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 이성호 교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
   고려신학대학원 졸.
   Calvin Theolgical Seminary
   (Th. M. 및 Ph. D)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역임)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현)
고신의 설교를 짧은 글에서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다. 어떻게 보면, “고신의 설교는 없다.”고 과격하게 말하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고신 설교인가?” 고신의 설교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현재의 고신의 목사들의 설교를 듣거나 읽어서 연구하고, 또한 지난 역사 속에서 행해진 설교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다 읽어 볼 수는 없으니, 샘플링을 통해서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샘플링하는 방법이 문제인데,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고신의 공식 언론인 기독교보에서 매주 발표되고 있는 설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설교가 고신을 대표한다고 하기도 그렇지만,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통일된 상(相)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샘플링을 통한 방법이 불가능하다면, 고신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목사의 설교를 연구하는 것도 한 방법인데, 필자가 보기에 고신을 대표한다고 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던 분은 고신교회 초기의 한상동 목사나 박윤선 목사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영향은 오늘날 고신 교회에서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더구나 오늘날 대부분의 고신의 설교자(목사)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모델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고신 설교를 정의하는 것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신학교육에도 문제가 있다.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고려신학대학원에는 전임 설교학 교수가 현재까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여러 교수들이 짧은 기간 동안에 파트타임으로 돌아가면서 가르쳤을 뿐이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함께 모여서 설교집을 한두 번 낸 적은 있지만 그것이 교회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였고 일시적이었다. 그 결과 고신의 설교가 이래야 한다는 명시적인 선언문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고신교회의 현실이다. 더 문제는 경건회에서 시행되는 설교조차도 너무나 다양하여 예비 목회자인 신학생들이 어떤 것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야 할 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설교에 대하여 최소한의 교회적 합의가 없다면 이런 다양화, 더 나아가서 파편화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화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볼 때, 여기에 싣는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고신 설교의 강점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약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스스로의 자화자찬이 되지 않고 겸허히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약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어렸을 때부터 고신 목사의 설교 외에는 들어 보지 않은 나로서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비고신 목회자의 설교를 접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고신 설교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고신 설교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경상도 멘탈리티: 이야기의 시작

설교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와 분리되지 않는다. 현재 고신 설교자의 출신지를 따지면 거의 대다수가 경상도, 그것도 부산*경남 출신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필자는 이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였다. 비록 서울에서 출생하였지만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경상도에서 보낸 필자로서는 고신 교회가 전부였다.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게 되었고, 출석하는 교회(그곳도 고신교회였다)를 통해 농활을 전북 남원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비로소 내가 가진 고신의 지역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전라도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그 생소함은 아직도 내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이 지역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단은 신대원을 천안으로 옮기는 대결단을 하였지만 여전히 신대원은 천안에 위치한 경상도 신학교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대원을 옮긴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역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총회의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신대원만 옮겨서는 지역성이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우리는 다른 방법도 같이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고신 목회자의 설교 속에 경상도 멘탈리티가 알게 모르게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경상도 멘탈리티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상대방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표현에 있어서 거칠고, 전달 형식에 있어서 감정적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현상이 설교 속에 종종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설교의 전달 형식이 대단히 일방적이고 권위적이다. 물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적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문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고민, 아픔에 대한 이해나 고려가 함께 설교에 충분하게 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설교의 표현에 있어서 섬세함과 세련됨이 부족하다. 설교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표현하는 방식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촌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지한 설교는 유머가 되어버리고 만다.


고신 목회자의 설교는 일반적으로 목소리가 크다. 평소에도 목소리가 크다 보니 설교에서도 목소리가 크다. 조용한 설교도 큰 감동을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큰 소리의 설교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설교는 신자들의 감성을 건드려야 하는데, 감정적으로 설교하니 소위 ‘치는’ 설교가 교회 안에 상당히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경상도 멘탈리티가 뭐가 문제인가? 장점도 많지 않은가? 그동안 교회가 많이 성장하지 않았는가?”라고 당장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경상도 멘탈리티에 갇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첫째,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배타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고, 둘째 우리 목회상황이 이전과 달리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적자원이 지역을 넘어서 교류하고 있고, 인터넷은 그야말로 담임목사의 설교를 발가벗겨 놓았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전 보다는 성도들의 구성이 훨씬 다양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경상도 교회라 하더라도 한나라당 지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지지자도 교회에 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시간에 아이폰으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목사의 설교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는 시대가 바로 우리 눈 앞에 있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고신에서 인정받고 있는 목사들은 적어도 설교에 있어서 이러한 경상도 멘탈리티를 창조적으로 극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주해가 부족한 설교

