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해와 설교” 기획기사는 한국동남성경연구원(원장: 황창기 박사)의 협조를 얻어 목회자들과 성경연구자들이 어떻게 성경본문을 주해(주석)하여 설교화할 수 있는 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이를 위하여 5편의 글을 준비하였다. 첫 번째에서 네 번째 글은 각각 구약과 신약의 본문들을 실제로 어떻게 주해하고 설교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에 관한 것이고 다섯 번째 글은 본문주해와 설교문 작성의 방법론적인 측면을 언급한 것이다. 한국동남성경연구원(kosebi.org)에 감사를 표한다.


글 차례

1. 다윗과 미갈의 다툼: 신득일 목사(고신대 신학과 교수, 구약학, Ph.D.)

2. 그는 어린양 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김하연 목사(대구삼승교회 담임목사, 구약학, Ph.D.)

3. 천상의 계시와 지상의 가시: 문장환 목사(부산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신약학, Th.D.)

4.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황원하 목사(대구서남교회 부목사, 신약학, Ph.D.)

5. 주해에서 설교까지의 근간: 황창기 목사(한국동남성경연구원 원장, 신약학, Th.D.)


연구위원장 이세령 목사

 

   
   ▲ 신득일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고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Th.M.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원
   Th.Drs.
   남아공 노스웨스트 대학교
   Ph.D.
   미국 리폼드신대원 연구교수
   현 고신대학교 신학과 및
   대학원 신학과 학과장
성경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인정받는 다윗 왕이 심각한 부부싸움을 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성경은 그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이 싸움은 단순히 가정문제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국가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다툼은 한 마디로 신앙과 불신앙의 갈등에서 빗어진 것이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려는 사람과 외형적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다툼이 있기 직전 그 날은 다윗의 일생에 가장 감격적인 날이었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역사적인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평소에 하나님의 법궤를 얼마나 사모했는지 법궤를 찾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였다(시 132:3-5).

  

법궤는 작은 제의기구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표시하는 기구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고, 법궤는 발등상으로서 하늘과 온 땅의 통치자인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았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전역에 흩어져 사는 각 지파의 백성이 법궤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법궤와 함께했다. 법궤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운명이요, 이스라엘의 운명은 곧 법궤의 운명이었다.

  

이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예루살렘은 그때부터 정치적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심에서 그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의미가 있다. 다윗은 이 거국적인 사업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시온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겔 38:12).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은 백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기럇여아림에 방치해 놓았다. 이제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첫 사업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이스라엘의 삶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은 정말 기쁘고, 너무나 감격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 미갈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다윗이 춤을 추며 법궤를 인도하는 모습을 창으로 내다보고 조소했다. 그리고 기쁨으로 집으로 들어오는 다윗에게 쏘아붙였다.

  

I. 미갈의 조소(20절)

다윗은 법궤를 옮기면서 백성과 함께 나누었던 기쁨을 계속 집으로 연결시켜서 그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다윗이 집에서 축복을 하기 전에 미갈은 그 동안 참았던 말을 쏟아내었다(6:16).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낸 미갈의 말은 다윗의 격앙된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kbd)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우리가 이 말을 그냥 들어볼 때 이 말이 그리 잘못된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만일 미갈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윗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위반한 것이다(출 20:26). 사실 이스라엘의 왕이,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갈이 다윗이 왕으로서 좀 더 품위 있고, 위엄 있는 태도로 백성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면 그것은 그리 잘 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미갈의 말을 잘 분석해 보면 그녀가 그렇게 자상한 아내로서 왕인 남편에게 조언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녀는 은연중에 다윗의 왕위에 복종과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그 말의 속뜻이 달랐던 것이다.

  

본문은 미갈을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울의 딸’이라고 소개한 것은 미갈의 신분을 다윗과의 관계보다는 사울과의 관계를 더 강조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그것은 불순종한 왕, 버림받은 왕의 딸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미갈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조롱하는 의미가 있다. 그녀는 아버지 사울집안에서 왕을 계승하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당신이 왕이 될 수 있느냐고...’ 그녀가 정말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했다면 완전히 통일된 신정국가의 왕 앞에서 왕의 직분을 고려하지 않은 이런 식의 발언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갈은 다윗이 계집종들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물론 이것은 과장으로 보인다. 다윗의 열광적인 행동이 왕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윗의 행위에서 덕망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지적하기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녀는 다윗이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녀는 상당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미갈은 백성으로부터 추앙과 영광을 한 몸에 받아 누리는 영웅적인 다윗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남편으로부터 세속적인 영광을 누려 보려는 생각이다. 그래서 백성과 함께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미갈은 자기 아버지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사울과 같이 백성들로부터 받는 칭송에 관심이 많았다(삼상 18:7). 그래서 정작 관심을 쏟아야 할 곳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미갈은 여호와의 언약궤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법궤의 언약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대상 13:3) 그의 딸 미갈도 하나님의 법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이 없으니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니 여호와의 눈은 의식하지 못하고 계집종의 눈 밖에 더 의식하겠나? 미갈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믿음 없는 백성의 관점에서 그 일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염려와 불만은 이렇게 낮은 차원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때로는 이렇게 믿음이 없는 자는 진실한 성도의 신앙적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할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만고불변의 진리다. 믿음 없는 외견상의 신자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진실한 신자의 헌신에 걸림돌이 되는 법이다.


