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박사 “인문과학의 하얀 십자가 르네 지라르” 특강

11월 29일 오후 4시 서울 중구 남상동에 위치한 교회다움에는 현대기독교아카데미가 주관한 인문과학의 한얀 십자가 르네 지라르의 특강이 열렸다. 조촐하였지만 학구열에 불타는 사람들이 강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로 신학생들이었고 총신과 순복음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교수님이 가보라는 권유가 있었다고도 했다. 고려신학대학원 출신인 목사 정일권 박사의 학위논문 발표와도 같은 성격인데 고신의 그림자는 없었다. 아마 아직은 지라르가 생소한 때문일 것이다. 청중은 많지 않았지만 강의는 시종일관 뜨거웠다. 4시에서 6시까지 그리고 저녁 식사 후 7시에 시작한 강의는 9시를 넘기면서 강론과 질의응답이 계속되었다. 갈 길이 먼 기자가 박수로서 마지막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멈추지 않을 듯 했다. ▲ 정일권 박사고신대B.A고려신학대학원M.Div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 조직신학, Dr. theol
정일권 박사는 군목 시절 우연히 접한 지라르를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를 찾아갔고 거기서 조직신학을 전공하면서 지라르 연구에 올인했다. 그는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기본으로 붓다들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서구에서는 불교가 낭만적이고 평화적인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엄청난 선언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붓다들도 역시 희생양이며 그 붓다들 뒤에 감취어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어 서구인들의 붓다들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그는 붓다는 단수가 아니라 붓다들이라는 복수를 쓰기를 고집했다. 불교는 끝없이 부처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귀국하여 그 논문들을 한글로 다시 번역해서 출판사에 맡겨놓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의 저서가 출판되어 나오는 날 불교계와의 관계에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날지 그 자신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다른 종교의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그대로 알리는 차원에서 글을 썼다고 강조했다.

 

   
지라르의 주 저서는 ““폭력과 성스러움”이다. 이 저서가 나오자 당시 르 몽드지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1972년은 인문학의 연보에 하얀 십자가가 그어져야 한다.” 르 몽드지는 또한 이 책을 인류 정신사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2006년 독일의 튀빙엔 개신교 신학부는 지라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변증작업에 영예로운 상을 수여했다. 독일 유력 일간지 디 짜이트(Die Zeit)는 “르네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현재 화란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지라르의 이론이 기독교 변증학 분야에서 수용되고 있다.


 

지라르의 이론은 무엇인가?

신화는 집단적 폭력과 그 희생양을 은폐하는 '거짓말'이며, 기독교 복음은 그 은폐된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희생당한 자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교적 신들의 정체는 살해된 후 신격화된 인간 희생양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너무 이 익숙해져서 그렇지 기독교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십자가에서 잔인한 폭력을 먼저 보게 된다. 그래서 일부 서구인들은 이 잔인한 폭력과 피를 물든 십자가 보다는 미소를 띤 동양의 붓다상에서 명상적 고요와 평화를 찾으려고 했다.


르네 지라르의 명저 폭력과 성스러움은 바로 소위 인류의 종교와 성스러움 속에 은폐되어있는 것은 신성한 폭력과 제의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창세로부터 은폐되어 온 이 성스러움 속의 폭력을 폭로하고 치유하는 계시다고 결론짓는다.


붓다들과 보살들의 파계 (Transgression)

정박사는 이 부분에 연구를 매진하여 붓다 속에 감취어진 폭력과 희생양을 연구발표했다. 최근 독일 젊은 종교학자들은 다시금 불교의 분신공양 속에서 인간제사 (human sacrifice), 희생양들과 희생양 메커니즘 등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관음보살에는 종교적 창녀의 모티브가 존재한다. 우리는 왜 보살이 주로 여성이고 주로 무당인지 다시 되물어야 한다. 왜 보살이 창녀로 등장하는지, 왜 심청이가 보살이 되는지, 왜 보살론에 있는 제의적, 신화적 구조분석 없이 민중신학 계열에서 보살과 무당을 갑자기 사회윤리화 시키는 퇴행적 담론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문과학의 하얀 십자가

“르네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고 독일 유력 일간지 디 짜이트(Die Zeit)는 당대의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 지라르를 소개한다. 독일 구약학자 로핑크는 (G. Lohfink) 20세기 신학자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출신의 지라르가 복음서를 다시 서구 정신사의 중심에 세웠다고 했다. 20세기 인문학의 고전이자 국내에서는 수능시험 논술 필독서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는 그의 주저 “폭력과 성스러움”을 당시 르 몽드지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1972년은 인문학의 연보에 하얀 십자가가 그어져야 한다”. 르 몽드지는 또한 이 책을 인류 정신사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2006년 독일의 튀빙엔 개신교 신학부는 지라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변증작업에 영예로운 상을 수여했다. 이 때 저자는 두 번째로 지라르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튀빙엔에서 신학 부분 베스트셀러였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변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십자가 사건은 인류문명과 신화를 해독하는 해석학적 열쇠이며 계시라고 세련되게 논증했다. 화란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지라르의 이론은 기독교 변증학 분야에서 수용되고 있다.

