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10. 12.27(월)-30(목)

12월 27일(월)

올해 선교사 수련회 때 선출된 임원들이 공식적으로 리트릿 형태로 모여 산적한 선교사회의 할 일들을 의논하기 위해 서기 오 덕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임원회를 하기로 하고 그동안 준비해 왔다. 모두들 연말이라 바쁜 사역의 일정을 쪼개어 이 모임에 참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모두가 참여할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역으로 인해 피치 못할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선교사는 부서기인 인도의 김광선 선교사와 회계인 필리핀의 강정인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참여하게 되어 결국 현지에서 준비하고 기다리는 서기 오덕 선교사 부부, 회장인 파라과이 이정건 선교사 부부, 부회장인 네팔의 이상룡 선교사 부부, 총무인 일본의 나달식 선교사 부부, 협동총무인 시에라레온의 이순복 선교사 부부, 협동총무인 일본의 윤혜자 선교사 부부, 그리고 부회계인 호주의 정훈채 선교사가 참여하게 되었다.


전날 대전을 비롯한 호남지방에 내린 많은 눈으로 인하여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고 이 날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났다. 준비하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이종건 선교센타 관리집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전날에 인천까지 우리 일행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었지만 최종적으로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고 터미널까지만 부탁한 상태였다. 드디어 정훈채 선교사가 내려왔고 마지막으로 이순복 선교사 부부가 왔다. 이선교사 부부는 4시 10분에 출발해야 하는데 4시 30분에 출발하는 것으로 일고 있었다. 그래서 늦게서야 부랴부랴 서두느라 사모님이 머리를 감고 채 말리지도 못한 채 왔다고 했다. 그렇다고 아무리 늦다고 해서 미끄러운 눈길을 달릴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집사님이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바람에 차가 마치 오리걸음으로 걸어가는 듯 했다. 그러는 와중에 결국 터미널까지 갈 시간이 없어서 중간 지점인 대전 정부청사 앞에서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비교적 상태가 좋아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대전에서 인천공항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3시간이었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지하 식당에 가서 아침 식사를 했다. 메뉴는 육개장과 순두부 백반이었다. 나는 항상 먹을 음식을 고를 때마다 매번 고민을 한다. 뭘 먹을까?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뭘 먹지 말까? 하는 고민이다. 오죽하면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기내식으로 나오는 음식을 먹지 않고 그냥 지난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왕성한 식욕이 그 고민의 주범인 셈이다. 결국 나는 늘 이기지 못하는 썩어져가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육개장을 시켜 먹었는데 값은 좀 비싼 편이었으나 꽤 먹을 만했다. 식사 후에 그 유명한 스타벅스 커피로 입가심을 한 후에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공항 대합실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이순복 선교사 내외와 우리 내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아차, 무엇이 잘 못되었구나 싶어서 마음을 졸이며 카운터로 갔더니 항공사 직원이 우리에게 좌석을 업그레이드 시켰으니 비즈니스 클래스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 무슨 반가운 복음인가? 사실 이 좌석은 이코노미 좌석 가격의 두 배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아마 비즈니스 좌석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고 이것을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마일리지 누적이 많은 승객우선으로 제공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이코노미 좌석에 남아있는 정훈채 선교사였다. 우리는 그에게도 좌석을 항공사 직원에게 업그레이드 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위에서 지시로 내려온 상황이라 임의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탑승 직전에 보니 아직도 한 장의 여유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재차 부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선교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결국 우리는 차별된 다른 입구로 안내되었고 특별대우를 받았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같이 구원은 받지만 행함 따라 상급이 다르다는 성경의 진리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평소에 다른 항공을 이용했던 정선교사가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택받은 자의 특권이 어떤가를 마음껏 음미했다. 그러나 인천공항은 아침에 내린 폭설로 항공기가 제 시간에 이룩할 수 없어서 활주로에서 제설작업을 하는 동안에 우리는 꼼짝없이 기내에 있어야만 했다. 드디어 항공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30분이 늦게 이륙했다. 비행시간은 총 5시간 10분이라고 방송에서 흘러 나왔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인 비즈니스 클래식기내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받으며 목적지인 베트남의 호치민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베트남, 이 나라의 공식 이름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9천만 명에 육박한다. 이 나라는 월남과 월맹이 전쟁을 벌이던 1964년에 대한민국이 월남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뒤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기 전까지 월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그 후 베트남의 통일 후 17년 만인 1992년 12월에 다시 수교를 했다. 이때부터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여 현재 약 250여명 의 한국인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다. 호치민시는 우리에게는 익히 사이공으로 알려진 베트남 최대의 도시이지만 베트남이 공산화되고 난 후에 통일의 영웅인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개명되었고 수도는 월맹의 수도였던 하노이가 되었다. 


