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주의 만찬을 그가 배신당한 날 밤에 제정하셨다(마 26:20-30; 막 14:17-26; 눅 22:14-23). 사도 바울은 고전 11:23-26에 주의 만찬 제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구절은 널리 알려진 구절이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한다.


1.1. 주의 만찬이 유월절과 관련되어 있는가?


    주의 마지막 만찬은 흔히 유월전 만찬과 동일시된다. 그 결과로 인해 유월절과 주의 만찬 사이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1) 그러나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이러한 견해는 때때로 가정되는 것 보다 증거는 부족하다. 첫째, 초대 교회에서 행해진 수많은 예배 의식들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 과거보다 현재는 훨씬 더 확실하지 않다. 폴 브래드쇼(Paul Bradshaw)가 언급한 바와 같이 양자 사이의 관련성은 아주 미약하다. 또한 설령 그것이 유월절 만찬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초대 교회의 성찬과 관련된 의식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분명히 유월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없다.2)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그 관련성은 학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주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이 지켜지던 날 밤에 행해지지 않았다. 요한복음 18:28은 유월절이 사실상 그 다음 날이었으며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는 동안에 유대인들은 여전히 다음 날의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수를 우리를 위해 희생당한 "우리의 유월절"로 묘사하고 있지만 (고전 5:7) 그는 그 다음 날에 일어났던 예수의 죽음을 언급하지 그 전날 밤의 만찬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살펴보면 이 사건들과 유월절 사이에 분명한 관련이 있지만 관심의 대상은 만찬이 아니라 십자가였다.3) 셋째, 구약성경과 가장 분명한 관련은 유월절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의 70인의 장로들이 시내산 정상에서 먹었던 (출 24:1-11) 언약의 만찬에 해당된다. 모세는 화제와 화목제로 드려진 제물의 피의 절반을 제단에 뿌렸고 나머지는 그릇에 담아 두고 언약의 책을 읽었다. 그 후에 남은 피를 백성들 위에 뿌리면서 "이것이 언약의 피이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산 위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목격했으며 먹고 마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친교의 식사이었다. 성찬 제정시에 "이것이 새 언약의 내 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 장면을 연상시킨다.4) 


1.2 신약에 사용된 용어들


    이 성례를 지칭하기 위해서 신약에서는 몇 가지 용어들이 채택되었다. 각 용어는 성찬이 지닌 다른 차원을 표현한다. 또한 이 용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주의 만찬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의 전부를 표현하지 않는다.


(1) 사도행전 (2:42, 20:7)5)에서 이 성례는 '떡을 떼는 것'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떡을 취하여 자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떡을 자신의 몸으로 묘사하셨으므로, 이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대한 그래픽한 묘사를 암시한다. 우리의 구속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의 몸이 찢기어졌다.        


(2) 사도 바울은 '주님의 식탁' (고전 10:21)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악령에게 바쳐진 희생제물에 참여하는 것과 이와 동시에 주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고려된 것은 성찬이 그리스도께 속한 의식이라는 실재이다. 그 분께서 이를 제정하셨으며 그 분께서 친히 이를 주관하신다. 성찬이 주어지는 이 식탁은 바로 그 분의 것이다. 따라서 이 식탁에 그 분과 함께 좌정한 자들은 거짓 영들에 바쳐진 식탁에 참여할 수 없다.


(3) 사도 바울은 이 만찬을 또한 '주의 만찬'(고전 11:20)이라고 부르고 우리에게 이 언약의 만찬을 제공하고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이신가를 재확인시킨다.


(4) 고린도전서 10:16-17에서 이 만찬의 잔과 떡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참여 또는 교제로서 언급한다. 그가 사용하는 koinonia라는 단어는 교제, 참여 또는 교감이라는 뜻을 지닐 수 있다. 이 단어는 동일한 목적 또는 정체성을 가리키지만 스포츠 팀이나 정치적 정당이 지니는 공통적 연합을 초월하는 의미를 갖는다.


(5) 성찬의 제정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떡을 취하사 감사하시고(eucharisteo), 떼신 후에 말씀하셨다."(마 26:26-27; 막 14:22-23; 눅 22:17-19; 고전 11:23-24). 이 헬라어 동사에서 예전적 용어인 성체 (eucharist)가 유래되었다. 주의 만찬은 감사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아버지께 감사드리셨다. 그 결과,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그의 아들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드리는데 이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 계속 행하시는 일에 대한 감사이다.


