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민기 선교사
본 소고의 목적

2007년은 개신교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馬禮遜)이 복음을 중국에 전해 준지 200주년이 된다. 실제로는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 된지는 200년 이상이 된다. 본 소고의 목적은 중국 기독교 전래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특히 각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을 살펴봄으로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며, 피해야 할 잘못을 무엇인지를 고찰함으로 미래의 선교 사역의 전략을 수립함에 교훈을 삼고자한다.

복음의 중국 전래에 대한 전설

1. 인도의 전설에 따르면 사도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했고, 바돌로매가 중국에 복음을 전래했다고 한다.
2. 전설에 따르면 동한의 명제(東漢明帝) 시대에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이다.
3. 고고학적인 근거로는
(1) 서주한화상(徐州漢畵像)의 석실묘(주후 86년)에는 구약의 이야기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 중에는 예수님의 강생, 오병이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시리아의 선교사들이 전래한 것으로 보여 진다.
(2) 명나라 시대의 <劉子高詩集>과 李九功의 <愼思錄>에는 명태조 홍무(洪武)시대에 강서의 려능(廬凌)에서 거대한 철제 십자가가 발견되었는데, 윗면에는 삼국동호적오(三國東吳赤烏)의 연호가 기록되어져 있었고, 십자가상에는 (사해가 무사태평하고, 쇠기둥 같이 보배로운 광선이 십자가에 머물렀고, 만민이 큰 은혜를 입으니, 금향로의 향이 천추에 퍼지네) <四海慶安瀾, 鐵柱寶光留十字,萬民懷大澤,金爐香篆藹千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세기 이전의 전래역사

1. 당나라 시대의 <景敎>

(1) 635년(貞觀9년) 에베소 회의(431년)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기독교의 분파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파(예수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가 아라본(阿羅本)을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당태종은 기쁨으로 선교사를 장안으로 영접하여, 장안에서 선교활동을 하게하고, 그 이름을 경교라 칭하였다. 정관 12년에 대진사(大秦寺)를 한곳 건축하도록 윤허하였다. 고종(650-683년)의 재위 시에는, 조정에서 전국 각처에서 경교 교회당을 짓도록 허락하였고, 그 결과 “경교의 율례가 모든 길(道)에 흐르고, 경교당이 모든 성에 충만”<法流十道, 寺滿百城>할 만큼 성행하게 되었다. 고종이 서거하게 되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자, 경교는 우세한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반대자들의 비난과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 후 현종, 숙종, 대종, 덕종은 경교를 지지하는 편이었다.
(2) 오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덕종(德宗)(781년)의 재위 시 건립이 된 것으로 1625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되었고, 서안의 비림에 보관 중이다.
(3) 845년에 당나라의 무종(武宗)은 신도사(信道士)인 조귀진(趙歸眞)의 충고를 받아 들여, 외국 종교를 척결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외국 종교에는 불교, 경교, 이슬람교 등이 포함되었다. 이 이후로 경교는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방지역의 소수민족 특히 몽고족 가운데는 경교가 계속 전래되고 있었다.
(4) 경교의 선교 전략
① 경전의 번역 : 십 수권의 신구약 성경과 시편을 번역했는데, 번역한 경전의 이름이 불교와 도교의 경전과 유사하다. 예를 들면, 天尊(上帝: 하나님), 蒙度(得救: 구원), 天寶藏經(시편) 등
② 병자를 고치고, 사회 구제에 참여했다.
(5) 평가
① 토착화 : 성경과 복음의 내용을 불교와 도교의 용어로 설명하여 과도한 상황화와 토착화를 초래했고, 그 결과 복음의 특색을 상실하여 중국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②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 : 조정의 지지에 과도하게 의지하여, 민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중국의 인재를 양성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정권이 쇠퇴하고 금교령이 내려 졌을 때 선교활동도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③ 上行下效 → 政亡敎息 : 궁정과 귀족, 지식인들부터 시작하여, 상층부로부터 민간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했지만,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이러한 선교 전략은 정권을 너무 의지하게 되고, 상층부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됨으로 정권이 쇠퇴해 감에 따라 기독교 전체가 힘을 잃고 존재마저 없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 원나라의 야리가온교(也里可溫敎)와 천주교(13~14세기)