우리를 태운 베트남 항공사 소속인 VN939편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3시에 호치민시의 탄손너트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수하물을 찾느라 시간이 좀 더 지체되어 결국 예정시간을 2시간 30분이나 넘기고서 우리는 마중 나온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공항에서는 일본에서 전날 도착했던 나달식 선교사 부부, 좀 전에 네팔로부터 다른 항공으로 도착한 이상룡 선교사 부부, 그리고 부산 김해공항에서 바로 온 류영기 선교사 부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현지 선교사 중에는 은퇴선교사인 김석영 선교사, 베트남 현지 선교부 지부장인 이영식 선교사, 전우영 선교사 부부, 그리고 오 덕 선교사가 함께 우리를 3시간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짐을 싣고 16인승 승합차로 시내를 가로 지르며 숙소인 모던 사이공 호텔에 도착했다. 모던 사이공 호텔은 주인이 한국인인데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고 객실은 보통 수준이나 인터넷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한국에 국제전화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일단 우리는 4시 30분까지 호텔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여장을 풀었다.


드디어 4시 40분에 호텔로비에 처음으로 모두 모였는데 여기에서 먼저 하노이를 거쳐서 미리 와 있던 김한중 본부장을 만났다. 사모님은 다음 날 오전 10시쯤 도착한다고 했다. 먼저 오 덕 선교사의 간단한 환영인사와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우리는 다시 승합차에 올라서 공식적인 일정에 앞서 호치민 시내 투어를 시작했다. 가이드는 오 덕 선교사가 했는데 그는 처음부터 17년 동안의 풍부한 사역 경험과 호치민 한국문화원 원장직에 걸 맞는 베트남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안내를 했다. 나는 그에게서 평소에 조용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의외였다. 그는 베트남 문화와 풍물을 이야기 해 주었는데 특히 소위 “오토바이론”은 상당한 노하우와 예리한 관찰 끝에 내려진 결론이라서 들을 만했다. “오토바이를 모르면 베트남을 논하지 말라”는 그만의 일관된 이론에 따라 베트남 오토바이족의 생리와 문화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토바이에 탄 사람을 보면 그의 신분을 알 수가 있고 또 함께 탄 사람과 운전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토바이의 성능 및 가격에 따라 그 사람의 부와 사회적인 위치가 드러나고 함께 탄 사람이 운전자의 뒤에서 그에게 어떻게 밀착되어서 타고 있는지에 따라서 두 사람과의 관계의 친밀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태우지 않고 이성간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더 깊이 알아가면서 운전자의 옷 끝을 조금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대담해고 더 나아가 연인을 꼭 껴안는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그런 관점에서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을 보니 그 이론이 맞는 것 같았다. 오 선교사는 거듭 우리 일행에게 이런 사실을 숙지하고 호치민을 떠나기 전에 자기의 이론이 맞는지를 경험해 본 후 마지막 시험을 치른 다음에 통과한 사람만 출국을 허락하겠노라고 하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정말 오토바이의 행렬은 끝이 없었고 그 엄청난 양의 오토바이가 신호도 무시하고 차선도 무시한 채 밀려가듯이,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데 가히 장관이었다. 우리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연신 여기저기에서 사진 셔트를 누르는 소리가 들였다. 내가 사역하는 파라과이도 요즘 부쩍 들어서 오토바이족이 늘긴 했어도 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며칠을 지나는 동안 계속 눈여겨봤지만 한 사람의 추돌도 보지 못했고 또 운전자끼리 다투는 일도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호치민시의 1,500만 인구 가운데 700만대가 넘는 오토바이가 이렇게 나름대로의 독특하고 거대한 한 문화를 이루는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참으로 인상에 남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이동 중에 오선교사로부터 베트남 전쟁이 남긴 슬픈 역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치민의 옛 이름 사이공 시내를 거닐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파리를 축소해서 만들었다는 이름다운 도시 사이공, 그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구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우체국, 노틀담 성당, 중앙광장 등이 인상 깊었다. 그런데 함께 동행한 베트남 선교부 지부장인 이영식 선교사는 성격이 아주 조용한 분인데 얌전하게 우리를 수행하면서 가만히 있다가 오덕 선교사의 설명에 가끔 한마디씩 거들었는데 그 내용에는 풍부하고 박식한 선교사역에 관한 양질의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이선교사 부부는 16년 전에 베트남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선교를 아주 모범적으로 잘 하고 있는 커플인데 사역은 주로 신학교 사역과 지도자 양성이다. 그는 매주 가까이는 100Km에서 멀게는 1,400Km까지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돌아보는 사역을 하고 있는 초인적인 인물이다. 그의 사역에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사이공 강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러 다시 승합차에 올랐다. 저녁 식사는 우리가 도착한 탄다 섬의 제일 끝 지점에 있는 빙꾸이 식당에서 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식당 주방에서 요리한 음식을 유람선 위에 배설하고 배를 타고 1시간 30분쯤 여행을 하면서 소위 선상파티를 하는 것이었다. 이 날도 마이크는 역시 오덕 선교사가 잡았는데 그는 숙달된 유모어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배위에서 먹는 전통음식은 일미였다. 특히 베트남식의 동태찌개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먹고 마시며 찬송가에서 가곡, 그리고 뽕짝에 이르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 내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 이 배에는 베트남 한국문화원에서 오 덕 선교사를 도우며 일하는 베트남 자매가 2명 동석했는데 상냥하고 친절한 자매들이었고 우리의 식사를 거들면서 사진도 찍어주는 등 정성껏 섬겼다.