1.3 성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성찬이 주어질 때 발생하는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이는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의 어떠함을 가리키는데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 마음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자기희생적 사랑,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한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의 부활과 우리를 위한 그의 지속적 중재로 집결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만찬을 이 측면 하나로만 국한시킨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그리고 심지어 많은 개혁주의적 견해를 지닌 자들도 전적으로 성찬을 기념설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찬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이 포함된다. 또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여기에 언급된 기념설은, 더욱 객관적인 관점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기념하는 사건들과 유사한데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들을 기념하기 위한 돌들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2) 주의 만찬은 그 자체로서 복음의 선포이다.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이 행해질 때마다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전 11:26)고 강조했다. 어거스틴은 성례를 "하나님 말씀의 가시적 형태"6)라고 주장함으로서 이 견해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말씀의 설교가 복음을 우리 귀에 전해주는 반면에, 성례는 이를 우리 눈앞에 묘사해준다. 성찬에서 우리 눈앞에 놓인 떡이 찢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 또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찢어진 것이다. 포도주가 잔에 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는 죽음위에 부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받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설교 때와는 다른 감각 기관에 호소하신다. 이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우리가 듣는 것을 강화하는 시각적 보조기구이다. 그러나 성찬의 이러한 시각적 기능이 성례의 의미를 전부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3) 사도 바울은 성찬을 주님의 살과 피 안에서의 "교제" 또는 "참여" (고전 10:16-17)라고 부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고찰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6장에 언급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이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과 관련된 것이며 우리가 그 물질적 요소들을 먹고 마실 때에 성령을 통해서 그 효과가 주어진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4 요한복음 6:47-58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은 성찬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두 가지 요소가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1) 성찬에 관한 제정에 앞서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말씀하셨다. 이 본문에 나타난 그의 주장을 그가 이것이 성찬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2) 이 본문을 성찬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식인주의와 유사한 것인데 이는 수용될 수도 없고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이제 자신이 아직 도입하지도 않은 성례를 주장함으로서 예수님께서 시대착오적이었다는 첫째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첫째, 주의 만찬이 아직 도입되지 않았음이 사실이지만 요한의 입장, 즉 예수님의 생애, 사역, 죽음과 부활 전체를 회상하는 입장에서 이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장을 성찬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보았음을 뜻한다. 이 본문에 나타난 견해와 예수님의 성찬 제정은 사실상 동일한 현실의 한 부분에 해당된다.  

     둘째,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이미 언급하신다. 그는 자주 임박한 자신의 죽음과 부활, 교회에 대한 핍박,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 교회의 치리, 교회의 존재 등에 대해서 이들이 발생하기 훨씬 전에 말씀하시곤 하셨다 (마 16:21-28; 요 16:1-4; 마 24:1-36, 참고 막 13:1-31; 눅 21:1-33; 마 18:15-20; 마 16:13-20)

셋째, 요한복음의 이 본문 바로 직전에 주어진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한 기사는 공관복음에 나타난 성찬 제정에 대한 묘사에 사용된 언어와 흡사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을 떼시고, 감사하시고, 이를 쪼개어 나누어 주셨다 (눅 22:19; 마 26:26-27; 막 14:22-23). 모여든 회중이 땅에 앉은 상태에서 예수님은 떡을 취하시고 감사하시고 이를 나누어 주셨다 (11절). 오천 명을 먹이신 기사와 성찬 제정 기사 사이에는 유사함이 존재하며 이 본문에서 주의 만찬에 대한 가능한 암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초대 기독교 예술에 있어서 공통적 주제가 성찬을 번식의 주제와 연관시키는 것이었으며 성찬은 자주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과 연관되어졌다.7)

     넷째, 이 본문 뒤에 주어진 구절들은 많은 첫 제자들의 배신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생명의 양식이라는 "어려운 주제"하에서 다루어진다 (60-71절). 결론에서 예수님은 유다를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배신할 사람으로 지목하신다. 이는 최후의 만찬에서 벌어지게 될 사건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떡을 받은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기 위해서 그 방에서 떠난 것을 가리킨다.