(1) 원나라의 종교정책은 비교적 관대하고 느슨했다. 중국에서 경교는 점점 부흥했는데, 야리가온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也里可溫>은 몽고어로 <복음을 받드는 자>란 뜻이다.
(2) 천주교는 원나라시대에 또한 야리가온교라 불리워졌다. 당시 원나라와 로마 교황청간에 왕래가 빈번했고, 1245년에는 교황이 중국에 대사를 파견하여, 원나라의 정종(定宗)이 믿게 되었다.
(3) 1269년에는 원나라의 세조가 이탈리아에서 원나라에 상업 차 방문한 2명의 상인들을 통하여 교황에게 과학자와 종교 전문가 100명을 중국에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중국으로 오는 도중에 전쟁을 만났는데, 수도사들은 중도에 돌아가고, 상인들만 중국에 도착했다. 그 중 한 명의 상인의 아들이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이다.
(4) 1294년 요한 몬테코르비노(John Montecorvino)는 교황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대도(大都: 오늘날 북경)에 도착하여, 원나라 성조(成祖)의 환영을 받았고, 북경에 3개의 교회당을 세웠는데, 1305년에는 6,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5) 1300년에는 중국에 이미 3만 명의 신도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숭복사(崇福司)란 기구를 두어 종교 사무를 모두 관리하게 했다.
(6) 안타깝게도 야리가온교는 몽고인과, 서역인, 외국인들에게만 전파되었고, 한족들에게는 전파되지 못했다.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에 의해 몽고인들이 중원에서 쫓겨나게 되자 야리가온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7) 야리가온교는 권력과 귀족들을 엎고, 위로부터 전래되어 결과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종교마저도 소멸되는 결과(政亡敎息)를 초래하게 되었다.
(8) 야리가온교의 선교 전략
① 황실과 귀족에게 전파했고,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② 각 지역에 폭넓게 사원 즉 교회당을 지었다.
(9) 평가
① 야리가온교는 장기적이고 멀리 바라보는 선교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의 선교 전략은 자연적으로 발전하는 선교 방식을 채택했다.
② 불교와 도교와 우위적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적이었고, 그 결과 피차간의 배척을 초래했다. 이는 지혜롭지 못한 전략과 처신으로 평가된다.

3.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천주교

(1)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천주교는 유럽에서 상실한 지위를 선교를 통해 회복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반동 종교개혁으로 1534년에서 1538년 사이에 예수회(Jesuit Order)가 창립된다.
(2) 명나라 말기인 1552년, 제수이트의 수도사인 프란시스 자비에르(沙勿略: St. Francis Xavier)가 중국에 들어오려고 시도했지만, 광동성 태산(台山 )밖의 上川島에서 병으로 서거했다. 1552년 이탈리아인 루기어리(Michele de Ruggieri)가 광동에 도착하여 전도, 교회당 건축을 지었던 중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였다.
(3) 1582년,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1601년에 북경에 들어오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20년이란 기간 동안 중국어를 습득하고, 사서오경을 연구하고, 서방의 천문, 지리, 역법 등을 번역하여 조정에 헌상했다.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天學實義는 정편과 속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천주교 교리의 분석과 중국 문화의 이해에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저술된 책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많은 귀족들과 사대부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20여종에 속하는 책을 저술했고, 완전히 중국인과 같이 음식 먹고 의복을 입었다.
(4) 명나라 말기의 관료와 사대부 가운데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다. 마태오 리치가 1610년에 북경에서 죽었을 때, 천주교는 북경에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1605년에 천주교 신자는 200여명이었는데, 1635년에는 전국에 신부가 24명이었고, 수도사가 5명, 12개의 성에 17개의 전도 거점이 있었다. 1651년에서 1664년에는 천주교 신자가 대략 1만 4천명이나 되었다.
(5) 청나라 초의 순치(順治) 황제는 제수이트인 아담 살(汤若望)을 매우 존중히 여겼다. 순치 황제는 일찍 서거하여, 8살의 나이로 즉위한 강희(康熙) 황제의 제위 시에는 보수적인 대신들이 역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옥에 투옥되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아담 살 역시 옥에 투고되기도 했다. 그 후 이어서 지진이 발생하여 태황과 태후가 앞에 나서 옥에 갇힌 자들을 석방했지만, 아담 살은 다음 해에 사망했다.
(6) 강희가 친히 집정을 하고 있을 때, 아담 살에게 조수인 남회인(南懷仁)을 통해 역법 사무를 총괄하게 했다. 이 때 강희 황제는 천주교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7) 1700년에는 천주교 신자가 30만에 달했다.
(8) 이러한 시기에 70년에 걸친 [예의 논쟁](禮儀之爭)이 발생했다. 제수이트는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공자와 맹자에게 제례를 드리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1704년에 교황청에서 [예의]가 교리에 위반된다는 법령이 발효되어 강희 황제는 이에 반대하여 천주교에 대한 심한 핍박이 일어나게 되었다.
(9) 1722년에 강희 황제가 서거하고, 옹정이 제위하게 되자 금교를 더 강화하게 되었다.
(10) 천주교의 선교 전략
① 접촉점 : 중국인들에게 서방의 과학과 기술을 소개하였다.
② 저술 활동 : 과학과 기술을 소개하는 것 이외에, 교리를 설명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경건생활과 관련된 책들을 발간했다.
③ 중국의 문화와 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 예수회는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 공자를 모시는 것, 合儒 - 補儒 - 超儒의 선교 정책을 취하려 했다.
(11) 평가
① 由上而下 → 居高不下
천주교 역시 경교와 마찬가지로 지식인, 궁정, 심지어는 황실의 영향력을 통한 선교 전략을 구사했다. 많은 사람들은 강희 황제가 십자가란 주제로 시를 한수 지은 적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실제로는 강희 황제가 십자가에 대한 시를 지은 것은 당시의 사대부 계층에서 이미 폭 넓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며, 천주교회는 많은 지역에 천주교회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주교의 선교 전략은 기본상 위로부터 아래로 전파되기를 시도했지만, 실제로는 위에서만 머물고 아래로는 전래되지 못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② 迎合习俗 → 无根之花: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전략은 오늘 우리가 동화(Accommodation)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문화와 풍습에 영합하는 것이었다. 예수회는 중국의 선교 역사를 고찰해 보았을 때 기독교는 중국인들에게 항상 서양의 종교(洋敎)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로 인해 기독교가 중국인에게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에 의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하고, 공자의 사당에서 제의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가하다는 선교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민간들의 커다란 행사 즉 중국 문화와 유가 사상에서 지지하는 각종 제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도록 독려하였다. 예수회는 기독교의 교리와 의식 중 중국 문화와 일치하는 부분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뿌리가 없이 꽃을 피우려는 허황된 입장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선교 전략은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독교가 중국의 문화의 일부이며, 중국의 민간의 풍습과 유사하다고 간주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③ 合儒- 補儒- 超儒 /合儒有成,补儒有限, 超儒无功
당시 천주교의 중요한 선교 전략은 유교와 합일하므로, 유교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결과적으로 유교를 초월하는 기독교의 탁월성을 드려내려는데 초점을 두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저술한 문장 가운데는 먼저 유가 사상과 합일하고, 합일한 이후 보충하고, 보충한 이후에는 초월한다는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유가사상에서 하늘(天)의 개념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神)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그 근원의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上帝)에 대한 기념 즉 예배로 간주했다. 또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인애지심(仁愛之心)을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힘을 다해 중국문화 안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사한 부분을 찾아 낸 후에, 접촉점을 모색하므로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지 않도록 하고, 계속하여 중국 문화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보충한 이후에 유가 사상에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개념인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창조,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은 기독교의 우월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당시의 천주교 선교사들에 의해 채택되었던 선교전략이었다.
이러한 선교 전략은 성경에서도 유사한 모델이 있긴 하다. 그러나 유가 사상을 보충하면서 유가 사상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과 이러한 사상을 초월하는 복음의 탁월성과 보다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 요구된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천주교와 같이 “유가 사상과 합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보충하는 데는 많은 제한이 있고, 초월 하는 데는 헛수고를 하게 되는” (合儒有成,补儒有限,超儒无功)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수회 전략의 최대의 약점은 성경의 독특성과 예수 그리스의 구원의 유일성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④ 예수회의 전략 특히 마테오 리치의 전략 중 성육신[道成肉身]과 중국의 문화와 언어에 정통(精通國學)하려 했던 것은 후대의 우리가 배워야 할 좋은 선교전략의 모델이 된다. 그러나 문화 측면에서 중국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힘을 쏟은 결과, 현지의 문화에 완전히 동화하게 되고, 그 결과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⑤ 도미니칸 수도회(道明會: Dominicans)와 프라체스칸 수도회(方濟會: Franciscans):
당시에 천주교의 또 다른 파송 단체인 도미니칸과 프란체스칸은 예수회의 중국 문화에 융합하는 태도에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선교사 내부에 예의논쟁(禮儀之爭)이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정치적인 힘으로 간섭을 받게 되어 선교 활동이 100년간 금지되게 되었다.

