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신학의 전반적 맥락에서 본 그의 성찬교리

   
칼빈의 성찬론에 대한 반박


     성찬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은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비판은 특히 19세기에 더욱 그러했으며 최근까지 보편적 차원을 지니게 되었다. 윌리엄 커닝햄 (William Cunningham)은 다음과 같이 널리 알려진 기록을 남겼다: 츠빙글리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성행하였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으나  이는 그 당시의 다른 개혁주의자들에 대한 반발이라는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그의 성찬론은 다른 종교개혁자들로 하여금 다시 로마 가톨릭의 입장의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칼빈에게도 다소 나타나지만 그의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성찬을 왜곡하는 요소들이 존재하였다. 이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과 친밀함을 유지하려는 욕망과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에 관한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도로 반영하려는 견해로 나타났다. 성례 전반 또는 세례에 관하여 칼빈의 주장에 나타난 내용들에 대하여 잘못을 집어내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성찬의 시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자들의 영혼에 미치는 실제적 영향을 강조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전적으로 성공적이지 않았으며 루터의 공재설과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으로 남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이는 공적 교사로의 칼빈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오점에 해당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실수하게 만드는데 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영향은 일반적으로 그가 기독교회의 상이한 차원들 가운데 일치와 조화를 보존하려는 신실한 욕망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흥미로운 상황이다.1

     1848년에 발간된 존 윌리엄슨 네빈 (John Williamson Nevin)의 저서인 『신비로운 임재 (The Mystical Presence)』에 대한 서평에서 찰스 핫지 (Charles Hodge)는 칼빈의 성찬론이 그의 전체 신학에 있어서 조화될 수 없는 낯선 요소이며 이는 곧 개혁 교회에 의해 부인되었다고 밝힌다2. 로버트 대브니 (Robert L. Dabney)는 칼빈의 성찬론을 난해하며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다.3 최근에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L. Reymond)는 비록 성찬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 전반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다는 그의 주장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반대 의견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칼빈이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4


칼빈은 성찬에 관해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칼빈의 성찬론은 그의『기독교 강요』1559년판 제 4권 17장과 『우리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관한 소논문』(1540)에서 발견된다. 또한 1546년에 발간된 고린도전서 11장 주석과 1548년에 발간된 에베소서 5장 주석에 중요한 주장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하인리히 불링거 (Heinrich Bullinger)와 함께 1549년에 성찬에 관하여 『취리히 협약문 (Consensus Tigurinus)』을 발표했다. 이 협약문은 일종의 중재적 문서로서 유럽을 로마 가톨릭과 루터란 지역으로 나뉘어지게 만들었던 1548년에 발표된 『아우구스부르크 잠정안』에 대항하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연합전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작성되었다. 이 협약문을 그의 『성찬에 관한 소논문』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칼빈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5 그 후에 그는 요아킴 베스트팔(Joachim Westphal)과 틸레만 헤슈스 (Tileman Hesshus)와 같은 루터란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다.6

    칼빈은『기독교 강요』4권 17장을 성찬이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한다고 주장함으로서 시작한다. 여기서 영적 양식은 성례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자리에 우리 눈 앞에 임재하시며 우리 손으로 만져지는 것과 같은”것이다.7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인쳐지게 되는데 이는 설명되기 보다는 오히려 체험되어야 할 신비이다. 그에게 참되게 참여함으로써 그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 것이 된다 - 이는 마치 떡이 음식으로 취해질 때 몸에 활기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8 이는 높은 수준의 신비이며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9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심에 있어서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다. 첫째, 성찬은 우리 의식에 복음의 약속에 대한 징표이자 인이며 이것이 우리의 참된 영적 양식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을 가져다준다. 둘째, 성찬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을 진작시킨다. 셋째, 성찬은 우리를 거룩함과 형제애를 추구하도록 고무한다.10 이렇게 함으로서 성찬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끄는데 이는 그가 모든 성례의 집약이며 내용이기 때문이다.11