 

이 같이 그는 자주 성경에서 그의 책 제목을 빌려온다. “창세로부터 감추어져 온 것들” (1987, 마 13:35)과 문화의 기원은 이미 복음서에 계시되어 있다고 지라르는 고백한다. 자신은 그것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제 연구결과가 나를 이렇게 인도했기 때문"이라는 실존적 신앙고백을 하면서, 신비로운 회심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실존적 고백으로 인해 데리다와 라깡 같은 동료 포스터모던 철학자들만큼 인문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모두들 지라르를 알고 읽지만, 소르본느의 닭이 울기전에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3번이나 다짐한다: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2005년 그가 '불멸의 40인'으로 선출됨으로 그의 사상은 국제적이고 학제적으로 급속도로 확산되고 응용되고 있다. 그는 상대주의의 독재를 비판하고 기독교 복음의 르네상스를 꿈꾼다. 지라르는 이탈리아 포스터모던 철학자 바티모(G. Vattimo)와 만나 토론 중에 '기독교 복음의 르네상스'에 대해서 예견한 적이 있다. 지라르의 인류문화에 대한 발생학적 기원론과 기독교 복음의 문명사적 가치에 대한 변증론은 기독교 복음의 인문학적 지평을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신화는 집단적 폭력과 그 희생양을 은폐하는 '거짓말'이며, 기독교 복음은 그 은폐된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희생당한 자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문화의 기원'을 해독했다는 르네 지라르의 주장은 새로운 거대담론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르네 지라르 (René Girard)의 미메시스 이론은 단순한 것 같지만 매우 복잡하며, 원시문명으로부터 후기자본주의 사회까지 그 연구범위가 참으로 넓다.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것들” (1978)과 “문화의 기원” (2004)을 해독했다는 지라르는 동료 프랑스 포스터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언어학적 허무주의와는 달리 사건의 진실을 믿는 리얼리스트다. 이미 지라르는 1961년에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자크 데리다, 자크 라깡, 바르트, 골드만 등 참가한 '비평언어와 인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200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Academie francaise)의 '불멸의 40명(40 immortels)'이라는 프랑스 국민 최대의 영예를 얻고 대통령 사코지까지도 인용하는 등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게 되었지만, 그 동안 단 하나의 대단한 것 (희생양과 그 메커니즘)을 해독한 지라르는 스캔들이었다. 한국에서도 그 동안의 데리다와 라깡 등 포스터모더니즘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에 비하면, 르네 지라르는 그 동안 소외되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Ecole Polytechnique)의 사회정치 학자이자 스탠포드 대학의 장 삐에르 뒤피 (Jean-Pierre Dupuy)는 아래와 같이 이 ‘지라르 현상’에 대한 말한 바 있다: "지라르는 하나의 현상이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은 그를 당대에 생존하는 위대한 학자들 중 하나로 평가하며, 또 어떤 이들은 그를 프로이드 혹은 마르크스에 비교하기도 한다. 또한 지라르는 일부 인문과학자들에게는 종종 스캔들로 받아들여진다. 지라르만큼 그 동안 스캔들처럼 폄하을 많이 받은 학자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폄하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지라르에게서 영감을 얻지만, 또한 그것을 숨기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소르본느의 닭이 울기 전에 이러한 학자들은 이렇게 3번이나 다짐한다: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지라르의 이론은 바로 이 이론이 겪고 있는 폭력적인 폄하를 설명하고 또한 그것을 예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도발적이다."

 

 9.11테러 이후 철학계에서도 그 동안의 (프랑스) 포스터모더니즘의 종언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논하기 시작했다. 현대 프랑스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킨 뉴욕대 이론물리학자 앨런 소칼( Alan Sokal)은 포스터모던 철학자들의 학문적 엄밀성을 시험한 후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흐름을 비판했다. 그러나 비교행동학적인 지지를 받으며 문화인류학적 현실과 ‘레페랑’ 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지라르는 그 동안의 지나친 포스터모더니즘의 해석학적, 언어학적 허무주의와는 달리 명쾌하고 분명하다. 그는 창세로부터 그리고 아벨의 피로부터 은폐되고 감추어진 “사실의 부인된 목소리”(Die verkannte Stimme des Realen, 2005)를 신화 속에서 듣고 복권시키고자 한다.