청조와 민국 시기의 기독교(1807-1949)

준비 시기(1807-1842)

이 시기 중국선교의 중요한 인물로는 로버트 모리슨과 귀츨라프이며,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은 태평천국의 난이다.

1. 로버트 모리슨(馬禮遜 : Robert Morrison, 1782-1834)

(1) 모리슨의 준비와 배경
모리슨은 영국 노덤버랜드(Nothumberland) 모패드(Morpeth)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이은 청빈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건한 장로로서,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신앙생활의 감화를 많이 받고 자랐다. 1802년 20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이듬해이 1803년에 신앙의 결단을 하고 런던의 고포트 선교학원 (Gosport Missionary Academy)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던 중 1804년 중국 선교를 결정하고 런던에 있던 중국 광동인 양선달(楊善達)로부터 중국어를 배웠으며, 후에 그와 함께 중국에 들어왔다.
1807년 1월 8일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 (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년 성립)의 파송을 받아 중국으로 떠났다. 1807년 1월 31일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선박을 타고 뉴욕에 도착했으며, 5월12일에 다시 인도양을 향하는 트라이던트 호(The Trident)를 타고 중국에 오게 되었다. 드디어 1807년 9월 4일에 마카오에 도착했고, 곧 이어 3일 후 9월 7일, 주일 저녁에 중국 광주에 도착했다. 당시 마땅한 거처가 없었던 모리슨은 외국인들을 임시 수용하던 이관(夷館)에 머무르게 되었다.
1807년 런던 선교회 소속의 로버트 모리슨이 마카오에 도착함으로 19세기 개신교 중국선교가 시작되었다.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중국입국을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인이 외국인을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큰 이유는 영국 상권을 쥐고 있던 동인도 회사가 자기들의 이권 문제로 선교사들이 중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리슨은 마카오에 도착하여, 개신교 선교사들 중 중국에 온 최초의 선교가 되었다. 당시 청나라 조정은 기독교 전파를 금지하고 있었고,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번역자의 신분으로, 중국어와 중국어 문화를 익히려 노력했다. 모리슨은 많은 중국 신자들을 얻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번역하고, 서적을 출판하고, 교육을 부흥시키고, 의료 사역을 감당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귀감이 될 만한 선교 사역의 모본을 보였다.