그리스도가 그의 성찬의 집약이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교제는 성찬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는『성찬에 관한 소논문』에서 이 실재를 부인하는 것은 이 거룩한 성례를 하찮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는 그의 영에 참여하는 것 뿐 아니라 그의 인성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완전히 소유하도록 그가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분배하심에 대한 표징이며 수단이다. 비록 성찬의 이 교제가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예수님의 세례에 있어서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태를 취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시적이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몸과 피가 갖게 되는 교제는 다음과 같다. 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신비이며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신비이다. 따라서 이는 가시적 표징에 의해 상징화된다. ... 그러나 이 표징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성찬의 실재와 내용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한 이유에 근거해서 떡은 몸으로 불리워지는데 떡이 몸을 표상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이를 실제로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 주님의 성례는 그 실재와 내용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아니되며 또한 분리될 수도 없다. 이를 구분하고 혼동하지 않는 것은 선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둘로 나누되 마치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분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12


   칼빈은 그의 『에베소서 주석』에서 이를 더욱 발전시킨다. 그는 만약 그리스도의 참된 구성원이라면 그의 실체와의 교제를 통해서 한 몸으로 자라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성찬에서 주어진 것에 대한 상징이며 서약에 해당된다.라고 묘사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교제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뼈에 속한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만약 성찬에서 그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영생을 위하여 양식을 공급하시기 위해서, 그의 몸을 제공하신다고 우리가 놀라워하는가? ... 이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인데 이는 그가 자신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뼈 중의 뼈가 아니며 살 중의 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에 의해 우리가 생명을 그의 몸에서 얻도록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새겨 넣어 주시기 때문이다.13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경이감으로서 결론을 맺는다. 그는 이것이 놀라운 신비라고 외친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어떤 언어도 이 신비를 정당하게 보여주지 못한다고 암시한다. ... 그들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제공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때 나는 이 신비의 심오함에 의해 놀라게 된다. 바울과 더불어 나의 무지함을 경이감과 더불어 인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따라서 이 교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보다는 우리 안에 사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자.14


       위의 주장들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는 교제의 실제와 이에 대한 기념적 이해의 공허함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증명한다. 그가 이 교제를 영적인 것으로 주장할 때 그는 이것이 성령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줄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이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실제적이고 참된 교제는 영적인 것이다.15

칼빈은 루터와 로마교의 가르침 모두로부터 거리를 유지한다. 미사에 관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성례를 부패시키고 효과적으로 파괴시킨 일련의 오류를 야기시켰다. 그 뿌리에는 성찬이 희생 제사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곧 화체설의 교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모든 우상 숭배와 미신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런 잘못된 교리로서 칼빈에 의해 거부된 것 중에 포함된 것으로, 집례자를 숭배하는 행위, 떡을 예약하는 행위, 평신도에게 잔을 돌리기를 거부하는 행위 (칼빈은 이를 도적질로 간주하였다)와 먼저 성례를 성례로 만들었던 말씀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거짓 교리의 과잉에 의해 상실한 것들이다.16

        루터 또한 상세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몸에 편재에 관한 독특한 교리가 비판의 대상이었다. 칼빈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신다. 우리는 승천의 의미와 가치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올라 가셨으므로 그의 인성의 차원에서 육체적으로 여기에 임할 수 없다.17 결과적으로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로 올라가는 것이다. 루터주의자들은 성령에게 어떤 역할도 남겨 놓지 아니한다. 그러나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지 않는 한 그가 임재하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 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신다면, 우리는 그만큼 그 분의 임재를 즐기지 않아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단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넣어 버리지만 우리는 그 분을 하늘에서 끌어 내리는 것이 적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18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을 인간의 영혼과 혼합하는 베스트팔의 가르침과도 다른 견해를 지닌다. 그와는 달리 칼빈은 그의 실제적 몸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에 생명을 불어 넣으시며 ... 실제로 바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쏟으신다."고 말한다.19 베스트팔과 다른 극단적인 루터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의 이해를 초월하는 능력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먹는다는 사실로 축소될 수 없는 신비이다.20

        우리는 주의 만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에 임해야 하는가? 칼빈은 이 성례를 경멸하거나 또는 이를 무시하는 태도가 지닌 엄중한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찬을 남용하고 오염시키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에 대한 신성모독이다.21 우리는 회개와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의라는 사실을 확고히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연약하고 비참하지만 그 분은 강하고 은혜로우시다.22 성찬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행위와 태도에 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성찬의 떡과 잔을 취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를 품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 성찬은 화해의 성례이기 때문이다.23 이 자기 성찰은 이제 막 성찬을 받으려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는 태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러한 권한은 적법한 교회적 권한에 속한 문제이다. 악랄한 죄가 적법한 교회 절차에 의해 증명되었을 때에만 출교는 가능한 것이다.


