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개발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s)를 보는 교회의 관점을 기억하자.

   
들어가는 말- 새천년개발 목표 정상회의

지난 주간 9월 20-22일까지 유엔에서 새천년개발목표 정상회의가 있었다. 새천년개발목표는 2000년에 191개국 유엔회원국이 모여서 합의한 빈곤 퇴치 계획이다. 잘 사는 나라가 협력해서 가난한 나라의 절대빈곤과 질병과 모자 보건 등 8개 분야에서 2015년까지 절반 수준으로 줄이자는 계획이다. 반기문 사무 총장은 가능한 목표라고 하면서 선진국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이번에 모여서 그 실천 평가를 하면서 목표 실천을 위한 각국에 협조를 구하는 정상회담이다. 그런데 최근 2008년부터 외환 위기가 있어 이 계획 실천을 위한 자금 모금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131개국 정상들이 모여서 목표 실현을 위해서 결의를 다졌다.

평가에 있어서 중국과 인도가 경제 발전으로 절대빈곤에서 벗어남으로 빈곤의 탈출의 상당 부분이 성취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산모와 5세 이하의 아동의 사망률을 줄이는 일이 가장 진전이 더디다는 평가이다. 그래서 이번 정상회의에서 모자 보건 증진을 위해서 400억불의 모금을 결정했다. 남반부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먹을 것과 치료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많은 진전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현재 회복되는 경기에 다시 찾아오는 불경기가 있다면 이 개발 목표가 어떻게 될 지를 염려가 된다. 이런 모든 결정들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기부를 통해서 진행이 되기를 비정부 기구들은 촉구하는 현실이다.

영국의 총리를 지냈던 고든 브라운은 이 정상회의와 관련해서 격분했다. 선진국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여러가지 다른 일들이(불경기 등) 생겨서 해야 할 실천에(부담금 기부) 차질이 생겼다는 말을 하는 것은 쉽다고 하면서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의 교육과 산모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결핍에 노출되어 있고,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한 단편적인 사실이다. 힘 있는 강자들인 선진국들이 얼마나 가능하면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교회가 무엇을 의식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교회의 눈, 시각, 그리고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일에 무관심하는 것은 곧 교회의 내일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음 세대들이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한 시대의 소명을 잃어버린 교회는 집단적 소모단체로서 규정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계몽과 신사참배 반대를 통해서 일제(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 앞에 굴복하지 않음으로 다음 시대에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가난 속에서 소망의 복음을 교회가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군사 독재의 시절 대다수의 보수 교회의 침묵 속에서 천주교는 명동 성당은 시대를 안는 상징이 되었다. 이것이 그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교회가 아니라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있다.

자기 시대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분명히 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세계화된 시대를 살면서 어떤 시대적 소명을 발견하고 달려갈 것인가는 한국 사회의 동력과 같은 것이다. 국가나 기업 그리고 단체들이 이런 소명에 기여하도록 교회가 가진 복음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날을 절기로 만든 유월절 규정인 출12장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자.

1. 새로운 출발의 날로서 유월절
출12:2절 말씀에 보니 이 날을 기준으로 새로운 달력이 시작된다고 선언한다. 유월절을 기준으로 새롭게 역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런 새로움은 무엇인가? 단지 애굽에서 독립된 나라가 한 나라가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세상의 한 나라인 우리나라의 독립과 차이가 나는 점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민족 역사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역할이 무엇인가?

1절에 보니 애굽 땅에 임한 말씀이다. 땅은 지리적인 상황만을 말하지 않고 그 땅에 있는 질서를 의미한다. 애굽 사회 질서와 가치, 통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유월절이다.

이런 유월절의 새로움은 애굽 땅을 지배하는 바로의 통치 방식과의 대조에서 드러난다.
바로는 출1:8, 5:2절에서 요셉을 모르는 왕이며,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왕으로 소개된다.
이런 왕이 통치하는 방식을 애굽의 지혜라고 부른다. 출1:9절이하에서 소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고 강하다. 우리 애굽 사람들이 그들에게 대해서 지혜롭게 대처하자.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때 적의 편에 서서 우리를 치고 자기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이 백성들에게 지워서 괴롭게 하고 비돔과 라암셋의 도시를 건축하자.