(2) 모리슨의 사역
광주에 도착한 모리슨은 먼저 중국어를 익히는 전력했다. 그의 친구이자 선교사인 윌리엄 밀네 (William Milne)는 로버트 모리슨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의 중국어 습득의 비결을 1.청동의 몸 2.강철의 목소리 3.떡갈나무의 머리 4.용수철 같은 손 5.독수리 같은 눈 6. 사도의 열정 7.천사의 기억력 8. 므두셀라의 수명을 갖춘 사나이라고 했다.
1809년 2월 20일에는 거주와 신변의 안전,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서 통역 요원으로 일했는데, 취직하던 날 마카오 주재 영국 상무의 일을 보는 모르톤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 모리슨이 중국에 온지 만 1년 5개월 되던 때였으며, 그 후 약 25년 간 동인도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중국을 바라보면서 “오! 지구상에 가장 큰 나라 바위 같은 나라야! 그대는 언제나 문을 열어 주겠는가?”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3년 만에 사도행전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4년 만에 누가복음을, 그리고 6년 만에 신약전서를 중국어로 번역 출판하였다. 중국 도착 12년 후인 1819년 11월 마침내 신, 구약전서 전부를 번역하여 신천성서(神天聖書) 라고 명명하여 출판하였다.
모리슨의 초기 사역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그가 쓴 화영자전(華英字典 1815-1822)을 출판한 일인데, 이는 최초의 영중사전이다. 그는 25년간 중국 사역 기간 동안 영문판 21권, 중문판 12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인지수문(印支授聞 Indo-Chinese Gleaner), 광동기록보(廣東記錄報, The Canton Repository), 중화총보(中華叢報, The Chinese Repository)등의 중국 문화를 서방에 소개하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1820년에는 마카오에 병원을 세우고 중국인 의사들을 고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하는 사역을 실시했으며, 1823년에는 광주에서 양발(梁發)을 전도인으로 임명하고, 아들 양 진덕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모리슨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은 1818년 밀네와 함께 영화서원(英華書院 : Anglo Chinese College)을 세워 중국 지도자들을 양성한 것이다. 영화서원은 설립 당시부터 복음 전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는데, 모리슨은 “영화서원은, 중국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결코 중지될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영화서원은 모리슨의 뜻을 따라 1835년에는 신학원으로 변하여 전도인을 기르는데 힘썼으며, 1843년에는 홍콩으로 이전했다.

2. 귀츨라프 (Karl A.F Gutzlaff, 1803-1851)

(1) 귀츨라프의 배경과 준비
귀츨라프는 독일인으로 18세에 베를린 전도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20세에 네델란드로 건너갔다. 1826년에 그는 전도인으로 안수를 받고 네델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동남 아시아에 있는 네델란드의 식민지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1831년 귀츨라프는 마카오네 들어왔으며, 중국어에 능숙했기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역원으로 일하면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리도 1833년 4월 그의 3차에 걸친 중국 순회 사역을 기록한 중구연해삼차유역기(中國沿海三次遊歷記, 1831, 1832, 1833)를 출판하였다.
귀츨라프는 1803년 독일에서 출생하여 바젤과 베를린에서 수학하고, 20대 초에는 네덜란드 선교협회(Netherland Missionary Society) 소속으로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중국인 난민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중국식 복장을 하고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눈에 띄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 귀츨라프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젊은 테일러의 선교 방법과 목표에 용기를 주었다. 후에 테일러는 그를 “C.I.M (China Inland Mission)의 할아버지” 라고 불렀다. 후에 그는 독립적으로 선교에 종사한 사람으로 특이한 선교의 흔적을 남겠다. 그는 "중국평론"을 발행했으며 또한 모리슨의 중국어 성경을 개역하였다. 그의 목표는 한 세대에 중국을 복음화 하는 것이었다.

(2) 귀츨라프의 사역
6년 동안 구츠라프는 300명 이상의 중국인 사역자를 얻었고, 수천의 신약성경과 소책자들을 분배했다. 그의 선교의 노력으로 중국 복음화 협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가 탄생되었다.
귀츨라프는 평생에 61권의 중문 서적, 9권의 영문 서적, 7권의 독일어 서적, 2권의 일어 서적을 쓴 대단한 저술가이다. 특히 그가 광주에서 창간한 계간지 동서양고매월통기전(東西洋考每月統記傳)을 통해 1833년에서 1838년까지 이국의 풍경과 정서들을 연재했는데, 이는 신문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동시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 1836년에는 메드허스트(Walter, Medhurst), 브리지만 등과 함께 모리슨의 구약전서를 번역하여 출판했으며, 1838~1840년에는 신약전서를 번역하여 발행했다.
1832년 7월 23일 영국의 상선 로드 앰허스트호를 타고 한국의 서해안 장산곶 부근(충청도 호주만 고대도)을 방문해 사람들에게 전도문서와 성경을 나누어 주는 등 선교활동을 시도했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귀츨라프는 한국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겼다.
“한국 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날이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힘써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미약한 첫 방문 사역에도 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한국 땅에 광명의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3. 태평천국(태평천국)의 난(1850-1864) :

태평천국을 건설한 홍수전(洪秀全)은 1814년 광동 화현(花縣)에서 태어났으며, 16세 이후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수차례 낙방했다. 1836년 3번째 과거에 낙방하여 낙심하던 중 양발의 저작인 권세양언(勸世良言)을 접했는데, 이때부터 기독교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1843년 네 번째 과거 시험에 응시했던 홍수전은 실패의 비애에 싸여 40여 일 간 병석에 누워 있던 중 꿈에서 어떤 노인으로부터 악마와 요귀들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해내라는 사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집에 두었던 권세양언을 좀 더 자세히 읽던 중, 자신이 겪은 환상과 기독교가 일치한다고 믿고, 유교를 버리고 전도 활동에 힘쓰게 되었다.