카인과 아벨의 성경이야기와 로물루스(Romulus)가 레무스 (Remus)를 죽여 로마시를 창립하는 신화에서 지라르는 초석적 살해라는 불편한 진실을 읽어낸다. 아벨의 피 이후로부터 인류질서의 제로점에 있는 초석적 살해와 그 희생양/신(神) 에 대한 그의 의심의 해석학은 창세로부터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카인의 정치학’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이기도 하다. 아벨의 피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살해까지 지라르는 “옛 사람들이 걸어간 사악한 길” (1985)에 대한 비판적 해독으로 그는 니체식의 디오니소스적인 미학화 보다는 유대/기독교 전통에 서서 수 많은 약자들과 희생양들의 복권이라는 윤리적 길을 택한다.

 

이교적 신들의 정체는 살해된 후 신격화된 인간 희생양이다

르네 지라르는 자신의 문화인류학적인 지성이 도달한 연구결과 때문에 기독교 영성으로 회심하게 된다. 그는 인간공동체가 자기파멸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생산해내는 사회적 초월과 참된 초월을 구분한다. 최근 이탈리아 어느 예술가가 십자가 위에 개구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못박아서 신성모독적 전위예술을 시도해서 크게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루터교 전통에서는 아직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아니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을 조각으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일본 선불교학자 스쯔기가 서구 기독교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상을 보고 잔인한 폭력을 본 것은 이해할만하다. 우리는 너무 이 익숙해져서 그렇지 기독교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이 볼때에는 십자가에서 잔인한 폭력을 먼저 보게 된다. 그래서 일부 서구인들은 이 잔인한 폭력과 피를 물든 십자가 보다는 미소를 띤 동양의 붓다상에서 명상적 고요와 평화를 찾으려고 했다. 르네 지라르의 명저 폭력과 성스러움은 바로 소위 인류의 종교와 성스러움 속에 은폐되어있는 것은 신성한 폭력과 제의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창세로부터 은폐되어 온 이 성스러움 속의 폭력을 폭로하고 치유하는 계시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붓다상에서 우리는 미화되고 은폐되어 있는 제의적 폭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서구 신학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의 2000년 교회역사를 범죄의 역사로만 규정하고 끊임없는 자기종교재판으로 복음까지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나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마녀사냥, 이 세가지는 이 만트라 같은 자기종교재판의 후렴구였다. 반면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필요이상으로 낭만적으로 상상했다.그렇게도 자신의 과거전통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독일 ZDF에서 2000년까지도 불교는 언제나 평화의 종교 대명사로 소개되어 왔다. 예를 들어 불교의 이름으로 한 방울의 피도 흘린적이 없다고 소개했다가 종교학자들의 거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불교 속에서는 소림사의 무술처럼 제의적 전투의 전통이 흐르고 있다.

 

정현경 교수가 세계 교회협의회에서 성령의 오심을 간구하는 자리에서 한국 여성무당의 초혼제를 한 것은 여기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신학자들에게까지 비판적으로 기억될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엘리아데식의 샤마니즘 해석, 억눌린 자들의 상징으로서의 여성 무당, 하지만 그 초혼제에는 전통적 무당이 들고 있는 제의적 삼지창과 칼이 빠져 있다. 제의적 폭력으로 발생하는 샤머니즘적인 초월과 성령의 초월에는 깊은 간격이 존재한다. 성령의 임재와 제의적 폭력이 아직도 살아있는 무당의 희생제의적 춤을 동일시하는 것은 20세기 민중신학적 계열에서 범한 오류이다. 마치 카프라가 흰두교 쉬바의 춤에서 양자역학의 춤을 발견하는 해석학적 비약을 한 것과 비슷할 정도로 우스운 해석이다. 물론 그들의 진지한 사회정치적 고뇌에 대해서까지 냉소적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무당을 단순한 억눌린 자들의 대표자, 마치 현대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해석하는 것은 종교학적 넌센스이다.

