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선교와 문화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선교를 언급함에 있어서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이 둘은 바늘과 실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존재며 마치 자동차의 바퀴가 자동차의 방향과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결국 바늘만 가지고는 꿰매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고, 차가 아무리 좋아도 바퀴가 없으면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어야 하는 자동차의 목적이 성립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건강하고 효과적인 타문화 선교는 기대할 수가 없다. 오늘 우리는 선교와 문화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부분을 살피면서 타문화권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보냄을 받든지 보내든지 해야 하는 미래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구체화시키고자 하는 헌신된 사역자들이 이 글을 통해 효과적인 준비와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문화에 대한 정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라는 단어가 드라마, 음악, 미술, 시 또는 문학과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문화적인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러한 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나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살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화는 전체적인 인간의 삶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정의는 너무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학자인 루이스 루즈베택(Louis Luzbetak)은 “문화란 삶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했다. 문화란 용어는 이렇듯이 하나의 농축된 개념이다.


또한 미국의 인류학자로서 인도네시아 연구의 권위자인 클리포드 길츠(Clifford Geertz)도 문화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문화란 삶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와 삶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을 개발하고, 의사소통을 지속하는 수단이다.’라고 했다. 루즈베택이 내린 정의처럼 길츠도 역시 문화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내면적인 생각의 문제, 태도, 지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실 후천적으로 깨닫는 것보다 알게 모르게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문화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영향은 마치 숨 쉬는 공기가 모든 곳에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문화는 개인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그들이 태어나서 사회화되는 전통적인 부분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는 뚜렷한 어떤 문화에 속해 있지만, 이것들이 우리 삶을 주장하는 요인만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것을 형성하거나 형성되는 문화적인 유형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의 본질”이 있다.


문화는 생물학적이거나 다른 자연적 요인들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다. 문화는 생물학적이고 환경적인 조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역시 인간이 주도하는 ‘인간의 작품’이다. 그래서 문화는 다른 동물이나 생물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문화는 변하며 살아 움직이는 동시에 과거의 것들을 보존한다.


이민을 가서 살아가는 한국인 부모들은 왕왕 자신들의 자녀 또는 손자들이 자신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한다. 한국 내에서는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 다르게 믿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들 역시 같은 한국문화 속에서 한국인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민지에서 태어난 한국인 자녀들의 문화적 코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보다는 사회적 생활을 통해 습득한 이민지 문화에 더 가깝다. 그 이유는 문화는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서 함께 호흡하고 경험하고 학습하며 교감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는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항상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릴 때, 유행하던 것들은 이제는 더 이상 가게에서 팔지 않으며, 내가 젊었을 때 즐기던 것들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한물간 유행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우리는 문화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 속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변함없이 한국인, 또는 이민자의 특징으로 남아있는 전통적 문화유산처럼 다른 나라 각 민족들 가운데도 그들만의 문화적 특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한편 인간의 모든 문화는 종교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를 종교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문화의 본질이 바로 인간들 사이에서 숭배나 가치를 표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Culture) 라는 단어는 숭배를 뜻하는 ‘칼투스’(Cultus)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경배의 장소로 변형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문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적절한 장소로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YWAM(Youth With A Mission)의 설립자인 론 보에미(Ron Boehme)는 신본주의적 관점이 문화에 대한 성경의 주된 사상이며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인간문화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책임과 사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의 다양성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일일 생활권으로 묶인 세계에는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문화 인류학자의 말에 따르면 세계에는 약 6,000여 개의 부족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지역과 종교, 인종에 따라 피부 색깔과 언어, 그리고 음식문화, 종교의식, 가치관, 생활관습 등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눈(시선)을 맞추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서구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예의인 반면, 어떤 지역에서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말을 해야 하며,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무례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특히 남녀 간에는 시선을 맞추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여인 및 그녀의 가족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지역도 있다.


또 다른 예로, 시간에 대한 문화적 차이가 있다. 즉, 어떤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가 예식이나 예배를 드리는 시간으로 여겨지는 문화가 있고, 정직과 거짓에 대한 문화적 차이로서 필요한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여기는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가 있다.