홍수전은 꿈에 나타난 노인을 상제 즉 여호와라고 여겨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신이 계시한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해 종교 단체인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창설하였다.
처음에 배상제회는 양발의 모범을 따라 복음서적과 성경을 배포하는 일을 했으며, 후에는 홍수전의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백정가(百正歌),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천조서(天條書)등의 저작들을 배포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홍수전은 자신이 건립하려한 천국을 太平天國이란 명명했는데, 이는 중국 고대 요순(堯舜)시대의 태평성대(太平聖代)의 ‘태평’과 양발의 권세양언 중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느니라”의 ‘천국’ 개념을 혼합하여 지상 천국을 건설하려는 혁명 운동 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장강 중류와 하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다 장악하였는데, 태평천국의 난의 이상은 정치와 군사와 종교를 하나로 합치는(政軍敎合一) 신정국가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 또 식사 전에 전 군대와 백성들이 하늘에 계신 천부이신 상제에게 예배하는 규정을 정해 놓았다. 또 주일은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전쟁도 그치고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했고, 예배를 드릴 때에는 진영 안에 있는 모든 병사들의 명단을 읽고, 기도하고, 불에 태워 번제를 드리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그들의 군대 장관은 전도인 이었고, 군대 장관은 군대를 통솔할 뿐 아니라 군사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였다.

4. 선교전략

(1) 성경 번역, 사전 편찬, 서적 및 잡지 출간, 학교 설립, 의료를 통한 선교
(2) 중국인 지도자들을 양성, 민간 계층에서부터 뿌리를 내림


4. 평 가
(1) 이 시기에는 선교의 자유가 거의 없었다. 이 시기 선교사들의 준비, 예를 들면 성경 번역과 서적 및 잡지의 출간은 미래의 선교를 위한 좋은 초석을 놓게 되었다.
(2) 이 시기의 선교사들은 중국인들 가운데 인재를 양성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고, 후대의 선교사들의 본받아야 할 좋은 모본을 보였다.
(3) 政軍敎合一 → 混合主義
홍수전의 기독교적인 혁명 사상은 하나님과 마귀와의 대립과 투쟁의 관념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실제로는 현실 사회에 불만을 가진 계층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하여 이택후(李澤厚)는 그의 책에서 “홍수전의 하나님은 근대 자산 계급의 박애 정신의 꿈이 아니라 농민 형제들의 복수의 신 이었다”라고 언급한다. 홍수전이 주도한 태평천국의 난은 당시 농민들이 암흑과 같은 현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지도층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해 생겨난 내부의 전쟁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전투적인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일종의 실패한 농민혁명으로 혼합주의의 색채가 농후한 혁명이었다. 1853년에 태평청국군은 2년 내에 남경을 점령하여 수도를 삼았는데, 수도를 삼은 이후 이전의 실패한 혁명과 유사하게 부패하고 타락의 길로 빠져갔다. 처음 이상은 청렴결백하고, 대단한 포부와 큰 이상을 품고 엄격한 군율로 시작했던 혁명이 점차적으로 오염되어지고, 부패하여 질 뿐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하나의 난(難)으로 전락해 갔다. 동시에 태평천국의 난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고,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라 자청하며, 성령의 능력을 독단적으로 오용하므로 혼합주의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와, 군사를 함께 결합하므로, 신앙을 잡동사니와 혼합하는 순수함에서 떠나게 되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

오구통상(五口通商, 1842-1860)과 자유로운 선교활동의 시기(1860-1900)

이 시기의 주요 인물로는 허드슨 테일러와 리처드 디모데를 들 수 있다.

1. 허드슨 테일러(Hudson Tailor, 1832-1905)

(1) 허드슨 테일러의 사역 및 사역원리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선교하면서 내지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인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해안을 중심으로 선교하던 상황이었고 내지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내지에도 엄청난 사람들이 복음을 필요로 함을 깨닫게 되면서 내지 선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랄프 윈터가 말하는 선교의 두 번째 시대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1865년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중국의 내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제안함으로서 그 시대적 선교적 관점을 정반대로 도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많은 선교단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새로운 선교단체들이 더 필요한지 그리고 해안선 사역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왜 내지로 들어가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 테일러 자신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창시하였고 그의 영향력으로 40개가 넘는 새로운 선교단체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내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헌신에 앞장섰다. 윈터는 이 운동의 결과가 오늘날 까지도 지속되고 있고 “1967년 까지도 북아메리카 전체 선교사들의 90%가 기존의 영향력 있는 현지교회들과 같이 동역하고 있었다”고 언급한다.

