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rch Calendar in both Continuity & Discontinuity)

이 글은 한국교회와 역사 (4: 2010 여름호), 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 (소장: 상규), pp. 52-89에 발표되었습니다. .-코닷-

 

   
▲ 이기업 목사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보스톤 대학교 대학원 예배학(S.T.M.)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Th.M.)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
구약학 박사과정 (Ph.D.) 코스웤 전, 미국 시카고 개혁교회(CRC교단) 담임목사
현, 한국동남성경연구원
현, 대학교회 담임목사
들어가면서

교회가 교회력/예배력 (the Church Calendar)[1]을 지킨다고 할 때, 그것은 절기들을 지킨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슨 (what)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언제 (when) 그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각각의 절기는 얼마 동안 (how long) 지켜져야 하는가? 그리고 교회력 안에 있는 이 절기들은 상호 어떤 관계 (what relationship)가 있는가 아니면 별개의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교회력에 대한 신학적 이해 또는 예배학적 이해와 예배학적 실천의 문제를 결정하는 방향타 (a rudder)와 같은 것이다.

 

본고는 예배학의 원리와 배경에 대한 이해가 약한 현대교회에 적절한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 목적으로 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교회력을 지킨다고 해야 할지, 교회력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야 할 지 그 행태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어떤 절기는 지키고 있으나 어떤 절기는 명칭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문외한적 태도를 보인다. 한국교회가 지키는 절기는 매우 “선택적” (selective)이라고 말할 수 있다.[2] 거기에는 신학적 이유나 원리 또는 예배학적 근거에 의한선택적 지킴’ (selective observance)이 아니라, 예배학적 지식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몇 가지 절기들을, ‘불완전하게형성된 어떤 전통을 따라서, 선택하여 지킨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각 절기들과의 상관관계는 있는지, 있다면 어떤 방식 안에서 교회력 안에 있는 절기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각 절기는 얼마 기간 동안 지켜야 하는 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한국교회에서 예배학을 공부한 분들이 많지 않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국보수교단의 신학교 안에서 설교학 교수들은 많으나 예배학 교수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자연히 목회자 후보생들이 실천신학의 분과 안에서 목회행위의 핵심 행위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설교학은 그러한 보편적 인식 안에서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예배학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매우 약한 것이 현실이다. 설사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배움의 환경이 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예배 (liturgy)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 예배학 (liturgics)에 대한 인식과 환경은 따라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모습들이 한국에서 예배학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약한 현상적인 이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카톨릭의 예배의신비를 걷어내는 과정에서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이라는 구호 아래서 예배 안에서 말씀 (설교)에 대한 위치는비대한반면, 예배학 (예전, liturgy)에 대한 관심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어린 아이의 기저귀를 갈 때, 사용한 기저귀만 버리면 되는데,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이까지 버린 격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양태는 교회당의 건축구조 안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다. 소위 () 강대상작은 () 강대상이라는 명칭이다. 소위 우리가 부르는 큰 강대상은 설교를 위한 가구이고 작은 강대상은 성찬을 위한 가구의 명칭이다. 그 위치도 상하 종속관계를 보여주는 구조 안에 위치되어 있었고 크기도 차이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는 예배학에 바탕을 둔 교회력 (예배력)에 대한 이해 증진을 위해 지면이 허락하는 한, 교회력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예배력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the Church Calendar in Continuity and Discontinuity)의 관점에서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I. 교회력의 기초 (The Foundational Event of the Church Calendar)

교회와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주님의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특히 부활 사건은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주된 이슈 일뿐만 아니라, 예배력의 형성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진원지 역할을 역사적으로 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떤 방식 안에서 역사적으로 교회력에 영향을 주었고, 그 교회력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살피는 것은 교회력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연대기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부터 초대교회까지의 초기 문헌들을 중심으로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1. 첫 번째 부활 사건 (The First Easter Event)[3]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때가 “안식 후 첫 날”[4] (the first day of the week,” 마 28:1; 16:9; 24:1; 20:1)이었다. 바로 “그 날” (evn auvth/| th/| h`me,ra| 24:13)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셔서 성경을 풀어 주시고,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 24:13-35).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 20:19) 제자들의 모임에 나타나셨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20:21)는 파송의 말씀을 주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주께서 맡기신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라” ( 20:22)는 말씀을 주셨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5] (meqV h`me,raj ovktw. 20:26) 도마가 함께 있을 때, 그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나타나셨다. 여기서 도마에게영광스런십자가의 상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20:27)는 말씀을 통해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20:28)는 신앙고백을 하게 됨으로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반복적으로안식 후 첫 날에 제자들의 모임에 부활의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 제자들의 모임의 시간이믿는 자들의 모임일즉 교회의 회집의 날이 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셨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안식 후 첫 날 저녁에’ ( 20:19) 보이셨던 모습과여드레를 지나서’ ( 20:26), 다시 보이신 장면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도마가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가지 포인트를 보여주셨다.[6] 첫째는 크리스천 의식 공동체 (the Christian ritual assembly)의 중심에 있는십자가를 그의 영광스런 상처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며, 둘째는 도마로부터 믿음을 요청함으로 예수님은 이 제자들, 곧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집회 (assembly)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동시에 이 날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회집의 날 (assembling day)이 되게 된다.

사도들은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의 주님이 제자 공동체에 임재해 주신 그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점차그 주간의 첫째 날’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대한 중요성을 포착해간다. 이 날은 결국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가 연결되었다.[7] 즉 이 날은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믿음의 공동체와의 결합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후, 55-57년경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를 위한 연보를매주 첫날모임, 즉 매주의 첫날에 반복적인 모임 (the weekly reunion)과 연결하고 있다 (고전 16:2). 이어서 부활 후 61-63년경에 쓴 사도행전에서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 20:7)라고 기록함으로 매주의 첫 날에 집회가 상례화 (conventionalization)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떡을 떼는 것 (the breaking bread)과 말씀의 강론 (a lengthy sermon)이 있었다.

 

물론안식 후 첫 날’ (the first day of the week)이라는 표현은 유대식 날의 계수 방식 (the Jewish method of counting)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의 교회들에서 유일한 개념이었다. 이 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부활 후, 95년경에 쓰여진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한다. 그것은주의 날’ (evn th/| kuriakh/| h`me,ra ¡°On the Lord's Day¡±)이라는 개념이다 ( 1:10).[8]

 

유대인의 안식일 (Sabbath)과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Sunday)의 개념과 신학은 많은 점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9] Sunday Sabbath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방식은 지역과 교회구성원 (이방인과 유대인)의 성분에 따라서 종교문화적으로 구분 또는 혼용이 병행되어오다가 1세기 말까지 Sunday Sabbath의 구분이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증거를 Ignatius of Antioch (ca. 107)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Sunday의 준수를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표식 (sign)으로 이해했다:

 

Those who used to live according to the old order of things have attained to a new hope and they observe no longer the Sabbath but Sunday, the day on which Christ and his death raised up our life.[10]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Sabbath와는 다른 날과 다른 방식으로 차별화하여 Sunday를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독 플리니 (Pliny the Younger, 61 AD~ca.112 AD)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내는 한 편지 (112)에서 그가 체포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어떤 방식으로 지켰는지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간접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Pliny the Younger, then governor of Bithynia, says that the Christians he had arrested claimed that their entire fault or error was to have gathered regularly before dawn on a set day in order to join in singing a hymn to the Christ as to a god.[11]

 

여기서 Pliny가 언급한 ¡°on a set day¡± Sunday를 의미했다. 우리는 또한 Pliny의 언급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는 일요일 새벽 전에 발생했고 거기에서 그들은한 신’ (a god)으로서 그리스도께 찬송을 불렀다는 것을 전한다.