앞에서 지적한 것은 고신교회에만 있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고신교회가 한국교회이기 때문에 갖는 특성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들이 훨씬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신교회가 개혁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지닌 비개혁주의 요소를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고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고신 교회의 목사들은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라고 뭉뚱그려서 설교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본문에 나타나는 ‘마음’과 ‘뜻’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설교에 있어서 구체성이 상실된다. 구체성이 상실이 되니 다양성과 본문의 풍성함이 상실되어 버린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 본문에 대한 주해가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뜻’에 해당하는 단어는 영어로 ‘마인드’라는 것을 대학교에 가서 알게 되었고, 헬라어로 ‘디아노이아’라는 것을 신대원에 가서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의지라기 보다는 지성이라는 의미이다. 즉,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지성적인 측면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설교시간에 이것을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신대원에 가서 전문적으로 신학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에 대해서 정작 구체적으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목사들이 성경을 구체적이거나 세밀하게 읽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목사들이 설교 준비에 있어서 고민을 가지고 본문과 씨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과 씨름하기 위해서는 결국 원어를 다루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원어에 대한 실력도 있어야 할 뿐만이 아니라 설교준비를 위한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목회자들이 모든 본문을 원어로 줄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적어도 중요한 단어에 대해서는 원문을 통해서 확인하고 점검하여 묵상하는 것이 최소한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원문을 다루는 최소한의 기술은 신대원에서 다 배우게 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보다 큰 문제는 언어에 대한 실력이 아니라 설교자의 자세와 설교준비의 시간이다. 즉, 오늘날 목회자의 가장 큰 적은 ‘분주함’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설교는 절박한 기도, 깊은 묵상, 그리고 성실한 연구에서 나온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여기에 대한 책임을 목회자가 상당히 지고 있는 한 고신 설교가 ‘주해없는 설교’의 함정에서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신학과 무관한 설교

대학 초년생 때 영어를 통해서 주해 없는 설교의 함정을 보았다면 졸업생 쯤 되었을 때 신학과 무관한 설교의 문제점을 직시하게 되었다. 하나는 고신 밖의 목사님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고신 안의 교수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대학생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중의 한 분은 박영선 목사였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대표되는 그의 설교는 젊은 지성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사람의 열심”만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폭탄을 던진 셈이었다. 나는 그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고신 밖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전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성경을 읽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대학 3학년 겨울 수련회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때 주강사는 화란에서 파송되어 신대원에서 교의학을 가르치고 계셨던 고재수 교수였다. 그분의 강의는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라는 책으로 대표되는 구속사적 설교였다. 그의 강의는 역사적 본문을 모범적으로 읽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 주기에 충분하였다. 고재수 교수는 “예수님처럼 살자”나 “바울처럼 살자”와 같은 윤리적 설교가 잘못 해석될 때 얼마나 비성경적인 설교가 될 수 있는지는 실제적인 본문해석을 통하여 잘 설명해 주었다.


그의 강의로 인해 그 당시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QT식 성경 읽기가 가진 함정을 충분히 꿰뚫어 볼 수 있었고 말씀 사역자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저런 것을 배우는 곳이 신학교라면 정말 가볼만한 곳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와 동시에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저렇게 배웠는데, 왜 한 번도 나는 저런 설교를 하는 목사를 만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도 같이 갖게 되었다. 나중에 신학교에 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신학과 설교의 괴리는 생각 이상이었다. 구속사적 설교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설교하는 것은 더 높은 신학적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구속사적 설교를 외치는 것과 그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도 동시에 보게 되었다. 아무리 올바른 설교라고 할 지라도 그것을 뒤따르는 삶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내용도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신의 설교가 갈 길은 내용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삶도 같이 따르는 것이다.