II 다윗의 답변(21-22절)

다윗은 즉각 미갈의 말을 되받아서 그녀의 교만을 꺾어 놓았다. 그가 백성가운데서 한 행동은 바로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고 했다. 다윗은 계집종의 눈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했다. 그래서 그 행위에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다윗은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것이 대단한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기쁨은 더욱 큰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때문이다. 그림자로서 바라보고 기뻐한 것에 비하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다윗이 기뻐한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nāgīd)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미갈이 듣기에는 부담이 되었겠지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선택받은 왕임을 말했다.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다”고 한다. ‘버리고 택했다’는 말은 구원론에서 말하는 유기와 선택이 아니다. 그 기준은 왕위다. 왕위에서 제거하시고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이다. 전쟁을 위한 이방 나라의 왕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을 맡은 것은 특별히 의미 있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왕으로서 품위를 떨어뜨렸다기보다는 백성 앞에서 신앙의 본을 보인 셈이다. 왕으로서 사람들의 생각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의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을 했다.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 체제를 구축하여 옛 언약에 속한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놀라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백성은 여호와의 법궤를 사모했음에도 불구하고(삼상 7:2) 사울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함으로써 다윗은 나라의 왕이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했다. 다윗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다윗은 이 법궤가 들어오는 순간 이 시편으로 왕되신 여호와를 찬양했을 것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시 24:7-10).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통치는 기쁨과 두려움으로 맞아야 했다. 미갈의 발언은 이 엄청난 의미를 완전히 도외시한 처사다. 다윗의 중심은 오직 왕이신 하나님께 있었기에 그가 아무리 낮아져서 천하게 보일지라도(qll) 미갈이 말하는 계집종에게는 존경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계집종’의 믿음도 갖지 못한 미갈은 천하게 볼지 몰라도 지극히 작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그 행위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통치를 비웃으면 안 된다. 기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고 따르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III 하나님의 판단(23절)

하나님께서 이 일을 평가해 주셨기 때문에 앞의 해석이 가능했다. 두 사람의 대화만을 볼 때 단순한 부부 싸움으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가 옳은지 모른다. 좀 강하게 번역된(KJV) ‘그러므로’란 접속사는 앞의 사건이 원인이 되어서 뒤의 결과가 초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 아마 다윗은 미갈에게서 자식을 기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통치 초창기에는 아직도 사울에 대한 미련이 백성들 사이에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미갈에게서 자식이 생기면 백성들에게 다윗이 사울의 적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다윗이 미갈을 다시 부른 이유도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냥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난 요구라면 그녀에게서 자식을 더욱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결정적으로 그녀는 죽는 날까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은 부부싸움이 있은 이후 다윗은 평생 동안 미갈과 동침하지 않았는지 혹은 그가 미갈에게 남편의 의무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임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미갈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심판의 결과로 아이가 없었다.

  

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자녀가 없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창 30:1; 레 20:20-21; 렘 22:30).  그러나 미갈이 당하는 심판은 이보다 훨씬 더 쓰라린 데가 있다. 이것은 자녀가 없기 때문에 단순히 자연인이 사회에서 당하는 수모 이상의 아픔이 있다. 하나님은 이 심판으로 자신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는데 그를 메시야 반열에서 버리셨다. 그렇지만 미갈이 자녀를 가지면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끝날 까지 메시야의 어머니로서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갈을 심판하셔서 그녀가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기회를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하나님은 메시야의 계보에서 믿음 없는 사울의 피를 깨끗하게 제외시키셨다. 이것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복된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것은 미갈에게는 정말 가혹한 심판이 아닐 수 없다.

    

미갈이 당한 심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통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예사롭게 생각하는 자, 하나님의 통치를 비웃는 자가 당하는 심판이 어떠한 가를 보라. 그것은 희망과 소망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최고로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에게 가장 큰 기쁨이요, 위로다.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 우리의 행복이 보장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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