사실은 계획표에 의하면 첫날 저녁에는 개회예배와 함께 간단한 모임을 오리엔테이션 형태로 갖고 일찍 푹 쉬려고 했던 계획이 열심이 특심인 베트남 현지 선교사들 때문에 헝클어졌지만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시간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중요한 회의의 일정에 무리가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오 덕 선교사와 베트남 지부에서 이런 것들을 감안해서 계획을 잘 짜서 진행해 주어서 일정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총무인 나달식 선교사는 숙소로 돌아오는 승합차 안에서 내일의 일정에 관해 간단하게 브리핑을 했다. 우리는 일단 내일 일정을 예정시간보다 1시간 먼저 시작하고 1시간 일찍 끝내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7시에 식당에 함께 모여서 하기로 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가서 첫날 밤 잠자리에 들었다.


12월 28일(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몇 번씩이나 깼고 잠이 깊이 들지 않았다. 본래 잠잘 때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형으로 자부하던 나도 이제는 늙었나 보다. 새벽 5시에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새벽형인 나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새벽 5시만 되면 아주 피곤하지 않으면 거의 일어나는 셈이다. 그것은 오랜 새벽기도 훈련의 결과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설치니 골아 떨어졌던 아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일어나야만 했다. 아침에 인터넷에서 이메일을 체크하고 매일 아침에 하듯이 오늘도 ‘생명의 삶’으로 큐티를 하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식사는 오전 7시에 호텔 7층에 있는 식당에서 했다. 순 한국식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투숙객은 모두 한국인 관광객이며 종업원만 베트남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온통 안내문도 한글이었다. 그러니까 순전히 한국인 대상의 영업소인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인 호텔인 셈이다.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소위 과일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베트남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과일이 먹을 게 별로 없었다. 원숭이 바나나와 수박이 전부였다. 식사 후에 8시부터 첫 번 모임을 시작했다. 회의장은 식당 옆에 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야 하는 그런 구조였다. 좀 불편했지만 다른 회의 장소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배인도는 필자가 했는데 막 9:2-8의 본문으로 ‘내게 와서 들으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이어서 회의를 시작했는데 이번 임원회의 토론 주제는 모두 4개이다. 행정, 재정, 멤버케어 그리고 MK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이 모임이 첫 모임이므로 이 주제에 대한 큰 주제 밑에 좀 더 세밀한 토의 주제인 소주제를 각각 4-5개씩 만들어서 그 주제에 관한 전체적인 충분한 토론이 되도록 유도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모두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 있었다. 이 모임에는 부인 선교사들도 모두 참석도하도록 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열띤 회의를 진행하고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일단 정회하고 우리는 메콩강의 미터시 터이넝 섬이라는 곳으로 관광 겸 점심 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메콩강, 이 강은 세계에서 12번째로 길고 10번째로 수량이 많은 강이다. 길이는 약 4180킬로로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흐르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강인데 베트남을 가로질러서 흐르고 있다. 특히 메콩강 삼각주는 베트남의 유명소인데  엄청난 규모를 뽐내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과연 상류로부터 흘러온 탁류가 온 지면을 덮어서 바다인가 착각할 지경으로 넓었다. 우리 일행은 작은 배를 타고 야자수 숲 사이로 날 물길을 따라 20여분 들어가니 숲속에 음식점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처음 보는 전통음식과 두리안 등의 열대과일에 흠뻑 빠졌다. 정말 좋았는데 단점은 가고 오는데 거의 5시간 정도가 걸려서 좀 힘들었다. 그러니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코스가 식당에서 나와서 다음 식당으로 이동하는 형태가 되었다. 왜냐하면 다음 장소에서는 베트남 지부의 선교사들이 환영 만찬을 베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나의 최대의 실수는 이 아름다운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아침에 급하게 서둘러 나오면서 그만 숙소에 카메라를 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마누라의 핀잔을 들었다. 사실은 아내가 카메라를 늘 챙기는 셈인데 이날은 어찌된 일인지 내가 챙겨서 가방 속에 넣어두고는 그냥 나왔던 것이다. 역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 부인이 하는 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교훈을 한 번 더 새기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이동을 위해서 주로 관광 벤이나 마이크로 버스를 이용했는데 이동 중에는 예외 없이 오 덕 선교사가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17년 간 익은 능숙한 솜씨로 관광 안내를 하면서 승객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의 리드에 희생양이 되었고 지적을 받을 때는 나와서 재롱을 떨며 노래나 개그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심지어는 관광이나 사역지를 보기위해 내렸다가 다시 탈 때는 일부러 마이크 을 잡은 오 덕 선교사가 버티고 있는 앞자리를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점잖은 선교사님들이 그렇게도 많은 끼를 가지고 있는 줄을 이번에 새삼 알게 되었다.


