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진 보컬 밴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 희망을노래하는사람들은 연 40회 이상 공연을 할 정도로 잘 나가는 보컬 밴드다. (사진 제공 희망을노래하는사람들)

송장열 씨(정신지체 2급·30)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집에서 내쫓겨 거리를 전전하는 그에게 담배, 술, 도벽은 항상 따라다녔다. 소년원에도 다녀왔다. 사람들에게 받는 건 손가락질이었다. 장애는 죄다. 적어도 보컬 밴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희노사) 단원들에게는 그랬다. 희노사 단원 대부분이 지적 장애, 정신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열 씨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드럼은 나의 꿈

2002년 가을 장열 씨는 거리에서 함께 노숙하던 알코올 중독자 아저씨 손에 이끌려 전북 정읍에 있는 '장애인자활공동체 나눔의집'(대표 문성하 목사, 당시 노숙인 쉼터)에 들어왔다. 장렬 씨는 온몸에 담배 냄새가 찌들어 있었다. 피부병, 담배로 지진 자국이 가득했다.

장열 씨에게 어느 날 문성하 목사(당시 전도사, 47)가 물었다. "너 뭐하고 싶니?" 장열 씨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드럼을 치고 싶어요." 장열 씨는 소년원에서 드럼을 배웠다고 했다. 드럼 치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문성하 목사는 장열 씨를 위해 20만 원을 주고 드럼을 샀다. 없는 형편에 '나눔의집' 살림을 꾸리는 아내 박춘아 원장이 잔소리할까 봐 5만 원 줬다고 거짓말했다. '나눔의집' 사람들과 문 목사 부부가 함께 비 새는 컨테이너에서 살 때니 20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 드럼 치는 것을 좋아하는 장열 씨는 드럼 치는 것을 더 좋아하는 현일 씨가 들어오자, 드럼 자리를 현일 씨에게 내 줬다. 장열 씨는 지금 보컬을 맡고 있다. 사진은 드럼 연습하는 장열 씨(좌)와 현일 씨(우). (사진 제공 희망을노래하는사람들)

거금을 들여 드럼을 사고 보니 장열 씨의 실력은 못 들어 줄 정도였다. 그래도 드럼 치는 장열 씨의 얼굴은 웃음이 가득했다. 이렇게 음악을 좋아하니 문 목사는 내친김에 밴드를 만들자 했다. 함께 사는 노숙자 중 기타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피아노 연주가가 꿈인 윤수진 씨(정신장애 2급·34)가 건반으로 합류했다. 피아노 봉사를 하고 싶었지만 정신 장애인이란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한 수진 씨를 아는 사회 복지사가 소개해 줬다. 시설에서 유일하게 노래를 할 수 있는 고은영 씨(정신·지적장애 2급·26)가 보컬을 맡았다. 은영 씨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상처받아 '예', '아니오'밖에 말하지 않았다. 말은 안 하면서 노래할 때 목소리는 컸다. 너무 커서 귀를 막아야 할 정도였다. 드럼, 건반, 기타, 보컬, 실력이야 어떻든 이렇게 구색이 맞는 밴드(당시 희망 찬양단)가 결성됐다.


무모한 도전은 현실이 되고

밴드가 생겼다는 소식에 여기저기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이웃 교회에서 장열 씨에게 일주일에 한 번 드럼을 가르쳐 줬다. 시 보건소에 근무하던 조동환 씨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며 공연을 하자고 했다. 음악을 지도해 줄 전문가들을 연결해 주고, 공연 기획․장소 섭외 등  자기 일처럼 공연 준비를 도왔다. 그렇게 2003년 6월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첫 무대에 올랐다. 공연이 끝나고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했다. 손가락질만 받던 이들은 박수를 받으며 조금씩 삶이 바뀌었다.

새로운 사람들도 합류했다. 희노사 중 비장애인으로 리더를 맡고 있는 백정록 전도사(전주대 신학과·28). 가수가 꿈이었던 백 전도사는 어머니의 권유로 '나눔의집'에 오게 됐다. 문 목사는 백 전도사를 한마디로 "우리 집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고 정의했다. 희노사 리더를 맡아 달라고 했지만 3일 만에 도망갈 줄 알았다. 그런데 문 목사 예상이 틀렸다. 8년째 희노사 리더를 맡고 있는 백 전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흔들렸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배부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밴드를 하면 엄청난 일꾼은 되지 못하지만 모두 즐거울 수 있는데…. 세상의 물질적 잣대로 잴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베이스를 치는 지병호 씨(정신지체 3급·25)는 첫 공연이 있던 해 '나눔의집'에 들어왔다. 아는 장로가 노랑머리에 신발을 찍찍 끌며 거리에서 전단을 붙이던 중학교를 졸업한 병호 씨를 소개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병호 씨는 가출을 밥 먹듯이 했다. 학교만 가면 도망가는  게 일이었다. 가출해 대포 통장을 만들어 온 적도 있다. 문 목사는 병호 씨를 1년간 지켜보다 안 되겠다 싶어 베이스를 잡게 했다.