 

플리니의 간접적인 증언으로부터 약 50년 후에, 저스틴 (Justin) Sunday 집회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 묘사 (165)를 비교적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On the day named after the sun, all who live in city or countryside assemble in the same place, and the memoirs of the apostles or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are read¡¦. The reason why we all assemble on Sunday is that it is the first day: the day on which God transformed darkness and matter and created the world, and the day on which Jesus Christ our Savior rose from the dead.[12]

 

저스틴의 글에서 우리는 당시 도시나 시골의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같이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읽었다는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집회의 주된 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일요일에 모인 이유를 하나님이 어둠과 물질을 변형시켰고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그 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라고 저스틴은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의 Sunday 집회가 시간적 측면에서 규칙적으로, 그리고 내용적 측면에서 성찬, 찬송, 말씀과 함께 내실 있는 모습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Sunday 집회는 아직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Sunday가 아직 공휴일이 아니었던 시절에 조차도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에 모였었다. 우리는 3세기 중반의 Teaching of the Apostles 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Make not your worldly affairs of more account than the word of God; but on the Lord’s day leave everything and run eagerly to your Church; for she is your glory. Otherwise, what excuse have they before God who do not assemble on the Lord’s day to hear the word of life and be nourished with the divine food which abides for ever?[13]

 

여기서 주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다른 세속적인 일을 하지 말며, 주의 날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교회에 갈 것을 권고한다.[14] 그리고 주의 날에 영생하도록 하는 신적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아직 당시에는 일요일이 공휴일이 아니었기에 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회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행위는 마침내 순교자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불법집회이었기 때문이다. 304 2 12, 아누리누스 총독 앞에 불법집회에 참가한 31명의 남자들과 18명의 여자들이 잡혀오게 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적인 고소는 로마제국의 칙령에 불복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적인 고소가 이루어졌을 때, 사투르니누스 (Saturninus) 라는 성직자는 “우리는 주의 날을 기념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법입니다”라고 증거했다. 자기 집에서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가졌던 에메리투스 (Emeritus)라는 사람은 이와 유사한 것을 말했다: “예 우리가 주의 날을 바로 나의 집 안에서 기념했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Sine dominico non possumus)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빅토리아 라는 한 소녀는 “저는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이 사건이 바로 “일요일을 위한 순교자들” (martyrs for Sunday)로 불리어지는 아비티나의 순교자들 (the martyrs of Abitina; near Medjez el-Bab in Tunisia)의 증언이다.[15]

 

이 사건은 아직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아비티나의 순교자들의 문서” (The Acts of the Martyrs of Abitina)는 박해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을 즈음, 교회는 이미 “일요일에 대한 성례전적 실체” (the sacramental reality of Sunday)를 인식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요일은 종교문화적으로 거룩한 삶의 초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고난에서조차도 이 날을 큰 기쁨을 누리는 날로 인식하며, 파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16]

 

이러한 시대가 지나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313)한 이후에 다가온 평화의 도래는 로마 제국의 법들이 일요일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콘스탄틴의 혼합주의 (Constantine’s syncretism)적 행태가 나타난다. 그는 태양에 대한 제의 (cult)와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를 동시에 강화시키는 것에 모두 충실했다. 그는 태양신과 그리스도를 위해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함으로써 둘 다를 영화롭게 했다. 그에게 일요일은태양의 날’ (the day of the sun)이었고 동시에그리스도의 날’ (the day of Kyrios Christ)이었다.[17]

 

321 3월에 제정된 일요일에 관한 당시의 한 법에 따르면, ‘태양을 위한 이 존엄한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으며, 관리나 모든 시민들 그리고 모든 장인들도 쉬어야 했다: All judges and the people of the towns and all craftsmen are to remain at rest on the venerable day of the sun.[18]

 

그리고 321 7월에 부가적으로 제정된 또 다른 한 법에 따르면, 태양신을 위한 경배의 날로 알려진 태양의 날 (the day of the sun)에 재판과 논쟁과 같은 것들로 채워지는 것은 적합한 행위가 아닌 것으로 여겼다. 대신에 이 날에 노예를 석방하고 해방시키는 적합한 날로 여겼다:

[J]ust as it was unbecoming to fill the day of the sun, ‘renowned for the worship paid to him,’ with trials and disputes, so on the contrary it was fitting to make this a day for manumitting and emancipating slaves.[19]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면서, 니케아 공의회 (the Council of Nicaea)의 전날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일요일은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성례전이 집례 되는 집회의 날로 공적으로 확정되었다.[20] 이 날은 매일의 업무를 제쳐두는 방식 안에서 축제의 날로 지켜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기들의 공의회들 (the councils)에서 일요일의 안식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으며, 그리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참여할 의무를 상기시키게 되었다.[21] 이어지는 공의회들은 그리스도인의 일요일의 본질적 특징인 ¡°빛의 날, 기쁨의 날, 죽은 자로부터 부활의 날¡°[22]에 다른 어떤 것을 부가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날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자들에게 속한 날이었다.¡° [23] 즉 부활이 이 날의 핵심 키워드이다.

 

 

2. 주간 예배력의 확장: 수요일과 금요일 (Wednesday and Friday in Extension of Weekly Cycle)

부활 사건 (the first Easter event)주의 날’ (the Lord’s day)라는 매주 규칙적인 주간 예배의 날 (weekly worship cycle)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부활 사건 직전의 1주간 안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의 역사적 행위들에 대한 것도 함께 서서히 기념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그 주간에 이틀을 금식의 날로 구별하였다.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다 (Did. 8:1; Tertullian, de Orat. 19; de Fejun. 2).

 

3세기 중반까지, 역사적 이유로 인해 매주 이틀을 특별한 날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 날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이었다. 이것은 바리새인 (the hypocrites)의 위선적인 금식일인 월요일과 목요일과 의도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24] 다음 세기에 Shepherd of Hermas, Clement of Alexandria, 그리고 Tertullian은 수요일과 금요일을 ¡°stational [days]¡±로 불렀고 ¡°days of fasting and penitential prayer¡±로 여겼다.[25] 동방에서 2세기에 부활절 시즌 (the great fifty days) 이외의 모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으며, 서방에는 ‘stations’으로 알려진다.[26] 수요일과 금요일의 기도 모임은 점차 개인적 성격에서 공동체적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모임의 성격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Alexandria에서 5세기 중반에 () 성찬집회’ (an aliturgical assembly)가 있었는데, 성찬 (Eucharist)이 없는 모임이었으며, 대신 성경본문들이 읽혀졌고 교사들이 그 본문들을 해석했으며, 이 모임에는 헌물 (offering)이 없이 진행되었다. 역사가 Socrates of Constantinople (c. 380~?)Historia Ecclesiastica에 따르면, Origen이 썼던 많은 주석들이 수요일과 금요일 집회들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증언한다.[27] 그러나 예루살렘과 갑바도기아 (Cappadocia) 교회들과 같은 아프리카 교회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성찬을 집례했다.

