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송과 고난의 모티프 -

   
  ▲ 황원하 목사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Pretoria University(Th.M.)
     Pretoria University(Ph.D.)
     대구서남교회,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강사
서론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 상황은 우리 시대의 교회 상황과 상당히 다르다. 초기 기독교회는 체계와 조직과 경제적인 자립도를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숫자에 비해 사역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교회가 자신들만의 사역자를 청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목사의 청빙이 공모, 채용, 승계, 추천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당시에는 주로 영향력 있는 지도자(예. 바울)의 추천과 파송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역자들은 교회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엄청난 박해와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회의 목사 청빙을 파송과 고난의 모티프(motif,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과 보혜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빛이신 예수님을 어두운 세상에 보내셔서 어둠을 물리치게 하시고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하신다(요 1:1-18; 3:16, 18).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께 나아옴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요 14:9) 온전한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요 9:7).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전권대사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죽이심으로써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공생애를 모두 마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6; 15:26).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그대로 수행하심으로 예수님의 계속적인 현존(presence)을 가능하게 하신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사역자들에게 권위와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성령님의 사역은 사도행전에서 매우 분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난다. 결국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파송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님을 파송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파송의 과정에서 성자의 고난이 필연적이었다.


사도들

마가복음 6:6-7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보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명을 이루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양육하시고 보내셨다. 그리하여 보냄을 받으신 분(Sent One)은 보내시는 분(Sender)이 되셨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하여) ‘사도’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데, ‘사도’라는 명칭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사도들 역시 강한 파송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고대에(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는 자의 권위를 가졌다.

이에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가지셨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가졌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권능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을 반영한다(참고. 막 2:10; 3:15).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일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하고 부모형제와 전토를 버려야 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버려야 했다(막 8:34-38; 10:17-31). 그들에게 요구된 이러한 희생은 예수님께서 이미 치르신 희생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세상(사탄)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그의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들의 삶과 사역에서도 파송과 고난의 원리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바울과 동역자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지만 이방 지역에서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바나바, 실라 등)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한다. 그러한 분화된 특성이 사도행전의 구조에 잘 드러나 있다.

사도행전은 초점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유대인에게서 헬라인에게로, 베드로에게서 바울에게로 옮겨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의 중심부인 9-12장을 기점으로 이러한 전환적 특성이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이렇게 분화된 사역의 형태는 사역자와 사역지의 특성이 감안된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임명되었지만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임명되었고, 그들 각각의 사명에 따라 적절한 사역지가 배정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재능과 성향에 따라 적합한 목회지에서 사역하였다. 행 13장에 따르면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이방 지역에서 사역하였다.

바울이 이방 지역에서 사역하면서 각 지역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엄청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 그것은 오직 복음과 교회를 위한 고난이었다. 한편, 교회의 숫자에 비해 사역자의 숫자는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이 양육한 제자들을 각 교회에 보냈다.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하였고(롬 16:1), 바나바를 고린도 교회에 추천하였다(고전 16:12). 바울의 제자 디모데는 제 2차 전도 여행 때 바울에게서 할례를 받고 바울을 도와 많은 활동을 하기 시작하여 데살로니가, 빌립보, 고린도 등을 방문하여 일했다(행 16:1-3). 그는 이후에 바울과 함께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에베소에 남겨져서 교회를 돌보게 되었다.

바울의 또 다른 제자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어 그곳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위임받았으며(고후 7:6, 8:6), 바울과 함께 그레데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남겨져서 교회를 섬기게 되었고(딛 1:5), 이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재차 투옥되었을 때 그레데를 떠나서 달마디아로 가게 되었다(딤후 4:10). 그러므로 바울과 동역자들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다. 그들의 사역에 언제나 고난이 있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겪었던 고난을 그들도 그대로 겪었다.


현대교회에 주는 함의: 파송과 고난

1. 파송: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이후에 승귀하신 예수님은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바울과 바나바 역시 안디옥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에 적합한 사역자들을 보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회에서 목회자 청빙은 철저히 ‘파송’의 원칙을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파송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적절한 사람을 적합한 자리에 보냈을 뿐이다. 즉 신약성경에서 사역자의 배치는 사역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능을 따랐던 것이다.

현대 교회의 목회자 청빙에 있어서도 이러한 파송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신약성경 시대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지만 동일한 원칙의 적용은 가능하다. 목회자 청빙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에 의한 추천이 공모나 채용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목회자를 보내는 것이 보내는 이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직 교회를 염려하고 돌보는 목적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사역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교회가 연결되어서 효과적이고 보람 있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

2. 고난: 초기 기독교에서 보냄을 받는 자들은 그 교회에서 어떤 유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목회지에서 맞이하게 될 일들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들은 고난이 닥쳐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곳에 가서 일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려는 자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마치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고전 4:13)같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목사 청빙에 있어서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들 중의 하나는 한 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 출세의 방법이 아니며 안정된 직장을 얻는 수단도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들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목회지를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자신이 그 교회에 어떤 유익이 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목사란 생명을 내어 걸고 양들을 지켜야 할 사람이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들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기 위하여 그토록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이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세상의 좋은 일터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분명히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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