애굽의 지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학대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연약한 민족을 억압하면서 제국의 도시들을 건설하는 실리도 취하자는 정책이다. 힘과 권력의 통치 지혜이다. 강자의 논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제국을 운영하는 지혜가 바로의 지혜이다. 이것이 애굽 땅의 질서이다.

여기에 비해서 바로가 알지 못한다는 요셉이 있다. 실제로 바로는 요셉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그의 정책과 삶의 방식에 대한 거절을 의미한다. 요셉을 거절하는 바로라는 의미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향 분석을 하고 있었고, 그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올라가려 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도 파악하고 있다. 애굽 제국 안에 있는 구성 요소들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 요셉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요셉을 거절한다. 인정하지 않는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를 지냈던 인물이다. 바로의 두 번의 꿈을 해석하면서 7년의 풍년 이후에 7년의 흉년이 찾아오는데, 이를 위해서 대비하라는 조언을 한다. 이때 바로가 요셉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창41:39절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요셉은 지혜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7년의 풍년을 잘 갈무리해서 7년의 흉년을 이겨내었다. 애굽뿐만 아니라 모든 주변의 근동을 먹여 살려내었다.

성경에서 7년의 흉년을 표현할 때 악하다고 표현한다. 요셉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이 악한 흉년을 이겨내었다. 형들이 자신에게 행한 악을 여호와께서 선으로 바꾸실 줄을 믿은 것과(창50:20) 병행이 된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은 세상의 흉악한 흉년을 이기도록 만드는 선을 창출하는 지혜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요셉의 지혜이다.

바로가 연약한 백성을 억압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는 악한 제국의 지혜이라면, 요셉은 애굽을 비롯한 근동의 모든 백성들을 함께 먹고 살리는 선한 지혜이다. 이것은 공의로운 세상이기도 하다.

이제 요셉을 모르고 그 배경이 되는 여호와를 모르는 바로의 통치가 있는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출애굽의 날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새로움은 바로 바로의 지혜가 아닌 요셉의 지혜가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연약이 위로를 받는 의와 공평이 있는 세상으로 출발한 것이 출애굽의 날 유월절의 새로움이다.

2. 피의 은혜로 얻은 새로운 출발 유월절
이런 새로운 출애굽의 역사는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다. 7절에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다. 이렇게 피를 바르는 것은 애굽을 심판하는 가운데 구원을 주신 것을 말한다(출12:12-13). 이것이 구원의 은혜이다. 피가 없는 집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
피가 가진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아가서 레위기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의미가 완전해 개화된다. 레16장의 대 속죄일과 17장의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을 통해서, 피에는 죄를 속한다는 규정을 확정한다. 이것은 이미 피가 가진 속죄적 기능을 구현하는 유월절 사건임을 전제한다. 심판에서 벗어나는 속죄의 기능을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가 하고 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민족적인 정체성, 이스라엘이 가진 언약, 예배, 절기, 율법 모든 것이 피를 바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롬9:4-5, 11:1-2, 빌3:4-8). 오직 은혜이다.

바로 이 피의 은혜를 통한 구원이 의와 공평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절기로 만들어서 기억한다(출12:14). 그리고 그런 은혜가 작용하는 세상을 그리도록 만든다. 세상에 복을 주는 나라(창12:1-3),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가(창18:19)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 즉 복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하는 역사의 시작이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의 은혜만이 진정한 새로움의 시작이다(고후5:17).

3. 예배에 담는 의와 공평
이제 유월절의 어린 양을 잡는 구체적인 규정을 3-4절을 통해서 보자.
양을 잡되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양에 비해서 식구 수가 너무 적으면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잡는데 각 사람이 먹는 양에 맞추어 계산을 잘하라고 규정한다.

각 가족대로 한 마리의 어린양을 잡으라고 규정하지 않고, 너무 숫자가 적으면 이웃과 함께 잡으라고 한다. 양은 고대 사회에서 귀한 재산이다. 그래서 가난한 이웃들이 모두 잡을 만큼 넉넉히 소유한 것이 아니다. 다윗 시대에도 한 마리의 양이 재산의 전부라고 규정하기도 했다(삼하12:3). 그래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 이 출애굽의 은혜를 같이 누리라고 율법으로 규정한다. 율법은 은혜를 구체적으로 누리는 방편이다.