 

수요일이 주간 집회일로 제정된 것은, 이 날이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날이며, 금요일은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기 때문이다 (Didascalia 21). 그러므로 주일 뿐만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 모임도 그리스도중심적 날들 (Christological days)로 모였고, 그리스도 중심의 주간 예배 모임 (Christological, weekly worship cycle)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Epiphanius (413) 3세기의 Didascalis Apostolorum (Teaching of the Apostles)를 재언급한다:

 

¡°Wednesday and Friday are spent fasting until the ninth hour, because when Wednesday was beginning the Lord was arrested, and on Friday he was crucified.¡±[28]

 

 

Sub-conclusion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교회력과 공적인 예배모임의 시작을 위한 예배학적 효시가 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인의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를 내용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날이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Sabbath와 연속성과 차별성을 드러내면서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예배의 날이 되는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주간의 수요일과 금요일의 예배 모임으로까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한주간의 예배사이클 (the weekly worship cycle)이 완성되게 되었다. 부활의 날 (Easter)은 결국 주간 예배 모임 (weekly worship cycle)을 완성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주일 중심의 예배력을 생성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연스럽게 1년 후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는 연간 예배 모임 (annual worship cycle)을 형성하게 된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 (a little Easter)이며, 부활절 (Easter)은 큰 주일 (the great Sunday)이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뒤로 회고하면서 사순절의 절기가 형성된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앞으로 성령강림절이 이어진다. 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이라는 예배력의 큰 사이클 (부활절 사이클)을 형성하게 된다. 이 부활절 사이클은, 대강절-성탄절-주현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의 또 다른 사이클이 성탄절 사이클과 불연속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2개의 사이클은 연속성 안에서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 중심의 6대 교회력의 절기를 형성한다. 이들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는 교회력 안에 있는 각각의 절기들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연속성을 보여준다.[29]

 

 

II. 교회력의 필요성: 왜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왜 교회력을 예배를 통해 지켜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구약에서의 절기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구원역사에 대한 그 사건들 (the salvific events)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세계 안에서 행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 행하심을 통해 그 분의 성품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행동 계시와 말씀 계시를 통해 그분의 구원역사의 드라마를 보여주셨다. 이 드라마의 한 장면마다 그 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도록 하셨다. 그들 자신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가르치고 교훈하여 ‘영원한 규례’로 삼게 하셨다 (: 12:14).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극적인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구원역사를 현재적으로 재현하면서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적으로 과거 사건을 기억 할 뿐만 아니라, 미래적 구원의 소망을 품도록 하여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시공간이 변하더라도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 그분의 절기 제정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의도이다. 이러한 현재적 기억은 과거에 역사하신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재현이며, 미래에 있을 동일한 그 하나님의 임재를 현재로 소급하여 소망하고 확신하는 믿음 행위이다. 이것은 변화무쌍한 세계에 살아가며, 신실함이 없는 인생에게는 무한한 유익이다. 이런 기억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에게 제정해주신 절기들이다. 이 절기들은 모두가 경건과 제사 (예배) 그리고 축제와 나눔을 포함한다. 언약 백성들의 경건한 삶과 드림과 헌신의 예배 그리고 축제의 누림은 과거만의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세대를 걸쳐서, 현재적 재현을 통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재성을 확인하고 미래에도 현재적 소망과 확신으로 소급하는 믿음의 기억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억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쉽게 걸리는 인간에게 ‘영적인 트라마’ (spiritual trauma)와 같이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의미 있는 ‘충격요법’과 같다.

 

이 기억행위가 절기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정해주신 절기들은 다음과 같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이다. 절기는 ‘성회’를 의미한다. 이 가운데 유월절/무교절 (étACM;h; gx), “맥추절” (^yf,ê[]m; yrEäWKBi ‘ryciQ'h; gx;Û), 수장절 (‘@sia'h'( gx)은 이스라엘 3대 절기이다 ( 23:14-19). 3대 절기의 시작인 유월절/무교절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절기이며, “맥추절” (밭의 첫 열매)과 수장절(연말 밭의 추수)은 수확의 열매에 대한 소출로 드리는 감사절기이다. 그래서 이 3대 절기들은 감사의 축제의 절기이다.

 

구약의 절기가 구약 백성들에게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 대해서 현재 기억을 통해서 감사의 응답의 표시를 매년 규칙적으로 지켰듯이 신약의 백성인 교회도 그리스도의 과거 구속 역사를기억과 기대를 통해서 현재 규칙적으로 신약의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교회력이며, 예배력이다.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에 대한 현재적 재현을 예배를 통해 표현하는 예배 월력 체계이다. ‘기억과 기대에 대한 더 정확한 신약적 이해를 위해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 아남네시스 (anamnesis)와 프로렢시스 (prolepsis)[3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인간이 시간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직선적이지만 과거에 대한 회고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현재 안에서 소급적으로 통합함으로 시간은능동적현재가 될 수 있다. 특히 과거와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특별히 우리의 예배 안에서 현재화 된다.

 

과거는 “능동적 행위로서”기억’ (아남네시스)하는 방식 안에서 현재가 된다. 예배에서 기억한다 (remember; remembrance)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과정 (a mental process)가 아니라, 의식적 과정 (a ritual process)을 의미한다. 성례전 (the Eucharist)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분에 대해 잠잠히 생각하는 것 (thinking)으로 기억함이 아니라, 그 분께서 하신 것을 행함 (doing)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즉 떡과 잔을 취하는 것 (Taking bread and the cup), 축사하는 것 (Giving thanks over them), 떡을 떼는 것 (Breaking the bread), 그리고 분배하는 것 (Giving the bread and cup). 이런 기억하는 행위는 명상 (cogitation)을 통한 기억함이 아니라, 행위 (doing)를 통한 기억이다. 이런 종류의 기억행위가 헬라어로아남네시스’ (anamnesis)이다. 그래서 성례전을 통한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은 여기서먹고 마시는행위를 통해서 현재화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가 현재화된다. 헬라어 프로렢시스’ (prolepsis)미리 앞당겨 취하는 것’ (to take beforehand)을 의미한다. 이것의 통상적 동의어는기대하는 행위’ (anticipate)이다. 이것은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행위나 사건이 미리 현재 여기서 우리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렢시스는 하나님의 미래 행위를 우리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는 행위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만들어진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그리고 예수님께만 한정된 의미로서 과거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라는 시간과 사건이 우리에게 현재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나도 부활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종국적 성취는 미래에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인 우리도 영화로운 부활의 몸으로 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미래의 현재화를 위한 기억행위 또는 기대행위이다 (The Resurrection is a proleptic event).

 

이런 기억 및 기대 행위와 교회력과 관련하여 말할 때, 교회의 절기들, 특히 그리스도 중심의 절기들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 안에 있는 여섯 절기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 또는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결연하게 믿는 것을 현재적 경험 안에서 축하하고 즐기는 “기억하는” (아남네시스) 그리고 “기대하는” (프로렢시스) 예배학적 절기들이다. 예배학적 생생한 행위적 기억과 기대’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해 언약백성의 영적인 “치매현상” (dementia) 또는 “기억상실” (amnesia)을 예방할 수 있다. 예배적 기억과 기대 행위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언약백성의 믿음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재방송”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과 시간과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언약 공동체가 행하는창의적 기억/기대 행위이다.

 

요컨데, 그리스도의 과거 구속 사역을기억과 기대를 통해 현재적으로 재현 또는 구현하는 것이 아남네시스와 프로펲시스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성탄절 사이클의 3절기인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이라면,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절 사이클의 3절기인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에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은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의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에서 내려오는 요소와 올라가는 요소인 예배 순서와 형식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예배에서 하나님과 언약 백성 상이의 커뮤니케이션이다.

 

2. 카타바시스 (catabasis)와 아나바시스 (anabasis)[31]

예배의 본질은 독백 (monologue)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 (dialogue)이다. 즉 예배에 참여하는 두 인격체의 “대화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 인격체는 예배를 받으시는 삼위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인 사람이다. 이 두 인격체 사이에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일체의 의미 있는 인간행위 (actus humanus)들은 모두가 예배적 행위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 두 측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라고 부른다. 카타바시스 (Catabasis: God’s Decent to Man)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내려오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의미한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로 구현되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말씀과 행위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말씀 계시를 주시고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성취하셨다. 한마디로, 카타바시스는 하나님의아래를 향한’ (downward) 행위이며, 구원론적 행위 (divines salvific action)이다.