2시간 반을 다시 달려 도착한 식당에서 베트남 지부의 선교사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 지부의 부원은 다음과 같다. 이영식 선교사(지부장) 부부, 오 덕 선교사 부부, 전우영 선교사 부부, 황정대 선교사 부부, 김석영 선교사(은퇴 선교사) 부부, 신한영 선교사(노회 파송 선교사) 부부인데 이번에 황정대, 신한영 선교사는 참석하지 못했다. 모두 반갑게 해후를 했고, 베트남 지부 공식 만찬을 주관한 이영식 지부장의 환영사 및 소개, 이정건 선교사회 회장의 답사 및 소개, 그리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장면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한중 본부장의 인사와 식사기도 후에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이 식당의 이름은 ‘훼’라고 불리는데 과거에 왕이 먹던 음식 즉, 궁중 요리로 유명한식당이었다. 이곳에서는 다른 곳에서 맛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하루 종일 계속 먹어서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음식만 보면 다시 먹고 싶고 또 먹으면 그게 도대체 어디로 쓸려 들어가는지 게눈 감추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이것으로 논문 하나는 써도 되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베트남 음식은 우리의 입맛에도 맞고 정말 담백하고 맛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절제 없는 폭식은 우리를 비만하게 할 뿐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자동적으로 음식으로 손이 가는 것을 어쩌겠는가?


저녁식사 후에 베트남 지부의 선교사들과 작별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8시30분부터 회의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누가 우리의 회의실을 먼저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어느 선교단체에서 어린이 캠프를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시작했는데 이날 모임을 호텔측의 착오로 우리가 사용 예약한 장소에서 이미 시작 한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가 양보하고 내 방인 402호실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부인 선교사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서 모여 발 마사지를 하고 차를 마시며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본부장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436장을 부른 뒤에 요 4:10-14의 본문을 가지고 ‘그가 네게 주었을 것이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롭고 도전이 되는 말씀을 했다.  이 밤의 회의 주체는 우리가 오전에 다루었던 전체적인 4가지 주제 가운데 첫 주제인 ‘행정’에 관해 구체적으로 토론을 시작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토론내용 중략)


이런 주제들은 대개 중요해서 밤을 새워서 토론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사안들이었다. 그래서 이 주제만 가지고 우리는 밤 11시가 넘도록 다루었고 위와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했다. 그러나 모두들 피곤이 일시에 몰려오는지 내일 다시 만나서 빠진 주제를 보충하한 후에 다음 주제를 토론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12월 29일(수)

이날 아침도 역시 7시에 식당에 모여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회의를 시작했다. 이상룡 선교사 인도로 예배를 드렸는데 찬송가 86장을 부른 뒤에 갈 6:9을 읽고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라는 제목으로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생을 조명하면서 우리의 선교사로서의 영적인 삶을 좀 더 경건하고 아름답게 살 것을 강조했다. 이어서 속회된 임원회 토론은 다음과 같다.