자기에게 좋게 보이는 대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거부하기 위해서 그를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은 개인의 직분이 아니다. 이러한 특권은 일반적으로 교회 전체에 속한 것이거나 목사와 교회의 통치에 있어서 그를 돕기로 되어 있는 장로들에게 속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라고 요구하지 않지만 각자는 스스로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24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은 완전에 도달한 자들만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기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우리 편에서 신앙과 사랑이 요구되지만 이는 획득 불가능한 완전은 아니다. 만약 완전한 회개와 확신이 요구된다고 한다면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모두 배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25

        칼빈은 주의 만찬이 그의 시대에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것 보다 더 자주 행해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성찬이 얼마나 자주 행해져야 하는가에 관하여 자세하고 구속력을 지닌 필요조건은 없었지만, 칼빈은 성찬이 "사람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자주" 행해져야 한다고 믿었다.26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찬은 아주 가끔 주어졌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는 이를 연 1회로 정했다. 칼빈 자신의 소원은 성찬이 매주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의회는 그의 소원을 기각했으며 월 1회로 제한했다.


로마 가톨릭, 루터주의, 그리고 쯔빙글리와 칼빈의 대조


        로마 가톨릭과 루터주의자들과 달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육체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연합된다. 이는 믿음을 통해서 성령의 이해할 수 없는 능력에 의해 일어난다. 성례에 의해 표상된 실재들을 불신자들은 받지 않는다. 그의 인성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한 장소에 계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성령 안에서 그 분에 의해 먹게 된다.

        한편 쯔빙글리와 정반대로 칼빈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교제를 통해서 그들은 그의 살과 피를 취하게 된다. 만찬은 상징적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리킨다.


칼빈의 독특한 가르침


       칼빈의 견해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인성, 즉 그의 살과 피에 대한 실제적이며 영적인 교통이 있다. 이 교통은 그리스도 자신의 생명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와 더불어 교제를 누리게 되며 이로부터 그가 제공하시는 유익을 받게 되는데 먼저 그리스도를 받게 되고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의 유익을 받게 된다. 이 생명은 위격적 연합과 성령의 사역 덕택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하여 받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따라서 성만찬에서 우리에게 중개된다; 그것은 벧후 1:4에 관한 주석에서 그가 언급한 일종의 신격화(quasi deificari)이다.27

       그의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Short Treatise, 1540)에서 칼빈은 아주 분명하다.“그는 믿음으로 그 성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참된 본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며 하나님의 영이 그 참여의 끈이다.”28 라고 결론을 내린다. 더우기 “성만찬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제를 부인하는 것은 이 거룩한 성례를 하챦고 소용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29  제네바교회 요리문답(1545)에서는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유익들에 대한 증언 혹은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과 연합할 때에 그 성만찬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je ne doubte par qu'il ne nous face participans de sa propre substance, pour nous unir avec soy en une vie)이라고 진술한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그의 성령의 기적적이고 비밀스런 덕에 의하여 행하시는데, 다른 경우에는 공간의 간격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그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30

       그 다음해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6:15을 논의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가지는 영적인 연합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몸이라고 확인한다. 만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완전하고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면, 부활의 소망도 연약해질 것이다.31 고전 11:24에서 성만찬에 관한 바울의 논의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가장 폭넓게 논의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첫째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과 연합된다는 것이다; 그분의 은덕들은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그 인격적 연합에서 따라온다(Ego autem tunc nos demum participare Christi bonis agnosco, postquam Christum ipsum obtinemus).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다고 믿을 때보다는 그분이 우리와 하나이실 때, 우리가 그분의 몸의 지체들일 때,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나의 삶과 본질로 연합될 때, 그리스도를 얻는다(sed dum in nobis habitat, dum est unum nobiscum, dum eius sumus membra ex carne eius, dum in unam denique et vitam et substantiam (ut ita loquor) cum ipso coalescimus).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은덕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죽으셨고 부활하신 바로 그 몸을 우리에게 제공하신다(sed corpus ipsum, is quo passus est ac resurrexit). 그 몸은 성만찬에서 실제로(realiter) 그리고 참되게(vere) 우리에게 주어지며, 그 결과 그 몸은 우리의 영혼에 건강을 주는 음식이 될 수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굳건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내 말은, 우리의 영혼들은 그분의 몸의 본체로써 양육되며, 그래서 우리는 참되게 그분과 하나가 된다 (ut vere unum efficiamur cum eo); 혹은, 그와 동일한 뜻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성령의 매개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진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와 뒤섞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nec misceatur nobiscum).32

       그러므로 칼빈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만찬에서 구체적인 표현에 이른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된다. 이것은 천주교와 루터교가 주장하였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셨다. 그의 몸은 공간적으로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거리상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합시키시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인성으로 우리를 먹이실 수 있다.