 

반대로 아나바시스 (Anabasis: Man’s Ascent to God)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받아들임으로 인간 내적 행위인 믿음과 외적 응답 행위인 예배 행위가 발생한다. 즉 아나바시스는 인간의위를 향한’ (upward) 행위이며, 예배적 행위 (human liturgical action)를 의미한다.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하나의 통일체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구원론적 통일체’ (salvific unity)이며, ‘예배학적 통일체’ (liturgical unity)이다. 물론 이 말은 신적인 행위가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되고 보충되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예배적 영광 (human liturgical doxa)을 돌리지 않더라도 그 분은 스스로 신적 존재론적 영광 (divine ontological doxa)을 가지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예배자로 부르셔서 교회를 삼으셨다. 이 구원론적이고 예배학적 통일체가 된 교회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의미 있는 다양한 방법과 상징과 언어와 표현들로 구현된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매우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미학을 담고 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하향의 카타바시스와 상향의 아나바시스의 커뮤니케이션은 예배의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예배의 두 방향과 요소를 결정하고 규정한다.[32]

 

 

Sub-conclusion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가 예배력을 지키는 이유에 대한 개념이라면,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한 언약백성의 응답행위의 개념이다. 예배력을 왜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과거 구속행위를 기억 (anamnesis)하고 미래 구속행위를 기대 (prolepsis)하는 현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응답행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자기 백성을 향한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의 사역으로 표현되었다. 예배도 결국 내려오심 (Catabasis)과 올려드림 (Anabasis) 사이의 신인 쌍방의 행위 (divine-human reciprocal action)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억과 기대 안에서, 그리고 아래를 향한 신적 행위와 위를 향한 인간적 행위가 예배 안에서 표현되되, 특히 일정한 예배력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주님의 교회는 어떤 절기들을 지켜야 하며, 그 절기에 합당한 예배를 어떤 방식 안에서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III. 교회력의 구성: 무슨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현대교회가 지키고 있는 절기들을 여기서 개괄적으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교회가 지키는 교회력 또는 예배력의 구성은 크게 3가지 (3Cs)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기독론적 절기 (Christological Feast), 둘째는 시민 기념일 (Civil Holiday)이며, 그리고 셋째는 교회 기념/강조일 (Church Emphatic Day)이다. 기독론적 절기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사역)을 기초로 해서 지키는 절기로서 전통적 의미에서 지키는 교회력의 예배절기이다. 시민 기념일은 국가공휴일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하는 사건이나 그러한 기념일에 교회가 예배를 드리며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예로써, 신년예배, 독립기념일 (광복절),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등이다. 그리고 교회 기념/강조일은 교회가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신학적 의미나 정신 그리고 헌신과 헌금을 강조하여 현재의 삶에서 구현하기를 원하여 지키는 날이다. 예컨데, 선교주일, 교회설립기념일, 종교개혁주일, 교단창설기념주일, 추수감사주일, 교육주일, 장애인주일 등이다.

 

은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지키는 절기를 예배를 통해 누리는 월력 (calendar) 시스템을 교회력/예배력이라고 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축하하는 것을 통해, 그 구속사역의 신학적 의미와 신앙적 의미를 현재적 교회적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그리스도 중심절기들 (Christo-centered Worship Seasons)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력 (교회력)에는 두 개의 사이클이 있다.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이다. 성탄절 사이클은 대강절 (Advent)로 시작하여 성탄절 (Christmas)과 주현절(Epiphany)로 이어지는 3개의 절기들이다. 그리고 부활절 사이클은 사순절 (Lent)로 시작하여 부활절 (Easter)과 성령강림절 (Pentecost)로 이어지는 3개의 절기이다. 각 사이클은 한 개의 준비의 절기와 두 개의 축제의 절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탄절 사이클에서 시작의 절기인 대강절과 부활절 사이클에서 시작의 절기인 사순절은 각 사이클의 축제의 절기들을 지키기 위한 준비의 절기이다. 그래서 대강절과 사순절은 이어지는 축제의 절기들을 위한준비의 절기’ (A Preparatory Season)라고 부르며, 각 사이클에서 준비의 절기에 이어지는 두 개의 절기들은축제의 절기’ (Festival Season)라고 부른다. 즉 성탄절 사이클에서 준비의 절기인 대강절이 지나면, 이어지는 성탄절과 주현절은 성탄절 사이클의 축제의 절기들이다. 그리고 부활절 사이클의 준비의 절기인 사순절이 지나면, 이어지는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은 부활절 사이클에서 축제의 절기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력은준비와 누림 (축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준비와 누림의 반복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를 연속적으로 표현하면, 대강절à성탄절à주현절à사순절à부활절à성령강림절로 이어진다.[33]

 

지금까지 우리는 위에서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이 절기들과 두 사이클이 어떤 역사적 과정 안에 생성했는지, 즉 그 역사적 기원 및 발전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탄절 사이클 (Christmas Cycle)

성탄절 사이클은 준비의 절기인 대강절에 시작되어 축제의 절기인 성탄절과 주현절로 이어진다.

 

 

(1) 대강절 (Advent)

대강절의 기원은 전적으로 서방교회의 전통이다. 대강절의 첫째 주일은 서방교회에서 그해의 교회력의 시작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모든 지역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34] 가울 (Gaul)에서 Hilary of Poiters (d. c. 367)의 증거와 스페인 (Spain)에서 the Councils of Saragossa (380)에 따르면, 대강절은 주현절을 위한 3주간의 준비의 과정이었다. 5세기와 6세기에 이 3주간의 대강절 기간은 성탄절이 되기 이전의 40일까지 길어지게 되었다. Bedeante natale Dei’ (before God’s birth) Egbert Cuthbert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기록한다 (HE 3.27, 4.30). 원래 로마에서 성탄절 하루 전 1일만 금식했다 (Filastrius of Brescia, Div. Haer. 149; CSEL 38. Cf. Augustine, Ep. 65). The Orthodox Church 의 대강절은 11 15일에 시작하며, 성탄절을 위한 준비의 금식 절기로 지킨다. 그 기간은 약간의 변천을 겪으면서 Gregory the Great 4주간으로 확정했다.[35] 대강절이 서방교회에서 동방교회로 발전되었으나, 성탄절의 축제의 절기를 위한 준비의 절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2) 성탄절 (Christmas)

성탄절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Chronography of 354[36] 에 의해서이다. 성탄절과 주현절은 기원과 발전의 역사[37] 안에서 상호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언급하고 다음 항목인 주현절에 대한 언급에서 계속할 것이다.

 

 

 (3) 주현절 (Epiphany)

대강절이 서방교회의 전통인 반면, 주현절은 동방교회의 기원을 갖는다. 성탄절과 주현절은 부분적으로 동지점 (the winter solstice)과 연결된 이방인의 축제의 컨텍스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의 축제를 대체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리스도인이 로마에서 성탄절을 지켰다는 첫 번째 증거가 나타나기 80년 전인 274년에, 12 25일은태양의 생일’ (Natalis solis invicti)을 지키는 날로 확정되었었다 (in the Chronograph of 354).[38] 그리고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1 6일은 태양신인 Aion과 그리스신화에서 포도주의 신인 Dionysus (Epiphanius AH 51.2; GCS 31.284)의 동정녀 탄생 (the virgin-birth of Aion/Dionysus)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Pliny the Elder Dionysus에 말하기를 물로 포도주로 바꿈으로 그 날에 그의 임재를 드러냈다고 언급한다 (Natural History 2.106, 31.13).[39]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12 25일과 1 6일은 모두 Julian calendar에서 Nisan 14일에 주님의 수난 (the Lord’s Passion)에 대한 실제 날짜로 고정하기 위한 시도로부터 계산된 날들이다. 서방에서 Hippolytus Tertullian에 의해 받아들여진 날은 3 25일이며, the older Asian recension of the calendar 4 6일이었다.[40]

 

그것들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성탄절과 주현절은 4세기에 폭넓게 지켜졌는데, 이것은 의심 없이 당대의 기독론적 논쟁들과 Arianism에 대한 논쟁의 필요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1]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출생 사건 (Christ’ nativity)에 대한 축하와 그리스도의 세례와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John Cassian, Conferences 10.2; PL 49.821).[42]

 

Epiphany라는 이름이 헬라어 기원을 가리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c. 361 Gaul에서 지킨 것이다 (Ammianus Marcellinus’s History 21.1).[43] 여기서 지킨 것에 대한 내용은 거의 확실하게 예수님의 출생 사건 (the nativity)이었다. Egeria[44]의 증언도, 예루살렘에서 주된 내용은 예수님의 출생에 제한된 것이었고, 예수님의 세례와 가나에서 기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25.6-12)고 전한다. 그러나 동방에서 45년을 보냈고 이 45년 기간 가운데 베들레헴에서 24년을 보냈던 Jerome (d. 420)은 예수님의 세례가 주된 내용이었다고 증언한다 (Comm. In Ezek. 1.1; PL 25.17). 그러나 그의 죽음의 때까지 서방의 기원을 갖는 성탄절은 동방으로 소개되었다. 386년까지는 Antioch (Chrysostom, in diem natalem, PG 49.351)으로, 370년까지 Cappadocia (Gregory of Nyssa, in diem luminum, ed. Jaeger, 9.221), 그리고 380년까지 Constantinople (Gregory Naz., Orat. 38)로 성탄절이 전래되었다.[45] 이 사실은 동방의 주현절과 서방의 성탄절이 상호 교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다소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된다.

