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하연 목사 한국동남성경연구원 부원장, Ph.D.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대구삼승교회 담임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모습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에 대한 예언이다. 이것은 본장의 여러 가지 면을 살 필 때에 너무나 분명하다. 지면상 그 당위성에 대한 논증을 펴지는 않겠다. 본 기고를 통해서 다만, 사 53:7에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의 귀절에 대해서만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어 보고자 한다.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라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죽음 앞에서도 잠잠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예언으로 말씀하고 있는가? 물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죽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신 분이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문으로 인해 유추해 낸 그러한 해석은 본문의 배경을 통해서 볼 때 적합한 해석이 되는가? 필자는 본 기고를 통하여서 이 부분을 좀더 분명히 하고자 한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직역)

끌려가 고통을 받으나,

그는 입을 열지 않음이 도살자 앞에 묶여있는 같고,

그리고 털깎는 앞에 (경악하여) 잠잠한 암양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도다.

이 본문은 어린양이 도살자 앞에서 순종하여 입을 열지 않고, 암양이 털 깍는 자 앞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순하게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안된다. 문맥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라. 자기의 털을 깎으려고, 또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서 있는 도살자나 털 깎는 자 앞에서 그 암양은 순종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기쁨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는가? 이사야 53장에서 암양이 잠잠한 것은 양의 순함으로가 아니고, 자신의 절박한 상황이 닥쳐왔으되 그것을 벗어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으로 인하여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묶여있었고, 앞에서는 칼을 들고 서있다. 그런데도 그는 너무 두려워서 또 쇼크 상태에서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두려우면 아무 말도 안 나오고 다리도 움직여지지 않는 일이 있지 않은가? 암양(רחל)이 잠잠하였다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네엘마’(  dumb)란 단어는 구약에서 사용될 때 쇼크나 공포 또는 분노로 인해 말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의 ‘잠잠하다’는 상태를 말한다.

 

겔 3:25-26 너 인자야 보라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be dumb, NASB, RSV)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개정개역)

 

10:15  그가 이런 말로 내게 이를 때에 내가 곧 얼굴을 땅에 향하고 말문이 막혔더니(dumb, KJV, RSV)(개정개역)


에스겔에서 ‘네엘람/네엘마’는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개정개역), “벙어리 되어(한글개역)”라고 번역되었지만, 말은 하나님이 에스겔의 혀가 입천장에 붙게 하여서 에스겔이 의지적으로 말하려고 해도 없게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다니엘서에는 히브리어 단어는 “말문이 막혔더니”(개정개역), “벙벙하였더라.”(한글개역) 하고 조금 의미가 애매하게 번역이 되었다. 이것은 다니엘이 홀로 이상을 보았을 때 주의 사자를 보고 그의 모습이 너무 두려워서 (단10:5-6) 기절할 지경이 되었을 쓰인 말이다. 다니엘은 두려움에 의해 입을 열려고 해도 열수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단어가 쓰일 때마다 그것은 외부적인 환경, 압력이나 두려움에 의해서 입을 열수 없는 상태를 말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뜻이 바로 오늘 이사야 53:7에서의 문맥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다. 상황으로 보나, 히브리어의 용례로 보나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의 어린양이 예수님에게 적용될 때에는 어떻게 설명이 되어져야 하겠는가? 본문의 내용과 ‘잠잠하다’란 단어의 용례를 통해서 살필 때에 우리는 좀 더 섬세하고 분명하게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적어도 사53:7에 나오는 도살자와 털깎는자 앞에 선 어린양과 빌라도와 대 제사장의 재판정 앞에 선 예수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공통점은 바로 주님의 잠잠하심 역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실례를 보자.

 

마 26:60-63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제사장들이 거짓 증인을 세우고, 온갖 종류의 죽일 거짓 증거들을 가지고 예수께 따지고 물을 때 예수께서 잠잠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막 15:5 에서 대 제사장이 여러가지 거짓 증거로 고소하고 빌라도 앞에서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답 하지 않으셨다. 눅 23:9 헤롯의 질문에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할 때에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모든 거짓 증거에는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마치 거짓된 재판과 고소에 유죄 사실을 인정한 듯한 결과를 가져 온다. 물론 예수님은 재판의 자리에서 항상 입을 다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올바른 질문에는 대답하셨다.


막 15:2 빌라도가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에 대해선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다. 마 26:63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도다.” 하신 것이다.

사 53장7절에서 하나님의 ‘고난의 종’은 공포에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적인 압력과 요인에 의해서, 그는 의지적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 로 이프타흐 피브). 공포 때문은 아니라도 그에게 말 못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서 본문에서는 고난의 종이 잠잠하신 이유에 대해 다 이해하기 힘드나, 예수에게서는 해결을 얻을 수 있다. 예수는 거짓된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 라고 말할 수 있으셨지만, 말씀을 하실 수가 없었다. 마치 어린양이 묶여 또는 두려움에 혀가 말려서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예수님도 어떤 힘에 의해서, 의지의 힘,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서 말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거짓된 고소를 인정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침묵은 무언의 인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소가 옳기 때문에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처럼, 스스로 그 입을 열지 않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소에 예수는 해당이 없어도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죄가 해당되니까 그렇다. 그는 거짓 고소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고소에 대하여 우리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입을 열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강포도 궤사도 없었던 분이시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던 것이다. 바로 다음 절인, 사 53:8을 보라.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적용)

1)  예수 그리스도, 그는 나를 위하여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말할 권리를 버리셨다. 땅에서 영광을 받으실 권리를 포기하셨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주 예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를 찬양해야만 한다.


2)  무엇이 당신을 묶고 있고, 당신의 입을 막고 있는가? 두려움과, 세상의 권력과 당신의 야망이? 무엇이 당신을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가? 우리를 묶는 것, 우리를 잠잠케 하고, 우리로 참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하지 않는가? 예수그리스도가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의 뜻에 묶여 입을 열지 아니했던 것처럼 말이다.

 

한글에서는 히브리어가 읽혀져서 올렸는데 여기서는 폰드가 없어서 깨지는군요. 엔디소프트사에서도 변환이 안된다고 하여 할 수 없이 그림판으로 옮겨 사진으로 붙여넣기를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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