     다섯째,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어려운 말씀을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이를 성찬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애찬식을 행함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식인주의로 기소당하기도 했다.8) 첫 수 세기 동안 교회에서 이 본문은 일반적으로 성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실제로 이 본문이 성찬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많은 학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가르치신 바가 성찬 제정에 관한 본문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9) 


상황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님은 광야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적을 통해 먹이신 사건을 회상하신다. 그는 자신이 이 사건을 성취한다고 확언한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순례를 통해 그의 백성들을 지탱하시는 아버지에 의해 주어진 생명의 양식이시다 (25-40절). 그 분은 우리를 먹이시고 양육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양육이 예수님 안에서 발견된다.

또한 이 양육은 영원한 것이다 (37-40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로 온다. 그에게로 온다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37절). 그를 믿는 자는 쫓겨나지 아니할 것이다. 이는 반대되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적인 것을 확증하는 방식을 완서법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즉 아버지께서 이들을 받으시고 보존하실 것을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영생을 누리는 자들은 믿음 안에서 참고 견딜 것이다. 어떤 사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이들은 모두 죽음에서 건짐을 받아 살아날 것이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은 믿음으로 수용된다 (41-47절).


     이 주장을 따라가면서 유대인들은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데 그들은 마치 그들 이전의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았다. 어떻게 나사렛 출신인 이 사람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아주 강한 불신과 대결했다. 이와 같이 아무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 예수님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지적하신다 (44-47절). 아버지는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 눈앞에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아버지만이 이러한 적의감을 무너뜨릴 수 있다. 생명의 양식인 예수는 믿음을 통해 받아들여지며 이 믿음은 아버지의 은혜로운 선물로 주어진 결과이다.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주의 만찬에서 먹고 마신다 (48-58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가 주는 떡은 그의 몸으로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의 생애와 사역의 가장 위대한 목표이었다. 성육신을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요 1:14) 이는 대속으로 결말을 맺는다. 그의 몸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아버지께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 우리의 양육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은 십자가에 드려진 자기 자신이었다. 이 죽음은 전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현실에 관한 것으로 이는 결코 약화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상징적 이해는 이단적인데 그 이유는 이러한 이해가 기독교 신앙의 전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다음과 같이 주장을 통해 본문의 핵심을 파고 든다. "의도적으로 사용된 노골적이고도 충격적인 단어는 독자들을 토라와 가르침의 언어 이상을 찾도록 만들며 “더 이상 무엇이 암시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그는 아람어에 "몸"과 "살"에 해당되는 단어가 하나 뿐이라는 사실과 대조적으로 헬라어에는 이에 상응하는 두 단어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공관복음에서 사용되었던 soma 대신에 이 본문에서는 의도적으로 sarx를 사용하였던 것은 "예수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의 내용을 순수하게 정신적이며 영적인 들음과 믿음으로부터 탈피시켜 물리적으로 씹고 삼키는 방향으로 전환시킨다."10) 요약하자면 이 본문에 나타난 말씀들은 다른 복음서에서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을 우리가 먹도록 주겠느냐?" (52절).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유대인들의 경멸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들이 받은 충격과 혐오감은 생명이 그의 살을 먹음으로서 주어진다는 식인주의를 포함했다. 피를 마시는 것은 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법령 이전에 대홍수 이후에 주어진 것이었다 (창 9:4). 동물의 피는 그 고기를 먹기 전에 반드시 걸러져야 했다 (레 3:17; 신 12:23). 인간의 피 또한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언어의 의미를 약화시키거나 이를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여기에서 어떤 오해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이를 더욱 강화시키신다. 뒤로 물러서거나 그의 독자들이 그를 오해했다고 지적하시는 대신에 그는 용감하게 그의 주장을 펼치신다. 그들은 그를 너무 잘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반응은 합리적이었다. 예수가 주장하는 먹고 마신다는 것은 아주 실제적이었다! 54절을 살펴보면 놀라운 동사의 변화가 감지된다. 지금까지 요한은 단순히 먹는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phago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동사를 조잡하고 대중적인 단어로서 '씹다', '물어 뜯다', "소리를 내어 깨물다"의 의미를 지닌 trogo로 대체하였다.11) 그는 이 본문의 남은 부분에서 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를 선택함으로서 그는 씹고 삼키는 물리적 과정과 그 행위에서 비롯되는 들리는 것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는 이 동사가 사용되는 54절, 56절, 그리고 57절에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대적들을 부드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다. 이 말씀들은 "어려운 말씀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것" (60-66절)으로 인정된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서 제자도를 포기했다. 심지어 12제자들도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현실주의적 식인주의를 주창하신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언어가 지닌 야생적 힘이 사라지게 된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가 유대인들의 적대감을 가라앉히기를 원했더라면, 그렇게 행동할 모든 기회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유대인들도 그의 주장을 순수하게 영론화된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플라톤의 철학에 의해 지배되지 아니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본문을 신학적으로 성찬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면(솔직히 말해서 나는 예수님의 의미와 청중들의 반응 모두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즉각적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주의 만찬에서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말함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그가 어떻게 생명의 양식으로서 우리를 영생에 이르도록 먹이고 양육하시는가를 보여주신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그를 먹는 한, 즉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생명의 양식이다. 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이 마치 동일한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한다. 한편으로는 믿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이 두 가지는 함께 움직이고 양자는 필요하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첫째, 우리는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믿음을 통해 먹는다.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동적으로 전달하는 마술적 의식이 아니다. 광야에서 처음 세대가 멸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대적들 또한 그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참된 떡을 먹을 수 없으며 영생을 누릴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주의 만찬을 올바로 먹을 수 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주의 만찬에서 생명의 양식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을 가르치시는 것도 육체와 별개의 이상화되고 영적인 구원을 주장하신 것도 아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믿음과 더불어 작용한다. 이들은 같은 동전의 양면에 해당된다. 성찬은 복음의 핵심적인 것이다. 믿음이 결여된 성찬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반면에, 성찬이 없는 믿음 또한 메마르고 공허한 것이다. 믿음(성령의 선물로서)을 통한 성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며 영원한 구원으로 풍족해진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는 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를 누리게 된다(56절). 우리가 음식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 음식과 하나가 된다. 음식은 우리 체계에 들어가게 되고 우리는 이를 소화하고 음식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어 우리로 하여금 활동적인 삶을 살도록 만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실 때 그가 우리 체계에 들어오시게 된다. 그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는 사실상 그 분 안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연합을 향해 자란다. 따라서 상호간에 거하게 된다. 즉 그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거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이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칭송의 대상이다.