 

서방의 성탄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354년이고 동방의 주현절이 360년까지는 Gaul에서 이미 형성된 전통이었다면, 즉 거의 동시적 기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주현절이 성탄절보다 일찍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어떤 경우이건 그것은 니케아 공의회 (325)보다 이전일 수는 없다.[46]

 

주현절의 동방 기원과 달리, 성탄절은 서방에서 기원되었는데, 로마라기 보다는 북아프리카에서 일 것이다. Donatists는 그밖에 모든 사람과 달리 Epiphany의 절기를 추가하지 않았다 (Serm. 202; PL 38.1033)고 어거스틴은 412년에 호소한다.[47] 이 사실은 성탄절이 Donatists schism의 년도인 311년 전에 북아프리카에서 폭넓게 기념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당시 주현절은 최근에 더해졌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록 주현절이 Leo의 시기까지 잘 확립되었을지라도, 로마에서 5세기 초까지는 기념되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Coeburgh, R. Ben, 1965, pp. 304ff). Gaul Spain에서 그리고 심지어 north Italy에서 그것은 더 일찍 알려졌다.  거기서 그것은 동방박사의 경배 사건 (the adoration of the Magi), 예수님의 세례 사건 (our Lord’s baptism),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사건 (the miracle at Cana)에 대한 3중적인 기념이었다. (Paulinus of Nola, Poema 27; PL 61,649), 반면 로마에서 동방박사 (the Magi)는 주현절의 유일한 주제가 되어온 것 같다.[48]

 

원래 기원과 그 내용에 있어서 주현절과 성탄절의결합적인 축제’ (unitive festival)이었던 것이 동방과 서방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서방의 성탄절은 예수님의 출생의 축일인데, 동방의 성탄절은 여기에다 동방박사의 경배 사건 (the adoration of the Magi)을 추가했다; 동방의 주현절은 동방에서 주님의 세례에 대한 기념이고 서방에서 주현절은 동방박사의 방문 사건 (the visit of the Magi)이 기념된다.[49] 그리고 나서, 다른 두 개의 주제가 주현절과 결합되었다. 즉 주님의 세례와 가나 혼인잔치가 서방에서 주현절 이후의 Sundays에 기념된다. 비잔틴 예배 (The Byzantine liturgy)에는 가나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혼인 이미지 (nuptial imagery)는 세례에 대해 사용된다.[50]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의아하다.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포함된 것은 주현절과 동일한 날인 1 6일에 대한 발생한 이방종교의 절기의 종교문화적인 현상에 대해 변증적으로 대체하려는 의미인 것 같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주현절의 날인 1 6일은 Aion/Dionysus와 연결되어 있었다. Pliny the Elder의 증언에 따르면, Dionysus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 날에 자신의 임재를 드러냈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나혼인잔치의 장면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방종교의 종교문화 안에 있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과 신의 임재 사건, 이 두 사건들이 관련된 1 6일에 주현절이라는 절기로 기독교화 (Christianization)하면서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된다.

 

동방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일찍이 주현절을 세례를 위한 표준일로 삼았다. 반면 서방에서는 비록 Leo가 성탄절에 그 주제에 관해 설교했을지라도, 적어도 Leo의 시기까지는 세례가 결코 그 때 집례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Gaul에서 성탄절/주현절은 세례의 시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Gaul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준비의 40일 기간에 대한 언급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51]

 

 

2. 부활절 사이클 (Easter Cycle)

부활절 사이클은 준비의 절기인 사순절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준비의 절기를 이어서 2개의 축제의 절기인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이 이어진다.

 

초대교회는 한 개의 절기만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기초한 주간과 연간의 유월절 (the weekly and annual Pesach)이다. 4세기에 이르러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절기가 생성된다.[52]

 

2세기 전까지 부활절 (Easter)의 날을 계산하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소아시아 교회들 (The Churches of Asia Minor) Nisan, 14일의 유대인의 유월절 (the Jewish Passover)의 날을 기독교화 (Christianizing)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에 그들의 금식을 멈추었다.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부활절을 Nisan, 14일 다음 일요일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지켰다. 로마교회 (The Roman Church)는 후자를 따랐다. 3세기 시작부터는 이것이 모두를 위한 하나의 표준 전통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Nisan월의 음력 14일이 양력의 어느 날에 떨어지는 지를 계산하는 데는 차이점들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 (the Council of Nicaea, 325)에서 모든 교회들은 Alexandrian 계산법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부활절은 춘분점 (the spring equinox: 322일과 4 25일 사이) 이후 첫 번째 보름달 (the first full moon) 직후의 일요일에 지켜졌다.

 

적어도 3세기 시작부터, 부활절의 축제는 50 (Pentekoste)의 기간 동안에 계속 지켜졌다. 그러나 특별한 지킴으로 특징지어지는 50일째 그 자체였다는 것은 단지 4세기부터이다. 이 동일한 기간에 “the sacred triduum (the Great Three Days; [] , , 토요일)이 출현했고 얼마 후에 전체로서 Holy Week (수난주간, the passion week)가 시작되었다.

 

부활절 축제는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날들에 금식으로 준비되었다. 이 금식은 비교적 빨리 사순절 (Lent) 40일 전 기간 동안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었다.

 

 

(1) 사순절 (Lent)

사순절 (Lent)은 라틴어로 Quadragesima이며, 헬라어로는 Tessarakoste라고 불리어진다. 이 절기는 기본적으로 금식과 세례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지켜졌다. 사순절의 ‘40의 수 (number)는 광야에서 예수님의 금식의 길이에 의해 결정되었다.[53]

 

사순절의 길이는 어떻게 40일의 기간을 계산하는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54] 예를 들면 Sunday가 제외되든지, 아니면 Saturday Sunday가 제외되든지, 아니면 Good Friday Holy Saturday 또는 Holy Week 전체가 제외되든지 했다. 그 시작과 마침 그리고 기간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과정의 역사를 갖는다. 1세기의 사순절은 40시간 동안 그리스도 무덤 속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기간을 의미했다. 그 후에 40시간이 연장되어 6 (Holy Week)이 되었다. 6일은 다시 6주간으로 늘어났다. Athanasius는 월요일에 시작하여 Holy Week (the Great Week)[55]를 포함하는 6주를 주장했다. 반면 50년 후에 Egeria는 예루살렘에서 사순절은 the Great Week를 포함했고 8주간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토요일과 일요일이 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7:1).[56]

 

서방전통에서 40일의 사순절은 Ash Wednesday로부터 계산되어 Holy Week를 포함하며, 일요일은 제외된다. 반면 동방전통에서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직전 월요일에 시작하여 종려주일 (Palm Sunday) 직전 금요일까지로 나아가며, Holy Week을 제외하고 그 사이의 모든 일요일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은 “Cheesefare Week[57]라고 불리는 부분 금식주간이 이어진다. 서방에서처럼, 사순절 (Lent, the Great Fast)은 준비의 금식절기 (a pre-Lenten season)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실제로 그 기간은 5주간이다.