병호 씨는 베이스를 치면서 학교생활이 달라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병호 씨는 학교 축제에서 베이스를 쳐서 대상을 받았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부러워했다. 늘 모자라다며 따돌렸던 친구들이었다. 3학년 때는 반장도 했다. 여자 친구도, 방송 편집이라는 꿈도 생겼다. 병호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꿈을 이루고자 미디어 영상 계열 대학에 들어갔다. 처음 나눔의집에 올 당시만 해도 병호 씨는 수업 일수가 적어 고등학교 중퇴를 고민해야 했었다. 

▲ 희망을노래하는사람들 주최로 매년 열리는 장애인 열린 음악회. 사진은 '예'와 '아니오' 밖에 말하지 않았던 은영 씨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 (사진 제공 희망을노래하는사람들)

찬양은 이렇게 사람들을 바꿨다. 장애가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밴드를 하며 수진 씨와 은영 씨는 장애 등급이 한 등급씩 낮아졌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복음 성가 '나'를 부르며 은영 씨의 말문이 터졌다. 입에 욕을 달고 다니던 병호 씨는 욕을 버렸다. 단원들은 담배를 끊고, 도벽도 버렸다. 찬양으로 장애인과 지역 사회 사이에 쌓여 있던 높은 담이 허물어졌다. 어디 가서 물 한 잔 얻어먹기 힘들었던 이들이 이제 정읍 시내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가 우리의 꿈

"아마 지금이라면 시도도 안 했을 겁니다. 몰랐으니까 할 수 있었어요." 

문성하 목사는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평가했다. 장애가 더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지적 장애, 정신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장애는 여전히 장애다. 벌써 8년째 매일같이 연습하지만 실력은 일 년 연습한 비장애인들보다 못하다. 악보도 볼 줄 모른다. 그나마 장애 등급이 낮은 윤수진 씨와 지병호 씨가 코드를 읽을 뿐이다. 연 40회 이상 공연을 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이름이 붙은 장애인 열린 음악회도 매년 열 정도로 잘 나가지만, 공연하려면 본인들의 장비를 모두 가져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설 수 있는 무대가 몇 없다.

하지만 이들의 꿈에는 장애가 없다. 재활 밴드가 아니라 직업 밴드가 되고 싶다. 단원들이 '희노사'로 자립을 하려면 수입이 월 700만 원 정도는 돼야 하는데, 8년 동안 가장 많이 번 돈이 한 달에 300만 원 정도니 아직 멀었다. 때론 사례비보다 공연 준비 비용이 더 들어 적자도 나지만 포기는 없다.

비장애인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싶다. 밴드로 실력을 인정받아 음향 시설에 제대로 갖춰진 큰 무대에 서고 싶다. 외국 순회공연도 하고 싶다. 희노사 단원들은 이 꿈을 품고 올 초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해 봐야 더 큰 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원들이 자신들의 사역비를 모아 여행 경비를 충당했다.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문성하 목사에게 물었다.

"낮은 음과 높은 음이 하나로 어우러졌을 때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지듯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로 어우러졌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꿈을 이루는 사역자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사는 사회는 문 목사의 꿈만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모두의 꿈이라고 했다.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과 '나눔의집'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순간을 함께 넘어가는 것입니다. 둘이 사는 것도 힘든데 30여 명이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이 아니라 꿈을 함께 꾸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같은 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겁니다."

 

나눔의집은 집이다  

나눔의집은 장애인 생활 공동체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생활 공동체다. 24명의 장애인과 8명의 비장애인이 함께 산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건 일 때문이 아니다. 일 때문이라면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거나, 야간에 장애인을 돌볼 사람을 고용하면 될 텐데, 이들은 그냥 산다.

선생님, 원장님, 목사님의 개념은 있지만 장애인들을 원생이나 생활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다들 가족이라 부르고 시설은 집이라 부른다. 실제 나눔의집은 대표 문성하 목사에게도 집이고, 지도 교사인 백정록 전도사, 양정현 선생, 서성원 선생에게도 집이다. 

나눔의집은 1998년 노숙인 쉼터로 시작했다. 외환 경제 위기 이후 사업하다 노숙자가 된 문성하 목사가 고향으로 내려가 같은 처지인 사람들과 컨테이너에 살며 나눔의집이 시작됐다. 문 목사는 노숙인과 살며 살아갈 이유를 발견했다. 사회복지사인 박춘아 원장은 신앙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노숙인 사역을 하는 문 목사와 결혼하며 나눔의집에 합류했다.

노숙인 쉼터였던 나눔의집은 2004년 장애인 생활 공동체가 됐다. 경제가 조금씩 회복하니 하나둘 노숙인이 떠났다. 남은 건 정신 장애,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던 노숙인들뿐이었다. 집은 있지만 돌아갈 집은 없는, 아무도 거둬주지 않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나눔의집이 시작됐다.

나눔의집 사람들에겐 소망이 있다.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장애인들도 꿈을 꿀 수 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각각 대여섯 명씩 한 방에 모여 살지만, 이들이 가정을 꾸리고 자립해서 사는 날을 꿈꾼다. 더불어 살아가며 장애를 뛰어넘으며 살아가는 나눔의집 사람들 때문에, 비장애인들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장애를 뛰어넘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문의 : 063-536-9311, cafe.daum.net/hopesongh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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