(토론내용 중략)


우리는 회의를 11시 10분까지 하고 오후에는 그 유명한 구찌 땅굴을 보러 가기로 하고 나섰다. 가는 길에 오 덕, 송은주 선교사 부부가 사역하는 곳을 가 보기로 했다. 송은주 선교사는 SK 텔레콤과 숭실대학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IT계통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6개월 코스로 장래가 촉망되는 IT전문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영어로 수업을 하는데 여기를 졸업하면 숭실대학교석사과정에 등록하여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 전액 장학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경쟁률이 치열하고 베트남의 엘리트들만 오는 곳이 되었다. 이날 마침 졸업식이었고 50명이 졸업을 했다. 점심을 이들과 함께 교내 식당에서 했는데 특별 초청된 베트남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팀이 와서 연주하여 흥이 나는 시간이었다.


오 덕 선교사는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한 뒤 바로 1993년에 벌써 그곳에 들어가서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NGO와 IT 전문가로 활동하며 베트남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일하고 있다. 이곳에는 그의 사무실이 옆 건물에 있고 INT VISION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비자 문제를 해결 받고 있다. 오 덕 선교사는 현재 한국문화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대정부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개척 형태의 사역이 어려운 이곳에서는 이런 NGO 계통이나 사업체등으로 전문인으로서 사역하는 방법이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오 덕 선교사 부부는 베트남에 맞는 선교의 새로운 유형을 개발했고 그 효과가 엄청나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새로운 패턴을 연구해야 하고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단의 선교정책이 너무 획일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목적한 구찌 땅굴을 찾았다. 구찌라는 도시는 호치민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과거 월남과 월맹이 전쟁할 때 미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저항을 하면서 싸웠던 전설의 도시이다. 이곳에는 월맹군이 미군에 대항하여 250Km의 긴 땅굴을 파서 그 속에서 생활하면서 전쟁하여 결국 승리를 이룬 장소로서 베트남 국민들에게 자랑과 자부심을 심어주는 곳이다. 이들은 베트남이 지구에서 미국과 싸워서 승리한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전쟁의 아픔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서 과거 베트남 전쟁 때 이들이 당했던 고난과 수욕의 역사를 한 눈에 보았고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무언중에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불가사의 한 것은 우리가 땅굴 체험을 하면서 겨우 100m를 가어가다시피 오리걸음으로 통과하면서 거의 파김치가 되어 통과했었는데 어떻게 그들은 이 굴을 250Km나 팠으며 돌같이 단단한 이 흙을 어떻게 호미 한 자루로 파서 이런 대 역사를 이루었는지 일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가이드 오 덕 선교사는 앞장서서 용감하게 어두운 굴속으로 들어갈듯 하면서 도중에 살짝 빠져 나갔음을 뒤늦게 알았다. 사실은 동행했던 두 명의 자매가 어디든지 따라다녔지만 땅굴 속에 들어갈 때는 왜 사양하는지를 우리는 눈치 챘어야만 했다. 과연 그 땅굴은 좀 체중이 나가는 사람은 통과하기 어렵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거기를 통과하는데 100미터가 마치 수 킬로나 되는 듯 힘들었다. 이것은 덩치 큰 미국 군인이 이곳에 숨은 베트콩을 잡으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땅굴을 빠져나온 우리 모두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통 몸이 땀으로, 흙으로 젖었다. 나는 이 땅굴을 수 백 번도 더 안내했다는 오 덕 선교사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그를 공개적으로 칭송해 마지않았었는데 알고 보니 도망을 쳤다는 것을 알고 살짝 분노했으나 이미 지나간 일, 어쩌겠는가? 나중에 오선교사는 우리에게 본부장님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선배를 이때가 아니면 언제 뺑뺑이를 돌리겠느냐고 농담을 했다. 우리 모두 오선교사의 능청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즐거워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트남 지부장 이영식 선교사는 묵묵히 우리와 고통분담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구찌 땅굴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보내어 다음 방문 장소인 롱안 세계로 병원으로 이동하기 바빴다. 이 병원은 부산의 세계로 병원에서 의료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부설 부산의료선교회의 총무로 있다가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우석정 선교사를 비롯한 직원들이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하는 곳이다. 이 병원은 2006년에 지었고 외국인이 병원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자동차 면허증을 내려해도 3개월 걸린다는 이 나라가 병원 인가를 내주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단 하루 만에 받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원목 김석영 선교사는 간증한다. 지금은 안식년 중인 원장인 우석정 선교사 부부를 비롯하여 원목 김석영 선교사 부부, 부원장 전우영 선교사 부부가 이 병원을 통해 같이 사역하고 있다. 또 간호사 몇 분과 안식년중인 우석정 선교사를 대신하여 의사 한 분이 한국에서부터 여기에 와서 사역하고 있었다. 병원 직원들의 영양을 책임지고 맛난 음식을 요리하시는 남행지 선교사의 손길을 통해 모두들 병원에서 정성스럽게 제공한 저녁식사와 풍성한 과일과 함께 먹었고 수요일 저녁 예배를 병원 강당에서 드렸다.