 

니케아공의회 (325)에서 사순절의 기간은 40 (6)로 확정되었다. 그 시작 시점은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이다. 재의 수요일은 부활절로부터 역산하여 산출할 수 있다. 이 날로부터 일요일을 제외한 부활주일 직전 토요일까지 40일간이다. 일요일은 금식일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에 서방 전통은 금식일에서 제외했고 반면 동방은 포함시켰다. 동방과 서방에서 사순절의 절기는 모두가 공히 금식으로 부활절을 준비하는 준비의 절기라는 것에는 일치한다.

 

 

(2) 부활절 (Easter)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매주 일요일에 기념했다. 연간 축제 (the annual celebration)로서 부활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Jewish Passover)이 그러한 것과 같았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의 유월절 (Christian Pascha)이었다. 부활절은 크게 The Easter Vigil (부활절 전야제), The Easter Triduum (부활절 직전 3), Easter Day/Season (부활절)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The Easter Vigil The Easter Triduum만 논할 것이다. 부활절 자체에 대한 것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초기 문헌들은 부활절 기념은 하루, 이틀, 또는 그 이상의 엄격한 금식의 형태를 본질적으로 취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찬으로 마무리되는 기도를 위한 야간 집회 (a nocturnal assembly for prayer)로 이어진다. 3세기의 Teaching of the Apostles[58]에 따르면, 부활절 기념에 대한 초기의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On the Friday and on the Sabbath fast wholly, and taste nothing. You shall come together and watch and keep vigil all the night with prayers and intercessions and with reading of the Prophets, and with the Gospel and with Psalmsuntil the third hour in the night after the Sabbath; and then break your fasts. And then offer your oblations; and thereafter eat and make good cheer, and rejoice and be glad, because the earnest of our resurrection, Christ, is risen. And this shall be a law to your for ever, unto the end of the world.[59]

 

여기서 우리는 the Easter Vigil의 기본적 요소들은 금식, 믿음의 공동체의 회집, 심야기도 (prayer vigil), 구약과 신약성경의 읽기, 봉헌, 식탁의 교제, 부활의 기쁨 안에서 누린다.[60]

 

그리고 The Easter Triduum (or paschal triduum)이 부활절을 지키는 또 다른 한 축으로 여겨왔다. 4세기 말에 Ambrose  sacred triduum (triduum sacrum)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suffered and rested and rose (et passus est, et requievit, et resurrexit)[61]의 행위를 가리킨다. 후에 어거스틴은 “the most holy triduum of the crucified, buried., and risen Lord (sacratissimum triduum crucifixi, sepulti et ressuscitati)으로 불렀다.[62] The Easter triduum은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그 증거를 우리는 Egeria의 증언에서 찾는다. Egeria[63] 381-384년에 예루살렘으로 순례자로 참여한 후, 남긴 Egeria’s Travels 후기에 기록되어 있다. Hol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 그리고 나서 50일간의 the Great Fifty (부활절 시즌) the great Sunday”로 불려지는 부활주일에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승천일 (Ascension)에 대한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승천 사건은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 사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절기는 7주간 동안의 축제 기간이다. 부활절 여섯째 주일이 포함된 그 주간의 목요일이 그리스도의 승천일 (the Day of Ascension of the Lord)이다. 승천하신 목요일이 부활주일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다 승천절에 대한 교회사적인 최초의 언급은 닛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 388년에 한, 설교에서 나타난다 (Jean Danielou). 그리고 ca. 420-430년에 예루살렘에 그것이 받아들여졌다.[64]

우리는 승천의 날인 목요일에 주로 예배가 없기 때문에, 그 다음 이어지는 부활절 일곱째 주일을 승천주일 (Sunday of Ascension)로 지킨다. 또한 부활절 마지막 일곱번째 주간으로서, 승천 주일이 있는 그 한 주간 전체를 승천절 (Season of Ascension)로 지킬 수 있다. 승천절은 마침은 곧 부활절의 절기의 마침을 의미한다.

 

 

 (3) 성령강림절 (Pentecost)

50일간의 부활절은 교회력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절기이다. 이것은 무교병 절기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로부터 초실절/맥추절 (the Feast of First Fruits)까지의 7주간의 유대인의 오순절 (the Jewish feast of Pentecost)에 상응하는 절기이다. 50일간의 부활절에 기간의 일요일들에 대해, Athanasius의 서신들은 실제로 그것을 “magna dominica (the great Sunday)라고 부른다. 이 날에는 금식이나 무릎을 꿇는 행위도 이 기간 허용되지 않았다 (Tertullian, de Cor. 3.4; Egeria, 41; Nicaea, Can. 20).[65] 성령강림절은 바로 이러한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축제의 절기로 지켜졌다.

 

사실 성령강림절은 일종의 “요약적인 시기” (a summarizing occasion)이지, 새로운 시작의 시기 (an inaugural occasion)는 아니다. 이 말의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고난 (사순절), 부활 (부활절), 승천 (승천일) 그리고 약속의 성령님을 보내주신 사건을 일련의 부활절의 사이클의 연속적인 절기를 마무리하는’ (day)의 개념이지, 새로운절기’ (season)의 개념이 담긴 날은 아니다.[66]

 

그리스도의 승천일 10일 후인, 이어지는 주일이 바로 성령강림주일 (the Day of Pentecost)이다. 성령강림주일은 부활주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승천절기가 부활절 절기 (Season)의 마침이라면, 성령강림주일은 부활절 사이클 자체를 닫는 축제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연속절기는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절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승천절이 왜 없는가? 승천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력에서 누락 또는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승천절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지 덜 강조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대강절-성탄절-주현절의 세 절기를 일컬어성탄절 사이클의 절기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세 절기를부활절 사이클의 절기들이라고 불러왔다. 각 사이클의 명칭은 그 사이클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핵심 사건인 성탄하심과 부활하심을 근거로 하여 교회력의 사이클의 명칭을 형성한다. 즉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로 대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승천사건은 각각 독립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사건을 연속적인 사건으로 보면서 승천은 부활에 대한 광의의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도인 것 같다. 이 신학적 의도가 교회력의 두 사이클에서 신학적으로 체계화 된 것이 절기 명칭에 대한 예배력 또는 예배신학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승천 사건을 기념하는 승천절의 명칭이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연속적 절기의 이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여서 승천절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거나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승천절은 부활절의 여섯째 주일이 포함된 그 주간의 목요일이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이기에 승천절을 부활절 절기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절 일곱째 주일을 승천주일로 교회력은 명칭을 부여하여 지켜오고 있다.

 

요셉 웨버 (Joseph Weber)는 “부활과 승천은 일종의 두 단계의 로케트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67] 이 의미는 부활은 예수님의 몸이 땅으로부터 로케트가 분출되는 것이며, 이어지는 승천은 로케트가 대기 바깥으로 발진하여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 비유는 연속성이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생명과 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부활생명/몸과 승천생명/몸은 동일한 영화로운 생명/몸이다. 그리고 구속 사역의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은 승천이 의미하는 왕으로서 영광 안에서 승귀를 통한 통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왕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승천 사건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 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교회력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중심의 두 사이클인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 안에 있는 6대 교회력 절기 안에 승천절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는 부활절의 사이클 안에서 부활절의 축제의 정서와 신학 안에서 승천절을 지킴이 옳다고 할 수 있다.

