으로 바꿨을 수 있다. 그리하여 칼빈주의를 확신하였던 것처럼, 예수 믿는 것을 전적으로 새롭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9) 이상규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서양영어에 있어서 ‘개혁교회’, ‘개혁신앙’, 혹은 ‘개혁사상’이라는 말은 있어도 ‘개혁주의’라는 말은 없다. ‘주의’(主義)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개혁주의자들의 전통을 잇는 한국개혁주의자들에게 이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인 것으로 이상규교수는 본다. 원래 ‘리폼드’(Reformed)라는 말은 ‘개혁신앙’(Reformed Faith) 또한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 등과 같이 특정한 신앙과 신학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중국인들이 ‘리폼드’(Reformed)를 ‘개혁주의’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용어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한상동과 그의 시대』, p.246, 각주248번). 하지만, 이것이 이렇게 중국을 통해서인지, 아니면 일본교회의 번역을 통해서인지는 문서를 통해서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위 ‘개혁주의’자들은 사람의 이름을 따라서 부르게 되는 ‘칼빈주의’라는 말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칼빈 자신도 자신의 이름 뒤에 ‘주의’라는 말이 붙여져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10) 이상규교수는 이 당시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 잡지인 『신학지남』에서 ‘칼빈신학’이 처음 논구된 것은, 1934년 남궁혁, 이눌서에 의해서였고, ‘칼빈주의’에 대한 논설이 처음 개재된 때는 1937년 함일돈선교사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또한 박형룡박사가 로레인 뵈트너의 『Reformed View of Predestination』을 『칼빈주의예정론』이란 제목으로 역간한 때는 1937년이었다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서 박형룡박사가 말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서, 이상규교수는 그것이 1976년의 진술로서 ‘후대의 해석’이라고 한다(『한상동과 그의 시대』, p.256.). 하지만, 이러한 박형룡박사의 진술은, 한국교회에 그 신학이 ‘전래되고 성장한’ 하나의 ‘과정’을 잘 진술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11) 유해무, “고신교회가 존속할 이유가 있는가?: 고신교회의 역사와 신학”, 『개혁신학과 교회』 22호(2009년), p.94.

12) 유해무, 전게서, p. 94. 유교수가 한상동목사가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공언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신학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p.101.)기 때문에 “성경중심적 보수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박윤선교수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암시하면서, 박윤선교수의 그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성경주의’라고 보고는 한 단계 위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정의상 모순이 있다고 보인다. 한상동목사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도 ‘성경중심적 보수주의’이고, 박윤선교수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이 ‘성경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성숙의 정도에 있어서 상대적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한상동목사의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이 ‘그의 신학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은, 서영일교수의 평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13) 유해무, 전게서, p. 99-100.

14) 한상동, ‘주님의 사랑’, 『파수군』29호, p. 22. ‘주님의 사랑’은 한상동목사의 신사참배반대로 인하여 옥고를 치룬 사연과 옥고의 과정 등을 1인칭으로 자술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한목사가 구술하고 박윤선목사가 기록하여 『파수군』 26,27,28,29호에 연재되었다. 한 것을 박윤선목사가 기록한 것이라고 밝혀놓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사랑』(부산, 성음사:1954)이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5) cf. 홍반식, “고신파의 어원에 대해서”,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위원회:1989), p.89-90.: "'고려'라고 하는 데는 우리 민족적인 전통과 국가적인 유서깊은 전통을 살리는 이념을 제외할 수가 없다. 우리 나라와 민족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호칭된 면이 있지만 세계적으로 고려(Korea)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려신학교라는 데는 우리 민족의 학교를 세운다는 사상이 들어 있었다. 우리 민족의 교회를 바로 잡아 세계만방에 복음을 선포할, 복음사역의 역군을 양성할 학문의 전당을 설립 육성한다는 이념이 들어있다."