이 때 계산을 하라고 규정한다. 계산을 하는 지향점이 중요하다. 얼마나 풍성할 것인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을지를 계산한다. 예배나 절기에서 계산을 한다는 개념은 아주 독특한 개념이다. 진심으로 힘 있는 대로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이다. 그러나 성경은 계산을 하면서 절기를 지켜라. 예배를 드려라. 그 계산의 대상은 가난한 이웃이다. 어떻게 그들을 품어내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계산해라.

10절에는 아침까지 남겨주지 말라고 규정하고 남은 것을 불사르라고 한다. 이것은 계산해서 이웃을 초대하는 것을 강화시키는 본문이다. 남긴 것을 먹지 말라. 나누어 주라. 결핍을 채우는 것이 구원의 은혜가 지향하는 지점이다. 바로 의와 공평이 은혜가 지향하는 목표지점입니다.

가족대로 양을 잡되 각 사람의 먹을 양을 계산하는 것은 만나 사건에서 예배와 절기의 기준이 일상화된 삶의 형태의 기준으로 드러난다. 출16장의 만나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자. 출16:13절이하이다. 16절에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고 명하신다. 장막에 있는 노약자와 병자들을 위해서도 각 사람의 먹을만큼을 거두어야 한다. 그런데 17절의 현실은 많이 거둔 자와 적게 거둔 자가 있다. 이를 18절에서 16절의 기준으로 조정하는 기능을 시행하도록 한다. 이것이 오멜로 되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도록 한다. 이로 인해서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도록 하라는 16절의 율법 규정을 이룬다.

여기서 "각 사람의 먹을 만큼만"이란 단어가 바로 유월절의 양을 잡을 때 계산하는 기준의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출12:4,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그럼으로 예배의 계산과 기준은 바로 삶의 기준으로 변환된다. 이것이 예배가 담아야 하는 의와 공평의 지향점이다.

4. G20 정상회담과 교단 총회를 바라보면서

새천년개발목표라는 유엔의 목표설정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당면한 고통과 연약, 굶주림과 상처에 대한 몸부림이다. 교회가 이런 목표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세상적인 목표가 교회적인 의미로 다가 올 수 있는가? 우리는 먹을 것만으로는 세상의 참된 소망이 없음을 분명히 고백한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언제나 유의미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의와 공평을 담아야 할 것은 교회가 가진 복음의 은혜의 목표지점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국가들이 죄를 억제하는 결핍과 연약을 제어하는 일을 제대로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롬13:3-4).

우리나라는 이번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의 의장국으로 역할을 한다. 이번 유엔의 새천년 개발목표 정상회의에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한승주 전 총리가 참석하면서 이런 발언을 했다. '성장을 위한 개발'이란 G20의 정상회의의 의제가 새천년개발목표와 상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이런 일들에 정말 기여를 했으면 한다. 장로인 대통령께서 고통 당하는 세계의 이웃을 품으면서 정말 정상회의를 잘 이끌었으면 한다. 비즈니스 서밋과 같은 세계적 기업들의 회의를 한국은 제안했고 이것이 열린 예정이다. 친기업 이미지의 대통령의 정책을 정말 잘 구현한 구상이다. 그런 중에서 기업들이나 세계의 강대 부국들의 관심을 정말 고통 당하는 이웃들로 향하게 하는 영성이 우리 대통령에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대통령이 되는 것은 국민들이 만들어 가야 한다.

나는 소망 교회 출신의 대통령에게서 이런 새천년개발 목표와 같은 지향점을 G20의 의제로 다룰 안목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가 만약에 서울 영동교회 출신이라면 기대할 수 있겠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하다. 교회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중요하다. 의와 공평이 은혜의 토대 위에서 보이는가?

이런 의와 공평을 지향하는 은혜의 복음을 담는 한국 교회가 되고 세계 교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 주간에 한국의 교단 총회들이 대부분 열린다. 우리 교단 총회도 열린다. 눈을 열어서 한국 정부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참된 역할을 하도록 기여하라는 권고문이라도 채택하는 총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교회의 다음 세대들은 무엇을 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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