3. 평상절; 성장절; 녹색절 (Ordinary Time of Growth)[68]

 

“평상절”에는 7개의 축제가 기념된다. 그 가운데 3개는 대부분의 전통들에서 공통적인 것들이다 (the Universal Feasts): the Transfiguration of the Lord, the Triumph of the Cross, and the Feast of Dedication. 그리고 나머지 4개는 서방교회에 해당된다 (the Western Feasts): the Trinity, Corpus Christi, the Sacred Heart of Jesus, and Christ the King.[69]

 

그러나 평상절은 절기의 개념은 아니다.[70]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력의 절기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활절 사이클과 성탄절 사이클 안에 있는 6개 절기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평상절은 절기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6대 절기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인격을 기초로 해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을 강조하는 적절한 시즌이다.

 

 

Sub-conclusion

교회력은 2개의 사이클인, 부활절 사이클과 성탄절 사이클 안에 그리스도 구속 사역 중심의 6대 절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구성진다. 6개의 절기의 발생과 성장과정의 역사는 지역과 전통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과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이클은 한 개의 준비의 절기와 두 개의 축제의 절기들을 가진 교회력 시스템으로 귀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나오면서

전통은 만들어져 왔고 전통은 또한 만들어져 가야 한다. 교회력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 한국교회는 교회력에 대한 전통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특히 한국보수교단의 교회는 불완전하게 형성된 교회력의 전통 안에서 절기들을 “선택적으로”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교회력은 그 성격상 선택적 지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연속적 누림의 체계이다.

 

이런 점에서 예배학에 대한 신학적 훈련과 연구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선행될 때, 건강한 예배학의 전통이 세워질 수 있다. 이 전통을 세우기 위한 연구 자료들이 개신교에, 특히 보수 교단의 개신교에 예배학적 유산이 빈약하다.  타 전통들 안에 쌓여 있는 1, 2차 자료들을 발굴하고 개혁 신학에 입각한 자료비평을 거쳐 예배력에 대한 진일보된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한 중요한 원리가 있다면, 교회력의 기초가 된 부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주일 (the first day of the week) 중심의 신학[71]과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 사역[72]에 바탕을 둔 예배력에 대한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1] 교회력 또는 예배력에 대한 영어 명칭은 다양하게 사용해오고 있다: the Christian Year/Calendar, the Church Year/Calendar, the Liturgical Year/Calendar 등이다.

[2] 한국교회가 지키는 절기들이선택적이라고 본고에서 필자가 언급할 때, 그 이유는 (1)성탄절>(2)부활절>(3)성령강림절>(4)사순절>(5)대강절>(6)주현절이라는 우선 순위도안에서 절기들이 주로 지켜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1)번 방향 쪽으로 갈수록 익숙해져 있고 (6)번 방향 쪽으로 갈수록 낯선 절기일 것이다. 적게는 앞의 (1)번과 (2)번 절기만을 선택적으로 지킬 수도 있고, 많이 지킨다면 (1)~(4)번까지의 절기가 선택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 이 섹션의 내용 전개에 있어서 필자는 A. G. MartimortThe Liturgy and Time, The Church at Prayer vol. IV, eds. by Aimé Georges Martimort et als.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3), 11-16에 있는 제1장 “Sunday and the Week”의 History of Sunday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설명함으로,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본고의 논지 전개를 위해 필요한 필자의 논평과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있다.

[4] 마태복음 28:1절의 헬라어 본문은 각각 한 개의 시간의 종속절과 주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사용된 종속절의 헬라어 본문은 VOye. de. sabba,twn( th/| evpifwskou,sh| eivj mi,an sabba,twn h=lqen 묘사했는데, 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은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로 번역했다. 특히안식 후 첫 날’ (eivj mi,an sabba,twn)에 해당되는 부분을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the first day of the week’ 으로 번역했다 (KJV, NASB, NIV etc.).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해당되는 헬라어를 마가복음 16:9절에는 prw,th| sabba,tou 으로 사용했다. 누가복음 24:1절과 요한복음 20:1절에서는 mia/| tw/n sabba,twn 을 사용했다. ‘안식 후 첫날그 주간의 첫날로 번역되는 것은 헬라어 sa,bbaton 안식일’ (Sabbath)주간’ (week)이라는 2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한 주간의 촛점으로 보는 유대인들에게는 2가지 의미가 모두 가능했다.

[5] meqV h`me,raj ovktw. (lit., ¡°after eight days¡±) NIV는 “a week later” 으로 번역했다. 일요일에 대한 또 다른 명칭들 가운데 하나가 ‘the eighth day’라는 표현이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여드레 후가 시간적으로 일요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주님이일주일 후에 제자공동체에 다시 나타나셨다는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다.

[6] A. G. Martimort, I. H. Dalmais, and P. Jounel, The Liturgy and Time, The Church at Prayer vol. IV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3, 12-13.

[7] Ibid., 13. 그리고 부활에 대한 기념 (commemoration) 위에 서서히 다른 구속 사건들이 예배학적 기념 절기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즉 승귀 (높아지심)의 구속 사역적 테마 (the salvific theme)에 포함된 부활, 승천, 성령강림 같은 사역들과 낮아지심의 구속 사역적 테마 안에 있는 성육신, 고난, 죽으심이 절기화된다.

[8] 주의 날에 대한 명칭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에서 두루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라틴어 형태의 명칭으로서 (Vul: in dominica die), 서방교회에서는 “dominicus dies” 라고 일컬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명사는 곧 사라져버렸고 형용사만 남게 되었다. 이 형용사가 다시 명사가 되어 사용되었다 (dominica). 그래서 이 단어가 라틴계의 언어들에서 dimanche, domenica, domingo (Sunday) 라는 말들을 생성하게 만들었다.

[9] 본고는 안식일과 일요일 (주일)의 관계에 대한 페이퍼가 아니기에 본고의 목적과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10] Ignatius of Antioch, Ad Magnesios 9, ed. P. Th. Camelot (SC 10; 2nd ed., Paris: Cerf. 1951), 102-103,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4, n., 5.

[11] Pliny the Younger, Epistolarum lib. 10, 96; cited in W. Rordorf, Sabbat et Dimanche 79; cited in The Liturgy and Time, 14 (italics mine).

[12] Justin, Apologia I 67, 3 and 7, ed. L. Pautigny (Textes et Documents; Paris: Picard, 1904), 143, cited in Liturgy and Time, 14, n., 8.

[13] Didascalia Apostolorum 23, trans. R. Hugh Connolly, Didascalia Apostolorum (Oxford; Clarendon Press, 1929), 124,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9.

[14] 주의 날에 다른 세속적인 일을 중단하는 안식의 행위는, 이 날을 지키는 실천적 측면에서, 유대인들의 Sabbath와 그리스도인들의 Sunday 사이의 어떤 연속성 (continuity)을 암시한다. 비록 서로 다른 날로, 다른 방식으로 지키는 불연속성 (discontinuity) 또는 단절성 (disconnection)이 있을지라도, Sabbath의 정신 (mentality) Sunday에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 율법과 신약의 복음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날의 지킴에 대한 이러한 실천의 방식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후에 (325) 로마에서 이방 종교의 태양숭배일과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본고의 각주 17번을 참고하라).

[15] Bibliographia hagiographica Latiana, no. 7492; text cited in Rordorf, Sabbat et Dimanche, 109;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0.

[16] Didascalia Apostolorum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1.

[17] Constantine’s syncretism에 관하여, H. Stern, Le calendrier de 354 (Institut Francais de Beyrouth, Bibliotheque archeologique et historique 55; Paris: Geuther, 1953),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2를 보라.

[18] Codex Jusinianus lib. 3, tit. 12, 2; ed. Kruger (Berlin: Weidmann, 1877[1926]), 127; Eusebius, Vita Constantini 4, 18 (PG 20:1165), cited in Rordorf, ibid., 111-113;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3.

[19] J. Gaudemet, La législation religieuse de Constantin, in Revue d’histoire de l’Eglise en France 33 (1947), 43-47; cited The Liturgy and Time, 16, n., 14

[20] The Liturgy and Time, 16.