16) 이러한 사명의식은 그가 평양신학교를 입학해서 공부했던 1933년에서 졸업했던 1936년까지 있었던 일련의 한국교회, 특별히 김재준목사와 박형룡목사와의 신학토론에 받은 깊은 인상도 한 몫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1933년 일본과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재준목사는 남궁혁목사에 의해 평양신학교 교수로 천거되었으나 그 신학사상 때문에 거부되었지만, 남목사의 배려로 『신학지남』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발표했던 논문은, “욥기에 현한 영혼불멸”(15권3호,1933), “전기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15권5호,1933), “아모스의 생애와 예언”(15권6호,1933),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16권1호,1934), “실존의 탐구”(16권5호,1934), “뿍맨운동과 그 비판”(17권1호,1935),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17권1호,1935), “위대한 종결-예레미야의 최후”(17권3호,1935) 모두 8편으로 역사적 기독교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 박형룡교수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김재준목사가 글을 이 잡지에 싣게 하지 못하였다. 이 당시의 논쟁의 분위기가 한상동목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고, 자유주의신학(정확히는) 신정통주의신학에 경도된 사람들이 신사참배에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 신신학과 신앙운동의 역상관관계를 추론하였을 것이고, 이 신학을 반대하여 박형룡교수 등으로 대표되는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잇는 일에 사명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7) 정성구, “한상동목사와 그의 설교”, 『한상동목사의 삶과 신학』(부산, 고신대학교출판부:2006),p.52.

18) 여기 나오는 ‘개혁교신학’은 ‘개혁파신학’, 혹은 ‘개혁신학’의 다른 말로 보인다. 바로 뒤이어 나오는 ‘밝히도’라는 말은 인쇄상의 잘못으로 보이며, 없어도 될 것 같다. 혹은 ‘확립하고 밝혀서’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19)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p. 30-33에 취지서전문이 실려 있다.

20) 유해무교수는 ‘고려신학교설립취지서’에 나오는 전문적인 술어들 중의 하나인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αυτοπιστια)'이라는 말에서 헬라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는 이 취지서는 박윤선박사가 쓴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문체도 박윤선교수의 문체라고 한다.

21) 주남선, 한상동, ‘대한예수교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출판 및 연대미상),이상규, “한상동과 개혁주의”, 한상동목사의 삶과 신학(고신대학교, 2005),p. 160에서 재인용. 이 상규교수는 2006년도에 출간된 그의 책 “한상동과 그의 시대”에서는 부록에서 이 자료를 수록하면서 그 연대를 1949년 7월이라고 확정시키고 있다.

22) 이 소책자의 전체 내용이 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의 410-418에  ‘참고문헌8’로 실려 있다. 여기에 나오는 “계약신학”은 “언약신학”과 동일한 개념을 담고 있다. 모두 Covenant Theology의 번역말이다.

23) 박교수가 이 책자에서 개진하고 있는 개혁주의(칼빈주의)의 나머지 특징들을 간단히 나열하면, 1)성경중심의 비당파주의, 2)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인정, 3)철두철미한 타율주의, 4)하나님영광의 인생목적, 6)과학존중(일반은총에 기초하여), 7)번쇄한 회의주의 반대, 7)하늘나라의 시민권인정과 삶, 9)성령적 신학에 기초한 기도의 삶 이다.

24) 서요한, 『언약사상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94). p.57. 서요한교수는 언약사상을 역사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는 국내에서 첫 번째 인물이다. 웨일즈의 글라모르간대학에서 학위취득하여 현재 개혁신학연구원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25) 서요한, 전게서, p. 58.

26) 서요한, 전게서, p.424.

27) 마이클 호턴, 『언약신학』(백금산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2009), p.17-33.

28) 존 헤실링커의 이 말을 아무런 출처표시 없이 마이클 호턴 교수가 그의 책, 『언약신학』p. 19에서 인용하고 있다.

29) 신현국목사와 심군식목사의 이 점에 있어서의 견해는 예외적이다. 신현국목사는 “후배가 본 목회자 한 상동”이란 글에서 한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다: “그 분은 마지막 은퇴하실 때까지 청년처럼 힘차게 설교하였습니다. 비록 피곤하실 때라도 일단 강단에 서기만 하면 힘있게 외쳤습니다. 특히 약속하신 메시야를 믿을 수 밖에 없는 확실성에 대하여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수십번을, 수백년을 믿어지도록 증거하시고,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그 주님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럴 수가 있겠는가/ 예언대로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과거에도 약속대로 이루어진 그 일이 앞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등의 특이하신 강조형식의 설교는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한상동목사10주기추모집 발간위원회, 『한상동 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부산, 광야:1986, p. 151-152). 심군식목사의 견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다룬다.

30) 찬송가 248장의 가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언약의 주 하나님 우리들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마

    친히 약속하시고 때가 되어 이삭을 나에게 하셨네.

 2. 아들 이삭 주셔서 그 약속을 이루고

    손으로 만지며 확인하게 하셨네 출애굽 약속은

    보지 못하였어도 아브라함 죽은 후 이루어졌네.