적용과 전달 방식에 약한 설교

미국에서 유학을 하게 되면서 훨씬 더 다양한 설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신 설교가 지닌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보게 되었다. 두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는 PCA의 카버넌트 신학교(Covanant Theological Seminary)의 설교학 교수였던 브라이언 채플이었다. 그 당시 아주 명성있는 설교학 교수였다. 그는 그 당시 나이가 40세를 조금 넘겼는데 그 신학교의 최고 책임자인 신대원장이었다.(참고로, 미국은 일반적으로 원장은 큰 문제가 없으면 은퇴할 때까지 유지된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장기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채플 교수는 그 강의에서 설교에 있어서 적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강의를 요약하면, 설교는 해석과 적용으로 이루어지는데, 설교자는 너무 전자에만 시간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실제 설교에 있어서 해석은 목사가 열심히 하지만 적용은 성도들이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마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차라리 설교를 성경본문에서 시작하지 않고 적용에서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를 하였다.


그의 강의를 듣고 적용이 부실하면 그 설교는 부실한 설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설교를 해 본 목사들은 알겠지만 제대로 된 해석도 어렵지만 그 해석에 근거한 제대로 된 적용은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적용이 약한 이유 중의 하나는 목사들이 성도의 삶을 모르기 때문이다. 농경시대에는 목사들과 성도들의 삶의 현장이 같았지만 현대에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요즘에는 심방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목사는 성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 교회 설교에 있어서 매우 큰 과제이다. 목사와 성도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적용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실한 설교를 뛰어 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미국에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미국의 많은 지역을 여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목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는 곳마다 미국교회를 방문하였다. 큰 교회뿐 아니라 작은 교회, 특이한 교회도 방문하였다. 그런데 방문한 교회마다 대부분 성장하고 있는 교회였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보니 놀랍게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사들이 모두 원고없이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고가 없다는 말은 원고지가 없다는 말이지 원고 그 자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내용에 있어서 그들의 설교는 철저히 원고에 얽매인 설교였다. 내용이 풍성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아주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원고없이(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하고 있었다. 즉, 원고없는 설교가 한국의 부흥사들이 자기 경험을 이것 저것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설교는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해 보면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을 금방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 전체를 암송하여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 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개인마다 차이점이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한 번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데, 설교 전 실제로 10번 정도 반복하니까 자신있게 할 수 있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기회있을 때 마다 학생들에게 원고없는 설교를 강조하고 있다. 설교를 외우면 설교시간에 훨씬 여유있게 설교할 수 있고, 성도들과 교감 속에서 설교를 할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원고없는 설교의 중요성을 한 번 더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교단의 원로이신 임종만 목사님이 어느 한 교회의 직분자 은퇴식에서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함에 있어서 수많은 성경본문을 인용하였는데, 연세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성경본문과 구절들을 다 암송하고 있었다. 딱 한 구절을 제외하고는 막힘이 없으셨다. 그 자체가 주는 설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예전에는 목사님들이 저렇게 설교를 하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감이 보편화되면서 설교에 있어서도 암송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다. 암송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작과 기초라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설교를 외운다는 것은 설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설교와 설교자가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결말

앞에서 풀어낸 이야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이다. 개인의 이야기가 일반화 될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서론에서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위에서 풀어낸 이야기가 일부분, 혹은 상당수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 필자의 이야기는 적실성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고신교회는 개혁주의를 표명하는 교회이다. 개혁주의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지는 설교와 성례와 권징이다. 오늘날 고신교회에서 권징은 유명무실화 되었고, 성례는 일 년에 겨우 서너 차례 시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매주 시행되는 설교에서라도 개혁신학이 드러나야 하는데,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설교와 신학이 분리된 지가 오래되었다. 주해의 수준은 풍성한 자료들로 인해 많이 나아졌지만, 문제는 일반 성도들의 지적 수준이 이전 보다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설교의 자기화 혹은 체화는 오히려 이전 보다는 퇴보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전의 목사들이 설교를 위해서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면, 오늘날은 교회의 프로그램 운영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한국 교회가 부흥해 왔다면 그 주된 이유는 설교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정체하거나 퇴보하는 주된 이유도 설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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