       2년 후, 1548년에, 칼빈은 『에베소서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의 연합 안에서 그의 본체를 우리에게 교류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본체와의 교류에 의하여 한 몸으로 자라간다(ita nos, ut simus vera Christi membra, substantiae eius communicare et hac communicatione nos coalescere in unum corpus).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뼈에 속한다고 증언한다(Paulus nos ex membris et ossibus Christi esse testatur). 그러므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몸을 즐기도록 제공하시며 우리가 영생에 이르도록 양육하신다고 칼빈은 주장한다(corpus suum in Coena fruendum nobis exhibet, ut sit nobis vitae aeternae alimentum).33 31절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이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우리 안에 쏟아 부으시는 그런 연합이라고 말한다(se quodammodo in nos transfundit). 우리는 그분의 뼈의 뼈이다. 왜냐하면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써 그분은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이시며, 따라서 그분으로부터 우리는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Spiritus virtute nos in corpus suum inserit, ut vitam ex eo hauriamus).34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quodammodo)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우리 안에 쏟아부으셨다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설명을 초월하는 지성적인 용어들로써 표현함으로써 은유적으로 말한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32절에 이르러, 이것은 커다란 신비이며  어떤 말로도 그것을 바르게 표현할 수 없으며,  초자연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칼빈이 인정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35

       1556년에, 『요아킴 베스트팔에 반대하는, 성례들에 관한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앙에 대한 두 번째 옹호』(Secunda defensio piae et orthodoxae de sacramentis fidei, adversus Joachimi Westphali calulmnias)에서, 칼빈은 영혼이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입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못지 않은 일이라고 적었다.36

       1559년에 칼빈의 『기독교강요』최종판이 출판되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 사이의 연관관계를 명백하게 설명하였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는 한, 우리는 그분과 분리되어 있으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분의 수난과 사역은 우리에게 아무 쓸모 없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덕들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성령의 은밀한 힘을 통한 것인데,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효과적으로 그분 자신에게 연결시키시는 끈이기  때문이다.37 칼빈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사역은 오직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뿌리이며, 칭의와 성화가 그 속에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일어나는데, 믿음 그 자체는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신다. 첫째, 성부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 성령의 모든 충만함을 내려주셨고, 그 결과 영원한 기업의 소망으로 그의 백성들을 모으게 하셨다.38 믿음은 성령의 주된 사역이며39,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된 상태에서 일어난다.40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밖에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분은 개인적 친교의 끈으로써 우리와 연합되어 계실 뿐 아니라, 놀라운 교류로써 날마다 그분은 우리와 한 몸이 되어가셔서 결국 그분은 우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신다.41

       그러므로, 칼빈에 따르면, 성례들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 은덕들을 수여하시는데, 그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신다(per Spiritum sanctum, qui nos facit Christi ipsius participes).42 이것은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주 명백하게 적용되는데, 성만찬 안에서 그 영혼이 가장 진실되고 깊이 있게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마치 빵을 음식으로 취할 때 활력이 우리의 몸에 전해지듯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넘어오며 우리의 생명이 된다(ut vita sua in nos transeat).43 한 결정적인 선언에서 칼빈은 이 일이 일어나는 방법을 설명한다.


우리는 한 가지 친숙한 사례에 의하여 이것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 물은 때때로 샘물에서 마실 수 있고, 때로는 길러 올 수 있고, 때로는 수로에 의하여 들판에 공급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물은 그 자체로부터 흘러나와서 그렇게 많은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데, 그 근원은 끊임없는 흐름으로 물을 공급하고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은 마치 우리 안에 그 신성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명을 쏟아 부어 주시는 풍성하고 마르지 않는 원천과 같다. 자,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교제가 천상적 생명을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누구일까?44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몸이 엄청난 공간적 거리에 의하여 우리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 이것은 믿을 수 없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은밀한 능력은 우리의 모든 감각들보다 월등하며 성만찬에서 참으로 거리상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연합시킨다.45 그렇다면, 이 연결의 끈은 그리스도의 성령인데, 우리는 연합 안에서 그와 결합되며, 성령은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이 우리에게로 전달되는 통로와 같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교제를 전해주시는 분은 성령이다. 이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을 말하면서 그 모든 힘을 성령과 관련시킨다.46