이 병원의 영적 사역을 책임지고 있는 김석영 선교사는 일찍이 군 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우리 교단이 자랑하는 군선교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김선교사는 전역 후에 일반 목회와 복음병원 원목으로서 사역하다가 61세에 조기 은퇴하고 부인 남행지 선교사와 함께 선교사로 헌신했고 예수 전도단 목회자부부 제자훈련을 받고 라오스 단기 선교사로 가서 일하다가 장기 선교사로 전환하여 베트남과 라오스를 오가며 선교사역을 11년째 열정적으로 펼치시는 선교사이다. 그는 이미 정년이 되어 은퇴했고 남은여생을 한국에서 편히 보낼 수도 있으나 선교지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계속 사역하는 모습을 보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저 선교사님의 나이가 되어도 선교지에서 남은 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수요일 예배는 방문한 우리와 병원 직원들이 함께 드렸는데 오 덕 선교사가 사회를 하고 기도는 이정건 선교사, 설교는 류영기 선교사, 광고 및 인사는 김석영 선교사, 축도는 김한중 본부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역소개는 전우영 선교사가 했다. 전우영 선교사는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세계로 병원의 사역을 모두 8가지로 나누어서 보고했다. 첫째는, 매일 오전 5시 20분에 가지는 새벽기도회 둘째는, 의료 사역, 셋째는 구제 사역, 넷째는, 교육 사역, 다섯째는 현지교회 지원 사역, 여섯째, 김석영 선교사를 통해 전개되는 라오스 사역 일곱째, 황정대 선교사의 중부지역 사역, 그리고 선교사가 각각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사역인데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증언이었다. 감사한 것은 병원과 붙어있는 대지 850평을 병원 확장을 위해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다 이 사역을 통해 롱안 세계로 병원이 육신의 병과 영혼의 병을 함께 치유하는 선교병원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병원 뜰에서 직원들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숙소로 돌아왔다. 본래 이날 밤에도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너무 늦었기도 하거니와 저녁에 회의하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기에 생략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숙소 도착과 동시에 밤에 귀국해야 하는 본부장이 마지막으로 차 안에서 우리가 토론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하고 인천으로 향해 떠났다. 우리는 피곤을 풀기 위해 단체로 발마시지를 받기로 하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숙소 부근의 발마사지 하는 것으로 갔다. 그런데 그렇게도 가날프게 보이는 베트남 처녀의 손이 얼마나 세고 힘이 좋은지 참으로 피곤이 한 방에 달아나는 듯 했다. 서비스 요금은 1인당 8불이고 팁까지 계산하면 10불 정도이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본부장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3시간 정도 항공기 이륙이 지연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피곤하여 내일 아침에 역시 같은 시간에 모이기로 하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12월 30일(목)

오늘도 여전히 아침 7시에 아침식사를 했는데 늘 아침마다 같은 메뉴의 음식인 한국식 식단에 식상해 있는 내 눈에 확 뜨이는 음식이 나타났다. 본부장 부인인 김 란 선교사가 아침에 호텔 밖으로 나가서 파리 바케트 빵 속에 각종 야채와 고기를 버무려 넣은 빵을 사 왔는데 그게 그렇게도 맛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미 한식으로 배를 불렸는데 또 먹을 수가 없어서 참았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에는 이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 후에 우리는 8시에 속회를 했다. 총무 나달식 선교사의 인도로 먼저 예배를 드렸다. 216장을 부른 뒤에 삼상 23:17을 읽고 나선교사는 ‘연합과 대를 잇는 선교’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를 시작했다.


(토론내용 중략)


시간이 없어서 4가지 주제에 관한 토론은 이것으로 대략 결론을 짓고 아직 다루지 못했던 부분인 재정의 투명성, MK에 대한 선교정책, 책무문제, 선교사의 자기개발, 선교사 관리부분 등 5개 주제는 차후에 논의하기로 했다. 회의가 마치기 조금 전에 김 란 선교사가 쿤밍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를 가이드 하는 오 덕 선교사가 이틀째 심한 복통과 두통을 호소하며 힘들어하기에 마치면서 다른 선교사들 가운데 아파서 신음하는 동료들을 보태서 함께 회복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했다. 주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리라.