 3. 영원한 저 천국은 지금 안뵐지라도

    약속의 천국은 분명한 나의 본향 약속 다 이루어

    보여 주셨으-니 주님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네”


 이 가사가 한상동목사의 것으로 인쇄되어 있지만, 찬송가공의회의 부탁을 받아서 심군식목사가 작사한 것이라는 사실은, 찬송가공의회의 찬송가개편위원회의 위원들 중의 한 명이었던 김정일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확인한 것이다. 이 가사내용이 생각나게 하는 설교가 한상동목사자필설교모음1집에 실려있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설교이다. 이 설교는 출간된 두 설교집에는 실려있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는 어두운 마음으로는 믿어지기 어려워 이루는 방법에 있어 원대함과 오묘하심이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그 자손에게 주리라(창12) 한지 4백여년을 지나 그 자손에게 주셨으며 주시되 애굽에서 종노릇하였고, 광야 40년을 헤매었다. 그때 종노릇하던 백성이 어찌 (가나안의 축복을) 알았으며 광야 40년때 어찌 (가나안정착생활을) 알았으랴. 드디어 큰 족속을 이루고 가나안에....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은 2천년 후 주님 탄생하사 만백성이 복을 받았던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괄호안의 글자는 필자가 넣었고, 또한 현대어로도 고쳤다). 심군식목사의 가사는 아마도 이 설교를 참고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31) 심군식, 『세상 끝 날까지: 한국교회의 증인 한상동목사의 생애』(서울, 소망사:1977), p. 96. 이후 『세상 끝 날까지』로 표기함.

32) 서영일, 전게서, p. 210. 또한 삼일교회의 김만석장로와 같은 분은, 이 한상동목사의 전기에는 객관적인 진술에 있어서 잘못된 부분도 몇군데 있다고 한다(cf. 김만석, “코람데오”, 『삶과 신앙』(삼일교회보35호, 2009), p.32-33).

33) 심군식, 전게서, p. 122. 128. 169, 186, 193, 207, 240, 245, 247, 253, 254, 258-259, 266 등 일제시대 감옥에 갇히고 해방되어 남한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한상동목사의 생애의 중요한 고비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34) 한상동, 『주님의 사랑』, 이상규교수의 『한상동과 그의 시대』의 부록으로 실린 자료의 p. 310, 311, 313, 320, 321, 325 등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들이 등장하는데, 그 표현들(예: “나와 같이 계시는 주 예수여”)은 심군식목사의 표현들(예:“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과는 얼마간 차이가 있다. 공통된 점은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한목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야말로 언약사상의 중요한 핵심사항들 중의 하나이다.

35) 언약사상에 있어서 “함께 하심”이라는 주제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 외에도,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의 칭호가 “임마누엘”(이사야7:14/마태복음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일 뿐만 아니라, 새언약의 예언들 중의 하나인 예레미야31:33에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렇게 언약의 본질을 “임마누엘”로 파악한 현대언약신학자들 중의 한 명이 죤 징커드, 『성경과 하나님의 언약』(서울, 여수룬:1989)이다. 한목사의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신앙은 이런 책들 중에서 섭취하였다고 하기 보다는, 전기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성경과 신앙생활의 체험을 통한 그 성경의 확증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6) 이 설교집에는 모두 29편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는데, 심군식목사가 정리, 편집, 출간하였다.

37) 이 설교집에는 모두 43편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는데, 강용원교수, 이환봉교수, 이상규교수가 대지중심으로 요약되어 있는 것을 설교문으로 다시 작성하여 편집하였다(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p.42의 각주 16번참고).