        브라이언 게리쉬(Brian Gerrish)는 칼빈의 성찬 신학에 관한 자신의 기념비적인 작품에서 성찬에 관한 개혁주의 사상의 세 가지 주된 갈래들을 식별한다.47 츠빙글리는 게리쉬가 상징적 기념주의(symbolic memorialism)라고 부르는 견해를 대표하는데, 거기서 성찬은 순전히 인간의 인식으로 표시된다(윌리엄 커닝햄은 이런 범주에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두 번째는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로 대표되는 상징적 병행주의(symbolic parallelism)인데, 여기서는 실체가 그 상징과 병행하여 일어난다.48 마지막으로, 칼빈은 게리쉬가 상징적 수단주의(symbolic instrumentalism)라고 묘사한 범주에 속하는데, 여기서 실체는 수단으로서의 상징을 통하여 초래된다. 이 세 번째 범주는 두 번째 범주와 양립 가능하다; 실제로, 칼빈에게 세 가지 요소들 모두의 증거들이 있는데, 첫 두 가지 범주들 역시 성경적 지지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예상치 못할 일은 아니다.49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얼마나 칼빈의 견해를 뒤따랐는가?


        칼빈의 견해는 개혁신학과 맞지 않는 낯선 요소이며, 곧 이질적인 것으로 거부되었다는 핫지의 논지는 증거에 의해 실증되지 않은 것이다. 핫지는 역사를 충분히 알지 못했고, 그런 결론들에 이르도록 만드는 발전을 증거를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방식으로 역사에 접근하기 보다는 현재를 위한 신학적 무기들을 얻기 위하여 과거를 팠다. 그의 논적인 메르겔부르크의 존 네빈(John Nevin of Mercersburg)의 입장이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는데, 개혁교회의 성만찬 교리에 관한 그의 포괄적인 논문은 시간이 지나서도 그 정당성을 유지하였다.50 칼빈의 원고에 바탕을 두고 작성된 프랑스 신앙고백서(French Confession, 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Scots Confession, 1560), 그리고 네덜란드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모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참되게 그러나 영적으로 먹는다고 주장한다.

        신학자들 개개인에게서는,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인물들로서는 부처와 버미글리가 있으며51, 로버트 브루스가 있는데, 그는 성만찬을 지고한 신적인 신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바젤의 아만두스 폴라누스와 로잔의 귀리데무스 부카누스는 모두 성만찬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와 교제한다는 것에 동의하였고,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도 칼빈의 견해를 따랐다.52 신학적으로 커닝햄은 신비한 것들의 기미가 있는 것들을 혐오하는 점에서 츠빙글리주의에 가까웠으며, 이런 점에서 대브니도 그의 뒤를 따랐다. 핫지는 스코틀랜드의 상식적 실재론으로 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관한 교리 및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초월적 본질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이것(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와 살과 피에 참여함)은 거의 유지할 수 없는 입장이다.

        칼빈이 루터파를 달래려는 열망으로 그런 입장에 이끌려 갔다는 커닝햄의 당혹스런 언급에 관해서는, 칼빈은, 왜냐하면 그의 논박은 대체로 루터파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루터파보다는 (<취리히 합의>의 불링거와 같은) 온건한 츠빙글리파와의 타협에 도달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더 컸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칼빈의 성만찬에 관한 교리는 그의 전반적 신학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나, 게리쉬가 그의 책 전반에서 주장하듯이, 칼빈의 신학은 그 자체로 철저하게 성례전적이다. 칼빈의 신학을 성찬론에 관한 그의 입장과 분리하여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성찬론은 그의 신학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의 첫머리에서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상호연관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지식이 먼저 오는지에 대해 칼빈은  두 가지 지식 모두 서로에게 기본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 특히 섭리와 예정에 관한 그의 강조에서 볼 수 있듯이, 칼빈에게 창조주-피조물의 구분은 자명한 공리이다. 다른 한편, 창조주-피조물의 양립가능서도 역시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창조와 무엇보다도 성육신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성육신에서 영원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순종하심으로 아담의 자리를 취하셔서, 인간의 본성과의 연합을 취하셨다.53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 취해진 인성을 거룩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그 성례에서 전해 받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성만찬에 관한 그의 교리의 핵심에 이르는 한 결정적인 선언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생명을 우리 안에 쏟아부어주는 풍성하고 다함이 없는 원천과 같다. 이제, 천상의 생명을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54 요 6:51에 관한 주석에서 칼빈은 유사한 용어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므로, 그의 몸은 소위 그분의 신성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그 생명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통로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을 주시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55