마지막 공식 방문 코스인 오 덕 선교사가 사역하는 호치민 한국문화원을 향해 출발했다. 호치민 한국문화원은 재단법인 ACEF(아시아문화교류재단)가 아름다운 아시아문화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1997년 10월에 호치민시에 세운 최초의 민간 한국문화원이다. 그동안 국제친선과 문화교류, 국제원조와 민간봉사, 국제문제의 연구 및 분석과 출판, 국제화 교육 등을 수행해 왔으며 특히 최근에 강하게 일고 있는 한류문화 등을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권역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문화원은 오 덕 선교사가 2009년 9월에 제3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해 왔다. 그는 3명의 형들이 전쟁용사로 베트남을 다녀간 이 땅에 복음을 심고자 1993년에 파송되어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 선교사이다.


한국문화원 원장실에서 안건 처리를 위한 선교사회임원회를 시작하였다. 그 동안에 지부장 이영식 선교사가 정성스럽게 베트남의 명물 쌀국수를 준비해서 우리에게 대접했다. 며칠 동안 본부장이 쌀국수야 나오너라 하면서 그렇게도 먹어보고 싶어서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먹어보지도 못하고 귀국했던 그 쌀국수를 드디어 먹에 되었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그야말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서 실려 나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안 사실은 쌀국수를 건져먹고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본래 쌀국수보다 더 맛이 있다는 사실이다. 안 먹어본 사람은 모르리라. 식사 후에 임원회를 속회하는 동안에 부인 선교사들은 현지 선교부 부인 선교사들과 함께 시내 중심가에 나가서 귀국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쇼핑을 하였다.


이 날 다룬 안건은 모두 4가지였는데 그 가운데 먼저 다룬 안건은 고신세계선교사회의 로고를 채택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공식적인 문서를 작성할 때 헤드라인을 장식할 로고가 없음으로 불편했는데 정훈채 선교사의 건의로 제작하기로 하고 디자인하여 준비한 자료를 검토했다. 몇 가지를 검토한 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KPM 로고와의 관계에서 전혀 새로운 로고를 제작해서 독자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 KPM 로고 밑에 적힌 ‘개혁주의 교회건설’ 대신에 ‘고신세계선교사회’를 넣을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결국 본부장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다음에는 장례기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필자가 국내에 머물면서 대여섯 차례 선교사 부모상에 조문한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아쉬운 것은 우리가 배송업체를 통해서 전달하는 조화가 일률적으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로 제작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인 우리와 맞지 않아서 늘 민망해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어느 장례식장에 갔더니 거기에 교회에서 제작하여 비치해 놓은 장례기를 보았다. 거기에 ‘천국환송’이라고 쓰인 글 밑에 십자가와 성경구절이 적혀 있었는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본부장과 의논했고 본부와 선교사회에서도 제작하여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다만 선교사 부모가 불신자로서 사망한 경우를 감안해서 ‘근 조’라고 적은 장례기를 하나 더 제작하기로 했다.


그 다음에 정훈채 부회계의 수고로 만든 2011년 선교사회 예산을 심의했는데 수입부분에서 매년 선교본부로부터 받는 지원금 3,000만원과 선교사 개별 계정에서 각 가정 당 내는 회비 50불씩을 계산하여 총 수입44,025불을 세웠고 지출부분을 이에 맞도록 항목을 만들어서 배정하여 몇 차례의 수정작업을 하여 완성했다. 지난 총회  시에 임원회에 예산 문제를 맡겼기 때문에 이것을 전체 선교사들에게 이번 회의 결과를 통보하면서 함께 보내는 일만 남았다. 예산서 작성과 더불어 그동안 수고한 베트남 지부의 부원들을 위해 300불을 지부장인 이영식 선교사에게 전달하여 다음 지부 모임 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격려했고 그동안 따라다니며 섬기느라 수고한 두 베트남 자매에게 각각 30불의 선물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영식 선교사는 작별인사를 했다. 곧 수 백 킬로 미터  떨어진 사역지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선교사의 사역에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를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오 덕 서기의 수고로 제작중인 고신세계선교사회 홈페이지를 검토했다. 이 홈페이지를 제작하게 된 동기는 보안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과의 소통이 KPM 홈페이지에서는 너무나 제한적이고 또 선교사들끼리만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함을 오래 전부터 요구해 온 회원들의 요구에 반응하여 이번에 제작하는 것이다. 이 싸이트를 시험 가동해 보았는데 아주 간단하면서도 짜임새가 있고 이용하기에 편리하여 앞으로 KPM 홈페이지 사용인원을 곧 초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이로써 모든 공식적인 모임을 마치게 되었고 리트릿을 겸한 임원회를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하기로 결정했고 우선 내년 하반기에 한국에서 모이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결정했다. 이번 모임은 선교사회 임원회를 해외에서 개최한 최초의 모임이었는데 경비 문제에 부담이 있어서 내년에는 국내에서 모이는 것으로 결정했다. 특히 차기 모임은 2012년에 가질 MK 선교대회의 준비모임의 성격으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시간 관계로 이번에 우리가 다루지 못했던 5가지 소주제인 재정의 투명성, MK에 대한 선교정책, 책무문제, 선교사의 자기개발, 선교사 관리부분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해 3월 첫 주간에 대전 선교센터에서 임원회를 모이기로 했다.