    둘째,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살아 있는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57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아버지는 자신 안에 모든 생명을 지니고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을 때(요 1:14) 그는 성육신을 통해서 아들을 보내셨다. 실제로 그는 자신 안에 생명을 지니도록 아들을 주셔서(요 5:26) 아들이 아버지 때문에 살도록 하신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연합되고 분리되지 않는 삼위일체 내에 침범할 수 없는 질서가 존재한다. 더욱이 우리는 아들로부터 생명을 받되 성찬에서 우리가 그를 씹어서 섭취하게 된다. 이 사실을 누가 칼빈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인성에도 충만한 생명이 거하며,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는 동시에 생명에 참여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친근한 한 실례를 통해서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때로는 샘에서 물을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퍼내기도 하고, 때로는 수로를 통해서 밭에 물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물이 물 자체에서 흘러나와서 그렇게 공급되고 쓰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육체는 마치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주는 풍성하고 다함이 없는 근원과도 같아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그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교제가 하늘의 생명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12)


    셋째, 우리는 영생을 받게 된다 (48-51a, 51b, 53-54, 58절). 그리스도는 그의 몸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셨다. 그가 곧 영생이시므로 그는 영생을 지니고 계신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죽음에서 일어나게 될 것인데 이는 우리가 생명되신 그 분과 연합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이 생명이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부어지게 된다. 이는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보증에 해당된다.


1.5 신약 성경에 나타난 성찬에 관한 다른 구절이나 암시에 관하여

  

    누가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여행하던 두 제자가 날이 어두워지자 예수님을 그들과 함께 머무르도록 초청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은 그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추정하지만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말에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오랜 시간 동안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단순히 그가 누구인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슬프고 충격 속에 머물러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루 밤을 머무를 것을 청했다.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는 22:19에서 주의 만찬을 위해 사용했던 동일한 방식을 사용해서 이 구절들을 표현했다. 물론, 이는 주의 만찬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축하는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관하셨기 때문에 이는 주의 만찬이었다. 더욱이, 누가는 이것이 동일한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두 사람의 즉각적 반응에 주목해 보자: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31절). 그의 만찬에서 즉각적으로 예수님이 인식되었다. 물론 말씀은 그들이 증언했던 그 분에 의한 성경의 주해보다 먼저 나아갔다(32절).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35절). 그가 주관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그의 만찬이었다.