 

무당에 대한 근본주의적 악마화도 민중신학적 낭만화도 대안이 아니다. 무당은 제의적으로 제의적 성과 폭력을 자신의 춤과몸 속에서 직업적, 전문적으로 재현하는 전문가들이다. 샤마니즘과 무당은 인류의 어제의 종교성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무당과 샤마니즘 속에 제의적 폭력을 말하지 않으면서 구조적 폭력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비둘기 같은 온유한 성령의 임재와 삼지창으로 무장한 무당의 초혼제를 공식적 예배 시공간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했던 것은 20세기 후반의 아시아 진보적 신학자들의 해프닝이었다.

 

민중신학의 토착화 시도에 있는 신원시주의적 퇴행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르네 지라르가 말한 바 있는 "희생양들의 전체주의", 희생양들이 무조건적으로 낭만화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한번 더 예언자적일 필요가 있다. 20세기 후반 후기식민주의적 보상의 정서 속에서는 정치적으로 누구든지 자신의 희생양이라는 논리로 자신의 권리는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희생양에 대한 일차적 변호라는 기독교 정신이 정치적으로 오용된 것이다.

 

최근 유럽 68세대들의 황혼기가 되어서 그런지 90년대 이후로 주도적 서구지식인들이 다시금 유대/기독교 전통의 재발견을 말한다. 당대 독일어권 최고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슬라보예 지젝, 이탈리아 포스터모던 철학자 바티모, 그리고 90년대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의 샬롱에서도 그 동안 학생혁명으로 유행했던 니이체주의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퇴행이라는 표현은 독일어권에서 위르겐 하버마스 계보의 학자들이 독일 일부 좌파적 문화현상을 두고 쓰는 표현임으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종교간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이 실존적으로 신앙하는 진실과 진리를 포기하고 상대화하라는 집단적 압력에 굴하지 않으려고 한다. 톨레랑스가 무비판적이고 무책임한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타종교인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기독교 복음에 대한 종교사적 진실에 대한 포기나 상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비판적 톨레랑스"의 시대가 이미 서구에는 시작되었다. 아직도 한국 일부 지식인들은 그 "배타성"을 포기하라고 데모하지만, 그 배타성이 기독교인들의 인류학적 오만함이 아니라, 종교사적 진실과 사실에 관련된 문제라면 그 신앙을 포기하라는 것 또한 양심에 대한 폭력이다. 우리는 자신이 신앙하는 것에 대해서 내적으로 확신할 자유가 있다.

이슬람과 불교에 대한 비판적 논쟁 자체마저도 타종교에 대한 모독으로 쉽게 치부되어버리기 쉬운 이 시대정신적 정서는 20세기후반의 후기식민주의적 보상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식민주의적 희생양에 대한 보상의 정서, 약자에 대한 엄밀한 비판적 의식 자체는 약자에 대한 우선권을 말하는 복음에 의해 문화적 교육을 받은 서구 지식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역수입된 70년대형의 서구불교담론 이전 우리의 신토불이 불교에 대해서 보다 정직하게 연구를 해야 한다. 학문이론적으로 분석하자면 일부 유럽신학자들이 대화한 불교는 현실역사 속에 존재했던 아시아의 전통불교와 불교인이 아니라, "서구/기독교화된 불교"(스쯔기 불교, 티벳불교)와 담론적으로 대화한 것이다. "타자"와의 대화는 주창했지만, 사실은 서구신학자들은 "서구화된 불교"라는 "자기"와 대화한 것이다. 기독교와 "담론적으로" 대화에 나온 불교버젼이 진정한 아시아적, 타자적 불교로 생각한다는데서 그 동안의 종교간의 대화의 무비판적 낭만성이 비롯된다. 르네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을 학문사회학적으로 적용해 본다면, 서구신학과 대화를 시도한 일본선불교는 서구 기독교 문명에 대한 작용없는 중립적, 순수한, 타자적, 아시아적 불교가 아니라, 서구 기독교 문명과 모방적 경쟁관계 속에서 창안된 새로운 버젼이다. 종교학자들은 이런 현대 서구 기독화된 불교를 “프로텐스탄트 불교”라고 명명했다.

 

종교간의 평화스러운 대화와 공존은 이후 그 정당한 범위를 너머서 때로는 대화와 상생 자체가 학문정치적 목적이 되어서 역사적 진실과 사실까지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체적으로 경쟁을 일으켜 선을 넘게 된다. 그리고 르네 지라르의 비판적 분석처럼 20세기 후반에는 기독교 복음 자체가 서구 정신사의 희생양이 된다. 모든 것의 책임을 기독교 복음으로 돌리는 것이 한때 대학가의 유행이 되었었다. 물론 지금이야 현대 생태계 위기의 주범이 창세기라는 단순논리에 대한 비판성찰이 주류가 되었지만, 유럽 68세대들이 주도하는 정신사에서는 이것이 진실인 것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다.