38) 이 7권 중에서 5권에는 “설교”라 하기 보다는 “강의”라고 할 수 있는 자료들이 모두 85편 있다. 이 “강의”들은 한목사가 강의를 들은 것을 기록하였거나 강의를 하기 위해서 적어둔 것인지는 이 ‘자필설교모음집“이 복사본이기 때문에 확인하기 힘들다. 스프링으로 된 원본자료를 통해서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이 원본자료는 고려신학대학원의 고신역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복사본에 의하면 이 자료들의 내용에는 로마서에 대한 연구와 교회정치 등에 대한 자료들이 특별히 정성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39) 설교집들 중의 하나의 발간에 관여했던 이상규교수는 필자와의 전화대담을 통해서,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는 설교집에 있는 설교들이 대개 반 정도, 혹 어떤 경우에는 그 이상이 가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때로는 설교한 것을 받아 적은 것도 있다고 한다. 출간된 설교집에는 있지만, 보관중인 자필설교원고모음파일에는 원고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한목사가 설교한 것을 받아 적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교수는 심군식목사가 그렇게 애를 써서 첫 번째 설교집을 발간하였다고 증언하는 것을 직접 심목사에게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오히려 설교한 것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한다면, 현장감과 더불어 신빙성이 더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0) 자필설교원고들을 직접 살펴보면, 대지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몇 편 있기는 하지만(예를 들어서, 1권에 있는 “은혜위에 은혜러라”), 대부분의 설교들이 충분히 그 대지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들이 부가되어 있기 때문에, 한목사의 생각들을 이해해 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41) 출간된 설교집인 『신앙세계와 천국』과 『고난과 승리』에 실린 설교들은 각각 29편, 43편으로서 합하여 모두 72편이다. 신앙세계와 천국에 실린 것들 중에는 자필원고에서보다는 한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심군식목사가 직접 받아 적은 것이 있음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출간된 설교집에 실린 것은 전체 자필설교의 10분의 1쯤에 해당된다. 출간된 설교집의 설교내용들이 한상동목사의 신학과 신앙을 어느 정도(how much) 그리고 어떻게(in what sense) 대표하고 있는가 질문해 보고, 설교집들에 실린 설교들을 선별한 기준들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42) 설교제목 뒤에 적혀 있는 번호는 모두 7권으로 되어 있는 자필설교모음집들의 일련번호를 1권부터 7권까지 붙이고, 각 권에서 실려있는 설교대로 일련번호를 붙여둔 것이다. 예를 들어서, ‘1-23’은 자필설교모음집1의 23번째 설교를 의미한다.

43) 제목만으로 언약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자필설교노트모음집들에 있는 설교들은 다음과 같다: 2집(122편), 3집(88편), 4집(134편), 5집(“강의”들), 6집(105편), 7집(114편). 이런 설교들이 과연 언약사상과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은 본론에서 다룬다.

44) 다른 모음집들에서 제목상으로 언약사상을 알만한 것들은 2집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2-59), “주님의 약속은”(2-70)이라는 것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본문에서도 다루겠지만, 이런 표면적인 관찰로서가 아니라, 그 내용들을 살펴보게 되면 언약을 다루고 있는 설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세례와 성찬에 관한 설교들은 모두 13편이다:1집[“세례는 주님 명령”(1-30)], 2집[“세례는”(2-63), “세례와 성찬은”(2-88), “주님성찬은”(2-105)],3집[“신자의 세례”(3-11), “성만찬에 대하여”(3-54)], 4집[“세례에 대하여”(4-126),“주님의 정하신 만찬”(4-128)], 6집[“세례는”(6-26), “주님을 기념함은”(6-32)], 7집[“세례는 주님의 명령이다”(7-15), “세례에 대한 주님의 명령”(7-76), “세례의 의의”(7-101)].

45) 이 설교를 자필설교노트의 것과 설교집에 실린 것을 비교해서 부록에 싣는다.

46) 이렇게 대지만 기록되어 있는데, 설교집을 만들기 위해서, 가필하거나 혹은 받아 적어서 출간한 분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한목사의 언약사상을 나타내는 다른 설교들에서 그 대지를 풀어서 설명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주님의 약속은”(2-70)이라는 설교에서는 언약을 “보혈로 사셨기 때문”이라고만 대지로 적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2-59)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범죄한 인생들에게 성취된 것을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설교에서 한목사는 창3:15,신18:18,사11:1등을 들어서 “타락된 인생에게 타락전 인생으로 회복될 약속을 주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예로 들어서 그리스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이스라엘백성, 조상, 하나님께 부름받은 모든 사람,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47) 신앙세계와 천국에 실려있는 이 제목의 설교에는 상당한 양의 설명이 부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심군식목사가 한목사의 설교를 직접 들으면서 메모한 것을 참고하였거나 가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가필하였다면 이 ‘가필’의 진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별해 보는 것은 한상동목사의 언약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48) 원본자필설교노트를 보면 다른 설교들은 서론을 거의 본문설명으로 대신한다는 간단한 메모가 있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이 설교에서는 서론의 길이가 23행이다.