오구통상(五口通商)(1842년 남경조약)이후,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고, 중화전도회를 통해 1854년에 중국에 들어 왔던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1865년에 중국내지선교회를 창립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53년 21세의 나이에 중국복음화협회 (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의 소속으로 중국에 왔다. 그는 목사도 아니고, 대학졸업장도 없었고, 의사면허증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무력한 선교단체를 사임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선교를 믿음선교(Faith Mission)라 부른다. 그는 중국식 복장을 입고 중국인과 동화되어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많은 다른 선교사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1860년 건강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5년 후 그는 어떤 단체에도 알리지 않고 또 그들의 지원도 없이 중국에 와서 중국 내지 선교회(Church Inland Mission)를 창설하였다.
그는 어느 선교회의 도움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마음먹고 이 선교회를 이끌어 가고자 했다. 그의 선교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① 이 선교회는 초교파적 이어야 한다.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 이 선교회는 소속 교단에 관계없이 이 선교회의 교리 선언에 서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어떤 그리 스도인이라도 선교사로 임용한다.
② 공식교육이 부족한 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다.
③ 선교부의 지휘부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에 있어야한다.
④ 선교사들은 중국식 복장을 해야 하며 가급적이면 중국인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
⑤ 선교회의 일차적인 임무는 언제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테일러에게는 싸워야 할 어려움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과 본국의 이해부족, 그의 동료 중 몇 사람들의 불성실, 중국 당국자들과의 어려운 입장으로 말미암아 빗어진 오해, 좋지 못한 건강, 1870년 헌신적인 아내와의 사별 등이다.
그러나 이 CIM의 성장은 놀랄 만큼 빨랐다. 1893년말 까지 중국 전 지역의 주요 도시들에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1895년에는 641명의 선교사와 462명의 중국인 조력자들이 있었으며, 260 여개의 선교지부들이 있었다.
CIM은 계속성장하여 1914년에는 세계최대의 해외 선교회가 되었고,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에 이르렀다. 그 당시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개신교 선교사의 50%는 내지선교회 소속이었다고 전해진다.
CIM의 선교 방법은 개신교 신자들을 초교파적으로 받아들여 선교사로 훈련 시켜서 파송하는 것이었다. CIM에 속한 선교사들은 후원 단체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선교에 임하였다. 그들은 희생적인 헌신과 열정을 가지고 중국인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 주고 받아주며, 친구가 되어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성공의 비결이었다.
공산화 이후 CIM은 해외로 나와 사역을 계속하고 있으며, 1964년부터는 그 이름을 OMF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라 부르고 있다. 1905년 7월4일 중국을 위해 위대한 헌신을 한 허드슨 테일러는 영원한 처소로 옮겨 갔다.

2. 리차드 디모데 (Richard Timothy, 1845-1914)

(1) 배경과 준비
리차드 디모데는 웨일즈인으로 대영침례회 소속이었으며,16세에 사범학교에 들어가 18세에 소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후 1865년에 침례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교육을 받고, 1868년에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아 중국 선교의 길에 올랐다. 1870년 2월 상해에 도착한 그는 바로 산동성 연대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1890년에는 다시 천진에서 선교 사역을 했다.
리차드 디모데는 주로 구제 사업, 교회 신문의 주필, 지식인과 관료 접촉을 통한 문화 선교를 실시했으며, 후에 대영침례회를 탈퇴하여 상해에서 독립된 문서회인 광학회를 설립하여 서양학문을 중국에 소개하는 일과 교육 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1902년 6월26일에는 산서대학을 설립했는데, 산서대학당 역서원을 세우고 각종 교과서(중구편년사, 유럽 상업사, 산술, 대수, 식물학, 광물학, 생리학, 물리학, 교육학, 세계고사 등)를 출판하는 증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2) 사역 및 사역의 영향
1842년 오구통상 직후, 서방 선교사들이 중국 내륙에 속속히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문화 선교 방면에 가장 대표격인 인물이 리차드 디모데 선교사였다. 그는 중국인 특히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만국공보>을 창간했고, 서적을 출판하므로 서방의 새로운 사상과 과학, 정치, 경제, 법률, 민주와 같은 개념을 소개하기도 했다. 동시에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을 설립했는데, 리차드 디모데의 계획에 따라 산서의 산서대학, 연경대학, 청화대학, 북경의 협화의대 등이 창립되었다. 이러한 이 디모데의 선교 전략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로 인해 5.4운동이 일어났고, 문어체의 한자가 아닌 백화문을 사용하기로 주장하게 되고, 지식인들 가운데 전통적인 중국 문화는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심각한 반성이 일어나기도 했다.

3. 선교전략
(1) 연해 지역에 선교 센타가 설립되어지고, 점차적으로 내륙으로 확장되어 갔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학교를 건립하고, 병원과 출판사 등을 통한 사역이 확장되어 갔다.
(2) 이 시기에 허드슨 테일러는 일반 대중에게 뿌리를 내리고, 직접 전도를 통해 밑에서부터 위로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하는 전략(由下而上)을 구사했고, 리처드 디모데는 발달된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지식인을 양성하므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영향을 미치려는 전략(由上而下)을 구사하므로 두 가지의 다른 선교 전략의 노선이 나타났다.