        따라서, 칼빈의 생각에, 우리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의하여 우리에게 중재되고 전해진다. 신성의 생명인 첫 생명은 위격적 연합 덕택으로 두 번째 생명인 그리스도의 살로 흘러 들어간다. 거기로부터, 원천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이 이 생명을 우리에게 쏟아 붓는데, 그것이 세 번째 생명이다.56

        베스트팔과 헤수스와 같은 루터파와의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승천은 결정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부의 우편으로 승천하셨다는 것은 로마와 루터 양쪽에 대항한 칼빈의 논쟁이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 때의 츠빙글리의 입장과 같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승천 때문에), 칼빈은 그리스도를 빵과 포도주 안에서 우리에게로 이끌어 내려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연결시키시는 성령의 불가해한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께로 올라간다고 주장하였다.

        이 모든 것 배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구원에 핵심적인 것으로 보았다.57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하여 가능해지며, 성만찬 안에서 표현된다. 다시 그는 일차적으로 성례들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관점에서 보는데58, 그 이유는 성례들의 효력은 성령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59

        커닝햄과 핫지가 칼빈에 대하여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 이유들 가운데 일부가 윌리엄 에반스의 최근 저서인 전가와 전수: 미국 개혁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Imputation and Impartation: Union with Christ in American Reformed Theology, Eugene, Oregon: Wipf & Stock, 2008)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기회에 다룰 일이다.

 

============================================================

1) William Cunningham, The Reformers and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rpr., London: Banner of Truth, 1967), 240.

2) Charles Hodge, The Princeton Review 20 (April 1848), 251.

3) Robert L. Dabney,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rpr., Grand Rapids: Zondervan 1972), 811.

4)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Second edition;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961-64.

5)  Paul E. Rorem, The Consensus Tigurinus (1549): Did Calvin Compromise?, in Wilhelm H. Neuser (ed.),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Calvin as Confessor of Holy Scripture (Grand Rapids: Eerdmans, 1994), 72-90.

6)  Defensio sanae et orthodoxae doctrinae de sacramentis (1555), followed by Secunda defensio piae et orthodoxae de sacramentis fidei contra Ioacimi Westphali calumnias (1556) and Ultima admonition ad Westphalium (1557) were written against Westphal and Dilucida  explication sanae doctrinae de vera participation carnis et sanguinis Christi in sacra coena ad discutiendas Heshusii nebulas (1561) were written against Hesshus. See Wulfert de Greef, The Writings of John Calvin: An Introductory Guide (Trans. Lyle D. Bierma; Grand Rapids: Baker, 1993), 190-93, for a detailed discussion of these controversies.

7)  Calvin, Institute, 4:17:3.

8)  Calvin, Institute, 4:17:5.

9)  John Calvin, Short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 and only Saviour Jesus Christ, in J.K.S. Reid, ed.,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4), 144. Hereafter ST.

10)  Ibid

11)  Ibid. 145-46.

12)  Ibid. 146-48.

13)  D.W. Torrance and T.F. Torrance (eds.,), Calvin's Commentaries: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and Colossians (Grand Rapids: Eerdmans, 1965), 208-9. Hereafter On Ephesians.

14)  Ibid., 209-10.

15)  Calvin, Institute, 4:17:8-10; ST, 166.

16)  Calvin, Institutes, 4:17:11-15, cf., 4:17:39; ST, 155-61.

17)  Calvin, Institutes, 4:17:16-27.

18)  Calvin, Institutes, 4:17:31.

19)  Calvin, Institutes, 4:17:32.

20)  Calvin, Institutes, 4:17:33. See also John Calvin, Second Defence of the Pious and Orthodox Faith concerning the Sacraments, in answer to the calumnies of Joachim Westphal, in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 eds.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rpr., Grand Rapids: Baker, 1983), 2:245-325.

21)  Calvin, ST, 149

22)  Ibid., 150.

23)  Calvin, Institutes, 4:17:38.

24)  Calvin, ST, 154.

25)  Ibid., 152; Institutes, 4:17:42. 

26)  Ibid., 153; Institutes, 4:17:44. 

27)  Calvin's Commentaries, 12:330.

