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누가 순교자인가 하는 질문은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것은 순교자들이 누렸던 영광이나 존경만큼 중요한 관심사였다. 순교자들이 누리는 영광이 컸기에 순교에 대한 열망 또한 지나쳐 교회지도자들은 2세기 당시 자발적으로 순교당하고자 하는 이들을 경계하기도 했다. 광신적인 몬타니스트들은 순교를 자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점에 유념하여 도날드 리들(Donald Riddle)은 그의 <순교자들>이란 책에서 ‘죽음에의 동경’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풍미했다고까지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이런 점 때문에 누가 순교자이며, ‘순교자’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하는 순교자 개념정리가 요구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고민의 흔적이 2세기 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폴리갑의 순교기> 제4장에 나타나 있는데, ‘순교자’를 다음의 세 가지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첫째, 단지 ‘말 증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증언으로 고통을 감수한 ‘행위 증인’만이 진정한 순교자이다. 둘째, 순교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순교를 정당화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은 구분되어야 한다. 셋째, 순교를 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며 허용된다. 그러나 진정한 순교자는 자발적으로 순교하려 나서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순교를 적극적으로 피하지도 않는다.


초기 기독교는 박해의 체험을 통해 순교의 의미가 점차 보편화 되어 갔는데, 순교는 특히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 증거(증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를 확증하기 위해 임의로 받아드리는 죽임이었다. 말하자면 순교는 무엇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볼 때 초기 교회가 이해했던 순교자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순교는 육체적 생명이 끊어지고 참으로 죽어야 한다. 둘째, 그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증거 하는 진리에 대한 박해에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죽음을 자의적으로 받아드려야(voluntary acceptance of death)한다. 즉 순교는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인 증거를 행하고, 이를 확증하기 위해 주어진 죽음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무엇 때문에, 그리고 왜 죽었는가를 고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Donatists)와의 논쟁의 와중에서 기술한 시편35편 23절,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를 주석하면서 “(죽음)이라는 형벌이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지 않고, 그 (죽음의) 이유가 순교자를 만든다.”(Martyrem non facit poena, sed causa, "men are made martyrs not by the amount of their suffering, but by the cause in which they suffer" Augustine, Letters, 89.2)고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피 흘림의 증거’를 ‘순교’로 간주했으나 점차 순교 개념은 확대되기 시작한다. 그 시기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으나 3세기 초부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순교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리겐은 “말과 행위로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진리를 증거 하는 이는 순교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했고, 키프리아누스는 “한 순간에 고통을 당하는 이는 오직 한번 승리한다. 그러나 언제나 고통 중에 머물고 끊임없이 고통과 투쟁하는 이는 매일 새로운 순교의 관을 쓴다.”고 했다.


말하자면 3세기를 거쳐 가면서 순교자는 피 흘림의 증거자일 뿐 아니라, 복음적 삶 곧, 청빈, 순종, 정절 등 세상과 구별된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행위도 순교로 간주하는 영적 순교개념이 대두된다. 특히 박해의 시대가 종결되고 기독교의 자유가 주어지자 피 흘림의 순교는 그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소멸되자 이런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3세기 <사도전승>(Traitio apostolica)을 썼던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d. 236)와 3세기 중엽의 로마의 주교였던 코르넬리우스(Cornelius, d. 252)는 실제로 박해자에 의해 죽지 않았으나 순교자로 불리기(顯揚)도 했다. 이런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였으므로 일반화된 경향은 아니었으나 후에는 일부의 수도사들에게까지 순교자라고 호칭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의미에서 순교자는 항상 두 가지 요건,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공적인 증거와 그 증거로 인한 불가피한 죽음을 인정받아야 했다. 이것은 그 이후의 교회사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졌다.


한국에서는 ‘순교’라는 용어가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선박사고로 사망한 선교사, 선교지를 방문하고 서울로 귀임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선교사, 이단비호세력에 의해 피살된 이단종교연구가, 피지섬에서 단기선교 여행 중 파동에 밀려 실종사한 두 대학생, 이라크에서 알 카이다에 의해 피살된 젊은 그리스도인 등에 대해서도 순교자라고 호칭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을 순교자인가, 수난자인가 아니면 희생자인가? 전통적인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위한 분명한 증거, 가해자 혹은 박해자에 의한 피 흘림의 죽음, 그리고 증거를 위한 기꺼이 받아드리는 죽음을 중요한 요건으로 이해했다. 이런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 이해를 고집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천주교회처럼 다소 완화된 입장을 따를 것인가? 이것은 우리 시대의 또 하나의 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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