4. 평가
(1) 이 시기에는 오구통상과 각종 조약을 통해 복음이 해안 지역과 내륙에 신속히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 의해 복음이 심하게 배척을 받게 되는데 이는 의화단 사건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의화단 사건을 통해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자가 매우 심각한 핍박과 손실을 받게 된다. 의화단 사건이 일어난 1900-1901년 사이에 천주교 주교 5명, 교사 48명, 수녀 9명, 중국인 교도 3만명 등과 기독교 선교사 188명, 기독교인 5천명이 살해 됐으며, 전국 교회당의 3/4가 훼파되었다.
(2) 리차드 디모데의 노선은 일종의 문화화 된 기독교를 산출하게 되었고, 그 속에는 생명력이 뿌리가 없는 지식 위주의 기독교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 디모데의 전략은 문화화 된 기독교의 한계성을 드러내었는데 단순한 교육 사업과 지식인에게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생명력 있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중국 선교

복음을 받아들인 지 28년이라는 짧은 시일 내에 급성장한 조선장로교회는 1912년 9월 조선장로회 총회를 창립하였다. 동시에 선교사 3명을 중국에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교 현지답사 차 중국에 도착하여 중국 기독교 대표들과 주중 미국 장로회 선교사 대표들을 만나서 조선 교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선교라고 하는 것은 선진국이 국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하는 사업이기에, 조선 같은 국력도 없는 나라의 교회는 이 어마어마한 선교 사업을 할 수 없으니 단념하라”고 권면하였다. 이에 조선교회 대표 목사들은 정중한 태도를 취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서 중국 선교에 대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과 같이 국력도 무력도 재력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시는 말씀인 주님의 복음을 가지고 있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2,500년간 공자의 사상과 도덕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조선인도 중국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할 때가 되었는데 조선은 공자와 같은 위대한 분은 없습니다만 더 위대하신 생명의 예수님을 중국에 전함으로서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선교부 대표들은 계속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중국 대표 목사들은 흥미를 가지고 대답하였다. “조선교회가 그렇게도 은공을 갚고자 한다면 공자의 고향인 산동에 와서 선교를 시작해 보시오.” 결국 산동성 중앙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래양현(萊陽懸)으로 선교지가 결정되었다.

1913년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의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생명부지인 지역에 도착하여 풍습과 식성이 달라 매우 고생하였다. 박태로 목사는 토질병에 걸려서 본국으로 귀환하여 치료를 받다가 서거하였고, 남은 두 목사도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임지를 떠나게 되었다.
조선 장로교회 총회에서는 악조건들을 조정하고 다시 1917년 방효원 목사와 박상순 목사 그리고 1918년에 홍승환 목사 등 세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는 국력과 재력과 무력이 풍부하여야 할 수 있다는 미국 선교부 대표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선교사를 파송한 본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짓밟히고 있는데 중국 땅에 초라한 모습으로 와서는 견디다 못하여 쓰러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장로교회 총회는 후퇴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다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식민지의 열강들은 함포에 기관총을 걸고 와서 불평등 조약을 맺어 강제로 선교의 문을 열게 하고 선교사들은 당당하게 환영 받으며 선교지에서 열강의 위대성을 나타내며 거룩한 선교 사업을 위엄 있게 진행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메뚜기 신세 같은 조선 장로회 선교사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당시의 5천명 서구 선교사들은 이를 비웃었다. 그러나 조선 장로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을 파송하면서 권면하던 말씀을 명심하고 선교지에 임하였다. 그 권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다른 열강의 선교사들은 절대로 중국 목사가 되지 않는데 반해 중국에 파송되는 조선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이임증서를 가지고 가서 중국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조선선교사들은 완전한 중국 사람이 되어 중국 사람과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에 조선 선교사의 장점이 있고, 중국인에게 환영 받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조선 선교사들은 중국인의 장점만 보고,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보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조선에 온 외국 선교사들은 사진을 찍되 창피한 장면만을 많이 찍어 세계 여러 나라에 퍼뜨렸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선교사들은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태산에서 시작하여 곤륜산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십시오. ....곤륜산에 뼈를 묻어라”

서구의 위대한 선교사들 뒤에는 막강한 국력과 풍부한 재력과 심오한 지력, 그리고 군사력이 있었지만 조선의 선교사들은 그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의지 하였다. 특히 1907년에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져서 백만 명 구령운동도 막 끝난 상태였기에 선교사들은 열정으로 충만된 상태에서 중국에 도착하였다.

한국선교사들은 중국에 단독 노회를 설립하기도 했고, 중국선교 30년이 되는 1942년에는 교회당 35개, 세례교인 1,716명을 얻는 역사를 남겼으며, 1957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선교 사역이 중단될 때 까지 활발한 사역을 전개 하였다.

이러한 힘은 서구의 선교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분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한동안은 중국어를 습득하였고, 이어서 곧 조선에서의 전도방식대로 호별전도와 노방전도에 나섰다. 선교사의 부인들도 유창한 중국어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400명씩이나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새신자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부임한 이대영목사는 유창한 중국어로 부흥회를 인도하여 1만6천명이 모이는 역사가 일어났다.