마지막 만찬은 전우영 선교사 가족이 한국식당에서 순대국밥과 회 무침을 제공했다. 베트남에서 먹는 순대국밥도 맛이 좋았다. 이 식당 주인은 오래 전에 이민 온 분인데 교인으로서 한국에 있을 때는 우리 교단 거제 고현교회 집사였다고 한다. 전우영 선교사는 우리 선교사들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선교사이다. 그는 분당매일교회의 시무장로로 섬기면서 무려 10년 이상을 본부에서 재정 부분을 맡아서 일했고 그의 근면하고 성실함은 자타가 공인한 바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내게는 사실 충격이었다. 선교사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쉽지 않았던 결정이며 전문인으로서 후원이 보장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선교사로 나선 그 자체는 내게 큰 감동을 주었었다. 그가 선교사로 파송된 이후에 가끔 이메일로 연락했는데 이번에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다. 그는 롱안 세계로 병원의 부원장의 직책을 가지고 전공을 살려 롱안 세계로 병원의 살림을 도맡아 살고 있다.


마지막 날 밤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특히 총무인 나달식선교사 부부의 진한 애정론은 우리 모두를 열광시켰다. 사모인 김경숙 선교사의 재치 있고 위트 넘치는 이야기에 우리는 배꼽을 잡았고 그러나 그 속에 담겨있는 뜨거운 불과 같은 성령으로 농축된 부부애의 진수를 볼 수 있었다. 잠시 후에 공항으로 떠나야 하는 시간임에도 자리를 뜰 줄 몰랐던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일본 팀이 떠났고 그 다음 날 마지막으로 떠날 한국 팀과 며칠 후에 네팔로 떠날 부회장 이상룡 선교사 부부만 남았다.


나가면서..

이번에 베트남에서 모인 고신세계선교사회 임원회 모임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우선 이 모임을 위해 우리가 초대한 김한중 본부장과 류영기 전임회장과의 연석회의는 고신교단 선교의 전체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었고 선교본부 사역에 관한  이해와 본부장으로서 가지는 고충과 어려움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본부가 선교사회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자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회도 본부를 적극적으로 도와 교단 선교를 한 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무거운 책임감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순회선교사회의 코디네이터인 류영기 선교사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순회선교사회와 고신선교사회가 서로 잘 협조하여 그 어느 교단이나 선교단체보다 더 멤버케어를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나 이렇게 정례적이고 심도 있는 임원회 모임을 통해서 우리 선교사회의 위상을 스스로 세워나가며 선교사회가 그저 단순한 친목 단체에 머무는 기관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선교위원회와 후원교회협의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함께 이루는 선교의 거룩한 삼각관계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며 교단 선교에 이바지하는데 있어서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하는 계기가 되도록 힘을 다해야 할 줄 믿는다.


며칠간 호치민에 머무는 동안에 음으로 양으로 수고하신 지부장 이영식 선교사 부부를 비롯하여 대선배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후배들을 챙기시고 사랑해 주셔서 격려해 주신 김석영 선교사 부부, 끝까지 남아서 우리를 챙겨주신 전우영 선교사 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들에게서 받은 선물과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서 특히 이번 모임을 위해서 임원으로서 베트남에 체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넘치게 수고한 오 덕 선교사님 부부에게 감사드린다. 이 베트남 방문기를 함께 동행 했던 고신세계선교사회 임원들과 고신 베트남 선교부 부원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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