     요한계시록 3:14-20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쓰신다. 교회는 그의 충성에 있어서 미지근했으며 그리스도는 교회가 회개하지 않는 한 이를 자신의 입에서 내뱉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마지막으로(20절) 그의 경고에 반응하는 모든 자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허락해 주신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들은 교회에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는 교회적 장면을 연상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 멤버들의 무관심과 자만에 의해서 교회로부터 외면당했다. 전에 이미 확보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의 엄청난 결과에 대해 경고했으므로 이제 그는 교회에 재입장을 요청하신다. 성찬에 대한 암시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이를 친교라는 차원에서 언급하시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던 교제라는 견해와 아주 가깝다.

    요한계시록 19:1-8에는 교회의 구원의 완성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드러난다. 교회는 어린 양을 위해서 단장한 신부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위대한 종말론적 잔치를 통해서 하나로 연합된다. 어린 양의 만찬과 주의 만찬 사이에 나타난 용어의 유사성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첫 부분에 나타난 것과 같이 어린 양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지휘하는 유다 지파의 사자가 곧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기도 하다 (5:1-14). 이러한 사실을 두고 살펴볼 때 요한 계시록 전체는 소아시아의 고통당하고 핍박당하는 교회들과 천국에서 승리한 교회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린 주의 만찬은 언젠가 천국에서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어린 양의 만찬과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에 나타난 가르침에 반영되어 있다. 히브리서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12:22-24)라고 증언한다. 주의 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천사와 천사장, 그리고 천국의 모든 백성들과 더불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예배드리는 가운데 승리한 천상의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더욱이, 단지 교회만이 (천사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아니라) 그 분과의 교제를 누리게 된다.


교회에서의 발전


    성찬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개괄한 후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물리적 방식으로 현존한다는 성찬론이 곧 등장하였다는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세기에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155)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13) 수 세기에 걸쳐 이 견해는 서방교회에서 발전하였으며 1215년에 개최된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의로 공인되었다.14) 동방에서도 화체설이 지배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등장과 급속한 발전 때문에 동방교회는 서방에서 일어났던 그러한 발전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대신에 6세기 이후에 완전히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동방정교회는 성찬의 요소들이 변화하였고, 신비의 측면을 강조했을때 성찬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성례전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분명하고 치명적인 오해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잡할 정도로 객관적인 의미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 오해는 효과적인 단순화로서 그 뿌리는 대중적이며 단순한 평신도 차원에서 발견된다. 이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사제이어야 한다는 점증적인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제사장들은 희생제물을 바친다. 따라서 교회의 사제는 성찬을 희생제사로 표현하는데 이 희생제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발전들은 함께 일어났다. 3세기경에 벌써 우리는 오리겐 (Origen, 185-224)과 키프리안 (Cyprian, 200-258)을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은 모두 주의 만찬을 "성례전적 희생"이라고 불렀다.15) 

     이 가르침이 이렇게 일찍 등장하게 되고 거침없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 자체로서 요한복음 6장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나는 제안한다. 만약 신약 성경이 성찬을 순수하게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으로 의도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 가르침이 그렇게 일찍 등장할 수 있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에 해당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가르침의 등장은 우리가 앞서 요약했던 견해에 대한 왜곡으로서 손쉽게 설명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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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은 연례적으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이 구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니산 14일 오후 6시부터 다음 날인 15일 오후 6시까지 지켜졌다. 그날 밤에 멸망시키는 주의 천사들이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넘어간 반면에 애굽의 장자들에게는 심판을 행하셨다. 자녀들은 이 위대한 구원 사건과 관련하여 교육받았다. 

2) Paul Bradshaw, The Search for the Origins of Christian Worship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92), 51, 205.

3)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유월절 만찬이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R. T. France, "Chronological Aspects of "Gospel Harmony", " Vox Evangelica 16 (1986): 50-54; C. K. Barre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London: SPCK, 1978), 48-50; J. Jeremias, The Eucharistic Words of Jesus (London: SCM, 1966), 41-62. 이와 상반되는 견해로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1), 455-57.