한민족 교회의 중국선교는 동양인에 의한 동양인 선교가 가능함을 입증하였다. 선진국에서나 선교사 파송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당시의 전통과 고정관념도 깨뜨려 버린 쾌거였다. 더욱이 선교의 정신, 선교구조, 선교사의 자질, 선교 전략과 방법, 그리고 피 선교지 교회와 관계에서 모범적이고 성공적이었다. 또한 모달리티 구조가 한국 장로교회에서 성공적으로 효과를 나타낸 증거였으며, 전도를 돕는 의료와 교육 선교 등 Wholistic Ministry (통전적 사역)의 좋은 표본이 되기도 하였다. 뛰어난 인물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사도행전에서와 같다. 우수한 전략을 구사한 것은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전수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건강하고 토착적인 그러면서도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선교 구조는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적 그것이었다. 철저한 팀 선교를 한 사실은 오늘의 우리에게 좋은 도전이 되고 있다.

방 효원 목사의 아들로 중국 산동에서 1937-1957년까지 선교 활동을 했던 방지일 목사는 중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절실히 체험했으며, 그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서 사역을 감당했다고 말하면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人的尽头神的起头)라는 고백을 했다. 이는 성경의 사도 바울의 고백 즉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중국 선교 전래의 회고와 반성

1.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올바른 선교 전략은 온전한 복음을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방언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파는 반드시 세계관 가치관의 변화를 초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복음이 중국과 같은 상당히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에게 전파되어질 때 종종 외형상의 변화만을 목표로 삼기가 싶다. 예컨대, 주일 날 교외에 놀러 가던 사람들이 교회당에 간다든지, 영화를 보던 사람이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던지, 유행가를 듣던 사람이 찬양을 듣는다던지 하는 외형상의 행동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기가 싶다. 이러한 것들은 행위상의 변화에 불과하다.

복음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인생관이 변해야한다. 그러면 어떻게 인생관이 변할 수 있을까? 인생관은 복음을 받는 자들의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데, 이전에 하나님도 없이 살던 사람이, 이전에 물질만이 전부로 알던 사람이, 이전에 자기중심적이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생각과 사고와 행동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11:36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의 제일 기본적이고, 제일 간단명료한 세계관을 말하고 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란 기독교의 창조론을 말하고,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란 기독교의 구원론을 말하고,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란 기독교의 종말론을 말한다. 이 모두는 기독교 세계관을 요약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신본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세계관의 변화는 단순히 유가사상과 합일(合儒)하는 것으로 불가능하다. 합일은 단순히 행위와 예의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관 전체의 변화는 반드시 유가 사상을 초월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정립이 필요하다. 중국문화는 인간 중심이다(以人爲本),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중심주의(以神爲本)이다. 인간중심과 하나님 중심은 중국문화와 기독교의 최대의 차이점이다. 세계관이 차이가 나므로, 혼인과, 금전, 성공, 가정, 경제, 시간의 활용 등의 모든 면에서 관점의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하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 선교사역과 복음 전도에 참여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명백히 알고 있다. 가치관의 체계가 다르므로, 인생관 전체가 다르고, 인생이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지,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일하기 위해서 사는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사는지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2. 리처드 디모데와 허드슨 테일러의 노선의 상호 보충을 통한 통합이 필요하다.

허드슨 테일러의 입장은 일반 대중들 속에 깊게 침투하여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므로 대중과 밀접하게 호흡하는 기독교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테일러의 <중국의 영적인 필요와 호소>에서 명확하게 밝힌 데로 중국의 당시의 인구를 4억으로 산정할 때 매 중국인을 1초에 한명씩 자기 앞으로 지나가게 한다면 23년에 다 지나 갈 수 있는데, 1개월에 100만 명이 지옥에 가게 되고, 하루에 3만 명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므로, 영혼을 신속히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여서 믿지 않는 자들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도록 “중국을 신속히 복음화”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테일러의 노선은 리차드 디모데의 노선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데, 각각의 노선은 본받아야 할 점과, 피해야할 약점들이 있으므로 서로 비난하지 말고, 상호간의 보충을 통한 좋은 점을 통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는 지식인들을 위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선교 전략도 필요하고, 대중적인 허드슨 테일러 식의 접근도 필요하다. 영국의 C. S. Lewis나 미국의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문학가와 사상가가 필요하다. 대중에게 적합한 소설, 영화, 연속극, 예술 등을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근거하여 소개하는 전문가가 필요할 뿐 아니라, 빌리 그래함과 같은 전도자도 필요하고, 죤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 죤스와 같은 설교자와 저술가도 필요하다.

마치면서

본인이 확신하기로는 중국 교회의 선교의 방향은, 먼저는 신자 개개인의 삶이 변하므로, 사상이 변하고, 이 세계를 본받지 않으면서 신앙을 위해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헌신하는 젊은 남녀와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골로새서 1:28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우리 선교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아니고, 일련의 사상과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즉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고, 각 사람을 권하므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세우는 것이 우리의 선교 사역의 목표이다.
기독교 문화의 외형상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관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선교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중국 선교 역사를 통해 배우게 하신 교훈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선교의 방향과 지침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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