또한 일부일처와 일부다처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문화차이도 있고, 혼전 성관계나 임신 경험이 결혼의 좋은 조건인 문화가 있다. 그와는 반대로 이슬람 문화권처럼 그런 상황은 가족의 명예를 위하여 딸을 명예살인 할 수도 있는 문화도 있다. 이렇듯 문화의 다양성은 언어, 음식, 일상습관, 의식구조, 가치관, 세계관, 종교적 행위, 인식의 차이 등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선교 문화 이해

사도 바울은 문화에 대해 아주 민감한 사람이었다. 고린도전서 9장 19-20절에 보면 사람은 삶과 문화의 배경에 의해 제한되고 엄격히 규제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같이’(as)라는 단어가 ‘처럼’(like)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앞뒤의 문맥을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구원해야 할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모든 방법을 다해서 그들과 같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그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이 오직 하나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근 방법은 다양할 수 있고,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르게 묘사될 수 있으나 오직 전파되는 것은 복음임을 인식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퍼져나갈 때 사도들은 유대인의 삶의 스타일이나 유대문화의 무거운 짐을 절대로 이방인에게 지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은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대문화를 이방인에게 강요함은 복음의 진리를 바꾸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타 문화권에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 선교사가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선교지에 그대로 옮겨다 심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역지 문화는 선교사가 지니고 있는 신앙과 한국적인 전통문화와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원주민 문화를 무조건 미신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한국 선교사는 자신의 문화적 전통과 스타일, 예를 들면,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 큰 목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금식기도와 새벽기도 등을 성경적인 진리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선교지 사람들의 문화적 특성을 감안하여 조화롭게 접목시키려 하기보다, 원주민에게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곤 한다.


또한 때때로 그들은 선교 동반자인 현지 사역자들에게 마치 종을 다루듯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무조건 ‘우리처럼’하라고 한다. 곧 한국 사람은 이렇게 부지런함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원주민들의 삶의 습관과 태도에 빗대어 자랑스럽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후와 문화적 관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 스타일의 전통과 의식구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타문화권 사역을 하는 선교사는 사역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국가에서 기독교를 서양 종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양 선교사들이 기독교와 함께 서양문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며, 지금 한국 선교사도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본다. 슬픈 일 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타문화권의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세계관과 신앙체계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데이비드 헤셀그레이브(David Hesselgrave)는 세 가지 가능한 이론을 제안했다.


첫째로, 원주민에게 자신들의 옛 세계관을 버리고 기독교 선교사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거의 불가능 하다. 왜냐하면 원주민은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거나 어떤 원주민도 다른 문화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의 세계관을 자신이 사역하는 동안만 잠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원주민의 세계관과 문화와 복음을 변형함으로 원주민들에게 아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새로운 토착적인 기독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가능한 일이며 실제적이다.


마지막으로, 부분적으로 원주민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이미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중간지점, 공통적으로 겹쳐지는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복음의 상황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선교에 있어서 복음과 문화의 상호관계

모든 문화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가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 나가신다(롬 11:33-36).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으로서 인간 문화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신다(욥 12:23, 시 67:6-7).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문화를 하나님의 복음전파의 통로로 사용하신다.


신구약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말씀일지라도 그 당시 유대인의 문화적 관점에서 조명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이는 하나님이 저자인 인간의 문화적 영역을 초월해서 일하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그의 사도들에게 모든 나라와 문화의 사람들을 제자화하라고 명하셨다(마 28:19). 하나님이 그의 구속적 목적을 위해 인간의 문화를 사용하신다는 가장 좋은 예는 바로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기존 문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셨다.