49) 앞의 각주 29에서 언급한 바 있는 신현국목사는 한상동목사의 설교의 중심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면서, 1)신앙세계는 기적이 따른 세계라는 점, 2)인간의 생명은 특별한 것임, 그리고 3)구원받는 신자의 봉사정신으로서의 희생이라고 하면서, 첫 번째 설교중심을 설명하기를, “그 분(곧, 한상동목사)이 흔히 쓰는 ‘물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라는 말씀이라든지, 거의 그 분의 설교에 반복(?)되다시피 예증되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야기는 ‘신앙세계는 기적이 따르는 세계’며, 지상에서도 하늘나라를 보여준다는 사상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한상동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p.152). 이것이 언약사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앞의 그의 진술을 참고한다면, 신목사도 은연중에 한상동목사의 언약사상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님의 약속’이라는 설교에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한상동목사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한 언약사상을 나타내기 예증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예증이 “반복”되고 있다고 신목사는 증언하고 있다. 삼일교회의 다른 교인들을 통해서도 이런 이야기는 자주 듣는 바이다.

50) 황대우, “개혁파 언약론과 선택론”,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http://www.kirs.kr/theology/705/page/5

51) 이 부분은 대지만 있고 설교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심군식목사가 한목사의 설교를 듣고 받아적었거나 가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지의 제목은 분명하게 한목사의 것이다.

52) Kim Hyungkyu, 『Han Sangdong and Reformed Spirituality in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1920-1970)』,University of Stellennbosch 1998, p. 172-179. 김형규교수는 이 점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설명하면서 칼빈의 경건과도 비교하고 있다.

53) 마이클 호튼, 전게서, 1장.

54) “함께 하심”이나 “신앙세계”, “여주동행”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는 설교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적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권면을 위한 설교들도 이런 “신앙세계”와 “여주동행”의 삶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설립한 고신대학교의 표어인 “코람데오”(Coram Deo)라는 것도 결국 그의 언약사상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55) 이런 연구는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한상동목사의 언약사상 자체가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는 현금의 실정에서는 잠시 뒤로 미뤄두어도 될 것이다.

56) 유해무, 전게서, p.102, 각주 33번. 유교수는 “한목사는 동방요배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 해방 후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태식목사의 “최덕지목사의 삶을 통해 본 재건운동과 재건교회”라는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 태식목사는 현재 재건교회총회장인데 이 글은 2006년도에 있었던 재건교회총회에서 세미나주제 세 번째로 발표된 것으로서, 그 발표된 글들이 『진리에 목숨 걸고』라는 제목으로 2007년도에 출간되었다. 재건교회측에서 개진하는 이런 주장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57) 이 설교테이프들은 ‘故한상동목사 설교집.’ V1~4로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58)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V3에 나오는 한목사가 직접 하고 있는 말을 옮겨놓는다: “그때 시대가 어떤 시대인고 하니 여러분들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지 못하고..왜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지 못합니까?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러 가면...예배보기 전에 온 교인들이 일어서 동쪽을 보고 일본천황폐하를 보고 일본천황폐하는 신인데, 신에게 먼저 경배를 하라 그래서 일본천황을 보고 동쪽을 보고 ‘최경례’..사이께게...하면 온교인들이 일본천황폐하에게 절을 하고 그 다음에는 강단에 가미다다를 향해서, 귀신함을 향해서 절을 시키고 나서 그 다음에 예배를 봅니다. 이 놈의 꼬라지가 세상 어디 있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교회가 되겠습니까?” 이 말을 하고 있는 한목사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한목사가 비록 40년전의 일을 회상한다고 해서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만일 거짓된 것이라면, 한상동목사의 인격은 전체적으로 매도될 수 있을 것이다.

59) 한상동, 전게서, p.141. 심군식목사는 한목사가 1939년 봄에 평양으로 올라가 주기철목사 외에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한 동지들을 만나게 된 자리에서 김인희전도사가 “신사참배도 문제이지만 궁성요배문제도 더 심각합니다”고 한 말에 “궁성요배야 당연히 할 수 없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60) 현재 밀양마산교회의 박시영목사는 밀양마산교회의 설립자의 아들 박명술집사(87세), 설립자의 자부 김귀남집사(97세)에 증언을 녹취했는데(2009. 5.14), 잡음이 많아서 재녹취를 시도하고 있는 중임을 필자와의 대화에서 밝히고 있다.

61)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의 자유게시판에 올려진 1311번 글과 박시영목사가 단 댓글. 이런 양측으로부터의 주장들은 보다 객관적인 자료들에 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62) 한상동, 『신앙세계와 천국』, p.50-56 에서는 “주님의 약속”이라고 되어 있는데, 설교문 중에서 괄호 안의 붉은 글자로 되어 있는 부분은 설교집의 것이고, 밖은 것은, 자필설교노트에 있는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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