4)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Zondervan, 1994), 988-89.

5) 두 경우 모두 주어진 상황은 교회론적이다 (2:42에 언급된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와의 관련성, 그리고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나타난 성전에서의 행위와의 관련성에 주목할 것). 20:7이하에 나타난 상황이 교회와 관련된 것은 자명하다. F. F.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The Greek Text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London: Tyndale, 1952), 100. 

6) Augustine, Lectures or Tractates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lxxx:3, in MPL 35:1840, NPNF 7:344.

7)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London: Chapman, 1966), 246ff; C. F. D. Moule, "A Note on Didache ix,4",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6 (1955): 240-43.

8) J. Stevenson (ed.) & W. H. C. Frend (rev.), A New Eusebius: Documents Illustrating the History of the Church to AD 337 (London: SPCK, 1987), 36, 66에서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and Athenagoras, Legatio pro Christianis를 인용함.

9) George R. Beasley-Murray,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36 (Waco, TX: Word, 1987), 94-95. 비슬리-머리는 성찬 제정에 관한 말씀이 이 본문 아래 자리잡고 있다는 의심하지만 복음전파자나 그의 독자 모두 의식적으로 이 본문이 주의 만찬을 지칭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글을 쓰고 읽을 것이라고 간주한다. 카슨은 이 성례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견해를 표명한다. 즉 물리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과 순수하게 영적인 그리고 은유적 해석에 대한 대안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은유적 언어와 비은유적 언어를 예리하게 구분하면서 이 본문의 의미는 은유적인 것에 놓여 있으며 전혀 성찬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카슨이 파악하지 못한 것은 성찬에 은유적 요소와 비은유적 요소가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에 나타난 어떤 본문도 이 본문만큼 분명하게 성찬의 의미를 드러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Leicester: Inter-Varsity, 1991), 288-98. 한편, 레이몬드 브라운은 이 본문에서 성찬은 이차적 주제라고 주장한다.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282-83, 291-92. 바나바스 린다스 (Barnabas Lindars)는 요한에 의해서 성례가 이미 전제되었다고 주장한다. The Gospel of John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2), 59. 루돌프 슈네큰부르크 (Rudolf  Schnackenburg)는 요한복음에 관한 최근의 저작물들이 이 본문 뒤에 성찬 제정에 관한 가르침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주장한다.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 (London: Burn & Oates, 1980), 55. 또한 다음을 참고할 것. Ernst Haenschen, John, 1 (Philadelphia: Fortress, 1984), 294ff.

10) Lesslie Newbigin, The Light Has Come: An Exposition of the Fourth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1982), 84-85.

11) Cf. Brown, John (i-xii), 282-83, 291-92.

12) 요한 칼빈, 『기독교강요』4.17.9.

13) Justin Martyr, "Apology" 1:66 in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eds.), The Ante-Nicene Fathers, reprinted (Edinburgh: T & T Clark, 1993), 1:185. 그러나 이 본문이 애매모호하고 루터란들과 개신교도들 양측 모두에 의해 주장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할 것.

14) 서방교회에서 나중에 이르기까지 성찬에 관한 이 교리가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9세기 수도승인 라트람누스 ( ~868)의 작품, <주의 몸과 피에 관하여>에 잘 드러난다. 그는 성찬의 요소들이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xii-xiii), 요한복음 6장은 육체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된다 (xxix, xxxiii)고 주장한다. 또한 성령의 주권적 능력이 필요하며 (xxvi-xxxi), 그리스도는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먹어야 한다 (lix-lxii)고 주장한다. 떡과 포도주가 인간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또한 취하게 만드는 것처럼, 살아있는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들의 마음을 새롭게 한다 (xl). Ratramnus, De corpore et sanguine Domini: Texte original et notice bibliographique (Amsterdam: North-Holland, 1974).  

15) Johannes Quasten, Patrology, Volume II: The Ante-Nicene Literature after Irenaeus, reprinted (Westmisnter, MD: Christian Classics, 1992), 85-87; Cyprian, "On the sacrament of the cup of the Lord", in Roberts and Donaldson (eds.), The Ante-Nicene Fathers, 5:358-64. 키프리안의 작품은 Epistolu 63으로 알려져 있다.

16) John W. Nevin, The Mystical Presence (Philadelphia,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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