28) J. Calvin,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J. Rei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4)166

29)  Ibid.,146.

30)  CO, 6:1278; Ibid.,137.

31)  J. Calvin, Calvin's Commentaries: 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trans. D. W. Torrance, J. W. Fraser;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60), 130.

32)  Ibid.,246; CO,49:487.

33J. Calvin, Calvin's Commentaries: The Epistles of Paul to the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and Colossians (tr, T. Parker; Grand Rapids: Eerdmans, 1965),2089; J. Calvin, Commentarii in Pauli Epistolas (Ioannis Calvini Opera Omnia; Genve: Librairie Droz, 1992), XVI:272.

34)  Calvin, Epistles of Paul, 209; Calvin, In Pauli Epistolas, XVI:273.

35)  Calvin, Epistles of Paul,209-10; Calvin, In Pauli Epistolas, XVI:273.

36Ibid.,9:65.

37)  Calvin, Institutes, 3:1:1.

38)  Calvin, Institutes, 3:1:2.

39)  Calvin, Institutes, 3:1:4.

40)  Calvin, Institutes, 3:2:24.

41)  Ibid

42)  Calvin, Institutes, 4:14:16; OS, 5:274.

43)  Calvin, Institute,4:17:5; CO, 5:346-47.

44)  Calvin, Institutes,4:17:9; OS, 5:350-51.

45)  Calvin, Institutes,4:17:9; OS, 5:350-52.

46)  OS, 5:355-56; Calvin, Institutes, 4:17:12

47)  B.A. Gerrish, Grace and Gratitude: The Eucharistic Theology of John Calvi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167.

48)  Thomas F. Torrance, trans. and ed., The Mystery of the Lord's Supper: Sermons on the Sacrament preached in the Kirk of Edinburgh by Robert Bruce in A.D. 1589 (London: James Clarke, 1958).

49)  See Calvin, Institutes, 4:17:37 for elements of memorialism, 4:17:3 for parallelism, and 4:17:10 for instrumentalism, together with ST, 147.

50)  John W. Nevin, "Doctrine of the Reformed Church on the Lord's Supper," Mercersburg Review 2 (1850): 421-548.

51)  See Joseph C. McLelland, The Visible Words of God: An Exposition of the Sacramental Theology of Peter Martyr Vermigli A.D. 1500-1562 (Edinburgh: Oliver and Boyd, 1957).

52)  Martin Bucer, Enarrationum in Evangelia Matthaei, Marci et Lucae libri duo (Strassburg, 1527), 244a.; Bericht aa.3. a.6-9.; Pietro Martire Vermigli, Disputatio deEucharistiae Sacramento in Celeberrime Angliae Schola Oxoniensi habitae (London, 1549); idem, Tractatio de Scaramento Eucharistiae, habita in Universitate Oxoniensi (London, 1549); idem, Defensio Doctrinae Veteris et Apostolicae Sacrosancto Eucharistiae Sacramento adversus Stephani Gardineri ([Zurich: C. Froschauer], 1559); Bruce, The Mystery of the Lord's Supper, 52, 82; Amandus Polanus, Partitiones Theologiae (Basel, 1590), 149, 277-82; idem,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Hanover, 1609), 2925-30, 3220-26; Guilielmus Bucanus, Institutiones Theologiae (n.p., 1604), 769-88; Fransiscus Junius, Opera theologica (Geneva, 1613), 1:2224-26. Robert L. Reymond fails to appreciate that this was not merely Calvin's personal position but that of classic Reformed theology as a whole; see his book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961-4. See Joseph C. McLelland, The Visible Words of God: An Exposition of the Sacramental Theology of Peter Martyr Vermigli AD 1500-1562 (Edinburgh: Oliver and Boyd, 1957), 280, who concludes that Martyr, Bucer, and Calvin were at one on the Lord's Supper.

53)  Calvin, Institutes, 2:12:3.

54)  Calvin, Institutes, 4:17:9.

55)  Calvin's Commentaries, 4:167.

56)  I am indebted to Andrew Ollerton, a research student of mine, for the classification. His category, first order life, is the life of God. Second order life is that of the incarnate Christ, the humanity being in personal union with the eternal Son as the Son's humanity. Third order life is that of man, the creature.

57)  Calvin, Institutes, 3:1:1; 4:17:33.

58)  Calvin, Institutes, 4:14:12.

59)  ST, 159. See I.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147-9.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