 

20세기후반 후기식민주의적 담론으로서 일시적으로 발흥했던 상대주의적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해서 지라르는 문화인류학적인 증거로서 일관되게 반박해 왔다. 20세기후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20세기 후반의 특정하고 제한된 정치사회적 상황이라는 상황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후기식민주의적 보상의 정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최근까지 독일 개신교협의회 회장이었던 볼프강 후버 (Wolfgang Huber)는 여러차례 독일교회의 자기세속화 경향에 대해서 경고한 바 있다. 또한 종교간의 대화에서 독일교회의 비판기피증과 논쟁기피증에 대해서도 지적한 바 있다. 학문적인 비판정신이 제외된 담론은 정치적 판단에 의한 담론일수는 있어도 지속가능한 학문적, 신학적 담론은 될 수 없다.

 

붓다들과 보살들의 파계 (Transgression)

최근 독일 젊은 종교학자들은 다시금 불교의 분신공양 속에서 인간제사 (human sacrifice), 희생양들과 희생양 메커니즘 등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했다. 관음보살에는 종교적 창녀의 모티브가 존재한다. 우리는 왜 보살이 주로 여성이고 주로 무당인지 다시 되물어야 한다. 왜 보살이 창녀로 등장하는지, 왜 심청이가 보살이 되는지, 왜 보살론에 있는 제의적, 신화적 구조분석 없이 민중신학 계열에서 보살과 무당을 갑자기 사회윤리화 시키는 퇴행적 담론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선불교 전통에서도 종교적 창녀들과 보살, 즉 보살이 창녀로 등장한다는 모티브는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탄트라적, 신화적, 제의적, 요기적 차원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침묵하면서 구원론적, 혹은 사회윤리적으로 보살론을 말하는 것은 비약에 불과하다. 희생제의적 폭력이 직업전문화되는 과정에서 무당이 삼지창을 들고 돼지를 살해하는 것처럼, 그 무당이 또한 민간에서는 보살이 되는 것처럼 일부 서구 신이교적 신학자들이 보살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는 것은 형식주의적이고 값싼 비교에 불과하다. 보살과 부처는 갠지즈강의 모래처럼 수많이 존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마지막 희생양으로, 집단이 신성한 종교와 폭력의 이름으로 희생양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셨다.


유럽 인문학의 천재로 평가되는 슬라보예 지적의 서구불교 비판처럼 계몽된 한국인들은 이러한 친신화적이고 친이교적인 서구지식인들이 창작해 내는 담론들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흰두교/불교적 세계관에서는 개체적인 유일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붓다들은 언제나 일관된 패턴 속의 영원한 시리즈 중에 하나로 등장하는 인물일 뿐이다.


우리는 종교사 앞에 정직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진실을 위해 경쟁하되 비폭력적이고 인간적으로 하는 새로운 모델을 택해야 한다. 대화와 공존을 위해서 진실과 학문을 희생시키는 지난 몇십년의 모델은 비판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정일권 박사는

현재 오스트리아 인스부룩 조직신학부가 30년 전부터 발전시켜온 학제간 연구프로젝트 종교/폭력/세계질서의 박사후기 연구과정 (post-doctoral research fellowship)으로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분당중앙교회 해외장학생 5기 (한국 고등신학 연구원)과 분당샘물교회 해외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지금까지 힘든 가운데서도 학위를 마쳤다.  또한 Colloquium on Violence and Religion의 회원으로 한국 고등신학 연구원 회원으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학위전공분야: 조직신학부 내의 기독교 사회론(Christliche Gesellschaftslehre). 전공분야 분류: 조직신학, 기독교 사회윤리 및 정치, 사회이론, 학제적 문화이론, 종교학, 문화인류학. 지도교수는 현재 르네 지라르의 이론의 국제적/학제적 콜로키움의 회장이며, 조직신학부의 리더이다. 토마스 홉스로부터 독일헌법의 아버지격인 칼스미트까지 주로 새로운 문화이론, 문명이론, 문명발생이론인 지라르의 이론의 정치,사회학적 적용을 전공했다. 물론 기독교 사회윤리와 사회이론으로 Yoder, Hauerwas, J. Milbank 등을 공부했으며, Habermas, Zizek, Vattimo, Derrida, Lacan 등과연결해서 공부했다.
       
        강의 가능한 주제
        기독교와 인문학: 르네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
        흰두교/불교에 대한 사회인류학적 연구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쟁
        개혁주의 교의학과 현대신학
        포스터모더니즘과 기독교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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