[21] 예컨데, the Councils of Agade (506), can. 47, ed. C. Munier (CCL 148:212), and Orleans (511), can. 26, ed. C. de Clercq (CCL 148A:11):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5.

[22] Abu’l Barakat, La lampe des tenebres, in W. Riedel, Die Kirchenrechtsquellen des Patriarchats Alexandrien (Leipzig : A. Deichert, 1900), 44;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6.

[23] St. Athanasius, De sabbato et circumcision 5 (PG 28:140),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7.

[24] Didache 8:1, 2 in Huub van de Sandt and David Flusser, The Didache: Its Jewish Sources and its Place in Early Judaism and Christianity (Fortress, Minneapolis, 2002), 12.

[25] A. G. Martimort, The Liturgy and Time, 26.

[26] Dom Gregory Dix, The Shape of the Liturgy (Norfolk: Biddles Ltd., 2007), 342.

[27] Socrates, Historia Ecclesiastica 5, 22 (PG 67: 636-637),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26.

[28] St. Epiphanius, De fide 22, ed. K. Holl (GCS 37), 522; see A. Jaubert, La date de la cène (Etudes bibliques; Paris: Gabalda, 1957), 88,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26, n., 47.

[29] 우리는 이 6대 절기들에 대해서는 본고의 마지막 섹션인 “III. 교회력의 구성”에서 다룰 것이다.

[30]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29-33을 보라.

[31] Michael Kunzler, The Church’s Liturgy (New York: Continuum, 2001), 1-166를 보라.

[32] 현대교회는 예배의 순서를 지나치게 편의성과 작위적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의 관점으로 예배순서와 예배 요소를 점검하고 인식함으로 우리의 예배가 더욱 의미 있는 예배형태가 되기를 소망한다.

[33] 그리스도 중심의 두 개의 사이클 안에 있는 6개 절기가 끝나면, Ordinary Time of Growth이 이어진다. 이 시즌은 “평상절” 또는 “성장절”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회력의 사용 색깔은 녹색 (Green)이기 “녹색절”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평상절은 교회력의 명칭은 아니다.

[34] 종종 예배력 (the church calendar)과 일반력 (the civil calendar)이 일치했기에, 희랍 정교회에서는 9 1일이 한 해의 시작이었으며, 1751년 이전에 잉글랜드에서는 3 25일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이 날이 수태고지 (the Annunciation)의 날이며, 이 날이 예수님이 잉태된 날로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서 12 25일이 예배력의 시작의 날이 되었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력은 일반력의 시작과 달리 대강절을 한 해의 교회력의 시작 시점으로 고려한다: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180, n., 1을 보라. 그리고 대표적으로,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은 대강절의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35] The Study of Liturgy, 468을 보라.

[36] ‘Chronography of 354’ ‘Calendar of 354’로도 불리어지는 이 사본은 Valentius라는 부유한 한 로마 그리스도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Chronography_of_354 (retrieved on 6-25-2010).

[37] 성탄절과 주현절의 상관관계에 대한 역사에 관하여 Michael Kunzler, The Church’s Liturgy (New York: Continuum, 2001), 418-421을 보라.

[38] Thomas J. Talley, The Origins of the Liturgical Year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6), 88; The Study of Liturgy, 466; The Liturgy and Time, 78.

[39]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46-448.

[40] Ibid.

[41] Ibid.

[42] Ibid.

[43] The Liturgy and Time, 79.

[44] Egeria 또는 Aetheria Gallaeci/Gallic 여인으로서, 그녀는 약 381-384년에 예루살렘을 순례자로 방문하여 당시 예루살렘의 예배적 상황과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오늘까지 전한다.

[45]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66-468을 보라.

[46] The Liturgy and Time, 79.

[47]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67.

[48] Ibid.

[49] Ibid.

[50] Ibid.

[51] Ibid.

[52] The Liturgy and Time, 78

[53] Coptic sources in fact suggest the fast was originally related, not to the Pascha but to Epiphany. See T. J. Talley, Origins, 189ff.

[54] Peter G. Cobb, 465를 보라.

[55] Holy Week (Latin: Hebdomas Sancta or Hebdomas Maior, Greater Week; Greek: Megale Hebdomas)은 사순절 마지막 한주간과 부활절 직전 한 주간을 의미한다. 이 한 주간의 매일은 각각의 명칭이 있다. 그들은 Palm Sunday (종려주일), Holy Monday, Holy Tuesday, Holy Wednesday, Holy Thursday (또는 Maund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이다. 특히, Maund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를 포함하는 3일을 “Easter Triduum (또는 “paschal triduum,” “sacred triduum,” “holy triduum)이라 부른다.

[56] Peter G. Cobb, 465.

[57] Cheesefare Week 또는 Maslenitsa (Russian: Ма́сленица, Ukrainian: Ма́сляниця, Belarusian: Ма́сьленіца)Butter Week, Pancake week, or Cheesefare Week로도 알려져 있다. 이 주간은 사순절 (the Great Fast)의 일곱 번째 주간인 마지막 한 주간을 의미한다. Maslenitsa 는 서방교회의 Carnival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Cheesefare_Week (retrieved on 6-26-2010).

[58] Didascalia Apostolorum (Teaching of the Apostles)는 예루살렘 공의회 ( 15:1-29)에서 사도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실제로는 3세기의 작품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59] Ch. 21. The Text in Didascalia et Constitutiones Apostolorum, ed. F. X. Funk, I (Paderborn: Schöningh, 1905), 288; trans. R. Hugh Connolly, Didascalia Apostolorum (Oxford: Clarendon Press, 1929), 189,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36, n., 7.

[60] The Liturgy and Time, 36.

[61] St. Ambrose, Ep. 23, 13 (PL 16:1030),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29.

[62] St. Ambrose, Ep, 54, 14 (PL 33: 215). Cited in Cantalamessa, ibid. 192;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30.

[63] Egeria’s Travels, trans. John Wilkinson (London: SPCK, 1971), 125ff. and passim. Cited by Cantalamessa, ibid., 170-177;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32.

[64] The Liturgy and Time, 60.

[65]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463.

[66] 한 때에는 이 날을 새로운 절기 (season)의 시작으로 보아서 “성령 강림절 주간 (Whitsuntide; 성령강림주일부터 1주일 또는 그 주간의 처음 3) 또는 “성령강림절” (the Season of Pentecost)로 이해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성령강림일 (the Day of Pentecost;) 또는 성령강림주일(Whitsunday)로 지킨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 교회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그 해의 부활절 축제의 절기를 닫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용어를 “성령강림절”로 부르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아마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부활절, 사순절 등 교회의 절기가 “~절” ()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이 날에 대해 습관적으로 교회력의 명칭으로 사용해온 것 같다.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기보다 성령강림일 또는 성령강림주일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사회적 습관 (언어의 사회성)에 따라 용어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고려한다면, 그것은 일반명사화 된 표현으로서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를지라도 그 의미하는 바가 성령님이 강림하신 주일로서 날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무방할 것이다.

[67]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67.

[68] 본고의 각주 33번을 참고하라.

[69] A. G. Martimort, The Liturgy and Time, 97-107를 보라.

[70] 이점에서삼위일체주일’ (Trinity Sunday)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행위와 무관한 절기이다. 이것은 조직신학적인 개념에 기초한 삼위일체론적 신론을 강조하는 신학이 반영된절기이다. 다시 말해서구속 사건’ (the salvific event)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구속자의 인격’ (the triune divine person)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71] 예를 들면, 승천일 (Ascension)이 목요일이지만, 이어지는 다음 주일이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로서 승천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이 주일 중심의 예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72] 예를 들면, 이미 언급한대로삼위일체 주일은 교리적 강조의 의미 안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굳이 이 날을 지킨다면 지킬 수도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력은 아니다 (참고: 본고의 각주 70번을 보라). 그리고 “평상절” (Ordinary Time of Growth)도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 사역에 바탕을 둔 절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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