그는 “총체적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1세기 로마제국 안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으로” 오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문화사용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해 한 국가를 이루게 하셨다. 또한 이스라엘의 문화적 구조를 사용하셔서 그의 구속적 의도를 만방에 알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문화를 사용하셔서 그의 의도를 이루시지만 복음 자체와 문화는 엄격히 구별하신다. 왜냐하면 복음은 어떠한 문화에도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의 행하심이다. 그러나 복음이 초문화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인간 문화라는 그릇에 담겨서 전달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복음은 옷감 원단처럼 하나이지만, 문화에 따라 다양한 색상과 스타일에 따라 디자인해야 하는 기성복과 같다. 결국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문화에 의해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어디까지가 계시적인 것이며, 어느 것이 상대적인 문화인지를 구별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바로 이것 때문에 복음과 문화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이며 문화 인류학자였던 폴 히버트(P. Hiebert)는 복음과 인간 문화 사이의 긴장 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로, 복음은 모든 인간 문화들로부터 구별되어져야 한다. 오늘날 선교 사역에서 크게 실수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복음과 인간 문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자주 복음과 그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동일시 할 때가 있다. 그 결과로 토착 문화를 정죄하게 되고 마침내 문화 제국주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둘째로, 복음은 인간 문화로부터 구별되지만 역시 문화적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은 사람들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형태로 성육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이 한 문화권 속으로 성육화 하는 과정을 우리는 ‘토착화’(Indigenization) 또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모든 문화가 각각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모든 문화가 변화되기를 요구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문화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복음은 각 개인의 죄성(罪性)에 대하여 정죄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만든 구조악(構造惡)에 대해 정죄한다.


문화로 옮겨지는 복음

파푸아 뉴기니에서 돼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 그 이상이다. 흔히 파푸아 뉴기니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그림들을 보면, 한 여인이 한쪽에는 자기 어린아이를, 다른 한쪽으로는 새끼 돼지를 안고 젖을 물리는 그림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듯 파푸아 뉴기니에서 돼지의 가치는 다른 나라에서 생각하는 가치와는 매우 다르다. 다시 말해, 이슬람 또는 유대주의 문화권에서는 돼지가 부정한 짐승으로 또는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이곳에서는 부와 행운의 상징 및 사랑스러운 동물로서 묘사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타국에서 전 재산을 탕진한 후,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고, 결국에는 돼지를 치다가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돼지우리 안에서 돼지와 같이 먹으며 생활했다는 내용은, 우리에게는 아주 비참하고 치를 떨 만큼 더러운 내용으로 전달이 되지만, 파푸아 뉴기니 사람들에게는 아주 즐겁고 복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이렇듯 문화는 선교의 모든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우리가 문화의 영역을 무시한다면 심각한 상황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복음은 참으로 문화 변형적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문화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으며, 풍요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전달되어져야 한다. 복음은 많은 조각의 좋은 소식으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로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행 2:6).


그 이유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채널을 통하여 옮겨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고후 4:7).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타내기 위해 문화를 사용했다. 그들은 때때로 다른 문화를 빌려오기도 했다. 메시지는 최고로 가능한 개인적인 형태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 1:18).


그리고 하나님은 특별히 문화란 옷을 입고 표현된다. 예수의 탄생은 자기 백성 안에서 관습적인 의식에 의해서 표현된다(눅 2:21-24). 예수 그리스도는 아람어를 모국어로 하여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한 명의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또 그는 헬라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는 목수의 일을 배웠으며, 추측하건대 나사렛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물건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평범한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는 자기 백성에게로 오셨다(요 1:11).


그는 율법을 배웠으며, 유월절과 같은 연중 축제에도 참석하셨고, 회당에 참석하여 계율도 지키셨다. 유대역사에 몰두했으며, 이야기 작가로 생각될 만한 예술적인 재능도 보여주셨다. 이렇듯 특정한 지역적, 역사적 위치에 있는 특별한 상황 속의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은 복음과 문화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해법 중 하나이다.


결 론

선교와 문화는 결코 떼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문화를 알면 선교가 보인다는 말로 결론을 짓고 싶다. 선교사가 아무리 선교지의 언어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선교의 하드웨어를 구축했다고 할지라도 선교지 사람들의 문화를 모르면 결단코 선교 사역에 성공할 수가 없다. 언어 속에는 그들의 문화가 녹아있다.


선교지의 특수한 문화를 선교지로 가기 전에 미리 학습하고 단기간 동안 아웃리치의 형태로 경험할 수 있으나 결국 그들의 문화가 내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은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모범을 보이신 그대로이다.


어쩌면 선교란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선교와 문화 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선교사로 간다든지 선교를 지원하는 일은 모래위에 짓는 집과 같다. 좀 더 한국교회가, 우리 교단의 교회들이 이 점을 명심하고 선교훈련을 하면 아름다운 선교의 결과물들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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